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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늙고 죽어간다는 것, 그 진실에 대하여

⑭ 더 파더 - 플로리안 젤러

지난 26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만큼 각축을 벌인 부문도 없었다. ‘맹크’의 게리 올드만에게 주자니 ‘더 파더’의 안소니 홉킨스가 걸리고 홉킨스에게 주자니 그러면 또 지난해 대장암으로 아깝게 사망한 채드윅 보즈만은 어째야 하느냐는 말이 나오고 있었던 참이다.

 

보즈만이 주연을 맡은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라는 작품 또한 호평이 이어지고 있어서 동정표가 몰리면 남우주연상은 그에게 돌아갈 확률이 크다고 봤다. 그러나 오래되고 고루한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안소니 홉킨스가 그래도 될 거라고 봤다. 홉킨스는 고령이다. 그는 올해 87세다. 이번 수상은 아마도 그의 생애의 마지막 수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들도 고려됐을 것이다. 다 떠나서 작품의 완성도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결국 남우주연상은 ‘더 파더’의 홉킨스에게 돌아갔다.

 

홉킨스가 ‘더 파더’에서 보인 치매 노인 연기는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그의 이름이 사사로이 났던 것이 아님을 역력하게 증명하는 영화라는 얘기다. 지금껏 이런 치매 연기는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 지금껏 이런 치매 영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의 설정이 특이하다. 지금까지의 치매 노인에 대한 영화는 그를 대상화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 ‘더 파더’는 치매 노인이, 더 나아가 그의 시점(視點)이 주인공이다. 노인의 파편화된 기억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도무지 어느 것이 사실이고 또 진실인지, 여기가 도무지 어디인지가 완벽하게 헷갈리게 된다.

 

이쯤 되면 이건 미스터리 영화다. 매번 그에게 등장하는 딸도 큰 딸이었다가 작은 딸이었다가 한다. 집도 자신의 집에서 큰딸의 집으로 옮겨 간다. 때로는 그것도 하루아침에 옮겨 가는 것처럼 나온다. 사위라는 남자, 혹은 (큰 딸인지 작은 딸인지, 그의 돌봄 서비스 여성인지 모를) 딸이 요즘 사귄다는 남자도 자꾸 바뀐다. 누가 누구고, 아니면 이 모든 이들이 (그가 종종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의 집을 빼앗기 위해 작당을 한 것은 아닌지 솔직히 나중에는 살짝 의심까지 하게 된다.

 

치매 노인에 대한 얘기를 하는 척 치매 노인의 재산을 노리는 음모의 얘기나 치정극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노인의 머리 속 파노라마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영화 ‘더 파더’는 아주 다른 각도에서 들어오게 된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주인공 노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의 치매를 진행형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디테일의 미학이 소름 끼칠 만큼 놀랍고 정교하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영화에 손을 들어 준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안소니의 큰딸 앤(올리비아 콜맨)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아버지의 집을 향해 걷고 있는 장면부터다. 배경에는 마리아 칼라스의 ‘카스타 디바’가 흐른다. 장면이 컷팅되면 안소니가 자신의 방, 창가에 놓인 소파에 헤드폰을 끼고 앉아 있다.

 

그가 듣고 있는 음악이 바로 칼라스의 것이다. 다음으로 컷팅하면 앤이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오고 안소니와 딸의 논쟁 아닌 논쟁이 벌어진다. 앤은 곧 영국으로 남자와 떠난다며 아버지를 걱정한다. 안소니는 그런 딸에게 섭섭해한다.

 

그렇게 다음 장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영화는 점점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진다. 갑자기 둘째 딸이 집에 들어오는 가 하면 주방에서 사위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 사위는 나중에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데 아마도 딸 앤의 새로운 남자인 모양이다.

 

처음엔 안소니 자신의 집이었다가 나중엔 딸의 집으로 바뀌기도 한다. 나중에는 둘째 딸이 사실은 죽었다고 했고 아버지는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 있는 큰딸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뭔가가 바뀌는 상황에 따라 안소니가 앉아 있는 거실의 풍경도 살짝살짝 바뀐다. 그림이 걸려 있다가 빈 벽이 나온다. 소파는 비슷해 보이는데 사실 다르다. 창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양이나 방향도 약간은 달라 보인다.

 

 

그 모든 것이 안소니의 기억 속을 그때그때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구 위치나 실내 장식이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이 영화가 궁극으로 보여주고 싶어 하는 풍경의 실체가 무엇인지 훅 들어 오게 된다. 그리고 그 주제와 이야기 전개 방식에 대해 깜짝 놀라게 된다.

 

‘더 파더’는 치매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아파지는 영화가 아니다. 치매라는 병에 대해, 그 어쩔 수 없이 추해지는 늙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게 되는 영화이다. 인간의 말년은 저런 상황으로 치닫기 쉽다. 노화의 실체는 아름답지 못하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 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 가.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 가. 무엇보다 아름다운 죽음이 가능은 한 것인가. 영화는 때론 인생의 진실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게 한다. 그래서 영화는 종종 착잡한 매체이다. ‘더 파더’는 안타깝고 슬프고 착잡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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