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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개혁이 민생이다”

우리나라에 “처녀귀신” 이야기가 그토록 오래 전해내려온 까닭은 달리 있지 않았다. 고을의 힘센 자들이 사건을 덮었기 때문이다. 그 처녀귀신 이야기가 쌓이고 쌓이면 어떤 이야기가 태어나게 될까?

 

《춘향전》이렷다. 죽은 다음에 해결하면 뭐하는가? 살아생전에 한이 생길 일을 풀어야 세상이 제 도리대로 돌아갈 것이다.

 

장원급제하여 어사로 밀행하고 있던 이몽룡은 거지꼴로 변장하고 관아에 들어선다. 백성들은 가난에 쪄들어 있는데 사또 변학도는 여기 저기 고을 수령들을 불러다가 상다리 부러지게 생일잔치를 벌였겠다. 거지 이몽룡은 밥값으로 시 한 수 읊는다.

 

“금준미주(琴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촉루낙시(燭淚落時) 민루락(民淚落)이요, 가성고처(歌聲高處)에 원성고(怨聲高)라.”

 

원님 생일 잔치에 뭔 난데 없는 소리인가?

 

“금 술잔에 담긴 맛좋은 술은 수많은 백성들이 흘린 피요, 옥으로 만든 쟁반에 그득 담긴 보기에도 입맛 다시게 하는 안주거리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것 아닌가? 술상 밝힌 촛농 떨어지면 백성들의 피눈물도 떨어지고, 너희들이 신이 나 난리 부르스치는 자리마다 한맺힌 소리 드높은 줄 모르느냐?”

 

이 모든 사태를 속 시원하게 바로 잡는 딱 한 마디, “암행어사 출도야~~~!” 탐관오리(貪官汚吏)의 권세를 꺽지 못하면 사랑이고 민생이고 자시고 없다. 억울한 백성만 피눈물 흘릴 뿐이다.

 

- 처녀귀신 면한 춘향이의 정치학

 

출세욕으로 따는 벼슬이라는 게 공직의 책임을 다하기보다는 사욕을 있는 대로 차릴 권리를 잡는 자리가 되고 만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차이가 없다.

 

어느 고을에 벼슬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폼을 잡고 사는 자가 있었는데 그를 사람들이 북곽선생(北郭先生)이라 불렀다. 전하는 바에는 당대 보수파 노론의 왕초 송시열을 빗댄 말이라고 하는데 그 진위를 알 도리는 없다.

 

어쨌거나 이 북곽선생은 나이 사십에 손수 교정(矯正)한 책이 만 권이요, 지은 책이 일만 오천 권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어느 날 호랑이를 덜컥 만난다. 호랑이는 꼴은 선비인데 냄새가 독하다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으면 신이 된다는데 그 좋은 먹잇감을 앞에 두고 입맛이 도통 다셔지지가 않는 것이다.

 

- 백성들을 논밭으로 삼는 탐관오리(貪官汚吏)

 

 

연암 박지원의 《호질(虎叱)》 이야기다. 호질(虎叱)은 “호랑이가 꾸짖다”라는 뜻이다. 그럼 어디 그 꾸지람을 들어나 볼까?

 

“무릇 제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는 것을 ‘도(盜)’라 하고 생명을 잔인하게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너희들은 밤낮으로 허둥지둥 쏘다니며,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뜬 채 노략질하고 훔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돈을 형(兄)이라 부른다. 메뚜기로부터 밥을 빼앗고, 누에로부터 그 옷을 빼앗고, 벌을 가두어 그 꿀을 긁어내고 심지어는 개미알로 젓갈을 담가서 제 조상에 제사 지낸다고 하니, 그 잔인하고 박정함이 너희보다 더한 것이 있겠느냐?”

 

정약전이 《자산어보》 쓰는 것을 도운 어부 창대가 관직에 올라 보니 관리들의 온갖 협잡질과 백성들 등골 휘게하는 현실을 보고 “백성들은 땅을 논밭으로 삼는데 양반들은 백성들을 논밭으로 삼는구나”라는 말 그대로다. 양반과 관리들이 한통속이 되어 죄다 긁어간다는 걸 이리 비유했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라며 농민들의 골수를 빼먹었던 게 뭐였는가? “전부(田賦)”라고 해서 지주부호 양반의 기름진 옥토(沃土)는 탐관오리와 결탁해 나쁜 땅 박토(薄土)로 장부에 기록해 세금포탈을 하게 하고, 농민들의 손바닥만한 땅은 높은 등급으로 기록해 징세를 했던 것이다.

 

“군포(軍布)”는 또 뭐였는가? 병역세인데 뱃속의 아기는 물론이고 이미 사망한 자에게까지 거두어내 “백골촉루(白骨髑髏)의 세(稅)”라는 말이 생겼다. ‘촉루’라는 한자가 어렵기는 한데 그 또한 해골이라는 뜻이다. 친족이나 이웃까지도 얽어서 군포를 거두니 이를 족징(族徵), 인징(隣徵)이라고 불렀다.

 

“환곡(還穀)”은 본래 춘궁기에 나라가 곡물을 내주고 추수기에 이자없이 돌려받는 구제책이었는데, 이게 강제로 받아가게 하고는 고리대금처럼 이자를 붙여 등골을 휘게 하는 작태로 변했다. 곡물을 받지 않은 사람까지 장부에 기입해 세금을 닦달한 백징(白徵)까지 있었으니 강탈이 아니고 뭔가?

 

해서 호랑이는 또 한번 크게 꾸짖는다.

 

“너희들이 먹는 것을 보면 그 얼마나 어질지 못한가! 덫과 함정으로도 부족하여 새 그물, 노루 그물, 작은 물고기 그물, 큰 물고기 그물, 수레 그물, 삼태 그물 등을 만들었으니, 최초에 그물을 만든 자야말로 천하에 가장 큰 화를 끼쳤도다.”

 

짐싣는 수레까지 가져간단다. 빠져나갈 틈없는 촘촘한 약탈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이름을 숨긴 채 공개리에 내건 “괘서(掛書)”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까닭도 양반과 탐관오리의 결탁에 숨통이 끊어질 듯 괴롭던 백성들의 현실을 말해준다. 1811년 황해도 곡산의 농민들이 관청을 습격했던 것이나 같은 해 평안도 지역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봉기 등도 모두 이런 현실에 대한 농민전쟁의 씨앗들이었다.

 

1862년 진주 농민 반란은 조선 땅 천지를 격동시켰고 이런 현실을 위로부터 혁파하고자 했던 갑신정변(1884년)에 이어 1894년 동학 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민중이 깨우친 것은 탐욕스러운 권력을 먼저 무너뜨리지 못하면 민생은 도탄에 빠진다는 사실이었다. “선(先)개혁 후(後)민생론”이다.

 

봉단이는 갖바치 양주팔의 조카딸이다. 갓바치라고 하기도 하고 갖바치라고 하기도 하는 이 직업은 백정이다. 그런데 양주팔은 글 꽤나 읽어 백정학자(白丁學者)라고 불리웠고 후에는 조광조와 교류까지 하는 사이가 된다. 봉단이와 양주팔 사이로 숨어 들어간 한 사나이가 있었으니 홍문관 교리 이장곤이었다.

 

- 농민봉기와 림꺽정

 

 

연산군의 갑자, 무오사화로부터 기묘, 을사로 이어진 사화는 사대부 선비들의 목숨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심지가 바른 이교리 역시도 말 한마디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목숨은 건졌으나 거제도로 귀양살이를 간다. 연산이 사화를 불러 일으킬 기세를 보이자 ‘지당하옵니다’라고 하지 못하고 “임금의 자리는 높은 까닭에 위태하옵니다. 덕이 아니면 누리기가....”했다가 단칼에 유배길이 되었다.

 

유배처에서 자칫 죽을 판이 된다는 소식을 듣고 야반도주를 하여 겨우 겨우 함경도땅까지 갔다가 처녀 봉단이를 우연히 만나 마음이 빼앗긴다. 서울 어느 대감집 하인으로 있다가 죄를 지어 쫓겨나 팔도강산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며 신분을 속이고 그곳에 기거하게 되고 봉단이의 아버지이자 집주인 양주삼의 아우 양주팔과는 비슷한 연배라 친구가 된다.

 

훗날 중종반정으로 조광조와 함께 직에 돌아간 이교리의 입지를 돌아보자면 봉단이와의 사랑으로 이어진 개혁파의 의도치 않은 밑바닥 연대였던 셈이다. 벽초 홍명희의 《림꺽정》, 그 시작의 무대다.

 

연산은 중종을 왕으로 옹립한 반정(反正)으로 몰락하고 중종 사후 권력이 배다른 형제인 인종으로 가는가 명종으로 가는가에 따라 외척의 권력향방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인종의 모친 장경왕후나 명종의 모친 문정왕후나 모두 파평윤씨 집안이었으나 어디 권력이 그리 순순하게 나누고 살 수 있는 물건인가?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尹元衡)은 이른바 대윤(大尹), 소윤(小尹)으로 불리는 사이였으되 권력쟁취를 놓고는 원수지간이었다.

 

인종이 권력승계를 하자 대윤의 승리로 마무리되나 했지만 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위는 열두 살 명종에게 갔고 당연하게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소윤 윤원형의 세상이 되었다. 윤씨가문의 외척세도가 하늘을 찔렀고 반대파는 죽임을 당하기를 그야말로 파리목숨이었다. 이러면서 이들과 연결된 탐관오리의 약탈은 막을 길 없이 조선팔도를 짓눌렀다.

 

그러자 어찌 되었을까? 바로 이 때에 황해도 경기도 그리고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고을관아를 습격, 창고를 털어 빈민에게 나누어준 림꺽정의 활약시대가 열렸다. 그에게 병법을 가르친 이가 다름 아닌 백정학자 양주팔이고 림꺽정의 아버지는 양주팔과 친구가 된 홍문관 이교리의 부인 봉단이의 사촌이다. 얽히고 설켰다.

 

성호 이익이 조선 3대 도적(의적)이라 불렀던 홍길동, 장길산, 그리고 림꺽정이었다. 그러니 그와 개혁파 홍문관 교리 이장곤, 조광조, 양주팔의 세계가 하나로 어우러져 위에서, 그리고 아래로부터 세상을 뒤집는 개혁으로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농민들이 겪었던 일이 오늘과 상관이 없는가? 아니다. 체제는 달라졌지만 돌아가는 정치의 원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개혁과 민생은 다른 것이라 선전하는 자들이 있다. 속도조절하자고 한다. 뻔한 속셈이다. 개혁하지 말자는 것이다. 자기들의 특권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민생의 요구가 해결되는 것은 “자기들이 먹고 남은 것만 가지고 ‘공정’하게 싸우면 된다”고 세뇌한다. 이들이 강조하는 “공정의 실상”이다.

 

금준미주와 옥반가효를 부패와 특권의 사슬 속에서 전부 차지하는 자들의 세도를 꺾고, 이들의 죄악을 징치(懲治)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민생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독일의 시인 하이네가 남긴 시 “슐레지엔의 직조공”의 한 대목이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마르고/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중략)두 번째 저주는 왕에게, 부자들의 왕에게/우리들의 비참을 덜어 주기는커녕/마지막 한 푼마저 빼앗아 먹고 그는 우리들을 개처럼 쏘아 죽이라 했다/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그런 세상은 이 시가 이어 말하고 있듯이 “오욕과 치욕만이 번창하고 꽃이란 꽃은 피기가 무섭게 꺾이고 부패와 타락 속에서 구더기가 살판을 만나는 곳” 이 된다. 개혁을 늦추고 민생을 하자는 자들은 개혁이건 민생이건 뭐든 제대로 하고 싶은 생각은 일절 없다. 자기들이 다 뜯어먹을 때까지 마냥 기다리라는 소리니까. 자기네 사건을 덮어줄 자들이 건재해야 자기들 독차지가 되니까. 그건 우리에게 “장송곡”이다.

 

힘겹게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그렇게 이룬 이 시대의 수의(壽衣)를 베틀에 앉아 짜고 싶지 않다면, 뭘 해야 할까?

 

촛불을 다시 들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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