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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혁명의 새로운 길”

 

- 예수와 단군

 

어느 학교의 교가(校歌)다. 어디일까?

 

“한뫼가 우뚝코 은택(恩澤)이 호대(浩大)한 한배검의 깃치신 이 터에/그 씨와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明洞)/웅장한 조상피 이 속에 흐르니 아무런 일 겁낼 것 없구나/정신은 자유요 의기가 용감한 나의 명동”

 

그렇다. 시인 윤동주가 나온 만주(동북 3성) 용정에 있는 명동촌의 명동학교 노래다. ‘한뫼’는 큰 산(백두산)이고 ‘한배검’은 단군왕검이라는 뜻이다. 그 첫머리를 요즘 말로 풀자면 “큰 산이 우뚝 서 있고 은혜와 축복이 차고 넘치는 단군 임금님의 힘이 끼쳐 이루어진 이 터에”로 풀 수 있다.

 

기이하지 않은가? 명동학교는 기독교인 김약연이 1908년 세운 학교인데 난데없이 왜 단군일까? 그런데 이 명동학교 교실 벽에는 예수와 단군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하니 이를 또 어찌 생각해야 하는가. 목사였던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삼촌이다.

 

명동학교의 전신(前身)은 “서전서숙(瑞甸書塾)”으로 ‘하늘의 기운이 상서로운 땅에 세워진 글방’이라는 의미를 가진 민족교육기관이었다. 1906년에 대종교(大倧敎)에 소속되어 있던 서일, 이상설 등이 중심이 되어 세운 학교였다.

 

그러나 그다음 해인 1907년 고종에 의한 이상설의 헤이그 밀사 파견 사건으로 문을 닫게 되면서 소속과 이름이 달라진 결과 명동학교로 다시 태어났다. 대종교(大倧敎)는 단군교로 시작한 민족종교로 애초에 전해져오던 단군교를 나철(羅喆, 1863~1916)이 한일합방 전에 새롭게 개혁한 것이다.

 

 

 

- 나철과 대종교, 그리고 독립투쟁

 

이 대종교에 속한 이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기라성이다. 사학자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문일평, 안호상, 국어학과 문학계로만 봐도 주시경, 김두봉, 최현배, 이병기, 홍명희, 영화 《아리랑》으로 유명한 춘사 나운규, 그리고 마라톤의 손기정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쓰는 ‘배달민족’, ‘한글’, ‘국학’그리고 ‘개천절’이 모두 대종교의 노력에 의한 열매다. 서일은 대종교의 종사(宗師)이고 중국 동북지역 무장독립단체 “중광단(重光團)”을 조직, 훗날 청산리 대첩의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의 모태 “대한군정회”를 세운 바 있다. .

 

이 이야기들은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선생이 최근에 펴낸 《나철평전(꽃자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민족의 뿌리에 대한 탐구는 1930년대에 이르면 더더욱 강렬해진다. 그러기 전 이미 박은식(1859~1925)은 1915년에 ‘뼈아픈 조선의 역사’라는 뜻의 《조선통사(朝鮮痛史)》, 1920년에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모두 망명지 중국 상해에서 내놓는다.

 

단재 신채호(1880~1936)는 또 어떤가? 독립투쟁으로 10년 실형을 살던 뤼순(여순(旅順) 감옥에서 1931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가 훗날 《조선상고사》로 묶여 나오게 된다.

 

조선총독부는 1925년에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조선사 왜곡 작업에 들어간다. 여기에 발맞춘 교육시책은 1.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에 무지하도록 한다. 2. 조상의 무능과 악행을 줌심으로 가르친다. 3. 일본문화와 역사를 가르쳐 민족적 열등감을 더욱 심화시킨다, 등이다.

 

 

- 조선사 연구의 뜻

 

 

이 악랄한 민족정신 말살정책에 도전했던 이들이 정인보(1893~1950)와 안재홍(1891~1965) 같은 이들이었다. 정인보와 안재홍은 1934년에서 1938년에 걸쳐 4년만에 다산 정약용의 저작을 복간, 편찬해서 《여유당 전서》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154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작업이었다.

 

이걸 죄다 읽고 당시 《동아일보》에 “여유당 전서를 독(讀)함”이라는 글을 연재한 것이 지금까지도 최고의 다산 연구자로 알려진 최익한이다. 최익한은 실학과 사회주의를 잇는 중요한 고리가 된다. 그는 국학자이며 사회주의자로 1948년 평양에서 열려 김구와 김규식이 참석한 남북연석회의에 동행, 그대로 머물러 북한의 실학연구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한국방통대의 손창섭 교수가 그를 발굴해 우리에게 소개한 이후 최익한의 저작은 실학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목록에 담기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다시 정인보로 돌아가보면 그는 《5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의 조선사 연구를 펴낸다. 정신의 힘이 바로 서지 못하면 형체조차 무너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남들이 우~ 하며 그리로 몰리는 이들은 얼이 없다. 얼빠진 것이다. 모든 학술이 ‘얼’을 주제로 삼아야 비로소 참된 학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사》의 출발이 된 《성서로 본 조선》을 출간한 것도 다르지 않은 목적이 담겨 있다. 정인보는 그의 부친이 “남의 것(중국고전)은 공부하면서 어찌 자기 일은 모를까?”라는 일깨움에 조선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신채호의 역사관은 정인보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

 

단재 신채호가 고려 인종 때(1135년) 일어난 “묘청의 난(妙淸-亂)”을 우리 역사에서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고 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는 묘청을 중심으로 하는 국풍파(國風派)가 김부식의 유학파에게 패하여 몰락함으로써 우리에게 진취적이고 자주적인 기상이 크게 무너졌다고 탄식했다. 제 생각을 똑바로 못하고 남에게 휘둘리게 된 사정이 그렇게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으니”라는 애통함은 신채호만의 것이 아니었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이미 일찍이 그의 《연암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김부식이 그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으면서 오직 중국의 역사책에만 의지하여 거기서 뽑은 것만을 사실로 만들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사실은 그것이 미더운 것이든 아니든 단 한마디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고조선의 경계를 다시 검증해야 한다면서 평양이라는 지명이 고조선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평양인지 따져 묻고 있다. 평양은 대동강 근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요동(遼東)에 있다는 것이다. 대륙의 역사를 상실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었다. 1962년 북한의 리지린이 《고조선 연구》를 내면서 박지원의 주장을 입증한 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 혁명 속에 있기에 혁명을 배운다

 

이런 모든 노력은 그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철의 스승은 왕석보로 그는 다산의 사상을 물려받았고 양명학(陽明學)에 몰두했다. 양명학은 유학의 주류 주자학이 지식의 축적에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자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고 실천 속에 참된 지식이 태어난다고 일깨웠다.

 

정인보 역시 양명학자였다. 그의 스승은 양명학의 대가 이건방(李建芳)이었고 정인보는 이 훈련을 바탕으로 《양명학 연론(陽明學演論)》을 출간한다. 이 책에서 정인보는 공부란 책에만 있지 않고 마음과 실천에 있다는 주장을 핵심으로 삼았다.

 

우리의 양명학은 18세기초 정제두가 강화학파를 형성하면서 반계 유형원-성호 이익-다산 정약용의 실학 주류, 그리고 박지원-홍대용-박제가-박규수로 이어지는 북학파와는 다른 가지인 학파가 만들어졌다.

 

정인보는 이 모든 사상의 원류를 자신 안에 합류시켜나갔다. 그를 비롯해 당대의 지식인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이 가운데 하나는 중국 근대 혁명사상을 이끈 장빙린이었다. 장빙린은 입헌군주체제를 주장하는 강유위 등을 비판하면서 혁명을 주창하는 《민보(民報)》를 발간했다.

 

장빙린은“사람들이 어떻게 혁명하는지를 배운 뒤에야 비로소 혁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혁명 속에 있기 때문에 혁명을 배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역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치철학이다. 실천 속에서만 앎의 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신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과정이 된다. 자기정신의 주체성을 붙잡으라는 것이다.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이수광은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는 기술은 조선이 창조한 것이지 중국의 소유가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중화주의에 대한 자존심의 발호다. 한글소설 《구운몽(九雲夢)》을 쓴 서포 김만중(1637~1692)은 “원나라 세조 때 서역의 스님 파사파가 서축어(산스크리트어)의 문체를 변화해 몽골문자를 만들었듯이 우리도 이를 따라 ‘언문(諺文)’을 만들었다”고 기록해놓았다.

 

이는 언문 한글이 대국 원(元)을 본떴다는 뜻이 아니라 훈민정음을 반대한 최만리같은 고리타분한 유학자들의 중화주의를 벗어나 세계적 교류의 틀 속에서 사고한 글자라는 걸 의미한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을 둘러싼 거란, 티베트, 금, 몽골 그리고 나중에는 만주의 여진까지 각기 자기 문자를 창안했고 우리 역시도 중화주의를 넘는 문자체계를 그렇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 호민(豪民)의 혁명

 

 

역시 함석헌 선생의 말씀대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홍길동전》의 허균(許筠/1569~1618)이 남긴 “호민론(豪民論)”에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글이 남겨져 있다.

 

“세상 변고를 주의깊게 살피다가 이건 정말 아니로구나, 하고 팔을 휘둘러 밭고랑에서 소리 높혀 부르짖으면 슬퍼하고 탄식하며 원망만 하던 원민(怨民)과 납작 엎드려 죽은 듯이 지내던 항민(恒民)도 모두 모여들어 무도한 자들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항민과 원민은 자기 중심을 세우지 못한 채 세상 돌아가는 형세에 휘둘리거나 의지하나 호민(豪民)은 깨어 있는 민(民)이다. 허균은 천하에 두려워할 것은 바로 이 “민”이라 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폭풍 속에 있을 때 가슴에 한배검 단군왕검을 모신 까닭도 바로 그 정신의 뿌리, 얼의 힘을 든든하게 붙잡고 있으려 한 애씀이다.

 

제대로 혁명을 하자면 우리가 파고 들 바가 참으로 많고 깊다. 우리 선조들이 밟고 나간 길이 아직도 결코 낡지 않았다. 휘둘려 세뇌되면 항민이나 원민이 될 뿐이다. 오직 혁명 속에서 혁명의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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