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수용소에 내가 가든 다른 누가 가든 상관없고, 가장 중요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 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흥분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내가 체념의 미소를 지은 채 파멸의 품속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단지 피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럴때 조차 궁극적으로 그들은 우리에게서 중요한 것을 빼앗을 수 없음을 확실히 알기에 버틸 힘을 얻는다.
나는 결코 피학증 같은 것 때문에 수용소에 가려하거나 지난 몇 년간 내 경험의 기반이었던 소중한 것들에서 분리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일에서 내가 면제된다고 해서 행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은 살아남아서 해야 할 일이 많고 남에게 줄 것이 많기 때문에 숨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계속 말한다. 하지만 내가 남에게 무엇을 주어야 한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 줄 수 있다는 걸 안다.
친구들과 함께 여기에 있듯 강제수용소에 있든 상관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운명을 함께하기에는 자기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순전히 교만일 뿐이다. 그리고 만일 신도 내가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신다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나도 함께 겪은 후에도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또 내가 귀중한 인간인지 아닌지는 오직 훨씬 더 힘든 상황에서 내가 하는 행위에 의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어떻게 죽는가에 의해 내가 진정 어떤 사람인가 밝혀질 것이다.
... 우리가 열린 창문 앞에서 최근의 추이에 대해 말할 때 고통에 시달리는 그의 얼굴을 살펴보고 생각했다. ‘오늘밤 우리는 서로의 품 안에서 흐느끼겠구나.’ 실제로 우리는 서로의 품 안에 있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다만 마지막 황홀경 속에서 그의 몸이 내 몸 위에 누웠을 때, 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절망과 근본적인 인간의 슬픔이 밀물처럼 차올라 내가 그 속에 잠겼고, 나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가득 일어났다. ... 어둠 속이라서 그의 맨등에 얼굴을 묻고 몰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주위 강권에 못 이겨 유대인위원회 행정비서직 지원 후...) 나는 마치 배가 난파되어 끝없는 망망대해에 작은 판자 하나만 떠 있고, 자기가 살자고 다른 사람들은 바닷물 속으로 밀어내어 그들이 익사하는 것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바닷물 위에 떠서 하늘을 바라보고 누운 채로 잠시 흘러가다가 기도하면서 물속으로 가라앉는 걸 택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출처 : 《에티 힐레숨》 패트릭 우드하우스. 이창엽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21(에티 힐레숨 1914-1943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