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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의 '오늘의 성찰'] 세일 없는 세상

 

세일 없는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 세일이 없는 세상은 우선 정직한 세상일 것이다. 30%, 60% 심지어 80%라는 세일 광고를 보았을 때는 온몸에 힘이 빠진다. 재고품을 정리하느라 5%, 10% 정도 값을 싸게 해서 고객에게 서비스하는 것은 소비자에게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똑같은 물건이 50%나 값이 내려가서 먼저 물건을 산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면 그것은 엄연한 횡포다. 처음부터 정당한 가격을 책정해 놓고 그 값을 고수하는 것이 소비자에 대한 상도의이며 예의다. 물건이 너무 많아서 그 물건을 처치하기 곤란할 것 같으면 물건을 조금만 만들든지 아예 만들지 않으면 될 일이다.


넘쳐나서 쓰레기처럼 쌓인 물건들과 그 물건들을 휘젓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도 함께 싸구려 세일이 되어 어느 시궁창으로 둥둥 떠내려가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언짢다. 더욱 겁나는 것은 가격파괴니 노마진 세일이라는 새로운 어휘들이다. 어떻게 보면 소비자들을 더욱 현혹하고 부추기는 것 같고 이런 어휘의 범람은 속임수와 거짓의 난장판인 것 같아 현기증이 난다. 값이 싼 물건이 횡재일지 모르지만 그런 물건에 대해서는 애당초부터 어떤 소중한 마음을 간직할 수가 없다. 물건은 어디까지나 물건이니까 하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 같은 세일, 어떤 기대나 설렘 하나도 없이 오히려 먼저 물건을 산 사람에게 불쾌감만 안겨주는 세일, 세일 가격이 애당초부터 진짜 소비자 가격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일까?


뉴욕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한국에 나온 친구가 세일 가격을 보더니, 내가 부끄러움을 느낄 만큼 경악하면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세일 없는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는 것이 내 소원이야.”


이 친구는 모든 면에서 나와 통하기 때문에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세일을 좋아하고 백화점에서 세일할 때만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감히 세일 없는 세상 이야기를 했다가 몰매를 맞을지 모르지만 친구는 나의 말에 씁쓸하게 웃으면서 손을 꼭 잡았다.


“너는 세일하는 물건은 안 사겠지?”
“물론, 물건 값을 깍아본 적도 없어.”


정말 그렇게 했다.
옷을 별로 사 입지도 않지만 결코 세일하는 옷을 입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어정쩡한 부자가 되어 잘 먹고 잘 산다는 데 세일하는 물건 앞에서 왜 그토록 기갈이 드는지 알 길이 없다. 어째서 출시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처음부터 50%니, 70%니 하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다가오는지 이해가 안 되는 수수께끼다.


나는 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세일하는 물건 앞에서 주춤거리며 살고 싶지는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이고 생리라면 경제적 관념이 없는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세일이 없는 세상,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그것도 내가 열망하고 바라는 세상이다./ (최영선, '별처럼 흙처럼 八十自敍' 2021. 올해 미수를 맞이하시고 자유인으로 살고 계시는 향린교회 명예 권사. 평생 다른 이들의 책을 내는 일에 종사하시다가 처음으로 당신의 책을 내셨다. 모전여전이라고 따님께서 편집과 출판을 맡았다. 부피는 크지 않지만 내용은 깊고 여운은 길다. 같은 동네에 계시는데, 어제 모처럼 만나 식사를 하면서 책을 받아 오늘 새벽 단숨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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