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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복종을 거부하는 오징어들”

 

-연예뉴스로만 소비되는 <오징어 게임>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넷플릭스에 올라 세계적 유명세를 발휘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단지 화젯거리 연예 뉴스로만 소비되고 있는 중이다. 정작 이 드라마는 엄청난 정치사회적 메스를 우리 사회의 목덜미에 예리하게 들이대고 있는데 그런 건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야만을 찔러댄 영화가 자본주의의 문화통치에 빨려 들어가 버린 꼴이다.

 

영화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는데 현실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걸 오락처럼 즐기고 있다. 자본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는 언론들은 ‘뽑기’로도 불리는 ‘달고나’가 어디에서 얼마나 팔리는지를 궁금하게 만들고 있으며, 외국인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열심히 따라 하고 있는 장면을 호기심거리로 제공하는 작업에 몰두할 뿐이다. 이 영화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비극, 벼랑 끝에 몰린 빈곤의 현장과 그 비명소리는 철저하게 외면한다.

 

<오징어 게임>에서 보여주고 있는 갖가지 게임은 아이들의 놀이를 모방했다. 그러나 그건 그냥 놀이가 아니라 생존투쟁이다. 여기서 승패는 곧 생사의 문제가 된다. 죽음은 정확하게 조준된 학살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마음 약한 이들은 이 드라마를 보다가 그만 두기도 한다. 그런데 게임이 이렇게 잔혹해지는 비밀이 있다. 다름 아닌 “복종”으로 길들여진 “저항의지의 소멸”이다. 그 순간 인간은 빈 껍데기가 되고 만다.

 

이렇게 끔찍한 원칙을 요구하는 게임이니 반발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러자 참여하고 싶지 않다면 투표로 결정하라는데 그 “합의”는 다수결의 원칙이 가진 기만을 드러낸다. 그건 사실 ‘강제된 동의’였을 뿐이다. 자신의 삶을 지켜낼 물적 토대가 없는 권리행사는 허망하다. 민주주의란 그래서 언제나 유물론적 논의를 해야 완성된다. 먹고사는 권리를 정의롭게 보장해주는 것에서, 어느 한쪽은 빼앗고 독점하는 특권을 거머쥐고 어느 한쪽은 빼앗기면서도 항의해봤자 말짱 아무 것도 아닌 계급정치는 사라질 수 있다.

 

-"인간사냥”을 위한 물신주의의 범죄

 

영어 ‘게임(game)’은 보통 ‘놀이’로 번역되지만 ‘사냥감’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놀이인 척하면서 인간사냥을 한다. 거액의 “돈”이라는 먹이로 꼬여 토끼몰이를 하고 일회용(disposable)으로 처분하는 장면은 인간의 존엄을 철저하게 박살 내는 “물신주의(物神主義/fetishism)”를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원리는 바로 이 물신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인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저들만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있는 현실이 윤리적 도전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은 인간에게 절망이다.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힘과 돈을 가진 자들 대부분이 “범죄자”라는 사실이다. 권력기관과 대자본, 언론과 토건족, 정치인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부패한 특권 카르텔을 만들어 서로 끈끈한 동맹을 유지한 채 이 나라의 땅과 돈을 온통 저희들 것인 양 피 빨아먹듯 빨아먹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흡혈귀들인 거다.

 

조선조 봉건체제에서는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이 민중을 고통에 몰아넣었고, 오늘날은 땅과 돈을 한 손에 모두 움켜쥔 자들이 악정(惡政)의 주역들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죄가 드러나도 수치를 모르며 이제는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큰 소리를 치며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언사를 농(弄)한다. 자기들이 저지른 것도 죄다 남들에게 뒤집어 씌우는 기술자들이며 이런 자들을 지켜주는 ‘법귀(法鬼)’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거대한 분쇄기”의 잔혹함

 

독일의 파비안 샤이들러(Fabian Scheidler)라는 젊은 학자는 이런 범죄자들의 조직이 자본주의의 오랜 역사 속에서 길러지고 하나의 체계가 되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이걸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을 “메가머신(Megamachine)”, 즉 “거대한 기계”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는 까닭은 이들 지배세력의 관계가 톱니바퀴처럼 연결되어서 그 안에다 보통 사람들을 갈아 넣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분쇄기다.

 

 

이 기계의 기능은 사람들의 팔다리를 묶고 머리를 비워 자기들의 지시에 복종하게 하는 명령어로 가득 차게 만드는 것이다. 팔다리를 묶는다는 것은 당연히 자유의 박탈이다. 가령 저임금은 자본의 입장에서 이윤의 극대화이면서 그와 함께 노동자들에게 그것에나마 매달려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줘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지배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니 팔다리가 포박되어 지시에 따르는 행동만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존재를 우리는 뭐라고 부를 수 있는가? “노예”다. <오징어 게임>은 돈과 권력의 힘에 의해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의 처참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그 자발성은 물론 보이지 않는 구조의 강제에 의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가장 크게 작동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다. 그건 교육을 통해 오래 길러지고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투입되어 인간의 행동방식을 규제하는 장치다.

 

“자본주의는 풍요다”와 “자본주의는 야만이다”는 중대한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가진다. 경제정책에서 “성장을 목표로”라는 생각과 “성장은 노동과 자연을 착취하는 원리”라는 생각은 대립할 수 밖에 없다. “계층이라는 단어는 허용”되나 “계급이라는 단어는 배제”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이데올로기적 대치다. 계급이라는 말속에 담긴 사회적 대결구조를 보게 하고 싶지 않은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논의는 무엇이 정당한가의 윤리적 쟁투가 된다. 그 논쟁의 중심에는 그렇다면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에 대하여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이 이 모든 논의의 정중앙에 놓여야 한다. 자본주의의 확대과정은 서구 이외의 지역 민중들을 학살하고 노예화시켰다. 지울 수 없는 역사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몸체였으며 그걸 따라 배운 일본이 우리를 그렇게 학살하고 노예로 만들었던 것은 이런 인류사의 궤적에 그대로 일치한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의 야만”에 대해 우리 사회는 이데올로기적, 윤리적 논쟁이 금지되어 있다. 요즘은 뭐든 다 말할 수 있으니 아니라고 여길 수 있지만 아이들의 교육과정에 이런 내용을 담아내야 한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금세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 교육은 어떤 부당한 일이 일상으로 펼쳐지고 있으며 그걸 주도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공개하게 된다. 그러니 지배세력 또는 이 시스템의 주도자들로서는 이런 내용들이 교육되어서는 안 된다.

 

식민지를 겪으며 “근대”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들어온 자본주의는 그 지배세력을 실로 끊임없이 범죄집단으로 만들고야 만다. 아니 범죄집단이 되어야 지배세력이 된다. 착취해야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고 부패를 고리로 해야 특권을 확보할 수 있으며 비리와 부정을 은폐해줄 자들이 있어야 합법을 가장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자본주의의 법은 지배세력의 범죄는 용서가 되도록 운용된다. 우리는 이걸 매일 보고 있다. 자, 그렇다면 어찌하면 되겠는가?

 

 

오래전 돌아가신 한국 유학사상의 거장 류승국(柳承國) 선생은 우리 역사를 오래 지탱해온 “유학은 기본적으로 인도주의(人道主義) 사상”이라고 강조하면서 “천도(天道)가 인도(人道)에 내재하며 인간은 물질의 주인으로 이를 지배하는 인간 존엄의 사상체계”라고 정리한다. 조선의 주자학이 성리학(性理學)을 중심으로 논전이 펼쳐진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내면에 천부적으로 존재하는 인성(人性)을 탐구하여 인간 자신의 주체성을 끝없이 연마하고자 함이었다.

 

물론 이 성리학이 너무 집요하게 추상화되어가면서 현실을 외면한 채 당파투쟁의 이론적 도구로 전락하고 만 역사가 있기는 하나 그 중심에는 계산으로 이득을 재는 리(利)보다 올바른 가치를 핵심으로 삼아 의(義)를 중시하는 이른바 “의리지학(義理之學)”이 발달한 것은 버려서는 안 되는 정신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생사를 초월해서 군자(君子)를 넘어 성인(聖人)의 지경으로 가고자 자기 수련을 아끼지 않는 태도를 길러낸 초석이었다.

 

어디 여기에서 그쳤는가. 정치를 논하면서 폐정(弊政)을 혁파하는 논리와 의지, 그리고 꺾이지 않는 자세도 이렇게 만들어졌다. 민생을 도탄에서 구하고자 하는 절실함을 권력이 있거나 없거나 책임있는 지자(知者)들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자세로 여겼고 이는 이후 근세사에서 적지 않은 사대부를 의병투쟁에 나서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조선 유학의 태두(泰斗) 퇴계 이황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측은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인간이 사는 길”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니 그와 같은 인생관을 지닌 이의 마음이 악해질래야 악해질 수가 없고 약자를 괴롭히는 생각은 날래야 날 수가 없다.

 

이런 생각들은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는 물신주의를 격파할 수 있는 중요한 도덕적 근거가 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니 의리지학(義理之學)이니 하는 것들은 고리타분하고 낡은 생각들이 결코 아니다. 인간의 내면 그 진실을 탐색하는 성리(性理)의 태도는 리(利)에 기반해서 내려지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주체적 가치관을 모색하고 지켜내는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교육은 지금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다. “오징어 게임”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불편하고 위험한 생각들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오징어들의 행동을 기대하며

 

 

인간의 의식을 연구해온 탁월한 진화론자 다니엘 데닛(Daniel Dennett)은 “다윈의 진화론”이 왜 위험한 사상이었는가를 밝히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미리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라고 강조한다. 유럽 중세의 신학은 모든 것은 이미 애초부터 정해져 세상의 질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사유를 기본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중대한 도전에 처했으니 변화를 그 축으로 하는 다윈의 진화론이 당연히 위험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현실의 근본적 재구성인 혁명도 그렇게 해서 가능한 정신적 토대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이건 “해방의 시작”이다. 자본주의는 인류문명사의 철칙이 아니다. 인류와 자연을 멸망의 길로 이끄는 폭력과 야만이며 권력과 재물이 모이는 곳을 범죄의 소굴로 만들어버리는 첩경이다. 다른 길이 분명 있다.

 

 

어떤 혁명적 변화도 처음에는 주류에서 배제된 변방의 목소리에서 비롯된다. 해방 철학자 엔리크 뒤셀(Enrique Dussel)은 예수의 산상수훈 첫대목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저희 것이요”가 얼마나 혁명적 선언인가를 강조한다. 강자들이 독점해온 ‘최상의 세계’에 대한 권리를 진정 누가 가지고 있는지를 여지없이 밝혔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했던 “모든 프로레타리아에 대한 선언”도 이 흐름에 합류한다.

 

존엄한 인간이 납작하게 눌린 오징어가 되어 일회용으로 소비되고 버려지는 세상은 떠나보내야 한다. 범죄를 권리로 알고 그걸로 지배자들이 되는 자들의 권세는 종식을 고해야 한다. 우린 사람이야, 오징어 취급받는다고 함부로 짓밟아도 돼? 사냥당하는 들판의 짐승들이 아니야, 너희들이 말을 이제부터는 절대로 듣지 않을 것이야, 라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야 한다. 거대한 자본이 내미는 욕망의 끈에 팔과 다리가 묶인 채 조준당해 쓰러지는 역할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 그 순간 게임판 자체의 종료다.

 

“오징어들의 반란”이 시작되는 날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