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특히 부각시키고자 할 때 만능열쇠처럼 동원되는 강력한 무기가 하나 있다. 좋지 않은 전통은 덮어놓고 일제의 잔재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그것이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는 온통 민둥산이었다. 산림이 이렇게 헐벗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데도 일제 탓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남산 위의 푸른 소나무' 밭을 벌겋게 만든 장본인은 일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제사학계나 산림학계 분야에서 잇따라 나오고 있는 최근의 실증적인 연구결과는 전혀 딴판이다. 한반도 산림은 이미 조선후기, 특히 18-19세기에 회복 불능일 정도로 곳곳이 황폐화됐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가 추진하는 3개년 프로젝트인 '한국의 경제통계:17-20세기' 중 하나로 제출된 '18-19세기 산림황폐화와 농업생산성' 보고서에 드러난 이 시기 한반도 산림은 처참하기 짝이 없다.
1차연도 연구성과를 결산한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서울대출판부 刊)에 수록된 이 논문은 성균관대 경제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이우연씨가 작성했으며, 낙성대경제연구소장인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최종 심사를 했다.
이 프로젝트의 중간결산이 내린 잠정결론은 조선경제는 19세기에 자생능력을 상실한 '대위기'를 맞았고, 이것이 결국 망국으로까지 연결됐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의 하나로 주목된 것이 바로 산림이었다.
이우연씨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 산림은 18세기에 인구증가에 따라 경작면적이 확대되고, 온돌이 보편화함에 따라 국가권력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산림의 남벌(濫伐).남획(濫獲)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현재는 '한국의 미'로까지 칭송되는 지리산 일대 산간의 계단식 논도 이 무렵에 개척되기 시작했다. 화전(火田) 또한 산림 황폐화의 주요한 원인이 됐다.
이렇게 파괴되기 시작한 산림은 특히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전국토가 벌거숭이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산림 소송이 이 무렵에 급증한 점도 이런 현상을 방증한다.
1898년 제물포를 통해 서울로 들어간 외교관 새비지-랜더(Savage-Landor)는 "어떤 지역에서도 일본처럼 세심하게 가꾼 산림지대는 눈에 띄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이보다 조금 앞서 조선에 들어와 고종의 주치의를 했던 독일 의사 분쉬(Wunsch) 또한 "풀이 거의 자라지 않는 곳도 있고 조금 자란 곳도 있었다. 주변에 땔감이라곤 없었으나 여기저기 지게를 진 나무꾼들은 보였다"는 회고록을 남기고 있다.
이우연씨는 이런 산림 남벌과 그로 인한 빈번한 홍수 피해로 인해 다른 무엇보다 19세기 조선의 농업생산성은 급락하고, 생필품인 땔감이나 관재(棺材) 값은 폭등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 조선 조정은 소나무 벌채를 금지하는 금송(禁松) 등의 소극적 정책밖에 시행하지 않았으며, 그것조차 법률이나 엄포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기존에 통용되는 일제의 산림 파괴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대목에서도 민둥산은 강압적인 일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