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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정의 '오늘의 성찰'] 광주민중항쟁 관련 어록

 

 80년 5월 시민군 대변인을 하던 윤상원은 복부에 총상을 입고 사망하기 전 이 말을 남긴다. 

 

"너희들은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너희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아! 설마,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귀를 잘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젖가슴을 잘리우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너무나 경악스런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국에서는 계속 허위날조, 유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대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 광주 시민군, 1980년 5월 25일 '광주시민군 궐기문'

 

  광주에 투입된 우리들은 총에 대검을 끼고 실탄을 넣었다. 비록 상관의 명령이었지만 나는 그 대검으로 '빨갱이'들을 찌르고 군중을 향해 사격을 했다. 잡혀온 '빨갱이'들은 개처럼 두들겨 패고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겼다. 진압봉과 개머리판 그리고 군홧발로 온 몸이 시커멓게 피멍이 들도록 때렸다.


  처음에는 길가에 서 있던 시민들이 우리 군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항의하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실제 사람을 패서 죽이고, 총으로 쏴서 죽이고, 대검으로 찔러서 죽이는 것을 몇 번 보는 순간부터는 감히 항의하는 시민도 없었다. 서로 눈치만 보며 우리를 무서워하며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잡혀 온 수백 명의 남녀노소 '빨갱이'들은 넓은 공터에서 우리들에게 사정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들은 우리들이 시키는 대로 시궁창을 기었다. 오리걸음으로 선착순을 반복했고, 그중에서 늦은 '빨갱이'들은 군홧발과 진압봉으로 죽도록 맞았다.


  나는 광주시내 여기저기서 죽어 넘어져 있는 시신도 여럿 보았다. 어떤 군인들은 "전라도xx들은 다 죽여야 해"라고 떠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감히 빨갱이들이 대한민국에서 활개치고 다녀" 하며 잡혀온 민간인들에게 심한 분노와 증오를 품었다.


 한번은 밤에 어디서인지 모르는 방향에서 갑자기 날아오는 돌에 맞아 전우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했다. 이 일로 '빨갱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분노와 적개심은 더욱 커갔다. 그 후 우리 손에 잡히는 '빨갱이'들을 더욱 무자비하게 죽였다. 사방에서 터지는 총성과 최루탄가스 연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리는 고함, 비명, 절규들은 생지옥을 연상하게 했다.


  우리들은 물이 없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면도도 하지 못했고, 그럴수록 이런 상황을 초래한 '빨갱이'들에게 극심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전우 중에는 지난 밤 몇 놈을 대검으로 통쾌하게 찔렀노라고 자랑삼아 말하던 이도 있었다." - 김성수 '함석헌 평전' 저자

 

민주화여! 영원한 우리 민족의 소망이여! 
피와 땀이 아니곤 거둘 수 없는 거룩한 열매여!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우리는 총칼에 부닥치며 여기 왔노라. - 5.18 당시 궐기대회에서 낭송된 시 '민주화여!'전문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기자일동 전남매일신문사장 귀하. - 전남매일신문기자의 집단사직서

 

임신 8개월의 딸이 숨졌는데 뱃속에는 태아가 뛰고 있었다. 민정당 의원들에게 더도 덜도 말고 한 번만 똑같은 일을 당해보라고 얘기하려 했는데 아무도 안 나왔으니 - 89.2.22. 국회청문회 김현녀[54] 증인

 

졸업장을 준다니 고맙긴 하지만, 광범이는 안 좋아할 거요. 그때의 주범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 좋아할 리가 있겠소? - 88.12.3. 5.18 명예졸업장을 받은 방광범 군의 아버지 방두형

여보, 당신은 천사였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 임산부임에도 학살된 최미애의 묘비명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가족이 왜 총을 맞아야 했는가를 모르겠어요. 시위를 한 것도 아니고 고향에 돌아가려 했는데 왜 우리에게 무차별 총질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 88.5.15. 최연소 부상자 김준향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 1980년 5월 30일, 당시 서강대 학생인 김의기 열사가 투신자살 직전에 남긴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의 한 구절

 

  도대체 한 나라 안에서 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 명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며 죽어가는데 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 1980년 6월 9일, 노동자인 김종태 열사가 분신 직전 남긴 유인물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중에서

 

  30년 전 6·25의 국가적 전란 때를 빼고는 가장 난삽했던 사태에 직면한 비상계엄군으로서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중략)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 80.5.28 조선일보 사설

 

  중국 문화대혁명 때 수천만 명이 희생당하고 엄청난 피를 흘렸다. 이런 갈등, 이런 불화, 이런 피를 흘린 사건이 있었는데도 (책임자) 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등소평이 중심이 돼 그 원로들을 다 대접하고 활용했다. 거기에 비하면 광주 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  - 95.10.5 경신회 모임에서 노태우

 

광주는 살아있다! - 1988년 6월 4일, 숭실대 학생 박래전 열사가 군부독재 타도를 위해 분신하며 외친 말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관 32구,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문용동전도사의 5월 21일 자 일기)


- 문용동전도사는 군 경력을 살려 탄약 관리반에 지원해 폭발물을 관리했다. 끝까지 남아 도청을 사수하던 문용동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탄에 숨을 거뒀다. 문용동은 목숨을 부지할 기회가 있었다. 숨지기 하루 전 가족과 친구가 찾아와 도청을 나가자고 권면했다. 그러나 문용동은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할 경우 도청을 중심으로 반경 5km 정도 파괴될 수 있다. 나는 신학도로서 주님의 종 양심으로 이 위험한 폭발물을 방치해둔 채 도저히 떠날 수 없다"고 거부했다.

 

  한신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류동운은 비상계엄으로 휴교되자 집이 있는 광주에 내려왔다. 류동운은 5월 18일부터 시위에 동참했다. 연행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또다시 금남로에 나갔다. 목숨을 잃기 전까지 시신을 수습하고 도청을 사수했다. 류동운은 5월 26일 저녁, 계엄군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도 도청으로 향했다. 말리는 목사 아버지에게 류동운은 말했다.


  "아버지, 붙잡지 마세요. 다른 집 자녀들이 다 이 나라를 위해 희생을 하는데 왜 자기 아들만 보호하려 합니까. 아버지의 평소 소신이 이럴 때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설교 말씀에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이 역사가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때 아버지 신념이 흔들리지 마시고, 붙잡지 말아 주세요." 류동운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쏜 총탄에 숨을 거뒀다. 류동운은 죽기 직전 "한 줌의 재가 된다면 어느 이름 모를 강가에 조용히 뿌려다오"라는 유서를 남겼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릴 들었소
아,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 백기완선생은 1980년 교도소 찬 시멘트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시를 썼다-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의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누이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오....    - 정태춘, '5·18’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는 직접 피해를 입은 광주시민들은 물론, 나중에 5.18을 해외언론이 보도한 내용을 반입하여 비디오로 돌려보면서 파악한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큰 충격과 배반감을 안겼다. "미국을 믿었는데..." 이는 곧 미국이 광주에서의 학살을 알면서도 막지 않고 묵인했으며, 심지어 적극적으로 승인했다는 음모론으로 커져나갔는데, 특히 당시 미국 사령관의 작전권하에 있던 20사단이 광주로 왔다는 사실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믿어졌다. 이 음모론은 이후에 재판과정에서 외교부 문서가 일부 공개되면서 상당 부분 사실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이 5.18 무력진압 용인했다".. 미 국무부 비밀문건 첫 확인 이후로 1982년 3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1985년 5월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등을 시작으로 적극적으로 미국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들로 나타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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