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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그대가 조국”, 그 출구(出口)를 위해

 

- 어두운 숲속의 출구 찾기

 

“내 인생의 여정(旅程)을 가던 중에 나는 어둡고 캄캄한 숲속에 갇힌 내 자신을 보았네. 그만 길을 잃고 말았지 뭔가.”

 

단테의 『신곡』 그 첫 문장이다. 이렇게 헤매고 있던 주인공 앞에 야수(野獸) 세 마리가 나타나 그를 두렵게 한다. 표범과 사자 그리고 늑대. 그는 과연 출구를 찾아 자신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

 

검찰개혁의 선두에 섰다가 정치적 참화를 겪은 조국과 그의 가족 이야기를 다룬 '그대가 조국'의 마지막 장면은 바로 이 단테의 『신곡』 첫 대목을 닮아있다. 산을 오른 그가 어느 숲길에서 길을 찾는다. 그런데 그것은 조국 한 개인의 출구로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이 시대 전체가 탐색의 임무를 안게 된 과제다.

 

다큐는 2시간의 길이다. 이승준 감독의 작품으로 총연출에 진모영 감독, 제작에 정상진, 강병석 PD와 양희 크리에이비트 프로듀서등이 힘을 합했다.  『조국백서』, 『조국의 시간』을 거쳐 이제 입체적 영상이 우리 앞에 온 것이다. 시사회에 초대를 받아 보는 내내 모르는 내용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숨이 막히고 고통스러웠다. 한 시대를 제대로 살아내는 것은 이토록  쉽지 않다. 영화는 냉정할 만큼 감정의 여지를 최대한 빼고 기록의 가치를 증언으로 해서 전개되었으나 그 자체가 도리어 감정의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실의 힘이다.

 

정치검찰의 쿠데타는 조국을 희생양으로 삼아 마침내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윤석열과 그의 세력이 2022년 대선을 통과하면서 거머쥐게 된 권력은 법과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검찰 파시즘의 등장이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지난 3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정치적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한 조국과 그 가족의 낭혈(浪血)이 있다.

 

‘능지처사’란 무엇인가? 그 말 그대로 언덕을 천천히 오르내리듯 고통을 서서히 최대한 느끼도록 만들어 죽이는 형벌이다. 팔다리와 어깨, 가슴 등을 잘라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는 잔혹한 처형이다. 능지처사와 함께 ‘멸문지화(滅門之禍)’는 중세조선의 단어이나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엄연히 벌어진 비극이다. 조국은 스스로 이런 처지에 빠진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토로한다. 그의 가족에 대한 수사에는 딸의 사춘기 시절 일기장 압수와 동생, 노모(老母)까지 포함되었다.

 

-현대한국의 중세정치사

 

선조때 서인 정철이 동인의 세력을 꺾기 위해 추진한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이발(李潑)이 처형되고 그의 여덟살 된 아들과 82세 고령의 어머니까지 옥사(獄死)하게 한다. 그러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와 김성일과는 달리 왜란을 예고했던 황윤길은 훗날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불명(不明)한 군주를 가까이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까지 한 바 있다. 조국과 그의 가족이 겪은 일들은 권력구조의 시대적 차이는 존재하나 그 양태는 조선조 당쟁과 사화(士禍)의 피바람에 못지않다. 한국의 정치는 이 참혹한 정치사의 유제(遺制) 안에 아직도 갇혀 있는 셈이다.

 

 

법무부 장관직에 임명된 조국을 둘러싸고 근거도 없는 수사가 시작되고 모함이 비등해졌다. 이후 그 모함은 모두 낭설(浪說)로 판명이 되었으나 이걸 퍼뜨린 검찰과 언론은 그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서 조국은 자신의 처지가 유배된 채 ‘위리안치(圍籬安置)’를 당하고 있다고 한 바 있다. 이는 귀양을 보낸 이의 집을 가시덩쿨로 둘러싸서 어디로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처벌이었다. 완벽한 고립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대선자금을 모으기 위한 사모펀드 혐의까지 가세했으니 당시 집권세력 내부에서도 그는 경계대상이 될 법한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사림(士林)의 화(禍)

 

 

권력 이동과 관련한 정변(政變)은 조선조에 지식인 관료인 사림(士林)들이 겪은 화(禍)라고 해서 ‘사화(士禍)’라 했다. 조선의 사대(四大) 사화라고 하면 연산 때인 무오(戊午/1498), 갑자(甲子/1504) 그리고 중종 때의 기묘(己卯/1519)와 명종 때의 을사(乙巳/1545)가 있다. 이 가운데 무오만은 사초(史草)문제로 생긴 것이라 해서 사화(史禍)라고 부르고, 폐비 윤씨 문제를 둘러싼 갑자, 조광조를 제거한 기묘, 대윤(大尹)이라고 불린 윤임(尹任) 세력 제거로 이어진 을사 등은 따져보면 전체적으로 겨우 50년 사이에 벌어진 정치적 비극이다.

 

 

이런 사화의 연속은 조선조의 언로를 막았고 정치를 쇠락하게 했으며 붕당을 지어 당쟁을 격화시킨 원인이 되었다. 음모가 통했고 보복이 잇따랐으며 결국 왜란과 호란을 막아내지 못하는 체제 붕괴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걸 내다보고 개혁정치를 도모했던 허균도 끝내 희생당했던 것은 조선 유학에서 실학(實學)의 모색으로 연결되기는 했으되 그마저도 정치적 희생을 계속 요구당하는 현실에 처했다.

 

 

음모(陰謀)라는 것이 참 묘하게도 잘 통하는 것이 인간사인가. 무오사화를 불러온 당상관 이득곤은 어느 날 김일손의 사초를 보다가 자신의 비행이 기록된 것을 보고 어떻게든 삭제를 해보려 하지만 실패한다. 그러자 이득곤은 김일손의 조사(祖師)인 김종직과 척을 진 유자광과 짜고 김종직이 초(楚)나라 회왕(懷王)에게 바친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권력찬탈을 비난한 것이라고 모함, 연산은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은 능지처사를 당하게 한다.

 

 

그런데 이때 김일손의 사초를 그대로 연산에게 보여주면 자신의 비행이 드러나기에 이득곤은 종묘사직과 관련된 대목만 보시면 된다고 하면서 조의제문 관련 대목을 절취(截取)해서 보고한다. 이는 이시애의 난을 함께 평정하고 돌아온 남이(南怡)의 시 한 대목인 ‘남아이십미평국(南兒二十未平國/사나이 스무살에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지 못하면)’의 ‘미평국’을 ‘미득국(未得國)’이라고 고쳐 모함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라를 얻지 못하면’이라는 뜻으로 바꾸어 역모를 꾀한 자로 몰았던 것이다. 김종직은 이때 유자광에게 비판적이었다. 그러니 구원(仇怨)은 이렇게 사화로 번지고 말았다. 이런 절취와 조작은 지금도 존재한다.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시초라고 하는 동인의 김효원과 서인의 심의겸의 문제도 사실은 인종의 후견자 윤임과 명종의 후견자이며 그 어머니 문정왕후의 아우인 윤원형 사이에 벌어진 정치적 암투의 결과가 이어진 사태였다. 인종이 일찍 죽자 명종이 왕위에 올라 윤임과 윤원형의 위상은 바뀌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관리의 인사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전랑(銓郞)에 추천된 김효원이 윤원형과 교제가 있었던 것을 명종의 부인 인순왕후의 아우 심의겸이 경계했고, 김효원은 이걸 마음에 두고 나중에 전랑이 된 뒤에 후임으로 추천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막아 나선다.

 

선조때인 이 시기에는 명종때의 권신 윤원형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세력 다툼이 벌어지면서 동인과 서인의 권력지도가 확정되어가는 과정이 생겨났다. 서인 정철의 정여립 모반사건 획책은 동인의 세도를 뒤집기 위한 음모였는데 관동별곡, 서미인곡의 저자인 정철만 아는 이들에게 이와 같은 정철은 낯설 수 있다. 정철이 득세했을 때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동인의 영수격이었으니 그 아들 허균은 어떤 처지에 처할 지는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형 허봉은 그 머나먼 산골짝인 삼수갑산(三水甲山)에 유배를 갔다가 죽는다.

 

그러고 보면, 조선의 왕조체제에서 권력 이동과 관련해서 초반부터 이런 정치적 참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형제의 난으로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고, 그 아들 세종의 자식인 세조는 자신의 조카 단종을 죽여 왕이 되었으며 세조의 손자인 성종의 맏아들 연산은 폐위되고 둘째 아들 중종이 그 자리를 반정(反正)으로 얻었다.

 

중종의 아들 인종은 대윤(大尹)이라 불린 윤임의 권세 아래 있다가 일찍 세상을 뜨고 그 뒤를 명종이 이어 문정왕후와 소윤(小尹)이라 불린 윤원형의 세상이 되었으나 이게 또 선조 때의 당쟁으로 연결되는 상황이 된다. 이이(李珥) 율곡의 동서 통합은 실패하고 그 자신마저도 탄핵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니 곡절많은 한 시대를 제대로 살아나간다는 것이 그야말로 어렵기 짝이 없다.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논쟁으로 유명한 고봉(高峰) 기대승은 명종과 선조를 거쳐 왕에게 그가 말한 바를 기록한 그의 『논사록(論思錄)』에 이런 내용을 남겼다.

 

“조광조는 범상한 선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품행이 아름답고 학문이 순수하고 올발랐으니 참으로 불세출의 대유(大儒)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소인들이 틈을 타 참소하고 이간질하며 끝내 대죄를 받았습니다.”

 

“정몽주의 학문을 전승한 이는 김종직입니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입니다. 그는 김종직의 문하라는 이유로 갑자사화때 귀양을 갔고 끝내 대죄를 당했습니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런 일들에 대한 옳고 그름을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윤원형이 권세를 휘두를 때 자리를 차지한 자들은 모두 그의 졸개이며 탐욕을 부리는 것이 습관이고 세상이 지금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모함당한 사림들을 신원(伸冤)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는 단지 그런 차원만이 아니라 개혁정치의 복구가 아니면 정치는 계속 탐욕스러운 자들이 쥐고 나라를 망친다는 경고로 기대승 또한 소윤(小尹) 윤원형의 권세를 비판하고 있다. 무오사화로 권세를 강화한 문정왕후 옆에는 윤원형의 첩 정난정(鄭蘭貞)이 있었고 요부(妖婦)로 알려졌다. 문정왕후와 정난정은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었는데 이때 양재역 벽서(壁書)사건이 일어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자 왕이 권세를 잡고 간신들이 아래에서 농간을 부리고 있다. 나라가 장차 망할 것 같으니 이 어찌 한심하지 않을쏜가.”

 

말이 되지 않는 불량한 정치에 대한 민심의 원성과 저격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진정한 주권자

 

'그대가 조국'의 첫 장면에서 조국은 재판에 나서면서 매번 익숙하지 않다고 말한다. 법정에 서면 처벌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자신의 자존에 대한 깊은 회한을 털어놓는다. 정치검찰과 사법부가 이 나라의 형편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독일 나치스에 협력한 법학자 칼 슈미트는 그의 『정치신학』 첫 줄에서 “주권자는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중요한 방점은 ‘결정의 권한’이며 그 내용은 ‘비상사태’에 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바로 이 비상사태 결정권을 발동한 끝에 나온 체제였다. 비상사태에 대한 결정권은 달리 말해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이다.

 

민주주의는 이로써 질식하고 말았다. 주권자로서의 주체인 국민, 시민은 이 정치신학의 법체계에서 실종되고 말았으며 괴물이 된 권력만이 주권자의 자리를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정치신학의 논법이 검찰국가에서 관철되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사법부 역시도 이러한 법체계의 작동논리에서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검찰의 기소를 그대로 받아 판결하는 사법부는 비상사태 결정권의 핵심기관이다. 검찰파시즘은 이렇게 구현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는 사이에 검찰파시즘의 주도세력들은 법의 판단대상에서 법의 결정자들이 되고 있다. 이 나라의 주권자는 이제 이들뿐이다. 칼 슈미트의 망령은 여전히 이 나라에서 떠돌고 있다. 이걸 계속 용납해도 되는 걸까? 우리의 생사여탈권이 이들의 손에 쥐어지고 있는데.

 

“주권자는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 그 말 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그 주권자의 자리를 도로 찾아와야 한다. 촛불혁명의 기본정신이자 원칙이다. 출구는 여기에 있다. 야수들을 진압하는 힘과 용기를 기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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