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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難讀日記(난독일기)] 호미와 작대기

 

호미 같은 할머니다. 꼬부라진 허리가 호미를 닮았다. 호미를 닮아서, 반듯하게 서도 얼굴은 땅으로 쏟아진다. 할머니는 종일 땅만 보고 산다. 이불을 개고, 밥을 하고, 마당을 쓸고, 풀을 뽑고, 밭고랑을 맨다. 할머니는, 고개 들어 하늘을 보는 것보다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을 내려다보는 게 편하다. 내려다보는 것에 익숙한 할머니가 집 앞 자갈밭에 물을 준다. 한 마지기 자갈밭은 할머니의 전부다. 호미로 긁어 판 한평생이 고스란히 자갈밭에 묻혀있다. 아들 하나에 딸 하나, 고구마 같이 튼실한 자식들도 밭일을 하다 낳았다.

 

호미 같은 할머니가 자갈밭에 물을 준다.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꽂아 물을 뿌린다. 호스는 마당과 텃밭을 이어주는 탯줄 같다. 가느다란 호스를 타고 밀려온 수돗물이 마른 자갈밭에 찔끔 떨어진다. 전립선(前立腺) 걸린 늙은 사내의 오줌발도 저러할까. 할머니의 한숨이 물을 따라 자갈밭으로 추락한다. 딸을 건져 올릴 때도 저렇게 물이 떨어졌었다. 사십년 세월이라고 지울 수 있겠는가. 그날, 저수지로 물놀이 간 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밭일을 하던 할머니는 맨발로 저수지로 달려갔다. 건져낸 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호미 같은 할머니의 일손이 멈춘다. 밭둑에 엉덩이를 붙이고 허리를 편다. 속없는 하늘은 잡티 하나 없이 멀끔하다. 할머니 손에서 풀려난 호스가 밭고랑 사이로 퍼질러 눕는다. 누운 호스 끄트머리에서 찔끔찔끔 물이 흘러나온다. 물은 밭고랑을 타고 흐르지 못하고 푸석푸석한 흙 속으로 금세 스며든다. 그 꼴이, 낮술에 취해 마룻바닥에 침 흘리고 자는 영감 같다. 영감은 벌써 며칠째 술이다. 아마도 서울 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받은 뒤부터인 것 같다. 할머니 눈길이 밭 끄트머리로 향한다. 거기, 키 작은 작대기 하나가 서있다. 늙은 작대기다.

 

볼수록, 작대기 같은 할아버지다. 살은 없고 뼈만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이랄까. 허수아비 허우대도 저렇진 않을 것이다. 그래선지 할아버지가 밭에 나타나도 새들이 도망치지 않는다. 훠이, 소리치면 폴짝 밭이랑 너머로 내빼는 시늉만 한다. 작대기 같은 할아버지가 고추모종 옆에 지주(支柱)를 박는다. 할아버지만큼 작달막한 쇠 작대기를 꾹꾹 눌러 박는다. 마늘 뽑은 밭고랑에 깨 심고 나면 배추농사만 남는다. 콩이야 밭둑에 뿌린 것만 거둬도 충분하다. 문제는 밭농사가 아니라 자식농사다. 어제 오늘 할 것 없이 늘 그랬다.

 

땅은 거짓이 없어서 뿌린 대로 거둔다. 흘린 땀만큼 돌려주는 게 땅이다. 작물은 주인 발소리를 듣고 자라는 것이라서 살필수록 잘 자란다. 줄기는 반듯해지고 열매는 속이 꽉 찬다. 수확의 시기 또한 그와 같아서 절기 따라 어김이 없다. 밭고랑에 널브러진 양파만 해도 그렇다. 뿌리작물은 이파리가 누렇게 수그러들면 속이 여문다. 익을수록 고개 숙이는 벼농사와 같은 이치다. 자식농사 또한 그러하면 좋으련만. 평생을 돌봤지만 말짱 황이다. 툭하면 일억 원이니. 일억 원이 뉘 집 개 이름인가. 하나뿐인 아들이지만 전화벨만 울려도 속이 시끄럽다.

 

마늘 뽑은 자리에 깨를 심어야 하는데, 오라는 비는 기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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