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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전공투(全共鬪), 평화헌법 제9조 그리고 우리

 

-전공투의 시작

 

“내가 와세다(早稻田))를 들어갔을 때가 1965년이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에 매료되어 문학에 탐닉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의에 대해 눈을 뜨면서 전공투 운동에 뛰어들었지요. 좌익 지식인으로서의 인생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전공투(全共鬪) 이후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시절을 회상한 일본의 사회사상 연구가 아라 다이스케(荒岱介)의 진술이다. 전공투는 ‘전학공투회의(全學共鬪會議)’의 약칭으로 1968년, 일본 전국 학생운동의 결집이 이뤄낸 조직이다. 그때까지 학생운동을 이끌던 ‘전학련(全學聯)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단계로 보다 전투화된 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가?

 

 

1967년 10월 8일, 경대(京大/교토(京都)대학)에 다니던 야마자키 히로하키(山崎廣明)가 하네다 공항으로 가는 길목인 다마가와(多摩川) 다리 위에서 경찰봉에 맞아 숨진다.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격렬했던 시기에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수상이 베트남으로 가는 것을 학생들이 막는 과정에서 발생한 참극(慘劇)이었다.

 

그의 친구들이 나중에 가족들에게 야마자키의 가방을 전달했는데 그 안에는 1권의 노트와 10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노트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독서메모였으며 책은 마르크스의 『경제철학 수고(手稿)』,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 키에르케고르의 『유혹자의 일기』 등이었다. 60년대 일본 대학생들의 독서역량과 사상적 경향이 그대로 담긴 유물(遺物)이었다.

 

이후 일본 사회를 뒤흔드는 전공투 투쟁의 역사는 이와 같은 희생과 반전(反戰)운동, 세계사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결과였다. 이듬해인 1968년 1월에는 미국의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미해군기지가 있는 사세보(佐世保) 항(港)에 들어오자 800여명의 학생들이 헬멧을 쓰고 각목을 든 채로 사세보역에 쏟아져 내렸다. 평화시위를 하려 든다고 하기보다는 초보적으로 무장(武裝)한 학생들이었다.

 

학생운동의 각목 사용에 대한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생들에 대한 시민사회의 호응과 지지는 만만치 않았다. 경찰 기동대의 폭력진압이 더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사회는 1959년에서 1960년 미일 신(新) 상호방위조약에 대한 반대로 일어난 ‘안보투쟁’의 기억을 생생하게 가지고 있던 시기였다. 주일미군의 지위강화로 이어진 이 조약에 대한 일본시민사회의 저항은 치열했고 수상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기시 노부스케는 최1급 전범으로 동경재판에서 처형판결을 받은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의 각료였으며 그 자신도 A급 전범으로 재판받은 바 있었는데 그의 동생이 바로 사토 에이사쿠였으니 전쟁범죄의 역사가 이어지는 것에 대한 반발은 당연했다. 그런데 전공투는 이런 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계기로 작용해 결성되었다. 이른바 동경대학에서 벌어진 ‘동대(東大)투쟁’이었다.

 

6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일본 자본주의 발달은 보다 고도화되고 교육은 시장이 요구하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목적이 보다 분명해지고 그 방식은 전전(戰前)의 국가주의 유제(遺制)에 따른 ‘관료적 규율강화’로 나타났다. ‘제국의 대학’과 ‘자본의 대학’이 하나로 겹쳐 재편되는 과정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와 유사한 현실에 격렬하게 반대한 프랑스 ‘68혁명’의 영향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일본의 학생사회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인간다운 삶’, ‘해방의 역사’와 같은 주제가 이들의 정신세계를 사로잡아갔으며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 동경대학 의학부에서 그 시동을 걸었다. 1963년부터 선데이 마이니치(サンデー毎日)에 연재되던 야마자키 도요코(山崎豊子)의 『하얀 거탑(白い巨塔)』은 의과대학 내부의 권력투쟁을 여실히 폭로했던 바 있기에 일본사회는 동대투쟁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그런데 대학당국은 학생들의 대화 요구를 거부하고 처벌위주로 대응해버리고 말았다. 관료주의적 권력에 의존하는 관성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처벌대상으로 삼았던 학생 하나는 대학당국이 문제를 삼았던 현장에 있지 않았던 것이 밝혀지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확대되었고 이후 전설의 투쟁현장이 된 동경대학 ‘야스다 강당(安田講堂)의 공방전’이 촉발되게 된다. 전공투는 어떤 지도부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직접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전원토의를 중시했으며 이를 통해 사상투쟁의 기조를 만들고자 했다. 야스다 강당은 그런 작업의 현장이었다.

 

-전쟁책임 논쟁과 식민지배의 참화

 

 

이후 좌파 테러 주도자로 지명수배되었던 필명 타키타 오사무(滝田修), 본명 타케모토 노부히로(竹本信弘)는 전공투의 임무를 이렇게 밝힌다.

 

“대학은 다시 제국주의의 대학이 되었다. 적의 주요거점이 되어버린 이상 이를 해체하는 것은 민중적 당위성을 갖는다. 따라서 그 해체를 주도하기 위해 전공투 학생들은 시민들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 이들과 결합하여 계급적 실체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테러 혐의를 끝까지 부정했는데. 이 시기 그의 논지는 사상적 주장으로서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전략지침으로는 비현실적이고 시민적 동력을 얻기는 곤란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대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학생들의 역량은 서로 엇갈려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현실의 한계를 돌파하겠다고 나온 도시게릴라 적군파(赤軍派)를 비롯해서 이후 전공투의 투쟁 방식은 살인까지 저지른 내부 숙청 등 자멸적 노선으로 기울어버리고 만다. 1970년에 다시 불붙은 안보투쟁의 결말이 학생운동의 소멸로 이어지고 만 것도 이런 까닭에서 출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공투 투쟁이 남긴 역사적 위력은 만만치 않다. ‘반전(反戰)노선’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의식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고 그 결과로 평화헌법의 틀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일본 사회가 감히 거론하지 못하는 천황의 전쟁 책임론까지 치고 나갔기 때문이다. 그 시발점은 1951년 교토대학 학생들이 5월 1일 메이데이를 맞이해서 “황궁 앞 광장을 인민의 광장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천황의 전쟁책임을 물었던 사건이었다.

 

이들이 내건 현수막에는 “신(神)과 같은 당신의 손에 의해 우리들의 선배들은 전쟁터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다시는 절대로 신이 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서 대중적 호응보다는 격렬한 비난을 불러 일으켰고 천황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일깨웠으나 한번 꺼내기 시작한 논의가 그대로 땅 속으로 꺼질리는 만무했다. 나중에 일본 자위대가 천황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할복했던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가 야스다 강당에서 학생들과 논쟁했던 대목 가운데 중요부분이 바로 천황 문제였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일본의 진보적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는 그의 저서 『전쟁책임(戰爭責任)』에서 천황의 책임을 다음과 같이 논증해나간다.

 

“천황은 대권행사를 하면서도 그 법률상, 정치상의 책임은 지지 않고 모두 국무대신이 책임지도록 했다. 가령 천황의 최고 고문 조직인 추밀원은 국민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다. 말은 입헌군주제라고 하면서도 천황이 져야 하는 대국민 책임의 법적 근거는 없다. 1931년 만주사변부터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종료되는 ‘15년 전쟁’ 기간 중에 군의 통수기관인 참모본부는 내각에서 독립되어 이른바 ‘통수권 독립’의 위치를 가졌다. 천황이 참석하는 밀실회의에 불과한 어전회의로 중대사가 결정되고 이로써 국민의 의사를 묻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결정내용조차 전혀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았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나가 사부로는 전쟁을 추진하고 그 결과까지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던 천황은 이렇게 그 책임이 면책되고 은폐되었는데 그 피해 당사자들의 비극적인 삶은 누가 보상해줘야 하는가라고 다시 묻는다. 사실 전공투의 반전의식에는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대한 반성요구와 베트남 전쟁 반대에는 열렬한 태도를 취했으나 식민지 조선에게 가했던 폭력과 전쟁범죄는 거론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나가 사부로는 이런 전공투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조선인 강제연행에 참가한 요시다키 요하루라는 한 일본인의 고백을 그는 이렇게 담고 있다.

 

“1933년 11월 3일, 서부 군관구 후쿠오카 현의 육군 비행장 건설공사를 위한 조선인 노무자 200명을 징용하기 위해 여수호를 타고 출발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았다. ‘모두 목숨을 걸고 도망갈 것이다. 칼을 빼 들고 가라. 다소 부상자가 생겨도 좋다. 도망가려는 노무자들을 용서하지 마라.’ 나도 의기양양하여 일을 마친 뒤 오늘 징용은 이로써 마친다며 귀환했다. 그때 여자와 아이들이 2~30명 뛰어나와 필사적으로 쫓아왔지만 호송차는 먼지를 일으키며 속도를 올렸다.”

 

그의 증언은 위안부 강제동원도 포함하고 있었다. 어느 촌락에서 총검을 가지고 조선 처녀 여덟 명을 끌고 가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남자들이 저항했다. 다니 중사는 전진을 명령했고 그 뒤로는 ‘아이고’라며 울부짖는 처녀들이 끌려가고 있었다. 다니 중사는 ‘위안부의 징용경비는 병사들이 담당한다’며 ‘지금부터 30분간 휴식이다’하자 병사들은 일제히 처녀들을 태운 트럭으로 달려 들어갔다. 처녀들의 비명이 울리고 대원들은 웃었다. 이 처녀들은 징용되자마자 바로 병사들의 위안부가 되고 말았다.”

 

그는 히로시마 조선인 피폭자를 비롯해서 사할린 잔류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의 책임까지 거론한다. 그에 더하여 일본의 전쟁에 학병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BC급 전범으로 처단된 역사의 비극도 지적하고 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며 일본인으로 만들어 끌고 가놓고 이후 보상책임은 전혀 지지 않는 일본 정부와 사회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한미일 군사동맹? 평화국가는 어디로?

 

 

이런 현실에 대한 비판과 극복은 일본사회에서 아직도 난망(難望)이다. 도리어 더 악화되고 있는 판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의 바이든은 일본에 가서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 선출과 군사력 확장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전쟁을 분쟁해결 수단으로 ‘영구히’ 쓸 수 없도록 만든 평화헌법 제9조 개정의 봉인(封印)을 뜯는 일을 응원한 것이다. 이는 전쟁할 수 있는 국가 일본을 '정상국가'로 인식하게 하는 일본 내 우경화의 논리와 그대로 직결된다.

 

이런 판국에 윤석열 정권은 물론이고 한국의 국회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 정면 규탄과 함께 반대 결의안이 나와야 하고 이런 상황을 저지하기 위한 국민적 운동의 전개를 위해 나서야 하는데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평화가 침해될 우려가 깊은 상황이다.

 

 

일본 역사학자 와타 하루키(和田春樹)는 그의 저서 『평화국가의 탄생(平和國家の誕生)』에서 “2015년 아베 수상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란 일본의 자존을 위한 자위(自衛)전쟁이었으며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전쟁과 관련해 반성과 사죄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 맥락에서 평화헌법 제9조 개정은 전후체제를 타파하기 위해 당연히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일본이 지향해온 평화국가는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다. 위기다.”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며 그의 노선을 물려받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이후의 일본은 지금 그 경로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한계가 있긴 했어도 전공투와 같은 전투력 강한 일본 시민사회의 평화운동 재기는 오늘날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한미정상회담의 공동성명은 한반도 주변까지 포괄한 군사행동을 명시하고 있고 한미일 군사동맹의 기초가 착착 놓이고 있으며 전쟁체제의 강화가 가속화될 지경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 일본 시민사회의 평화운동과 우리 시민사회의 뜨거운 결속이 동북아시아 평화의 관건이 되고 있다. “반전(反戰)과 평화(平和)”는 이제 우리에게 너무도 절박한 생명선(生命線)이 되었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한미일의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진행되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바로 그 ‘어전회의’라는 밀실에서 이루어진 일본제국의 개전(開戰) 선포는 동아시아 민족의 무수한 생명을 희생시키고 말았다. 결코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할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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