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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난독일기(難讀日記)] 정추실이라서 믿는다

 

 

 

깊어져서 가을이다. 새벽 닭 울음조차 어스름 너머에서 깊다. 깊음도 흐를 수 있을까. 나는 창문을 열고 한동안 바라만 본다. 방 안에 고인 어둠이 창틀을 타고 넘어가 새벽 속으로 흩어진다. 새벽은 푸름 속에서 더디게 흐른다. 산과 들과 마을에서 흘러온 밤의 색깔들이 푸름 속으로 스며든다. 그런 까닭으로 푸른 것들은 깊다. 밤과 어둠을 삼킨 푸름은 깊다. 바다가 그렇고, 새벽이 그렇고, 피멍 든 가슴 또한 그러하다. 푸름의 깊이는 어떤 눈금으로도 가늠할 수 없다. 하물며 가을이 익어가는 새벽의 푸름 아니던가. 나는 실눈을 뜨고 어둠과 푸름의 경계에서 발돋움 하고 선 여인을 떠올린다. 움푹 파인 그녀의 볼우물에도 새벽은 고이고 있을까.

 

땅끝, 해남(海南)에서 만난 봄은 목이 말랐다. 갈증 난 논과 밭과 들이 마른하늘을 향해 손가락질을 퍼부었다. 원망 섞인 삿대질에도 하늘은 좀체 비를 뿌리지 않았다. 나는 갈라진 논바닥과 타들어가는 밭고랑을 그대로 뮤지컬 대본에 옮겼다. 해남에서 만난 가뭄은 뮤지컬의 배경이 되는 마을에서도 시뻘겋게 타올랐다. 그녀에게서 처음 연락이 오던 날도 비는 오지 않았다. 보자는 연락에 그러자고 답했다. 약속장소는 해남과 완도가 마주보고 서있는 남창 시외버스터미널 앞이었다. 한낮인데도 식당 안은 가뭄이었다. 돼지고기를 불판에 올리고 낮술을 마셨다. ‘쓰는 짓’과 ‘사는 짓’을 주고받으며 술잔을 비웠다. 비울수록 그녀의 볼우물은 깊었다.

 

이야기는 시인 최승자(崔勝子)로 이어졌다. 최승자는 황지우, 이성복과 더불어 한 시대를 노래한 시인이다. 가족이 없었던 최승자는 고시원과 여관방에서 소주와 담배로 연명했다. 최승자는 죽음의 손짓 너머에서 시를 길어 올렸다. 너무나 아리고 쓸쓸하고 솔직한 시라서, 나는 감히 소리 내어 읽지 못하고 속으로 더듬거렸다. 그녀는, 그러니까 남창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처음 만나 낮술을 마신 여인은 시인 최승자의 제자 정추실이다. 최승자가 정신분열로 시의 영역으로부터 단절될 때, 정추실은 이 사회로부터 스스로 제 몸뚱이를 유배시켰다. 유배시킨 몸은 오랜 세월 인도와 남미와 유럽을 떠돌았다. 떠도는 세월만큼 그녀의 볼우물도 깊었다.

 

깊어져서 가을일까. 가을이어서 깊을까. 깊어지는 것들 앞에서, 나는 멀어지는 그날의 기억 하나를 떠올린다. 보름을 참았다고 했다. 참은 술값과 담뱃값을 모아 상을 차리고, 차린 상 앞으로 나와 또 다른 나의 벗들을 불러 앉혔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석양에 흩날리고 바다 저쪽으로 두 개의 무지개가 걸렸다. 바다에서 돌아온 새들이 비탈진 섬 절벽에 날개를 접듯이, 상 앞에 앉은 우리는 한동안 말을 접었다. 그녀의 시집 제목처럼, ‘어느 원시인의 사랑’이 이런 것일까. 그녀와 최승자의 매듭은 빛바랜 사진 속에 묶여있지만, 그녀와 나의 고리는 시퍼런 새벽 여명 속에서 자유롭다. 자유롭게 그녀의 볼우물 따라 맴돈다.

 

나는 그녀를 믿는다. 수줍게 내밀던 무화과 한 꾸러미를 믿는다. 계란 판에 담아 내밀던 서른 개의 무화과를 믿는다. 꽃이 열매일 수밖에 없는 무화과의 운명을 믿는다. 무화과를 닮은 그녀의 시(詩)를 믿는다. 다시 시를 써 내릴 그녀의 새벽 여명을 믿는다. 새벽여명처럼 깊은 그녀의 볼우물을 믿는다. 볼우물에 깊게 삭혀있을 그녀의 고독과 연민을 믿는다. 나는 정추실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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