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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행 칼럼] 주술 사회

 

 

인간은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는 존재이다. 처해있는 상황이 제각기 다른 탓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발생한 사건은 부풀리거나 축소되는 등 각색되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를 라쇼몽 효과라고 하는데 일본의 세계적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동명 영화에서 유래했다.

 

『라쇼몽』은 무사(사무라이) 부부가 산길을 가다 산적에게 붙잡혀 벌어진 일을 저마다 다르게 진술하는 단순한 영화다. 그러나 사실이 미궁에 빠져 인식에 어떤 까닭이 있어선 지를 묻는 심오한 영화이기도 하다. 산적은 당당하게 결투를 벌여 무사를 죽였다고 진술한다. 반면 무사 아내는 산적에게 겁탈 당한 자신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기 때문에 남편을 죽였다고 말한다, 죽임 당한 무사는 무당의 말을 통해 (수치심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한다. 무사의 죽음만이 팩트인 것이다.

 

라쇼몽은 팩트를 주관적으로 비트는 인간의 심리를 잘 포착해 낸 영화다. 하지만 우리는 라쇼몽을 비웃기라도 하듯 없는 사실을 마치 있는 것처럼 기정사실화하는 '팩트 가공' 시대에 살고 있다. 우스꽝스런 이 가공은 비이성 그 자체이지만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많아 가히 주술적이다.

 

이른바 '청담동 술자리'는 팩트 가공과 관련해 상징적 사건이다. 사회학·심리학·언론학적으로 많은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한다. 사건은 간단하다. 첼리스트가 동거하는 남자친구와 통화를 한다. 자신이 새벽 3시에 청담동 술집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 김앤장 소속 변호사 30여 명이 술을 마셨다. 윤 대통령이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불렀고 자신이 첼로 반주를 넣었다. 통화 내용을 녹취한 남자 친구는 신생 뉴스 유튜브에 제보했고 육성 녹취가 그대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기자는 현장에 있었다는 첼리스트와 통화조차 한 적 없었다. 기사의 구성 요소인 육하원칙도 제시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그야말로 팩트 제로인 상태에서 청담동 술자리는 사실로 둔갑되었다. 민주당 김의겸 대변인을 비롯 정치권부터 지식인, 시민에 이르기까지 영락없는 사실로 받아들였다. 포털 사이트 관련 기사에는 사실을 확신하는 댓글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첼리스트가 서울 서초경찰서에 출두해 자신이 남자친구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었다고 진술해 사건은 일단락되는가 싶었다. 녹취록의 주인공이 사실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청담동 술자리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은 경찰의 협박 때문에 첼리스트가 어쩔 수 없이 거짓 진술을 했다고 확신한다. 이쯤이면 주술 말고는 그들을 설명할 길이 없다. 라쇼몽 효과나 확증편향도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검찰이 범죄 사실을 입증해야 하듯이 언론이 팩트를 제시해야 하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제 아무리 개연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팩트를 확보하지 못하면 기사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작금 팩트를 거리낌 없이 가공해 내고, 그것을 의심하거나 검증하지 않고 집단적으로 믿기까지 한다. 실로 주술 사회가 깊어지고 고착화 하지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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