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고향갑의 난독일기(難讀日記)] 페이스메이커

 

우리는 잊고 산다. 우리가 얼마나 빠른지. 얼마나 쏜살같은지.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내달린다. 내달릴 때, 우리의 속도는 시속 11만km다. 총알보다 30배 빠른 속도다. 방향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1초에 30km를 달린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별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공전(公轉) 속도다. 그렇다고 앞만 보고 무작정 달리는 건 아니다. 총알 보다 빨리 달리면서 뱅글 돌기까지 한다. 뱅글 돌 때, 도는 속도는 시속 1667km다. 경주용 자동차 보다 5배 빠른 속도다. 방향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1초에 460m를 내달린다. 그것이 지구라는 초록별의 자전(自轉) 속도다. 초록별에 붙어사는 온갖 것들은 그 두 가지 속도에 기대어 산다. 공전과 자전이라는 두 가지 속도 틈에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죽이고 죽는다.

 

우리는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얼마나 빠르게 날아가는지. 얼마나 쏜살같이 돌아가는지. 비행기에 탑승한 승객처럼, 지구라는 별을 타고 날아가는 우리는 속도를 느끼지 못한다. 느끼지 못해서, 지구라는 별이 품고 있는 두 가지 속도의 경이로움 또한 망각한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공전(公轉)을 멈추면 지구에 사는 모든 것들은 죽는다. 총알보다 30배 빠른 속도로 날아가던 지구가 멈추면 지구에 붙어살던 모든 것들은 우주로 튕겨 날아가고, 멈춘 지구는 점차 태양으로 빨려 들어가 소멸한다. 지구가 자전(自轉)을 멈춰도 죽기는 마찬가지다. 시속 1667km 속도로 돌아가던 지구가 멈추면 지구에는 1667km의 폭풍이 쉼 없이 몰아친다. 낮과 밤이 6개월마다 바뀌고 폭염과 혹한과 지진과 화산과 해일과 방사선이 지구를 삼킨다.

 

우리는 모르고 산다. 우리가 사는 별의 속도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그 두 가지 속도가 잉태한 생명의 씨앗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까마득히 잊고 살아서, 우리의 속도보다 턱 없이 느린 것들을 부러워한다. 스포츠카와 5G와 고속성장을 경외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빨리빨리’를 외쳐대며 속도경쟁을 한다. 빨리 만들고, 빨리 먹고, 빨리 세우고, 빨리 소비하고, 빨리 버린다. 빠름이 기준인 세상에서는 연인들의 이별통보와 직장의 해고통지조차 문자메시지가 대신한다. ‘빠름’을 먹고 자란 지구별에 넘치는 건 ‘많음’이다. 빨라진 만큼, 우리는 많이 만들고, 많이 먹고, 많이 세우고, 많이 소비하고, 많이 버린다. 앞 다퉈 빨리 생산하고 많이 소비할수록 더디고 짧아지는 것이 행복인 까닭은 무얼까.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한 일이다.

 

우리는 눈 감고 산다. 지구별에 탑승한 행운아들이라서. 공전(公轉)과 자전(自轉)이 잉태한 생명의 경이(驚異)를 만끽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별에 생명이 깃들 수 있음은 공전과 자전의 엄청난 속도 때문이 아니다. 생명의 신비는 속도가 아니라 어우러짐에서 싹튼다. 태양의 주위를 도는 속도와 스스로 회전하는 속도가 절묘하게 어우러졌을 때, 어둠의 먼지 속에서 생명의 호흡이 꿈틀거린다. 그것이 지구라는 별에 우리가 살게 된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지구의 공전과 자전은 지구를 살게 하는 들숨과 날숨이다. 지구라는 별의 심장을 뛰게 하는 페이스메이커(pacemaker)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 공전과 자전의 개별 속도는 넓은 의미에서 지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페이스메이커가 분명하다.

 

마라톤 경주에도 페이스메이커는 있다. 마라톤에 투입된 페이스메이커의 임무는 우승후보의 기록단축이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달리지 않고 우승후보가 될 누군가의 승리를 위해 달린다. 그렇게 선두에서 30km를 이끌면 그들의 임무는 끝이다. 타인을 위해 헌신한다는 점에서 마라톤 경주의 페이스메이커는 박수 받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마라톤 경주가 아니다.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는 42.195km를 완주하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는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 끝까지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의 페이스메이커다. 지구를 살게 하는 공전과 자전처럼, 나와 네가 어우러질 우리가 필요하다. 30km를 넘어 결승점까지 완주할 수 있는 각자의 페이스메이커가 필요하다.

 

당신이 준비한 페이스메이커는 무엇인가. 연인인가. 가족인가. 아니면 가치나 신념인가. 그도 아니면 거룩한 믿음인가. 그 무엇이든 인생을 함께 완주할 수 있는 페이스메이커가 있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야 하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하니까.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