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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광주시는 □□□□ 있다”… 네 글자로 본 광주

광주광역시와 명칭 혼돈으로 50여년간 정체성 문제 여전
‘광주 1000년 역사’ 기념 9월28일은 52번째 광주시민의날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주의 항쟁인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곳, 광주비엔날레가 열리는 예향, 대표적인 자동차산업도시….’

 

‘광주시’의 정체성에 대해 ChatGPT에 물어봤더니 거침없이 작성한 내용이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광주시지만 AI 역시 광주시와 광주광역시의 명칭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혼돈하고 있다.

 

이번엔 ‘경기도 광주시’의 정체성을 ChatGPT에 물어봤다. '남한산성, 광주조선백자요지, 실학, 정약용, 천주교 탄생 등 다양한 역사와 문화적 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도시….'

 

광주시는 시민의 정체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시의 역사, 문화, 생태자원을 발굴 및 확대하는데 박차를 가할 생각이다.

 

광주시는 너른고을이다. 한자로 '넓을 광(廣)', 고을 주(州를)를 쓰며 '땅이 넓은 고을'이라는 뜻이다. 옛 문헌에 따르면 광주시는 현재의 서울시 송파·강남·강동구와 서초구 일부, 경기도 성남·하남·의왕·안산시 일부까지 아우르는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

 

 

광주시는 '남한산성'이 있다.

 

광주시에는 남한산성이 있다. 남한산성은 통일신라 문무왕(672년)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해 조선 인조 4년(1626년)에 구축했다. 남한산성 행궁은 조선시대 행궁 중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뒀기에 조정의 임시수도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피난 길이 막힌 인조 일행은 급히 남한산성으로 향했고 준비되지 않았던 천혜의 요새는 1637년 1월 30일, 인조를 삼전도로 나아가 무릎 꿇게 했다. 민족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유산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내 소나무 숲은 수도권 최대의 소나무 군락이다. 일제강점기 소나무를 전쟁 물자로 확보하기 위해 무분별한 벌목이 이뤄졌지만 산성리 마을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금림조합을 결성, 소나무 숲을 가꾸고 보전했다.

 

 

광주시는 '왕실도자'가 있다.

 

광주시는 왕실도자의 고장이다. 조선백자 발전의 중심에는 조선의 사옹원 분원이 설치됐던 광주가 있다. 1424년부터 1432년까지 전국의 토산물을 조사해 편찬한 '세종실록 지리지'에 상품(上品) 자기소가 광주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광주는 세종 시대에 이미 당대 최고 품질의 분청과 백자를 생산하던 도자기 고장으로 주목받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광주는 질 좋은 백토와 좋은 물이 있고 땔감으로 쉽게 조달할 수목이 무성한 곳이 많아 관요를 운영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 중기 기록에 따르면 조선 영조 28년(1752년)에는 사옹원의 분원이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했다.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130여 년 동안 분원리에서 관요(官窯)가 운영됐고 300여 개에 달하는 가마터가 이 일대에서 번창하기도 했다.

 

 

광주조선백자요지는 조선시대 백자를 제작했던 가마터로, 현재까지 400여 개의 가마터가 광주시 관내에서 확인됐다. 광주가 왕실도자의 고장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데는 수많은 도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도편수들의 이름이 담긴 자료를 유실하는 바람에 정확한 생몰연대와 이름조차 알 수 없게 됐다. 이에 광주시는 옛 도공의 유업을 추모하기 위해 1977년 광주시 쌍령동에 '무명도공의 비'를 세우고 매년 제향제를 열어 무명 도공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무명 도공의 후손이자 5대째 도자기를 빚은 지평도예 한기석 장인은 2020년 제9대 광주 왕실 도자 명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광주시는 '실학연구'가 있다.

 

광주시는 실학연구와 천주교도의 고장이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즉 좀 더 현실적인 학문을 전개했던 성호 이익과 그의 문하 순암 안정복이 광주 출신이다. 성호 이익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해 청을 통해 전해 내려온 서양의 종규 지식 기술에 대해 배제하지 않고 긍정적인 면을 평가하고 수용하려 했던 인물이다. 실학의 두 부류, 즉 중농학파·경세치용학파로 불리는 부류와 중상학파·이용후생학파로 불리는 이 두 부류는 정약용에 이르러 하나로 집대성된다.

 

1780년을 전후해 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 강학이 암암리에 이뤄지고 점차 심취되는 경향을 보이면서 성호학파는 안정복을 추종하고 천주교를 배척하는 뜻을 고수하는 측과 권철신을 추종하며 천주교에 입교하거나 깊게 관여한 측으로 양분됐다. 권철신 계열 성호학통은 천주교 박해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정약용 등으로 이어지며 후학을 양성한 것으로 보인다.

 

천진암은 실학과 천주교의 고장 광주시의 상징이다. 1770년~1780년대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 젊은 선비들이 학문 연구와 진리 탐구를 위해 자발적으로 모였던 곳이다. 실학에 천주교를 받아들이며 학문연구와 사회적 실천을 동시에 이뤄낸 성호학파 실학자들의 개혁적인 사상은 조선사회가 근대화로 가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천진암은 정약용이 20대 시절 많은 실학자와 강학을 논하던 곳이며 많은 작품이 탄생한 곳이다. 18년의 유배 생활을 마친 노년의 정약용은 천진암을 찾아가 며칠씩 묵으며 시를 읊었다. 천진암은 정약용 마음의 안식처였다.

 

 

 

다시 광주시 명칭의 유래로 돌아가 보자. 대한제국 시대 전국의 행정구역이 개편돼 광주군이 됐다가 일제강점기에는 18개 면이 16개 면으로 축소돼 지금의 광주시 구역을 동광주, 서울·강동·강남·송파·서초구 일부 및 성남·하남시 전 지역을 서광주라 불렀다. 광주군 명칭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오다 2001년 3월21일 광주시로 승격됐다.

 

광주시는 1972년 '군민의 날' 행사를 시작으로 2000년까지 총 29회 이 행사를 개최했다. 이후 2001년 시로 승격하며 '시민의 날' 행사로 격상해 22주년의 행사를 치러왔다. 관행대로라면 올해는 23회를 맞는 시민의 날 행사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민선 8기에서는 1000년 역사의 유서 깊은 광주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지난 군민의 날과 시민의 날 행사의 회차를 통합하고자 한다. 단순한 회차의 누적으로 정량적인 수치 부풀리기가 아닌 우리 시의 뿌리를 소중히 여기고 품으려는 노력의 차원이다. 이에 따라 올해부터는 23회가 아닌, 52회를 맞는 '광주시민의 날'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방세환 시장은 지난 3월 시 승격 기념일에 "광주 시민의 날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으로부터 하사받은 광주(廣州)라는 이름을 지켜온 1000년의 역사와 전통을 빛내고 기념하기 위한 행사로 50만 자족도시를 꿈꾸는 41만 광주시민의 자부심을 높이며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경기신문 = 오석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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