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일본의 미래사회, 정확하게는 일본의 10년 후에 대해 가한 예측은 많은 부분이 정확하지가 않다. 그는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에 신인 감독 5명을 기용해 ‘10년’이란 제목의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이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전혀 생각지 못했다. 따라서 영화 ‘10년’은 역설적으로 미래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대한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그동안 미래 예측을 하는 데 있어 이른바 돌발 변수들을 얼마나 고려하지 않고 살아왔는가를 보여 준다.
우리 모두 코로나가 과거 흑사병 같은 팬데믹이 될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영화는 인간의 상상을 기초로 하고 그런(상상하지 못했다는) 면에서 영화 역시 뒤처지고 말았다. 영화 ‘10년’은 그런 의미, 우리의 오류와 영화의 오류, 특히 세계적 거장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오류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흥미를 가지고 지켜볼 만한 영상 기록물이다.
무엇보다 10년으로는 세상이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 물론 10년 사이에 별의 별 앱의 개발이 뒤따르고(예를 들어 2018년에서 6년이 지난 2024년에 한국 경기도에서는 ‘똑버스’라는 마을버스 앱까지 개발이 됐다. 마을버스를 콜택시처럼 부를 수 있는 서비스 앱이다.)
디지털 정보시스템이 엄청나게 업그레이드되겠지만 그것들에 사람들이 철저하게 더 종속이 될지 아니면 오히려 반대로 그런 테크놀로지를 거부하며 자연주의로 돌아가 살아갈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다.
10년을 텀으로 미래 사회의 변화를 예측하는 건 그래서 올바르지 않아 보인다. 그건 10년이란 기간이 턱없이 짧아서가 아니라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작고 디테일한 변화가 뒤따를지를 예상하기란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잘한 변화가 많을 것이다.
넷플릭스에 올라 있는 영화 ‘10년’은 모두 다섯 개의 옴니버스 영화로 돼있다. ‘플랜 75’와 ‘청개구리 동맹’ ‘데이터’ ‘그 공기는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등 각각 20분 안쪽의 작품들이다. 영화적으로는 거의 다 뛰어나지 못하다. 습작 수준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정말 신인감독 차원에서 연출을 맡긴 작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각 영화가 갖고 있는 설정과 주제의식만큼은 높이 살 수 있고 일본 사회를 비롯해 지금의 인류가 안고 살아가는 고민의 실체를 공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다.
미래사회를 그리는 모든 영화는 사실 미래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현실의 불안증에 대한 것이다. 이런 류의 영화가 대체로 디스토피아적인 이유이다. 비관의 지성주의가 하늘을 찌를 정도다.
첫 에피소드인 ‘플랜 75’는 안락사 얘기이다. 75세가 되면 사람들은 안락사 신청을 할 수 있게 된 사회를 그린다. 일본 후생노동성 공무원들은 정부의 플랜 75 캠페인을 통해 안락사를 적극 유도하고 있는바 지하철로 가는 쇼핑몰 같은 곳에 무료 상담소를 만들어 홍보를 할 정도이다.
일본 정부가 추진하는 안락사 정책의 이유는 자명하다. 75세 이상의 복지 문제, 그 비용과 예산을 이제 더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일본 사회가 고령화됐으며 그 부담을 젊은 층에게 전가시키지 않기 위해 노인들을 ‘죽이기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합법적 자살 방조 정책’의 대상에 전 노인이 모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중산층과 상류층의 노인들은 여기에서 제외된다. 후생성의 간부는 직원 교육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다.” 안락사도 계급과 계층에 따라 적용되는 시대와 사회가 됐음을 보여 준다.
단편 ‘플랜 75’는 결국 피치 못할 선택처럼 여겨지는 존엄사의 문제가 언젠가 사회계급적 갈등의 이슈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그 불안증에 대해 얘기하는 내용이다. (존엄사를 소재나 주제로 한 작품들이 모든 대중예술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을 정도로 세계 공통어가 되고 있는 요즘이다. 국내에서는 남유하란 작가가 쓴 근미래 소설 『다이웰 주식회사』가 이 부자연스러운 죽음의 사회학이 지닌 계급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와 묘하게 닮은 점이 있다.)
작품이 갖고 있는 주제의식의 심각성과 드라마틱한 이야기 구조 때문인지 이 ‘플랜 75’는 장편으로 확장됐으며 지난 2월 7일 국내에 개봉됐다. 장편의 이야기는 많이 달라졌다. 안락사=존엄사를 놓고 씨줄날줄로 얽힌 캐릭터가 4명인데 중심인물은 죽음을 선택하려는 78세 노인이다.
여기에 이 노인을 죽음으로 유도하는 시 공무원이 있다. 콜 센터 여성은 노인의 고민을 들어주는 역할이다. 유품 정리사인 필리핀 노동자 여성도 있다. 이들 4명의 일상의 언어는 죽음이다. 편안한 죽음. 웰 다잉. 사람이 아무리 좋은 죽음을 기획한다 해도 죽음은 죽음이다.
죽음이 일상어가 된 사회는 어둡고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플랜 75’의 장단편 영화를 만든 하야카와 치에 같은 일본의 젊은 감독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얼마나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플랜 75’의 결정적인 하자는 고령층이 ‘죽어 줘야 할’ 기준의 나이를 너무 낮게 잡았다는 것이다. 75세라면 너무 젊다. 요즘 세상에서 죽기엔 아직 아까운 나이 소리를 듣는다.
물론 영화의 설정이 물리적 나이의 중요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재정에 피해를 끼치는 노년계층이냐 그렇지 않은 존재이냐에 주어져 있는 것이기는 해도 영화를 보고 있으면 지금과 같은 시대로서는 다소 과장된 설정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나이 대를 훨씬 높이거나 아니면 아예 없애는 식의 설정이 보다 현실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단편 ‘플랜 75’ 외에 영화 ‘10년’의 나머지 4편은 일본 사회의 통제된 교육 시스템의 문제나 후쿠시마 오염 사태 등 환경 이슈, 자위대 해외파병의 논란에 대해 다루는 내용들이다. 이들 단편들을 대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사고(思考)는 일본의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극도로 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문제는 과거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오히려 영광의 시절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이들 군국주의 향수론자들이 또다시 일본 사회를 훼손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이다. 넷플릭스 옴니버스 영화 ‘10년’은 일본 사회의 현재적 고민이 어떠한 것들이며 또 얼마만큼 깊은 것인가를 보여 준다.
일본의 고민은 우리의 고민일 수 있다. 모든 사회의 극우는 극우끼리 통하고 진보는 진보끼리 통한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영화가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미래사회의 모습은 우리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하는 실체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이 영화 ‘10년’ 그리고 확장 버전 ‘플랜 75’를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장편 ‘플랜 75’의 영화적 완성도는 만만치 않다. 괜히 단편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장편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