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천 년쯤 흐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인간의 일이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켜온 절집들이 있다. 거대한 법당보다 오래된 돌계단, 화려한 장식보다 깊은 고요가 더 큰 위로가 되는 공간.
천년의 세월을 품은 고찰은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시간과 사람, 자연이 어우러진 삶의 기록이다. 고요한 산길을 따라 들어서면 그 어떤 언어보다 조용한 위안이 마음에 스민다. 경기도 곳곳에 남겨진 천년고찰 여섯 곳을 따라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걸어보자.

◇ 남양주 수종사
운길산 중턱 해발 350m 지점에 자리한 수종사는 '전망 맛집'으로 손꼽힌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경내를 휘감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을 선사한다. 세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500년 된 은행나무, 다실 삼정헌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은 마음까지 씻어낸다.
수종사의 경내 중심에는 대웅보전이, 가장 높은 곳에는 삼신각이 자리하고 있어 각각의 고즈넉한 전경을 즐기기 좋다. 경내 곳곳이 전경 명소이며, 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의 배경으로도 등장해 널리 알려졌다.

◇ 파주 검단사
300년 느티나무 아래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풍경을 품은 작은 사찰. 신라 혜소국사 혜소가 847년에 창건한 뒤 왕릉의 원찰로 쓰였던 역사적 깊이가 담겨 있다. 검단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법화전에는 인조가 하사한 편액이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조선 후기 목조 관음보살 좌상이 모셔져 있다.
무량수전과 명부전에는 한글 주련이 적혀 있어 친근한 감성이 느껴진다. 규모는 작지만, 소박한 전각과 주변 자연이 어우러져 깊은 울림을 준다.

◇ 동두천 자재암
소요산 깊은 숲길을 따라 도착하는 자재암은 원효대사의 수행처로 전해진다. 108계단을 오르면 원효대가 자리하고 그 앞 원효폭포와 원효굴은 사찰의 고즈넉한 시작을 알린다. 암자 안에는 원효대사가 사용했다는 샘물도 흐른다.
자재암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대웅전, 나한전, 요사채 등이 아담하게 어우러져 있다. 폭포 소리와 새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이곳은 걷는 것만으로도 수행이 되는 장소다. 번뇌를 내려놓고 마음을 다스리기에 제격인 공간이다.

◇ 안성 청룡사
청룡사는 고려 원종 때 명본국사가 창건한 절로 본래 이름은 '대장암'이었다. 공민왕 시기 중건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휘어진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려 세운 대웅전 기둥에서 자연을 존중하는 미학이 느껴진다.
금강역사 벽화, 사천왕문 없는 독특한 구조, 남사당패가 겨울을 지내던 이야기까지 전통과 민속이 어우러진 절집이다. 깊은 산중의 낮고 조용한 기운이 묵직하게 감싼다. 나무 기둥처럼 사람도 자연스럽게 기대어 쉬기 좋은 곳이다.

◇ 양평 사나사
용문산 백운봉 자락 깊숙이 자리한 사나사는 계곡과 숲이 어우러진 산사다. 고려 태조 때 대경국사 여엄이 제자 융천과 함께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보살의 세계'를 뜻하는 이름처럼 불심을 찾는 이들에게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준다.
삼층석탑과 태고화상 보우의 부도가 나란히 자리해 고요한 마당의 중심을 이룬다. 대적광전 외벽에 그려진 '심우도' 선화는 이곳만의 특별한 묵상을 가능케 한다. 계곡 소리와 풍경 소리가 겹치는 이곳은 계절 따라 찾는 재미도 크다.

◇ 용인 백련사
향수산 깊은 숲속 용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통일신라 애장왕 2년에 신응선사가 창건한 사찰로 '백련'은 진흙 속에서도 맑게 피는 흰 연꽃을 뜻한다. 천장에 휘감긴 청룡과 황룡, 화려한 수미단과 석가모니불 삼존상이 장엄함을 전한다.
대웅보전 외벽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담은 벽화가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다. 이름처럼 맑고 따뜻한 연꽃 같은 공간을 걷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절집이다. 정갈한 숲길 끝 누구나 조용히 머물고 싶은 자리에 있다.
[ 경기신문 = 류초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