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 전 뜨거운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수원에서는 독립운동가의 활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묵묵하고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활동하며 희생했다.
작은 영웅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빛나는 오늘을 선물 받은 후손들의 의무인 만큼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수원시가 발굴한 11인을 소개한다.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선창한 의기(義妓), 김향화
1897년 서울에서 태어나 수원으로 이사한 김향화의 본명은 김순이다. 1919년 3월29일 김향화는 기생 33명과 함께 위생검사를 받기 위해 자혜의원(화성행궁 봉수당)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쫓겨나면서도 수원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날 김향화의 만세 선창은 주변 상인과 노동자, 학생들을 일깨우며 격렬한 만세운동에 불을 지폈다. 이 일로 김향화는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석방됐다.

◇모진 고문으로 희생된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
이선경은 1902년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났다. 숙명여학교에 진학한 뒤 1919년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독립을 위해 투신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수원 출신 서울 유학생들과 함께 구국민단을 결성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간호원으로 독립운동을 돕고자 결심하고 1920년 군자금을 받아 상해로 떠나려다 서울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모진 고문에도 독립운동의 의지를 당당히 밝히는 기개를 보여줬다. 이선경은 9개월의 옥고 끝에 풀려났지만 석방 9일만에 가족의 품에서 순국했다.
◇대한 독립을 외친 언론의 의지, 유병기
1895년 수원 성호면 가장리에서 태어난 유병기는 1921년 창간한 월간 잡지 '신천지'에서 활동한 기자였다. 신천지는 일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어 총독부의 검열과 탄압을 받던 잡지였다.
유병기는 1923년 8월 '모든 약자 계급에 호소하여 단결을 촉구함'이라는 글을 썼고 이 글은 9월호에 게재됐다. 유병기의 글에는 "정복당한 식민지를 해방시키고 같은 경우의 약자와 함께 정복자 또는 착취자 계급을 도과하여 이상사회 건설에 노력하자"는 주장이 담겼다. 이에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24년 8월 출옥했다.

◇소작농의 애환을 보듬은 청년 활동가, 장주문
1906년 수원 양감면에서 태어난 장주문은 1928년부터 수원군 양감면에서 활발한 청년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특히 수원군과 진위군을 묶어 창립된 수진농민조합에 가담해 소작쟁의 지도 및 해결에 적극 참여했다. 이후로도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으로 총 세 차례 체포됐으나 1933년 3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됐다.
◇안중근 의거로 불타오른 독립운동의 투혼, 이겸승
이겸승은 수원면 남수리 출신으로 1891년 태어났다. 18세였던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가 일어나자 '우국열사(憂國烈士)의 장거(壯擧)'라며 칭송했다.
이듬해 3월 제주도에서 '안중근 군과 이별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했는데 '우리 2000만 독립 정신과 4000년의 신성한 역사를 발표하였음은 안중근 혼자의 광영일 뿐만 아니라 곧 국가의 빛나는 위업이다'라고 의거의 의미를 짚고 '뜻을 계승하고 업을 이어갈 자 그 누구인가'라며 독립운동 투신 의지를 암시하는 내용이 담겼다.

◇잡히고 잡혀도 꺾이지 않은 결기, 차계영
1913년 수원 산루리에서 태어난 차계영은 수차례 체포당하면서도 일제에 굳건히 맞선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1930년 서울의 조선총독부 산림부 급사로 취직한 그는 비밀결사 독서회에 참여했다.
'뉴우스'라는 인쇄물을 발행해 회원들에게 배포하고, 만주사변에 반대하는 반전 격문을 살포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1931년 첫 번째로 체포됐다. 이후로도 치안유지법 위반, 조선공산당 재건 및 반제동맹 재건 사건 등으로 총 세 차례 고초를 겪었다.

◇태평양전쟁을 소문낸 기차 수리공, 구현서
1921년 수원 반월면 초평리에서 태어나 태평양전쟁으로 패망이 가까워진 1944년 8월 용산역에서 기차 수리공으로 근무하던 그는 동료들에게 태평양전쟁에 대한 말을 전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1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미국 공군이 북큐슈를 폭격하는 도중 조선을 통과하면서 폭격하지 않은 것은 그 비행기에 조선인 비행사가 타고 있었기 때문"이며 "조선인 비행사가 미국을 위하여 노력한 것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할 때 조선 독립을 실현시키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을 위한 묘수, 박기서
1891년 수원 성호면 오산리에서 태어난 박기서는 1920년 서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정태유를 만나고, 12월에는 나상필과 만나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내기로 의기투합했다.
군자금 모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임시정부 공채 발행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하고 둘을 소개해 공채증서를 발행하는데 일조했다. 이후로도 삼남지방 군자금 모집에 지속적으로 공을 들였던 박기서는 결국 체포돼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계급 투쟁으로 독립운동을 모색한 홍종갑
홍종갑은 수원 성호면 세교리 출신이다. 동향인 최경창, 홍종례와 교유하며 무산자와 청년, 여성 등에 대한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했다.
'모순된 사회제도를 변혁해야 한다'는 비밀결사 적색노동조합을 접하고 이에 참여했다. 수원에서 공장 노동자를 조직하고 운동 자금을 조달하다가 1935년 체포됐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됐으나 기소가 중지되는 '면소' 처분을 받았다.

◇공장에서 사회개혁을 꿈꾸다, 최경창
수원 성호면 세교리에서 1918년 태어난 최경창은 1933년 적색노동조합에 가입해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이를 통한 개혁을 꾀하고자 노동자 규합을 실천했다. 1934년 안양 종연방직공장에서 근로자로 근무하면서 격문 배포에 참여했다.
또 서울에서 반제국주의 비밀결사 ‘콤그룹’에 참여해 서울의 여러 공장과 거리에서 동지를 규합하는 활동을 했다. 1937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유예를 선고받았다.

◇노동운동으로 독립투쟁 고취한 여성노동자, 홍종례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규합해 사회개혁을 실천하려한 홍종례는 1934년 5월 안양 종연방직공장 직공으로 근무하다가 영등포경찰서의 일제 단속으로 검거됐으나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이후 반제국주의를 표방한 ‘콤그룹’ 조직활동을 전개했다. 여러 공장과 거리에서 동지를 규함하는 적색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하다가 1936년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됐다가 1937년 5월11일 기소 유예로 풀려났다.
[ 경기신문 = 장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