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장군은 말년을 너무나 울분스럽게 맞이했다.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일본군 3개 사단을 거의 섬멸 시켰던 맹장이 동족의 손에 의해 암살당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였다. 그의 나이는 불혹을 갓 넘긴 42세였다.
3·1 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난 그 이듬해인 1920년 김좌진 장군은 북로군정서 소속의 독립군 2500여명(현대 군편제상 연대병력)을 이끌고 만주 화룡현(和龍縣)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대접전을 벌였다. 김좌진의 독립군은 일본군의 3개 사단과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독립군은 수백여 명의 병력 손실만을 입었을 뿐이다. 이른바 신화적인 대승이었다.
절치부심한 일본은 청산리 전투이후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식량을 조달할 길 없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은 배고픔에 쫓겨 소만(蘇滿) 국경의 밀산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의 제안을 받아 들여 시베리아의 블라고베시첸스크로 본영을 이동한다. 1921년 초, 한인공산주의자들과 소련군의 배신으로 병력의 태반을 잃었다. 이들 일당은 김좌진 장군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우수리강 너머의 일본군 지원을 받아 가며 독립군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어렵게 목숨을 건진 김좌진 장군은 8년 후 한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만주의 호랑이를 동족 공산주의자들이 죽인 것이다.
그런데 김일성은 1937년 동북항일 유격대를 이끌고 함북 갑산군 보천보면소를 습격 일본인 경찰 7명을 사살하고는 승승장구 북한을 50여년 지배했다. 소련의 도포를 입은 부귀영화였다. 주민의 밥그릇을 빼앗고 생명까지 뺏으면서 일인독재를 했다. 주민의 신음이 들리는 듯 하다. 그러한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대를 이어 호강하며 한국정치를 리모트 컨트롤하고 있다. 또 일부에서는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전투를 평가하려하고 있기도 하다. 지하 김좌진 장군이 통곡할 일이다.
滿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