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이 있으며 스승의 날이 있는 5월은 온 국민의 축제의 달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교계에서의 5월은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고 한국의 유교에 새 불을 지피려한 심산 김창숙(金昌淑) 선생을 보낸 잊지 못할 달이다. 심산 선생이 너무나 불우하게 명을 달리 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인 1962년 5월 10일 심산 선생은 서울의 초라한 여인숙의 단칸방에서 극적으로 생을 마쳤다.
심산 선생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지리멸렬한 유도회를 재조직하고 통합 출범시키면서 전국 향교의 호응을 받아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전국 각지의 향교와 유림들은 재산을 팔아 가면서까지 성금을 기탁했다. 유림은 나라의 재건을 위해서는 성균관을 부흥시키는 일밖에 없다며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유림의 정치 세력화를 경계하고 불리를 두려워했던 부류의 공작과 반대에 의해 심산은 유도재건의 꿈을 접고 물러나야 했다. 이른바 친일황도(皇道) 유림세력과 보수유림의 어거지 반대였다. 유도의 진흥과 한국정체성의 정립을 위해 안타까운 일이였다는 것이 유가의 반성이다.
심산 선생은 유도회 총본부 회장에 취임하면서 “잡으면 있고 놓으면 없어지며 행하면 흥하고 반하면 망한다.”며 유림의 대오각성을 호소했다. 심산 선생은 병자호란, 임진왜란과 같은 국치를 당했으면서도 각성 없이 시대에 낙후된 껍데기만 고수하다 결국은 경술국치와 같은 대통한사(大痛恨事)를 불러들였다면서 유림의 개혁을 부르짖었으며 잘못된 폐단의 청산을 요구했다.
심산 선생의 칼날 같은 선비정신이 당시 기득권 세력인 황도(皇道) 유림의 반발을 산 것이다. 이들은 임진왜란에서 보여준 조국애와 선비정신이 일본의 회유로 친일화, 개인의 부귀영화에 눈이 멀었던 것이다. 요즈음 과거사 논쟁과도 무관치 않은 안타까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