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강토에서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동족상쟁의 포화가 터진지 만 3년 1개월 2일만인 1950년 7월 27일 한국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을 지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과 국토는 인적 물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희생과 재앙을 입었다. 이에 따른 피해 통계는 오늘에 이르기 까지 부정확한 상태이다. 대체로 남북한의 인적 손실은 52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계되는데, 이 가운데는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 가장 많았다는 점에서 6.25전란의 비참성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다. 1천만에 가까운 이산가족이 발생하여 지구상 유례가 드문 고통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안겨주고 있다. 당사국인 우리측은 최후까지 이 회담에 반대하면서 휴전협정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159차에 걸친 휴전회담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쌍방의 포로 교환문제였다. 당시 공산군측 포로는 약 17만명으로 이 중 10만명이 자유송환을 원하고 있었다.
북한측은 포로 송환문제를 자기들 뜻에 맞게 하기 위하여 포로수용소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얼마후인 1953년 6월 18일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군측이 억류중이던 반공포로 2만7천여명을 인도적 차원에서 석방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전선은 소강상태에서 일진일퇴하면서 희생자는 계속 늘어났다.
이 무렵 제7차 유엔총회에서 브라질 대표가 휴전협상은 유엔총회가 아닌 판문점 현지에서 해결짓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판문점에서 양측이 숱한 설전을 펴 오다가 그 해 7월 22일 군사분계선을 확정짓고 7월 23일 포로송환을 비무장지대인 중립국송환위원단에 인계하게 되면서 정전회담 제159차 본회의에서 회의 개시 9분만에 서명을 마침으로써 휴전협정은 이루어졌다.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전선에서의 포성은 이날 밤 22시에 멈추고 이전까지의 38도선은 휴전선으로 바뀌었다. 우리 국민은 무려 7천여회에 달하는 휴전 결사반대 시위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였으나 우리의 염원은 반영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휴전협정이란 종전(終戰)이라는 개념과는 다른 뜻이다. 이제 52년째의 휴전일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온 국민은 휴전에 대한 의미를 되새겼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