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는 무의미한 전쟁을 막으려 하고, 한 남자는 학살의 역사를 끊어내려 한다. 두 사람의 목적은 다른 듯 사실은 같다. 두 남자는 원수지간이지만 알고 보면 동지일 수 있다. 두 남자는 상대가 제5열(국가를 붕괴시키려는 내부 비밀집단)의 수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나를 잠입자로 생각하는 걸 나는 알고 있고, 그걸 알고 있는 나를 상대가 알고 있고, 다시 그걸 내가 아는 식이다. 거울 속의 거울과 그 거울 속의 거울 이야기가 바로 ‘헌트’이다. 누가 역사 앞에서 선이고 악인가. 누가 옳고 누가 잘못된 것인가. 동림이라는 이름의 조직 내 두더지는 두 남자 중 누구인가. 혹시 둘 다인가. 아니면 둘 다가 아닌가. 영화 ‘헌트’는 격렬한 하드보일드 액션으로 두 사람의 정체를 향해 냅다 돌진해대기 시작한다. 배우 이정재가 놀랄만한 연출 역량을 선보인 영화 ‘헌트’는 극이 2/3까지 진행될 때만 해도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 둘 중 누가 잠입자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둘 모두 무슨 음모에 휘말려 있고, 그래서 간첩이 저 중 누구일 거라고 관객 한 사람 한 사람 확신하게 만든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무엇보다 ‘헌트’의 얘기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
일본 니시카와 미와의 신작 ‘멋진 세계’의 로그 라인(스토리의 항해 일지. 전체 스토리를 두세 줄로 요약하는 것)은 이것이다. “13년간 감옥에 복역했던 전직 야쿠자 미카미가 출소한다. 그는 새롭게 살 결심을 하지만 변화된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매번 트러블을 일으킨다.” 로그 라인만으로는 영화가 어째 민망해 보인다. 매우 올드하게 느껴진다. 일종의 갱생(更生) 영화이다. 이런 영화, 1970,80년대에 흔하게 나오던 것들이다. 시작과 끝이 뻔한 내용들이다. 게다가 주인공 미카미(야쿠쇼 코지)는 자꾸 가슴을 움켜잡는다. 협심증이 있는 모양이다. 이것도 어째 끝이 뻔해 보인다. 그러니 이건 물어보나 마나 신파이다. 제목 ‘멋진 세계’가 내포하는 반어(反語)적 의미도 전형성의 대표급이다. 내용은 절대로 멋진 세계를 그리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이 세상이 멋질 일 없다는, 구질구질한 일 투성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처사임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멋진 세계’를 이상한 흡입력으로 종종 훌쩍대다가, 때로는 낄낄 거리며 보게 되는 이유 역시 바로 그 전형적이고 뻔한 신파의 줄거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주인공 역의 야쿠쇼 코지 때문이다. 코지는 미카미의
세상은 늘 한 번에 망가지지 않는다. 서서히 붕괴한다. 그건 마치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주인공 형사 해준(박해일)이 서래라는 이름의 조선족 여인(탕웨이) 때문에 붕괴하는 것과 같다. 붕괴는 물리적인 파괴보다 해준처럼 참담함이라는 정서적 공습으로 다가선다. 붕괴는 간조(干潮)가 끝나고 밀물이 차오를 때 마냥 서서히 스며든다.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렇다. 예컨대 1. 이전 정부 때까지 정권의 핵심 공간이었던 청와대를 지금의 정부는 베르사유 궁전처럼 바꿔 관광 장소로 활용하겠다고 한다. 이미 그곳을 버린 자들이지만 공적인 공간을 자기들 멋대로 바꾸겠다고 하는 것이 일단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적어도 공청회 같은 것, 여론을 모으는 척 같은 것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게 누구 발상이고 누구 아이디어인지, 생각한다는 것이 기껏 베르사유라니, 그 상상력에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왕정 시대의 가장 화려했던 면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그래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아직 이어지고 있지만, 그건 이 공간이야말로 이중의 역사적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배우 출신의 감독(이란 표현도 일정한 편견이 들어간 것이다. 배우가 연출을 하는 것을 여전히 신기해하는 것인 양 굴면 안 된다) 매기 질렌할이 만든 ‘로스트 도터’는 오프닝 장면 그리고 제목 자체만으로는 이야기 전개를 도통 짐작할 수 없게 하는 영화이다. 이건 공포인가, 살인극인가, 유괴범 이야기인가. 적어도 서스펜스 스릴러 스타일인가. 영화는 그 어느 것도 아니지만, 그 어느 것 모두에 해당하기도 한다. 이야기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다루는 척 하지만, 사실은 인간 마음속의 거친 풍랑을 그려 나간다. 그 격랑의 물결 안에는 살의(殺意)가 있다. 그것도 모성의 살해 욕구. 바로 그 점이 섬뜩하게 만든다. 많은 여자들, 많은 남자들이 마음속을 들킨 것 같고, 그것을 헤집어 놓은 것 같아 못내 찝찝하면서도 겁이 난다. ‘어떻게 알았을까? 사람들이 내 마음속 진심을 어떻게 눈치 챘을까’하는 마음이 된다.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치는(것처럼 묘사되는) 여성 레다(올리비아 콜맨, 젊은 시절 역은 제시 버클리)는 그리스의 외딴 섬에 외따로 여행을 왔다. 일종의 워킹 홀리데이다. 조용한 곳에서 홀로,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연구하고, 쉬고 할 생각이다. 레다는 올해로
1978년 당시 1500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후 4500만 달러를 벌어 들였으니 지금 시가 기준으로 1억 5000만 달러에서 4억 5000만 달러, 즉 우리 돈으로 1700억 원 정도의 돈을 들여 5000억 원 정도의 돈을 번 셈이 되는 것이다. 바로 영화 ‘디어 헌터’ 얘기이고, 이 영화를 만든 마이클 치미노 감독에게는 그 같은 성공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됐던 얘기이다. 이후 여기서 얻은 자신감으로 치미노는 차기작으로 7시간짜리 대작 영화 ‘천국의 문, Heaven’s Gate’을 만들었다. 문제는 이 서부극이 당시로선 천문학적 비용인 3500만 달러가 들었고,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로 마이클 치미노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의 메이저 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A)까지 파산하고 말았다. 마이클 치미노는 이후 2016년에 사망할 때까지 할리우드에서 기피 인물이 됐고, 끝까지 재기하지 못했지만(미키 루크 주연의 ‘이어 오브 드래곤(1985년)’은 인종차별 논란으로 흥행에서 참패했고, 마이클 치미노와 미키 루크 모두 몰락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의 역작 ‘디어 헌터’는 현대 영화사의 전설로 남아 있게 됐다. ‘디어 헌터’는 베트남전을 다룬
공공기관이나 민간 단체 혹은 기업에서 주최하는 사전제작지원 공모사업에는 적게는 수백 편, 많게는 수천 편의 영화 시나리오들이 쏟아져 들어 온다. 제작 지원금의 규모는 실로 다양한데 단편의 경우에는 수백만원이나 천만원 짜리가 있고 장편의 경우는 1억에 가까운 경우도 있다. 작품들이 너무 많다 보니 늘 문제는 심사를 하는 것이다. 심사 의뢰를 받고 자료들을 열람하면 항상 입부터 벌어진다. 이걸 다 언제 보나 싶어서이다. 응모 작품이 많다는 것은 두 가지이다. 영화를 만들겠다, 영화를 업으로 삼겠다, 영화에 일생을 걸겠다는 사람들이 많고,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며 감독의 길이 됐든 시나리오 작가의 길이 됐든 영화계 안으로 들어 오는 등용의 문이 그만큼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영화 인력의 공급이 많다 보니 나눠 써야 하는 물적 토대는 점점 좁아지거나 할당량이 줄어든다는 것이고 그래도 그나마 이런 저런 기관과 기업에서 자금을 투여해서 모자란 제작 자금을 채워 주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년 전만 해도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일이었으며 그만큼 한국의 영화 인더스트리가 선진화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사 과정은 백퍼센트 장담할 수 있는 바,
영화 ‘큐어’에서 그려지는 도쿄의 모습은 을씨년스럽다. 화려한 네온사인 같은 것, 고층 빌딩과 사치스러운 쇼윈도 따위는 일체 나오지 않는다. 도시가 그렇게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워서 기이한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잇따른 정신이상의 살인 행위 때문에 도시가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살짝 구분은 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는 엽기살인 탓이 먼저인 것처럼 보이지만 언뜻 생각해 보면 공간과 시대가 사람을 죽고 죽이게 만들거나 죽이게끔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시는 심각하게 우울해 보인다. 공간 전체가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영화 ‘큐어’는 1997년에 나왔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초기작이다. 25년 만에 리마스터링 작업이 이뤄졌고 최근 국내에 재개봉됐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1990년대 후반 일본 사회가 겪었던 내면의 살풍경스러움이 느껴진다. 당시 일본 사회는 풍요로웠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내부적으로 이미 무너지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영화가 발표됐던 1997년보다는 2022년 현재, 일본 사회가 어디서부터 붕괴됐는지를 갈파시킨다. 실제로 일본 경제는 1990년대 후반부터 급격하게 그 거품이 빠지기 시작해 장기 불황의 늪으로 들어가
콜 사인 아이스 맨(발 킬머)과 매버릭(톰 크루즈)은 탑 건 훈련 시절 엄청난 라이벌 관계였으나 지금은 다 지나간 얘기일 뿐이다. 아이스 맨은 별 넷인 4성 장군 제독이 됐고 매버릭은 여전히 대령에서 진급이 멈춰 있다. 괴짜(매버릭)라는 닉네임처럼 온갖 말썽과 구설수, 군조직에 반하는 행동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파일럿 사이에서 여전히 전설이다. 아이스 맨은 그런 매버릭을 파일럿의 교관으로 불러들여, 위험한 대테러 작전에 투입시키려 한다. 아이스 맨은 후두암으로 죽어 간다. 군 내부에서 진퇴양난에 처한 매버릭은 그를 만난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아이스 맨은 그에게 컴퓨터 키보드로 이렇게 쓴다. “It’s time to let go”. 흘러가게 해, 이제 그냥 놔 줘, 그냥 내버려 둬, 뭐 그런 뜻일 것이다. 둘은 오랜 세월을 라이벌이든 친구이든 교감해 왔고 매버릭은 아이스 맨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스 맨이 하늘에서 최고의 파일럿은 누구냐고 묻자 매버릭은 지금처럼 좋은 분위기를 망치지 말자고 한다. 둘은 뜨겁게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늙어 가는 두 남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
개봉과 동시에 엄청 화제를 모을 것이 확실히 되어 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에는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 형사는 자꾸 자신 앞에 용의자가 돼 나타나는 여자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이 대사는 이제 여기저기서 패러디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여자의 대답은 이거였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남자 형사의 저 대사를 지자체장들에게 해주고 싶다. 지방자치단체장이 되면, 특히 새로 되고 나면, 늘 만만한 게 영화제인 모양이다. 이런저런 영화제를 만들겠다, 혹은 만들어 달라 등등 이쪽 전문가들에게 요구와 부탁을 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영화제 하면 그저 극장에 영화를 ‘갖다 붙이는 행위’ 정도로만 생각하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거, 돈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오? 얼마면 된다는 거요, 식이다. 문제는 영화제가 그렇게 만만한 퍼포먼스가 아니라는 점이다. 극장에 영화를 갖다 붙이는 것만으로는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가당치 않은 일이다. 영화제를 돈만 가지고 할 생각이라면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수없이 영화제를 해 온 사람으로서 그럴 때마다 지자체장 당사자에게 거나 관련 공무원에게 분명히 경고성 얘기를 건넨다
박찬욱의 신작 ‘헤어질 결심’은 한 마디로 ‘영화 볼 결심’을 하게 만든다. 실로 수년 만에, 십수 년 만에 만나는 영화적인 영화, 영화다운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박찬욱은 이번에 ‘위대한 걸작’이란 표현보다는 ‘매우 뛰어난 역작’이란 표현이 걸맞은 영화 한 편을 내놨다. 그가 얼마나 장르적 규칙에 민감하고 뛰어나면서도 동시에 그 허들을 넘어서는 도발적 작가 의식의 인물인가를 유감없이 토해 냈다. 박찬욱이 사람의 마음속 심연을 들여다보는 방식은 때론 악마적일 만큼 잔혹하다는 평가와 오해를 받았지만, 그건 그가 너무 예민하고 면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 현미경과 같은 정확한 심도에다가 뜻하지 않는 따뜻한 심성이 플러스됐다. 영화는 절절해지고 가슴이 아파졌지만 때론 달콤할 만큼 사랑스러운데다 그 마음속 우물이 더욱더 깊어졌다. 박찬욱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으며 여전히 새로운 영화적 항로를 찾으려 부심하는 감독이라는 것을 입증해 낸다. 한국에서 봉준호가 칼 마르크스라면 박찬욱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아니 그 둘을 합친 에리히 프롬과 같다. 박찬욱은 어찌 보면 매우 기독교적 근본주의에 입각해 있는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참회를 해야 하고 그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