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지난 해인 2025년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 상영에 이어 올해인 지난 3월 15일 열린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장편 다큐 부문은 올해 유난히 경합이 심했다. 많은 이들이 넷플릭스에 올라 있는 ‘완벽한 이웃’의 수상을 예상했었다.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푸틴만큼 잘못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자국의 트럼프를 생각한다면 이 영화에 표가 모이는 게 정치적으로 자칫 ‘민망한’ 선택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남의 전쟁을 탓할 자격이 없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아카데미 회원들은 과감하게, 그렇기에 더욱더, 이 다큐멘터리에 승부수를 던지는 모양새를 보였다. 어떤 전쟁이라도 반대해야 한다는 의지를 선보인 것이다.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의 원제는 ‘푸틴에 맞서는 미스터 노바디 (Mr. Nobody Against Putin)’이다. 여기서 미스터 노바디는 파벨 탈란킨이다. 탈란킨은 우랄산맥 기슭의 도시 카라바시의 슈콜라(초⦁중등교육기관)인 ‘카라바시 제1학교’의 교사이다. 카라바시는 타타르족, 바슈키르족 등 투르크 계열 무슬림들이 거주해 온 지역으로 탈란킨이라는 성도 그러한 역사적 맥락을 지닌다. 무슬림들 사이에 흔한 이름인 압둘에서 유래한 압둘마노프 같은 성을 가진 역사 교사도 있다. 카라바시는 구리제련업으로 살아가는 인구 1만의, 소수민족의 도시이다. 구리제련은 당연히 공장 주변과 노동자들을 극심한 중금속 오염에 시달리게 만든다. 주민들의 평균 수명이 45세라는 얘기가 있을 만큼 ‘세계 최고의 오염 도시’로 악명이 높다. 그럼에도 파벨 탈란킨은 평온하면서도 나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말 그대로 ‘미스터 노바디’였다. ‘존재감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던 인물이었다는 얘기이다. 그런 그를 바꾼 것은 바로 푸틴이다. 푸틴이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이었다. 물론 러-우 전쟁은, 누가 도발했고 그 과정에서 양국 간 외교·정치·군사적 갈등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었는지, 우크라이나 러시아 접경의 돈바스 지역에서 친러-친서방 주민 간 내전을 중지시키려던 민스크 협정(2014년)은 왜 이행되지 않았는지 등등 시각에 따라 전쟁 발발의 원인에 대해 나름 치열한 논쟁이 있을 수는 있다. 푸틴은 돈바스 지역 내의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에 가장 먼저 지상군을 파병했다. 따라서 전쟁은 명백히 푸틴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특히 푸틴은 러-우 전쟁을 자신의 독재 권력의 강화 기반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 국내외의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파벨 탈란킨은 일종의 이벤트 과목 교사이다. 그는 교내 각종 행사를 기획하고 이를 동영상으로 기록한다. 탈란킨은 2022년 2월 22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 자신이 점점 국가의 선전 선동 교육에 동원되고 있음을 알게 되고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푸틴의 ‘독재 교육’은 점점 심각해지고 심지어 악랄해지기 시작한다. 일단 학교 내 교육과정에서 전쟁이라는 표현을 금지한다. ‘특별군사작전’일 뿐이라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가짜뉴스 처벌법’에 따라 처벌된다. 전쟁이 벌어졌으니 부분 동원령이 떨어진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한 일이었다. 카라바시에서도 젊은이들 뿐 아니라 남성들 상당수가 징집된다. 카라바시 외 타지역의 많은 남성이 나라 밖으로 이탈해갔고 푸틴은 이에 반역법으로 맞선다. 국가에 반역한 죄는 최고 종신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중견 군사 전문기자였던 이반 사프로노프는 2022년 9월 국가반역죄로 징역 22년 형을 선고받는다) 푸틴이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열을 올리며 길들이려 한 대상은 당연히 방송 등 언론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학교 교육이었다. 이른바 러시아 모든 학교에서 자행된, 그리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이른바 ‘애국 교육’이 시작된 이유이다. 전쟁과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인민 세뇌 교육이다. 푸틴은 방송에 나와 말한다. “교사는 국가가 전환점에 있을 때 중추적인 역할을 합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건 장군이 아니라 학교 선생님들입니다.” 교사 파벨 탈란킨은 의무적으로 이 모든 교육 현장을 영상으로 찍고 기록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러-우 전쟁의 부당성을 깨닫게 되고 전쟁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게 된다. 그는 점점 위험해진다. 이 다큐멘터리는 파벨 탈란킨이 찍은 영상의 중요성을 간파한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 데이비드 보렌스타인이 그에게 접촉, 원격으로 비밀리에 진행해 완성된 작품이다. (탈란킨은 자신의 영상을 담은 하드 디스크를 벽 속에 숨겨 놓는다) 보렌스타인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활동하는 독립 다큐멘터리 작가로 코펜하겐에는 세계 주요 다큐멘터리영화제인 CPH:DOX (코펜하겐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있다. 영화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CPH:DOX의 제작 지원 플랫폼인 CPH:FORUM의 프로젝트로, 은밀하게 제작되었다. 아카데미는 2022년부터 2024년까지 2년여를 비밀리에, 그것도 원격으로, 전문 다큐 작가와 아마추어 간에 호흡을 이어 가며 작품을 완성한, 그 제작 과정 자체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자의 시선을 외부자들에게 피력해 내는 보편적 정치관, 인간주의적 측면의 성취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시리아 와드 알-카팁 감독의 ‘사마에게’(2019)와 같은 맥락에 있다. ‘사마에게’는 시리아 내전 및 학생운동의 거점이었던 시리아 북부 알레포의 함락 과정을, 흔들리는 홈 비디오 형식으로 카메라에 담아 외부로 반출(터키를 거쳐 영국 런던의 한 다큐멘터리 PD에게), 완성한 작품이다. 이 다큐는 같은 해 72회 칸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사마에게’와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정치적 올바름의 측면을 넘어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고 누구에 의해 만들어져야 하는지, 그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실험 정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 점이야말로 이 다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영화에서 가장 코믹한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오싹한 장면은 이 카라바시 제1학교의 역사 교사 파벨 압둘마노프가 카라바시의 ‘가장 사랑받는 교사상’을 받는 장면이다. 압둘마노프가 숭앙하는 인물은 셋이다.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 빅토르 세묘노비치 아바쿠모프, 파벨 아나톨리예비치 수도플라토프 등이다. 베리야는 스탈린 시대 비밀경찰인 내부인민위원부(NKVD)의 수장이었고 고문 기술자였다. 아바쿠모프는 방첩대 역할을 한 국가보안부(MGB) 대장이었고 수많은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시킨 장본인이다. 수도플라토프는 일종의 전문 킬러로 트로츠키를 등산용 곡괭이인 피켈로 암살했던 살인자이다. 이들을 역사적 인물이라고 추켜세우는 역사 교사 압둘마노프가 교사상을 받는 장면은 이 다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세상의 전쟁은 전장이 아니라 학교와 같은 사회의 깊은 내면에서 더욱 치열하고 잔혹하게 치러지는 법이다. 다큐멘터리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은 국내 극장가에서 볼 수가 없다. 수입되지 않았다. 다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진행 중인 경기도 지역의 공동체 영화 상영(도서관, 학교, 독립서점 등)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상영 신청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누리집에 소개된다.
제니퍼 로렌스가 16일(한국시간) 끝난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 주연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은 올해의 가장 큰 이변으로 꼽혔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녀의 연기가 거의 최고급이었기 때문이다. 제니퍼 로렌스는 지금까지의 연기 인생에서 거의 정점을 찍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영혼이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을 광적으로 연기해 냈지만, 그 생생함이 투표권을 지닌 일부 아카데미 회원들에게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모습으로 비춰 불편함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제니퍼 로렌스는 자신 때문이 아니라 영화 '다이 마이 러브' 자체가 다소 난해하고 요령부득의 내용인 탓에 대중성을 선호하는 아카데미와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케빈에 대하여'(2011)로 한국에 많이 알려진 감독 린 램지의 이번 신작 '다이 마이 러브'는 일반 영화와는 다른 화면 비율(1.33:1, 흔히들 4:3 화면이라 한다)로 시종일관 시선을 박스권 안에 가둬두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화면 비율은 영화 역사 초기에 쓰인 것으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현대영화는 대체로 비스타 비전(1.85:1)으로 찍는다. 가로 화면이 길다. 가로 화면을 조금 더 극단으로 늘린 것이 시네마스코프이다. 거의 3:1(2.39:1)의 비율에 가깝다. '다이 마이 러브'의 화면 비율은 최근 개봉된 영화에서도 경험한 바 있다. 여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감독한 영화 '물의 연대기'도 4:3 비율이었다. 이런 화면은 뭔가에 갇혀 있는 억눌린 심리 상태를 표현해내는데 적확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립감과 복잡한 심리 상태를 드러내는 데도 가장 알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린 램지가 왜 이런 화면 비율을 선택했는지, 그렇다면 영화 '다이 마이 러브'가 어떤 내용의 작품일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게다가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몬태나임에도 불구하고(주인공 그레이스의 남편 잭슨은 삼촌의 몬태나 집을 물려받은 것으로 나온다) 광활한 자연을 보여줄 수 있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쓰지 않은 것은, 이 영화가 다분히 심리물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영화의 오프닝 씬은 두 남녀가 집 뒤에 차를 주차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카메라는 집 안에서 그들을 향해 정면으로 고정된 채 오랫동안 롱테이크로 관찰한다. 영화는 두 남녀가 곧 이 정사각형의 폐쇄된 프레임 안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그레이스(제니퍼 로렌스)는 대도시 뉴욕에서 작품활동을 하던 작가인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사랑하는 남편 잭슨(로버트 패틴슨)과 그의 죽은 삼촌의 집에 살기 위해 몬태나로 왔고, 곧 임신했으며, 출산 후 육아로 인한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그레이스의 우울증은 단순한 산후우울증이 아니다. 산후우울증은 그녀의 시어머니 팸(씨씨 스페이식)의 말대로 1년쯤 지나면 극복이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산책도 하고 요가도 하고, 다른 일에 집중하다 보면 나아질 수 있다고들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레이스의 우울증은 그보다 심연이 훨씬 깊은 것이다. 그레이스는 이제 글을 쓰지 못한다. 그녀는 그 같은 경력단절로 인한 고립감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 생활의 고독함을 어쩌지 못한다. 정서적 연대를 해 나갈 수 있는 상대는 오로지 남편인 잭슨뿐이지만 남자는 여자의 깊은 내면을 이해하지 못한다. 많은 다른 남자들처럼 잭슨 역시 자신은 돈을 벌어 와야 하며 여자는 애를 키우고 집안을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레이스가 원하는 것은 다시 작가가 되는 것이라거나 육아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내부가 부서지고 있는 소리를 들어 달라는 것이다. 그 방법을 그녀는 섹스에 대한 요구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잭슨은 일상에 지쳐 아내의 그런 요구를 번번이 피하기 일쑤다. 그레이스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고 풀장에 뛰어드는 등 이상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그녀는 사물을 부수고 자기 몸을 학대하고 다치게 하는 등 점점 미쳐간다. 문제는 자신이 미쳐간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레이스처럼 자아의 벽이 두꺼운 인물은 정신 상담이든 약물 치료든 잘 통하지 않는다. 그레이스의 정신 상태는 점점 더 극단을 향해 치닫는다. 영화 '다이 마이 러브'의 제목을 직역하면 ‘죽어버려 내 사랑’쯤이 된다. 이 영화는 우울증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상대가 (이제는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식의, 사랑 자체가 부정되는, ‘사랑의 죽음과 끝’에 대한 영화이다. 남자와 여자 혹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사랑은 창대했던 시작과 달리 종국에는 상대를 지켜주지 못한다. 사랑의 관계는 어느 시점부터 형식적이고 일상적인 틀에 매이게 되고 상대가 어떤 심적 고통을 겪는지는 차라리 외면하고 싶어 하는 관계가 된다. 영화 '다이 마이 러브'를 보고 있으면 나의 여자, 혹은 나의 남자가 저렇게 광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면 과연 나 자신은 어떻게 하게 될까를 반추하게 된다. 사랑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것이다. 수사학적으로야 상대를 사랑으로 끝까지 돌볼 것이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같은 사랑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기괴하고 끔찍한 면이 있다. 혹은 그 반대로 대단한 감각을 선보인다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아르헨티나 작가 아리아나 하르비츠의 스페인어 소설 '마타테, 아모르'(Matate, amor)를 원작으로 했다. 역시 같은 뜻이다. 소설은 그레이스의 의식을 일종의 컷 업 기법(비선형적 서술방식)으로 기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린 램지 감독은 이를 그레이스와 잭슨의 상호 관계로 구체화 시켜 각색했다. 원작 그대로 했든, 그것을 각색으로 바꿔냈든 그레이스를 표현해내는 데는 완벽한 빙의, 곧 철저한 캐릭터라이징이 필요했을 것이다. 주변 사물을 때려 부수고 이마를 짓이기고 창문에 뛰어들고 등등의 폭력적인 연기는 누구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라를 드러내고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거나 바닥을 기어 다니는 연기도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4:3이라는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면 안에서 클로즈업으로 얼굴을 드러낸 채 자신의 내부에서 태풍이 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정 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레이스 역의 제니퍼 로렌스는 보는 사람들이 치를 떨게 할 만큼 극단의 우울증 연기를 유감없이 해낸다. 스스로가 우울증에 대한 경험이 치열했거나 아니면 이 역할을 위해 의도적으로 우울증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거나 했을 것이다. 배우가 영화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말이 있다면 그건 이 영화 '다이 마이 러브'의 제니퍼 로렌스를 두고 하는 말이 될 것이다. 영화가 심리스릴러에 가깝고 난해한데다, 산후우울증의 극단적 증세를 보통의 남성 관객이라면 체화해 느끼는 것이 쉽지 않은 면이 있어서인지 일반관객을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이 마이 러브'는 유명한 감독과 개성 있는 스타급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영화이다. 그래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어려운 영화이다. 2400만 달러짜리 영화지만 북미에서는 550만 달러의 흥행수익에 그친 이유이다. 국내 관객 동원도 부진한 편이다. 아마도 산후우울증 증세를 다소 공격적인 모습으로 그려내고 그런 모습에 대해 일정한 해석을 유보한 채 관객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서게 하는 린 램지의 연출방식이 대중의 호응을 끌어내는 데 쉽지 않았던 요소로 보인다. 한 마디로 지나치게 관념적이었다는 얘기이다. 관객들에게 그레이스는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분석과 거리두기의 대상이 됐다. 그레이스의 마지막 대사는 '이젠 그만 (Enough)'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영화 대사 중 가장 서늘한 것이다. 영화를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지난 3월 4일 전국 개봉했으며 일부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젊었을 때 큰 인기를 누렸던 남자배우가 나이를 먹으면서 잃는 것은 잘생긴 외모이고 얻는 것은 주름이 주는 너그러운 인상이다. '렌탈 패밀리: 가족을 빌려 드립니다'의 주인공 브랜든 프레이저에게서 이제 '미이라'(1999) 때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급격하게 늘어난 체중으로 배우로서의 삶이 추락할 때 그는 '더 웨일'(2022)을 통해 차라리 272㎏이라는 극단적 몸집의 캐릭터(특수분장)를 연기해 이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번 신작 '렌탈 패밀리: 가족을 빌려 드립니다'에서는 인생의 굴곡과 파고를 겪은 사람 특유의 밑바닥 인고(忍苦)의 표정을 현실감 있게 연기해 낸다. 영화를 만든 감독 히카리(본명 미야자키 미쓰요)가 브랜든 프레이저를 캐스팅한 건 역설적으로 신의 한 수였다. 일본 사회의 특수한 문화를 반영하는 역할 대행 서비스란 직종에서 백인 남자가 일한다는 건 아무래도 이야기를 짜맞추기가 쉽지 않거나 아예 억지스러운 일이 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 역할을 일본인 혹은 아시아인이 했다면 영화는 오히려 정말 그렇고 그런 신파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제목인 ‘렌탈 패밀리( レンタル・ファミリー, 렌타루 파미리)’는 영화 속에 나오는 역할 대행 서비스 회사의 이름이다. 이 회사는 타다 신지(히라 다케히로)라는 남자가 운영하는 것으로 아이코(야마모토 마리)라는 여성과 코타(기무라 분)라는 직원이 있다. 아이코는 주로 대리 사과 서비스를 한다. 의뢰인 남자의 요구에 맞춰, 남자와 실제로 바람을 피운 여자 대신, 남자의 아내에게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며 사과하는 역할이다. 그 일을 할 때 대체로 아이코는 남자 와이프에게 뺨을 맞는다. 뺨을 맞으면 2만 엔이 추가된다. 영화의 주인공인 필립 밴더플로그(브랜든 프레이저)는 미네소타 출신으로, 치약 광고 출연차 일본에 왔다가 7년째 눌러앉아 사는 중이다. 그의 에이전트는 일본에서 영화 출연 일을 찾아 주려 몇 년째 애쓰고 있지만 그는 오디션에서 번번이 탈락하면서 생계에 곤란을 겪는다. 2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공항으로 가는 기차역에 앉아 차마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컸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만큼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며 그리워한다. 필립은 현재 일본 도쿄에서 (특유의) 작은 원룸에 살며 거리에 나가 홍보용 인형을 쓰고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만큼 인생이 내려간 상태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연기 의뢰가 들어 온다. 장례식에 찾아가 슬퍼하는 백인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필립이 처음, 역할 대행 서비스 일을 알게 되는 계기이다. 거기까지는 이 영화가 필립의 역할 대행 일과 그 사연으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의 뻔한 스토리텔링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갖게 한다. 그러나 필립이 ‘렌탈 패밀리’란 직장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첫 일의 에피소드는 그런 당연할 것 같은 짐작을 뛰어넘는다. 필립은 자기 신랑 역할을 해 달라고 의뢰한 이케다(모리타 미사토. 맞다. 넷플릭스 일본 드라마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에서 1980년대 일본 AV업계를 강타한 포르노 여배우 역할을 한 그 모리타 미사토이다)란 여성에게 묻는다. 당신에 비해 내 나이가 너무 많지 않나요? 부모님이 허락하신 겁니까? 왜 내가 캐나다인이어야 하는 거지요? 필립은 이 모든 게 거짓말이고 거짓 인생을 파는 행위라며 결혼식 직전에 '출연'을 거부하고 도망을 치려고 한다. 화장실에 숨어 있는 필립에게 동료 직원 아이코는 이렇게 쏘아붙인다. "당신에게는 이게 고작 연기일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순간이 평생을 버티게 할 유일한 희망이야. 그걸 우습게 보지 마!" 필립은 결국 이케다와 성대한 결혼식을 잘 치러낸다. 그리고 신혼 첫날 호텔 룸에 둘이 어색하게 앉아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이케다를 찾아온 누군가를 보면 이 영화에 대해 무릎을 치게 된다. 그 누군가를 보고 있으면 아이코가 화장실 문 사이로 얘기한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희망’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역할 대행 서비스든 실제 연기자 생활이든 반드시 경계해야 할 금기사항이 있다. 넘지 말아야 할 선 같은 것이다. 그건 바로 '과몰입'이다. 연기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몰입을 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진짜 연기자는 연기를 할 때만 몰입한다. 연기와 실제를 구분할 줄 안다. 과몰입하면, 곧 지나치게 캐릭터에 동화되면 자칫 모든 것을 망가뜨리게 된다. 영화 '렌탈 패밀리: 가족을 빌려 드립니다'의 주인공 필립 역시 과몰입의 위기를 겪는다. 그 첫 번째 일은 미국 아빠 역할을 대행하게 되면서이다. 그는 미아(섀넌 마히나 고먼)라는 아이에게 진짜 부성을 느낀다. 아버지가 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근데 그 과정에서 필립 자신도 변하게 된다. 미아는 일본인 싱글맘 히토미(시노 시노자키)가 키우지만 혼혈이다. 히토미는 미아를 유명 공립학교에 입학시키려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의 아빠를 면접에 데리고 가야 한다. 미아는 나중에 필립이 가짜 아빠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필립의 또 다른 일 중에는, 한물간 원로 배우 하세가와 기쿠오(에모토 아키라)를 찾아 인터뷰하는 기자인 척 그를 위로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역할도 있다. 기쿠오는 그간 1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지만, 지금은 치매가 서서히 진행 중이다. 기쿠오는 필립에게 자신을 '탈옥'시켜 달라며 자기 고향인 아마쿠사로 가자고 한다. 규슈 지역 구마모토현에 있는, 일본 남부의 해안 마을이다. 기쿠오와 필립의 이 여정을 감독 히카리는 가장 공들여 찍었다. 기쿠오는 일본 신사를 볼 때마다 절을 하고 소원을 빈다. 필립은 일본에는 편의점보다 신이 많다고 말한다. 노인 기쿠오는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일본 신은 800만이나 되지.” 실제로 일본에는 '야오요로즈 노 카미', 곧 '800만의 신'이란 개념이 있다. 만물에 다 신이 있다는 의미이다. 필립은 기쿠오를 통해 모든 사람 한명 한명이 다 신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음을, 그 같은 인생의 진리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영화 '렌탈 패밀리: 가족을 빌려드립니다'에는 몇 가지 반전 아닌 반전이 있는데, 그것이 만든 트릭이 사람들을 살짝 놀라게 한다. 예를 들어 회사 '렌탈 패밀리'의 사장 타다가 사는 모습 같은 것이다. 타다의 실체를 알고 놀라게 되는 감정은, 처음에 필립에게 신랑 대행 서비스 일을 맡긴 여성 이케다의 정체를 알았을 때 이윽고 놀라게 되는 마음과 비슷한 맥락이다. 일본 사회뿐만 아니라 현대사회 자체가 개개인의 삶을 극도로 외롭게 고립시키며, 수시로 난관에 봉착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무서운 현실과 차가운 진실을 피해 갈 수 있다면 차라리 가짜를 선택하고 싶어 한다. 영화 '렌탈 패밀리: 가족을 빌려 드립니다'는 바로 그 같은, 사람들의 측은한 욕망을 반영하고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코끝이 찡해진다. 주인공 필립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여자를 산다. 그가 단골로 찾아가는 윤락녀(안도 타마에)는 필립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우리는 같은 일을 하네요. 당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나는 사람들의 몸을 위로하고." 모두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음을 영화 '렌탈 패밀리: 가족을 빌려드립니다'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걸 깨닫게 되는 과정은 다소 서글픈 것이다. 감독 히카리(미야자키 미쓰요)는 영화보다 OTT 드라마로 국내에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일본 야쿠자를 소재로 만든 갱스터 느와르 '도쿄 바이스'(2022)는 미국 HBO 맥스에서 나왔다. 넷플릭스의 인기 시리즈였던 '성난 사람들(BEEF)'(2023)에서는 총 3개의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보다는 이야기를 잘 짜는 감독이다. 그 섬세함이 좋다. 거기에다 밀어붙이는 연출의 힘이 남다르다. '도쿄 바이스'는 이런 계열 영화에 있어 전설 격인 마이클 만이 제작을 맡았던 작품이다. 히카리의 연출력을 인정했다는 얘기이다. '렌탈 패밀리: 가족을 빌려 드립니다'는 지난 2월 25일 개봉했다. 흥행성적은 과히 좋지 않은 편이다.
화제작 ‘하우스메이드, The Housemaid’에서 주목할 만한 배우는 사실 따로 있다. 주연인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소름 끼칠 정도의 광적인 연기를 펼쳤고 또 다른 주연인 시드니 스위니가 아직 젊고 어린 나이에도(1997년생) 놀랄 만한 알몸 연기와 베드신을 선보였지만, 올드팬들에게는 엘리자베스 퍼킨스의, ‘알아보기 힘든’ 노년의 모습(1960년생)이 더 놀랍다. 40년 전 ‘어젯밤에 생긴 일’(1986)에서 데미 무어와 나와 스타덤에 올랐고 영화 ‘빅’(1988)에서 톰 행크스의 상대역으로 나와 인기 절정이었던 배우다. 이번 ‘하우스메이드’에서는 남자 주인공 앤드루(브랜든 스클레너)의 엄마로 나온다. 대사도 많지 않다. 깡마르고 성질이 이상한, 뭔가 정신질환의 근원 같은 느낌의, 늙은 여자로 나온다. 스타도 다 한 시절이 있고 그것은 또 순간 지나간다는 것을 역력히 보여준다. ‘하우스메이드’는 처음엔 오래전, 전설이 된 B급 영화 ‘요람을 흔드는 손’(1992)의 리메이크가 아닐까 살짝 의심이 들게 한다. 일단 안정적인 집안에 가사도우미가 들어오고 그 여자와 집의 여주인, 그리고 그녀의 남편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정 살인극이라는 테두리가 흡사하다. 그러나 조금 더 보다 보면 극의 진행 방향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무엇보다 원작이 다르다. 아마도, ‘하우스메이드’의 배급사인 ‘라이언스게이트’는 그 점, 곧 ‘요람을 흔드는 손’을 의식했던 듯, 극의 방향을 중반부터, 그러니까 일찌감치, 완전히 트는 영리함을 선보인다. ‘요람을 흔드는 손’은 한 중산층 가정의 여성(애너벨라 쇼라)을 정신적으로 이상한 외부 여성, 곧 타자(레베카 드 모네이)가 공격하고 뒤흔든다는 줄거리였다. 의미상으로는 미국 사회의 보수적 가치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 준 내용이었다. 실제로 당시의 미국은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에서 빌 클린턴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조지 부시는 레이건에 이어 미국을 보수의 요람으로 만든 대통령이다. ‘요람을 흔드는 손’이 두 여성의 대결을 보여주고, 보수와 (혼란스러운) 진보의 대립을 보여줬던 작품이라면 이번 영화 ‘하우스메이드’는 오히려 여성의 연대와 연합을 보여준다는 점, 결과적으로는 남성 대 여성이라는 젠더 이슈를 강하게 내포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이다. (광기의) 남성 중심 사회는 궤멸하고 (합리적이고 똑똑한) 여성의 시대가 됐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 바로 이번 ‘하우스메이드’의 내용이다. 그 점 때문에 열광할 수도 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영화의 ‘정치적 내면’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일 것이다. 관객 대다수는 이 영화가 자아내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가 주는 매력에 빠질 것이다. 흥행 포인트가 낮지 않은 작품이라는 얘기이다. 젊은 여성 밀리(시드니 스위니)가 윈체스터 家의 저택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안주인인 니나(아만다 사이프리드)가 그녀를 환대하고 이 둘은 곧 밀리가 이 집의 가사도우미로 채용될지 그 여부를 놓고 얘기를 나눈다. 니나는 밀리가 도우미로 일하기엔 이력이 너무 ‘고퀄’인데 괜찮겠느냐고 말하며 곧 연락하겠다고 얘기하지만, 다음 장면은 자신의 고물차에서 ‘차박’을 하며 공용 화장실에서 몸을 씻고 이를 닦는 밀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밀리의 이력서는 다 거짓이다. 그녀는 전과자이며 보호관찰 대상이다. 나중에 알려지기로는 살인죄로 징역 15년을 받았지만 10년을 살다 가석방된 상태이다. 분위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짐작이 된다. 그러나 이상행동, 이상심리는 밀리가 아니라 니나에게서 시작된다. 밀리가 니나의 집으로 들어와 일하기 시작한 바로 다음 날 주인 여자 니나는 가정부 밀리가 학부모 회의에 쓸 자기 원고를 치웠다며 닦달 수준을 넘어선 난동을 부린다. 이를 보다 못한 니나의 남편 앤드루 윈체스터(브랜든 스클레너)가 간신히 아내를 달래며 상황을 수습한다. 밀리는 이후에도 앤드루의 친절한 도움을 계속해서 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엔 둘 사이에 로맨스가 발아하고, 당연히 염문과 비밀의 정사가 이어지게 된다. 앤드루의 아내, 밀리의 보스인 안주인 니나는 알고 보니 할로페리돌을 복용 중이다. 밀리는 욕실 변기 물에 약 한 알이 잠겨있는 것을 발견하고 니나가 먹지 않고 버린 것임을 알게 된다. 할로페리돌은 조현병 약이다. 조현병 환자들은 종종 걷잡을 수 없이 폭력적인 증상을 보인다. 자학과 가학을 오간다. 밀리는 니나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보호관찰 중이라 이 일이 꼭 필요한 상황이다. 게다가 니나는 밀리가 이력을 속인 것, 살인죄를 저지른 것까지 이미 다 아는 상황이다. 니나의 딸이자 앤드루의 의붓딸인 씨씨(인디애나 엘)도 밀리를 막 대한다. 앤드루의 엄마인 에블린 윈체스터도 밀리에게 불친절하고 기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에블린 여사는 니나의 집에 가보 급이라며 도자기 그릇 세트를 가지고 온다. 이 그릇 세트는 나중에 반전의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정원사인 엔조(미켈레 모로네)의 행동도 수상쩍기가 이를 데 없다. 니나와 엔조는 뭔가를 공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극 후반에 가서 보면 실제로 두 사람이 엄청난 일을 꾸몄음을 알 수 있다. 더 정확하게는, 니나가 꾸미고 엔조는 그걸 돕거나 묵인하는 쪽이었다. 니나의 광기와 집착, 이상한 편집증 증상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가고 이미 밀리와 통정을 한 앤드루는 에라 모르겠다며, 둘 사이를 밝히고 니나에게 이제 집을 나가라고, 그만 썩 꺼지라고, 그답지 않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둘은 씨씨 외에 또 다른 아이, 자신들만의 아이를 갖길 원했지만 니나가 불임임을 알게 되고 불화가 시작되던 터이다. 니나는 결국 쫓겨나고 이야기는 점점 파국으로 흘러간다. 광기의 니나는 과연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펼칠 것인가. 만약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간다면 ‘하우스메이드’는 실로 그렇고 그런, 아니 그렇고 그런 보다도 못한, 과거의 TV 아침 드라마, 그것도 막장 드라마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영리하게도 중간에 방향을 튼다. 여자 대 여자의 대결에서 여자 대 남자의 대결로 그리고 여자와 여자의 연대와 단합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영화 ‘하우스메이드’는 반전의 드라마이다. 사건의 발단부터 관객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는 걸 보여준다. 단, 그것의 억지스러움을 줄이고 개연성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반전의 순간을 빠르게 준비한다는 것이 다른 반전 드라마와 다르다면 다른 영화이다. ‘하우스메이드’의 전반부는 사건이 벌어지는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그 사건에 대한 해설서와 같은 식으로 전개된다. 그렇다면 누군가 저걸 다 짰다는 얘기인데 혼자서 그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으로 앞서 벌어진 모든 일을 복기하게 되지만 별반 허점을 발견하지 못하게끔 상황들을 치밀하게 구성해 놓았다. 그런 점에서 레베카 소넨샤인의 각본은 프리다 맥파든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하는 데 있어 탁월한 감각을 선보인 셈이다. 소넨샤인도 연출 출신이다.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외모가 아닌 연기력으로 평가받는 배우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접시를 집어 던지고 발악하는 연기는 사이프리드를 따라갈 수 없다.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이 영화 직전에 출연한 ‘세븐 베일즈’(2023)에서 편집증에 시달리는 연극연출가 역을 비교적 무난하게 소화함으로써 내면 연기의 수준을 한 단계 올린 상황이었다. ‘하우스메이드’는 어쩌면 그 연장선상의 작품이다. 남편 앤드루 역의 브랜든 스클레너는 국내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배우이다. ‘바이스’ ‘미드웨이’ 등에 조·단역으로 나왔고 OTT ‘파라마운트+’의 최고 히트작 ‘옐로스톤’의 프리퀄 드라마 ‘1923’으로 서서히 이름을 얻고 있는 배우이다. 주연인 시드니 스위니도 HBO 드라마 ‘유포리아’로 주목받았다. 브래드 피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맨슨 패밀리의 ‘스네이크’로 나와 극악한 연기에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우스메이드’에는 기성 스타들과 라이징 스타급 연기자들이 앙상블을 이룬다. 이 영화 역시 ‘요람을 흔드는 손’과 같은 B급 히트작이다. 심심한 극장가에 재미의 바람을 몰고 올 영화이다. 게다가 여성들이 힘을 합친다. 올바른 정치사회학까지 지녔다. 티켓값은 톡톡히 하는 영화라는 얘기이다. 지난 1월 28일 전국 개봉했다.
2020년에 발간된 스티븐 킹의 중단편집 ‘피가 흐르는 곳에, If it bleeds’의 모든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현재 한국 극장가의 구석, 곧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거의 종영을 기다리고 있는 ‘척의 일생’도 이 중단편집에 두 번째로 실려 있는 원작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답게 다소 기이한 공포의 감성도 섞여 있는데 예컨대 척의 할아버지 앨비(마크 해밀. 맞다.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 역의 그 마크 해밀이다)가 어린 손자인 척(벤자민 파자크)에게 절대로 올라가면 안 된다는 지붕의 골방과 같은 존재가 그렇다. 인자한 할아버지가 절대 금기시하는 그 방에는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 실제로 할아버지 앨비는 이 방문을 연 손자를 계단으로 밀쳐 낸 후 방 안의 ‘어떤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미스터리는 스티븐 킹의 장기이자 일종의 낙관 같은 것이다. 없어서는 안 될 그의 소설 속 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 전체의 주제를 밀고 나가는 하나의 소도구이자 맥거핀(MacGuffin: 눈속임 장치)일 뿐이다. 그의 작품에는 그보다 더 심오한, 인생과 세상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 감독인 마이크 플래너건 역시 지금까지 ‘오큘러스’나 ‘힐 하우스의 유령’ 같은 공포 영화 혹은 시즌 드라마를 만들어 왔다. 플래너건이야말로 스티븐 킹의 원작을 작품의 훼손 없이, 그러나 자기식의 해석을 곁들여 잘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능공 같은 감독이다. 이번 ‘척의 일생’은 플래너건이 스티븐 킹의 적자임을 증명해 낸 작품과 같다. 영화는 소설처럼 총 3막으로 구성돼 있되 특이하게도 역순으로 흘러간다. 처음의 3막은 ‘고마워요, 척’이고 2막은 ‘버스커는 영원하다’이다. 마지막 1막은 ‘나는 수많은 것을 담고 있다’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서로 다른 이야기, 다른 사람의 관점을 담고 있는 듯 느껴진다. 특히 3막의 ‘고마워요, 척’은 지구 종말의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이다. 여기에 잠깐 스치듯 척이 병상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비춘다. 세상의 멸망은 마치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일들처럼 진행될 것이라는 점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오싹하게 만든다. (스티븐 킹이 그려내는 공포는 물리적이고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심리적인 데에 있다) 캘리포니아 거의 전체가 지각 변동으로 가라앉으며 사라지고 네바다로 난민이 대거 유입되지만, 인터넷도 끊기고 방송도 없어지며 속수무책이 된다. 3막의 주인공 마티 앤더슨(추이텔 에지오포)이 직장인 학교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다 만난 이웃집 남자 거스(매튜 릴라드. 1996년 공포 영화 ‘스크림’의 살인자 역 배우이다)는 그에게 절망스러운 푸념을 늘어놓는다. 거스는 집에 오는 도로에 엄청난 싱크홀이 생겨 차를 버리고 5km 넘게 걸어 온 참이다. “캘리포니아의 나머지 20%도 완전히 없어졌대. 중서부는 (가뭄 때문에) 숯덩이고 플로리다는 홍수래. 식량 생산지역이 없어졌어. 아시아는 기근에 흑사병이고 러시아 정부는 전복됐대. 파키스탄하고 인도가 4일간 전쟁을 벌였고 독일에서는 화산이 폭발했어. 세상에 독일에 화산이 있었어?” 마티 앤더슨과 거스가 한탄하는 것은 멸망과 멸종의 순간을 그저 넋 놓고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무력감 때문이다. 마티는 ‘그 순간’이 바로 코앞에 다가설 때 헐레벌떡 자신의 전 부인인 펠리시아(카렌 길런)를 찾는다. 그런데 이 얘기와 척의 일생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2막과 1막으로 서서히 실체가 드러난다. 실제로 척의 중년기(톰 히들스턴)와 소년기(벤자민 파자크)의 얘기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중년기의 척, 곧 찰스 크랜츠는 어느 날 회계사들을 위한 컨퍼런스에 왔다가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테일러(테일러 고든)의 드럼 비트에 맞춰 충동적으로 춤을 춘다. 척은 연애 10개월 만에 남자에게 차인 여자 재니스(애널리스 배소)를 길 중앙으로 리드하며 한바탕 길거리 무대를 ‘찢어 놓는다’. 척의 춤 실력은 초등학생 때의 춤 동호회 ‘트월러와 스피너’에서 갈고 닦은 것이지만 사실은 할머니인 사라(미아 세라)에게서 온 DNA이다.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곧 태어날 여동생 모두를 교통사고로 잃은 척은 조부모의 손에 의해 길러지고 할아버지처럼 회계사가 돼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내 지니(코리안카 킬처)와 행복한 삶을 이어 가지만 뇌종양으로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곧 죽어 갈 운명이 된다. 소년 척이 다니는 과거의 학교는 현재의 마티 앤더슨 교사가 근무하는 곳이다. 척이 복도를 지나갈 때 교실에 앉아 있는 사람이 마티 교사이다. 그는 소년 척이 자기 자신보다 30cm가 큰 소녀 캣 맥코이(트리니티 조리 블러스)와 댄스 경연 대회의 분위기를 역시 ‘찢어 놓을 때’ 그걸 지켜보기도 한다. 마티와 펠리시아 전 부부가 지구 멸망 전 올려다보는 하늘은 소년 척이 쳐다본, 별이 가득한 하늘과 같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인물들은 별도로 존재하는 듯, 상대의 존재를 초월적 감각으로 인식한다. 17살이 된 청소년 척(제이콥 트렘블레이)은 할아버지의 장례를 맡은 장의사 샘 야보로(칼 럼블리)에게 예언자에 관한 얘기를 듣는다. 이 야보로는 3막에서 주인공 마티 앤더슨이 길거리에서 만나는 그 장의사이다. 인간의 삶은 어쩌면 운명처럼 예정돼 있다는 것이 이 장의사의 얘기이다. 이쯤 되면 3막에서 그려진 세상의 멸망과 2막, 1막으로 ‘뒤집혀서’ 이어지는 척의 일생이 어떤 내용으로 연결되고 있는지가 떠올려진다. 그 의미도 드러난다. 우주는 인간이고 인간은 우주이다. 우주의 멸망은 인간 모두의 죽음이지만 척과 같은 한 인간의 죽음 역시 우주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3막에서 주인공 마티는 ‘고마워요, 척!’이라는 수많은 입간판, 광고 빌보드, 꺼져 가는 TV의 마지막 광고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의아해한다. 찰스 크랜츠는 도대체 누구인가. 왜 그에게 39년간의 노고에 고맙다고 하는가. 그는 주변에 묻고 또 묻는다. 할아버지마저 돌아간 후 17살이 된 척은 절대로 열지 말라던 지붕의 방을 연다. 그리고 거기서 누워 죽어가는 자신인 중년의 척, 39살의 척을 본다. 그리고 3막에서 마티의 전 부인인 펠리시아가 병원에서 들었던(그녀는 간호사이다) 심장 모니터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린다. 17살 척은 자신의 마지막을 목격한다. 척은 중얼거린다. “없었던 것처럼 (못 봤던 것처럼) 살 거야. 삶이 끝날 때까지 내 삶을 살아갈 거야. 나는 경이로운 존재야. 난 수많은 것을 품고 있어.” 영화 ‘척의 일생’은 우주와 나는 하나라는, 우주의 근원은 나 자신의 실존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삶을 사랑하고 지탱해 나가는 노력이 우주 자체를 살리는 작은 실천과도 같다는 점을 얘기하는 작품이다. 스티븐 킹과 그를 흠모하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점점 동양의 사상과 철학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의 철학인 셈이다. ‘척의 일생’은 미국의 배급사 중 새로운 강자인 네온(‘기생충’ 배급)의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크리스마스 대목을 겨냥해 개봉됐지만 1월 19일 현재까지 관객 25,989(영화진흥위원회 박스오피스 집계 기준)명을 모으는 데에 그쳤다. 수작은 종종 외면받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는 넷플릭스 최대 히트작 가운데 하나이다. 에피소드가 여럿 있는 드라마와 달리 이 작품은 단 회 형식으로 한 편씩 공개돼 오고 있다. 러닝타임은 대략 2시간 10여 분씩들이다. 이번이 세 번째로 부제는 ‘웨이크 업 데드 맨’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죽은 자가 (예수처럼) 살아나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돼 있다.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는 미스터리 추리극을 골간으로 한다. 주인공이 사설탐정이다. 이름은 브누아 블랑(다니엘 크레이그)이다. 블랑 탐정의 캐릭터는 1회 때는, 아무리 댄디한 신사형으로 바꿨다 한들 명백히 전설의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에르퀼 푸아로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2편을 거쳐 이번 3편에서는 역사상 지금까지 손에 꼽을 수 있는 여러 사립 탐정 캐릭터를 다 혼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대실 해밋의 샘 스페이드도 들어 있고,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도 들어 있다. 이들은 대체로 더블버튼 재킷 정장을 입고 다니며 총을 갖고 다니지 않고, 폭력을 쓰지 않는다. 오로지 지략과 통찰, 혜안으로 사건을 헤쳐 나가는 인물들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있어 모두가 ‘도사급’이다. 기본적으로 이런 하드보일드 혹은 필름 누아르 계열에서의 사립 탐정은 상대가 아무리 고상한 인격자라도, 또 아무리 뇌쇄적인 미모의 여성이라도 일단 모든 걸 의심하는 남자이다. 브누아 블랑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나이브스 아웃’ 곧, ‘칼을 뽑아 들다’라는 제목처럼 블랑은 기사도가 넘치는 척, 사실은 인간 다수의 어두운 욕망을 요리조리 잘 저울질하고 요리하면서 얄미울 만큼 똑똑하게 상대를 다뤄 나간다. 이번 '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 맨'은 뉴욕주 올버니 교구에서 사제 수업 중인 주드 듀플렌티시 신부(조쉬 오코너)가 늘 비아냥대던 부제에게 참지를 못하고 주먹을 날린 죄로 뉴욕주 북부 외곽의 침니록이란 마을의 본당 보좌 신부로 좌천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직급은 보좌 신부로 올라갔지만 침니록의 이 성당은 골칫덩어리다. 랭스트롬 주교(제프리 라이트)에 따르면, 이곳은 가톨릭의 사각지대로, 올버니 교구가 사실상 버린 성당쯤으로 취급하는 곳이다. 그곳의 본당 신부인 제퍼슨 윅스(조시 브롤린)가 신부로서는 가당치 않은 악행과 기행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며 그의 막무가내식 극단주의는 일부 신도들만 추종하게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문제 성당’이 된 지 오래라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 부분 지금의 트럼프 캐릭터와 그의 호전적인 슬로건인 MAGA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의 극우 추종자들을 희화해 설정한 것이다) 랭스트롬 주교는 주드 듀플렌티시 신부에게, 그런 곳인데 네가 정말 해 낼 수 있겠느냐, 감당할 수 있겠는가, 라고 걱정스럽게 말한다. 아니나 다를까, 제퍼슨 윅스의 광기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인 상태다. 그가 주드 보좌 신부를 상대로 하는 고해성사는 대부분 이번 주는 자위를 몇 회를 했다느니, 그때 어떤 여자와 어떤 장면을 상상했다느니 하는 얘기일 뿐이다. 주드 듀플렌티시 신부는 사제 수업을 받기 전 권투 선수였고, 오로지 증오심으로 펀치를 두들겨 상대 선수를 사망케 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이다. 간악한 윅스는 그런 주드를 부추겨 스스로 침니록을 떠나게 할 셈인 것이다. 윅스에게는 ‘다 계획이 있다.’ 새로 들어 온 신도들을, 그들이 지닌 과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난해(대체로 고해성사실에서 들은 얘기이다) 스스로 성당을 박차고 나가게 한다. 오로지 자신에게 충성하거나, 이해관계 면에서 필요한 골수 신도들만을 데리고 예배를 본다. 윅스 추종자 중 톱은, 어린 시절부터 제퍼슨 윅스를 보좌해 온 마사라는 이름의 여인(글렌 클로즈)이다. 마사는 원래 제퍼슨 윅스의 아버지이자 침니록의 신부였던 프렌티스 윅스(제임스 포크너)의 어린 소녀 신도였다. 프렌티스 윅스는 재산 8천만 달러를 숨긴 채 갑자기 사망했으며 이번 드라마의 살인사건은 모두 故프렌티스 신부의 막대한 재산에서 비롯된다. 성당의 모든 회계와 재산 관리는 그간 마사가 일임해 왔다. 마사 외의 주요 성당 인물로는 알코올 중독자 의사인 냇(제러미 레너)이 있고 여성 변호사 베라(케리 워싱턴)가 있다. 베라의 배다른 남동생 싸이(대릴 매코맥)는 뉴욕주 정계 진출에 실패한 뒤, 스마트 폰으로 연신 영상을 촬영하고 다니는 극렬 유튜버가 됐다. 이번 사건의 증거 자료 상당수는 싸이의 동영상에서 나온다. 여기에 한물간 펄프 픽션(대중소설) 작가 리 로스(앤드류 스콧)가 나오고 세계적 첼리스트였지만 지금은 심리적인 이유로 걷지를 못하는 시몬이라는 여성(케일리 스페이니)이 나온다. 제퍼슨 윅스 신부는 이 여성, 시몬에게서 성당 헌금 대부분을 갈취한다. 그리고 마지막 주요 인물이 정원사인 샘슨(토머스 헤이든 처치)이다. 샘슨은 마사의 정인(情人)이다. 자, 이 ‘천하의 나쁜 놈’ 제퍼슨 윅스 신부가 여느 때처럼 그날도 호전적이고도 극단의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내세우며 여성 혐오주의 발언의 강론을 한 후 제단 옆 창고에서 잠시 쉬고 있다가 등에 악마 문양의 손잡이가 있는 칼이 꽂힌 채 살해당한다. 성당 안에는 주드 보좌 신부와 마사와 샘슨, 냇, 베라와 싸이, 리 로스 그리고 시몬만이 있던 상태였으며 그들은 신부 윅스가 밀실인 제단 옆 창고에서 갑자기 살해된 후 그가 ‘시체가 된 것’만을 목격한 증인들이 됐다. 창고 안에는 누가 있었을까. 창고에서 가장 가깝게 있던 사람은 누구일까. 당장 주드 듀플렌티시 보좌 신부는 유력한 용의자로 수사선상에 오르게 된다. 사립 탐정 브누아 블랑이 푸는 이번 사건 역시 밀실 수수께끼이다. 미스터리극에서 벌어지는 밀실 사건의 범인은 언제나 밀실 안에 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밀실 안에 있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죽은 사람이라면? '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 맨'은 퍼즐의 퍼즐을 풀어내야 한다. 밀실에 누군가 더 있었는가. 밀실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인가. 윅스가 죽을 때 밀실 안에서는 순간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브누아 블랑이 의심하는 것은 살인의 교묘한 계획보다는 그걸 왜 저질렀느냐는 행동 동기이다. 모든 건 동기이다. 그 점을 찾아 가면 이 드라마의 범인이 보인다. 제퍼슨 윅스는 살해당했지만, 며칠 후 무덤에서 부활한다. 그게 CCTV에 찍히자 침니록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침니록의 경찰서장 제럴딘(밀라 쿠니스)은 주드 신부를 막 체포할 참이다. 자 당신의 선택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밀실 살인사건의 범인은 밀실 안에 있다. 적어도 밀실이 문제다. '나이브스 아웃' 시리즈는 정치사회 풍자가 충만한 탐정극이다. 지난 2편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의 조롱 대상은 일론 머스크였다. 이번 비아냥의 대상은 명백히 트럼프이다. 미국 할리우드는 적어도 트럼프를 미친 극단주의자로 보고 있다. 트럼프와 미국 영화계의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이다. 제임스 본드를 사망케 함으로써 ‘007시리즈’에서 하차한 다니엘 크레이그가 이제 브누아 블랑으로 재탄생 중이다. 크레이그는 늘, 매력적이다.
프랑스 영화 '파리, 밤의 여행자들'은 한국 극장가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이런 영화일수록,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지만, 수작이다. 단아하다. 그 안에 많은 말을 담고 있다. 이런 영화가 한국에서 안 되는 이유는 프랑스 영화이기 때문에? (시장의 할리우드 의존도가 병적인 수준이다)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나오기 때문에? (지금의 영화 주 소비층이 잘 모르는 배우이다) 그것도 아니면 내용이 지난 시대 얘기여서? (1980년대가 배경이다) 이유는 복합적이다. 어쩌니저쩌니 이 영화를 외면하는 것이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다. 엘리자베트(샤를로트 갱스부르)는 막 이혼한 상태다. 정확하게는 ‘당’했다.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 엘리자베트는 각각 고등학교 고학년과 저학년인 딸 쥬디트(메간 노섬)와 아들 마티아스(키토 라용-리슈테르)를 키우는 중이다. 애들이 커 갈수록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 아이들의 할아버지(디디에 산드로)는 그런 딸이 내심 불안하고 그래서 경제적으로 도와주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일이라는 걸 서로가 잘 안다. 엘리자베트는 남편 의존도가 높았던 전형적인 생활 주부였다. 새로 일을 시작하기도 늦은 나이다. 불안하고 무섭다. 그녀는 그래서 안절부절못한다. 엄마보다 더 철이 든 것 같은 딸 쥬디트는 ‘징징대는’ 엄마를 달래기 일쑤다. 엘리자베트는 출근 첫날 직장에서 잘린다. “왜 엄마?”라고 묻는 쥬디트에게 엘리자베트는 창피한 일이라는 듯, “‘저장하기’ 누르는 걸 까먹었어. 그래서 입력한 걸 다 날려 먹었어.”라고 말한다. 영화의 배경은 1981년에서 1988년이다. 1984년과 1988년, 두 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힘들긴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좋아하는 라디오 방송국의 전화 교환원 일을 얻는다. DJ 방다(엠마누엘 베아르)의 심야 음악 프로그램은 청취자의 사연을 읽어 주는 걸로 인기를 얻고 있고 종종 직접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과 실시간 대담을 이어 나간다. 엘리자베트는 이들과 먼저 얘기를 나누고 어떤 대화를 원하는지 감별해서 방다에게 연결하는 역할이다. 민감한 일이다. 있을 수 있는 변태의 전화, 장난 전화를 걸러내서 미리 차단해야 한다. 엘리자베트는 실수도 하지만 점점 자신의 역할에 적응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탈룰라(노에이 아비타)라는 이름의, 갈 곳 없는 소녀를 알게 되고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게 되기도 한다. 아이 둘은 알아서 성장하는데 딸은 정치 고관여층 젊은이로 커 가고 아들은 작가 지망생이지만 아직 출판사로부터는 좋은 소식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삶의 순간순간이 비록 힘은 들지만 그래도 조금씩 움직여 간다. 엘리자베트는 방송국 PD와 잠시 가까워지는 듯하지만, 육체관계 한 번으로 끝난다. 그녀는 실망하고 외로워한다. 방송국 일 외에도 도서관에서 파트타임으로 임시 사서 일도 하게 된 엘리자베트는 책을 빌리러 온 연하남 위고(티볼트 빈콘)와 사랑에 빠진다. 둘은 같이 살지는 않지만 서로를 오가며 자유로운 연애를 즐긴다. 엘리자베트는 비로소 진짜 사랑, 의존하지 않고 상대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을 하게 된다. '파리, 밤의 여행자들'을 두고 어떤 이혼녀들, 홀로서기를 감행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들은 엘리자베트에게 강한 동일화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가 매우 낭만적이라고 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영화가 착하고 예쁘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파리의 야경이 매력적으로 펼쳐지는 영화이긴 하다. 아들 마티아스, 입양한 듯같이 살아가는 딸 탈룰라(가끔 약을 해 엘리자베트를 미치게 만든다)는 종종 사는 집의 발코니 위, 지붕에 올라가 담배를 피운다. 파리의 밤이 아름답다. 마티아스와 탈룰라, 쥬디트는 종종 극장을 간다. 그때의 청소년들에겐 여가를 보내기에 극장이 최고였다. '그렘린'이 상영되고 막 '인디아나 존스'의 인기가 시작되던 때였다. 그러나 이 영화가 낭만적이라느니 예쁘다느니 하는 것은 으레 하는 소리일 수 있다. '파리, 밤의 여행자들'은 그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고, 지금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진보 사회에 대한 믿음과 희망 같은 것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다. 그건 이 영화가 굳이 이 2020년대를 돌진하고 있는 시대에 (2022년 작품이다), 그것도 OTT의 온갖 콘텐츠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굳이 1980년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친 것만으로도 단박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1981년 5월 10일이라는 날짜가 명시된 이유가 있다. 좌파 정당을 대표하던 사회당이 만년 2등에서 벗어나 전후 최초로 결선투표에서 이겼다. 새 시대를 위한 변화를 희망하는 대중의 환호 속에 엘리자베트의 가족들이 자연스레 어울린다. 그 와중에 탈룰라도 파리에 막 도착했다. 1980년대는 프랑스에선 희망의 시대였다. 정통 사회주의자 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의 1기 집권 시대로 드디어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의 적통을 이어받는 인민을 위한, 민중을 위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들떴던 시대이다. 부대끼며 살아가기가 너무도 힘든 세상이지만 그래도 따뜻한 심성의 아버지가 늘 뒤에서 위로해 주고(미테랑처럼) 아이들과 엄마는 그래도 극단의 갈등은 피해 가며 서로를 인정하는 선에서 물러날 줄 알았던 시대이다(코아비타시옹, 좌우 동거 정부). 밖에서 ‘업어 데려온’ 여자아이가 불편하지만 그래도 같이 살아가려 애쓴다. 지금의 프랑스 사회가 이민자라면 질색하며 극우화되고 비정상사회가 된 것과는 정말 다른 분위기의 사회였음을 보여 준다.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더불어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서로 멀리서 떨어져, 혹은 바로 옆에 있더라도 문자와 이모티콘, 갖가지 생경한 약어로 디지털 ‘소통’하는 지금 세대와는 달리 영화 속 사람들은 자신의 얘기를 글로 써서 보내고 전화 통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 1980년대에 사람들이 살아가던 모습은 2020년대의 우리가 보기엔 완벽한 SF이다. 심지어 엘리자베트의 딸 쥬디트처럼 아이들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다. 아들 마티아스처럼 뭔가를 쓰고 생각하며 사유하고 성찰하려 했다. 그런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어디에 있는가. 영화 '파리, 밤의 여행자들'이 묻고 있는 질문이다. 그런 질문에 맞닥뜨리게 될 즈음엔 이 영화가 이혼녀의 얘기라느니, 예쁘고 착한 영화라느니 하는 생각은 사라지게 된다. 감독인 미카엘 허스가 바라는 것은 작게는 프랑스 사회의 1980년식 복원에서 크게는 (지금으로서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지적들 하겠지만) 세상이 과거에 지향했던 인간적 사회주의라는 목표를 되찾는 것일 수 있다. 특히 후자에 더 방점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가족은 같이 살아야 하며 그 가족이 혈연으로 구성된 것이든 의지로 만들어진 새 가족이든 상관없이 함께 살아가는 삶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 밤의 여행자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프랑스의 정통 좌파 영화이다. 그걸 드라마 장르로 풀었다. 그 속내가 보이면 영화가 매우 흥미롭다. 어쩌면 요즘 관객들은 그걸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복잡한 마음이 든다. 그게 맞다.
영화 역사상 가장 논쟁적이다 못해 추악한 논란에 휩싸였던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당시 주연 여배우였던 마리아 슈나이더의 입장에서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솔직히, 주요 관계자들이 다 고인이 됐기 때문이다. 감독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말년을 휠체어에서 지내다 (마치 이 영화에서 지은 죄과의 대가를 치른다는 듯) 타계했고, 말론 브랜도는 그 훨씬 전에 죽었으며 마리아 슈나이더 역시 비교적 젊은 50대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베르톨루치는 강간 신을 찍는 과정에서 대본에도 없었고, 여배우에게도 동의를 구하지 않은 상태로 실제처럼 (실제였을 수도 있는 데다 그것도 항문 섹스 장면이었다) 촬영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화는 미국의 한 좌절한 중년 지식인 남자 폴(말론 브랜도)이 파리에 와서 젊은 여자 잔느(마리아 슈나이더)를 만나고 격렬한 일탈의 정사 신을 이어 나간다는 이야기이다. 1972년 작이다. 이때의 베르톨루치 감독은 '순응자'를 찍은 후였고 '1900년'을 찍기 전이었다. 베르톨루치는 이탈리아를 넘어서서 유럽의 역사, 서구의 역사를 격렬한 서사의 드라마로 만들어 내는데 일가견이 있었으며 당시의 여타 감독들이 그랬듯이(예컨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처럼) 정치와 섹스를 혼합해 내려 했다. 그 정점에 있는 영화가 바로 그의 프랑스 파리 올 로케 촬영 영화이자 말론 브랜도와 마리아 슈나이더가 나왔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이다. 이 영화 '나의 이름은 마리아'를 보는 데 있어 다음 두 가지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베르톨루치는 왜 이때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찍었으며,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이고 또 하나는 그렇다면 제시카 팔루 감독은 왜, 그것도 지금, 이 영화 얘기를 다룬 '나의 이름은 마리아'를 찍으려 했는가, 이다. 과거와 현재의 두 작품이 갖는 이중의 행동 동기를 생각해 봐야 한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68혁명의 소용돌이가 지나가던 1970년대, 미국과 유럽을 휩쓸었던 반전 시위들, 좌우의 날카로운 대치와 대척점에서 스스로 이념의 좌표를 한층 분명히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말론 브랜도가 보인 폭력적 행동은 (그는 여자를 강간하면서 ‘종교는 야만인들을 교육한다’를 중얼거리고 그걸 여자에게 따라 하게 시킨다. 이건 수많은 포르노그래피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성적인 흥분을 강요하기 위해 요구하는 대사를 연상케 한다) 보수와 역사적 반동의 움직임을 혐오하고 경멸하게 하려는 처사처럼 느껴진다. 그런 정치성은 차치하거나 무시되고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당연히 흥행도 뒤따랐다. '나의 이름은 마리아'의 원제는 ‘마리아 되기(Being Maria)’이다. 원작 소설은 마리아의 사촌 동생 바네사 슈나이더가 쓴 '너의 이름은 마리아(불어판 제목이다. 영어판 제목은 ‘내 사촌 마리아 슈나이더')이다. 제시카 팔루 감독은 영화 속에서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 누르라는 캐릭터(셀레스트 브룬켈)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낸다. 바네사는 아마도 마리아 슈나이더(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의 생전에 그녀를 가장 잘 이해했던 인물일 것이다. 감독 제시카 팔루는 마리아와 누르(바네사 자신일 수 있다)를 동성의 연인 관계로 발전시킨다. 어쨌든 팔루는 마리아 슈나이더의 ‘행복하지 않았던 (‘불행했던’이 아니고) 여배우로서의 생애를 돌아보며 예술이라는 미명으로, 그리고 영화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여자로서의 배우’가 착취되고 소모되는지를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리아 되기, 곧 마리아를 올바로 이해하면 여성의 문제, 여배우로서의 정체성, 너와 나 모두 자기 자신의 자아를 찾는 데 있어 지름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 슈나이더는 누르와 인터뷰 도중 이렇게 말한다. “문제의 그 장면을 찍은 후 두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어. 베르톨루치와 브랜도 둘에게. 촬영이 끝나고 아무도 내게 사과하지 않았어.” 슈나이더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첫 주연작이었으며, 이 영화 이후 영화적으로는 주목할 만한 작품에 출연하지 못했고, 헤로인 중독에 시달렸으며 사람들이 보내는 따가운 ‘시선 강간’의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영화 '나의 이름은 마리아'의 전반부는 문제의 영화를 촬영하는 장면, 후반부는 마리아가 쇠락하고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영화감독이 여배우를 예술적으로 착취하고 소모한 사례는 많다. 오시마 나기사는 '감각의 제국'에서 마츠다 에이코를 소모했고 배우 김태연은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 이후 출연작을 거의 가지지 못한 채 사라졌다. 탕웨이는 '색, 계' 논란을 딛고 스스로 잘 성장했지만, 이것은 어찌 보면 드문 케이스에 속한다. 그러나 결국 예술적 착취 논란 역시 예술이나 영화의 한계를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본질의 문제이며 따라서 쉽게 정의하거나 일도양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시카 팔루의 영화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뜨거웠던 1970년대 여배우의 일생을 차분하게 톤다운 시키려는 태도가 역력해 보인다. 근데 다소 지나치게 눌렀다. 문제는 베르톨루치니 말론 브랜도니 하는 옛날 감독과 배우를 전혀 모르는 세대의 관객들에게 이 이야기가 갖는 복잡성, 이유, 의미를 전달해 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지 않은 세대에겐 다소 지루한,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일생의 드라마일 뿐이다. 게다가 그 파란만장에서 파란의 아우라도 좀 빠져 있다. 아마도 '나의 이름은 마리아'는 70년대와 베르톨루치의 영화와 말론 브랜도를 기억하고 추앙했던 올드 세대‘만’을 위한 영화일 수 있다. 이 영화가 조기에 큰 극장에서 종영된 이유로 보인다. 마리아 슈나이더 역을 맡은 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는 프랑스의 차세대 주자급이다. 할리우드에서 스타가 된 쿠바 출신의 아나 데 아르마스 같은 배우가 프랑스에 있다면 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일 것이다. 바르톨로메이의 전작 '레벤느망'은 그녀의 연기 덕에 만들어진 보기 드문 역작이었다. 말론 브랜도 역에 맷 딜런이 캐스팅됐고 싱크로율 백 퍼센트에 가깝게 캐릭터를 만들어 냈지만 (맷 딜런은 브랜도가 얘기할 때처럼 아래턱을 앞으로 내밀고 웅얼거리는 걸 그대로 따라 한다) 영화 전체적으로 볼 때 그다지 인상적으로 배치되지 못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역의 주세페 마지오는 아무런 효능감을 보이지 못한다. 제시카 팔루의 연출이 지나치게 ‘평평한’ 탓이다. ‘큰 영화 역사’에 짓눌려 있는 듯 보인다. '나의 이름은 마리아'는 보는 영화보다는 ‘읽는 영화’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1970년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논란을 정리하기에는 좀 심심하다. 지난 11월 26일에 개봉했다. 소수의 예술 영화 전용관에서 상영 중이다.
영화는 스스로 각성해 사회를 각성시키려 한다. 그러나 각성하길 원하는 사회 주체들은 정작 영화를 볼 시간과 여유가 없다. 반대로 각성의 대상들은 영화에 무관심하다. 계급사회에서 사회적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이 고립되는 이유이다. 대만 영화 ‘왼손잡이 소녀’의 운명이 딱 그렇다. 뼈아픈 모녀 3대의 가족 얘기이고 비교적 참담한 얘기지만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만 귀 기울일 뿐, 정작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국내에서는 개봉 일주일 만에 전 극장에서 사라졌다. VOD, IPTV, OTT를 떠돌겠지만, 극소수의 지지자들만이 남을 것이다. 배경은 타이베이의 야시장이다. 엄마 슈펀(채숙진, 蔡淑臻)은 큰딸 이안(마사원, 馬士媛)과 둘째 딸 이징(엽자기, 葉子綺)을 데리고 국수 가게를 연다. 첫째는 갓 성인이 된 나이지만 둘째는 아직 5살이다. 두 아이는 아빠가 다르다(고 짐작된다. 사연이 있어 보인다). 세 모녀는 사는 게 각박하다. 슈펀은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하지만 늘 월세를 내지 못한다. 죽어가는 전 남편, 이안의 아버지가 남긴 빚 때문으로 보인다. 이 남자는 결국 장례 부담까지 남기고 죽는다. 죽은 남자는 한때 슈펀의 본가를 도와줬던 것으로 보인다. 중소 규모의 공장을 했고 슈펀의 엄마, 그녀의 자매들을 도와줬지만 정작 부도가 난 후에는 따돌림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들 돈 버는 방식이 이상하다. 슈펀만 정상적이다. 노동을 통해 번다. 비뚤어진 큰딸 이안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내가 엄마보다 더 벌어!” 이안은 담배 가게 같은 데서 일하는데 정작 여기서는 불법 약물로 돈을 번다. 이안은 늘 야한 옷을 입고 가게에 나와 호객행위를 한다. 가게 사장과도 수시로 섹스를 한다. 결국 이 관계는 사달이 난다. 슈펀의 엄마이자 이안과 이징의 할머니도 수상하다. 그녀는 늘 미국을 나다닌다. 불법 이민이나 밀수에 연루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둘째 이징은 야시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훔친다. 아이는 그것이 자기가 하는 일이 아니라 악마의 손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침대 밑에 포르노 테이프나 깔고 살아가는 이징의 할아버지 탓이다. 그는 전족(纏足, 발을 작게 만들려고 어린 여자아이의 발을 꽁꽁 묶는 악습) 세대의 남자로 이징에게 왼손은 악마의 손이니 쓰면 안 된다고 윽박지른다. 할아버지 때문에 아이는 자기 팔보다도 큰 식칼을 들고 왼손을 자를까, 말까 망설이기도 한다.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도 한다. 아이는 엄마 슈펀의 전 남편(자신에게는 의붓아버지)이 죽고 남긴 미어캣을 키우다가 그 악마의 손 때문에 교통사고가 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은 할아버지라는, 쓸모없는 인간 탓이다. 언제부터인가, 자본주의가 뒤로 갈수록 남자는 점점 불필요한 존재감으로 변화됐다. 현대 영화는 대체로 남자란 존재를 쓸모없거나 아예 사라지는 쪽이 도움 되는 것처럼 묘사한다. 이 영화 ‘왼손잡이 소녀’에 나오는 남자는 네 명인데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악습을 전파하고, 아이의 외삼촌은 보아하니 집안 돈을 빨아들이고 있으며, 이안의 가게 사장은 그냥 놈팡이이다. 엄마 슈펀의 가게 옆에서 노점을 하는 남자는 그나마 착한 인물이지만 그다지 능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지적인 남자는 영화 속에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현대사회가 여성성이 강해져서 여성 중심의 사회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만이 가족과 세상을 지켜 낼 수 있기에 그렇게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외할아버지가 잘못 알려 준, ‘왼손은 악마의 손’이라는 등식은 이들 세 모녀가 살아가는 대만 사회의 모든 중층 모순을 한 번에 얘기해 주는 메타포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순이 삼단 사단의 케이크처럼 쌓여 있고 섞여 있다. 여성들은 계급의 하단에서 출발하기가 십상이며 그렇기에 몸을 팔기도 하고, 그러다 임신이 돼버리면 원하지 않았던 가족관계 때문에 괴로워지는데 그게 경제적 문제로 거듭 압박이 가해져 다시 계급의 하단 구조로 떨어지게 된다. 빈곤의 악순환이지만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어찌 보면 여성 개인의 몫만은 아니게 된다. 여성은 먼저 ‘여성들’이 되어야 한다. 영화 속 모녀 셋도 결국 그 길만이 자신들이 생존하되, 존엄하게 살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모색하게 된다. 영화 ‘왼손잡이 소녀’는 참담하지만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낙관적이거나 쓸데없는 희망을 보여주지도 않지만 인생이 꼭 비관적일 수만은 없다는 점을 보여주려 애쓴다. 비관의 지성을 낙관의 감성이 이어간다. ‘왼손잡이 소녀’는 어쩌면 큰 딸 이안의 성장을 보여주는 영화 속 또 한편의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아이는 스무 살 안팎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엄마 슈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슈펀과 이안은 갑을의 모녀 관계가 아니며 이안이 오히려 엄마를 가르치는 쪽이다. 엄마 몰래 죽어가는 아빠를 찾아가 더 이상 엄마에게 오라는 소리 하지 말라고 표독스럽게 말하기도 한다. 어차피 아빠는 죽을 것이고 살아 내야 할 엄마가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가게 놈팡이 남자와의 관계로 임신하고 유산하는 과정에서 이안은 부쩍 성장한다. 점점 더 어린 동생 이징을 살피는 모습이 모성의 본체를 닮아가기 시작한다. 이안이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안은 이징을 데리고 시장을 다니며 아이가 훔친 물건을 돌려주고 주인에게 잘못을 빌게 한다. 아이는 당연히 용서받는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이안은 세상과의 타협점, 화해의 방법을 체득해 나간다. 한 여자가 주체성을 찾으면 주변의 여성들,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이안의 변화는 엄마 슈펀을 차분하게 만든다. 아이 이징도 더 이상 왼손 문제를 고민하지 않게 된다. 세 모녀는 어쨌든 살아갈 것이며, 그것도 존엄하게 살아가려 애쓸 것이다. 바로 그 존엄성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돈이나 섹스, 명성, 지위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자존감을 잃거나 얻거나 할 때이다. 계급사회에서 불평등은 개선되지 않고 더욱더 양극화되어 가고 있지만 그나마 사회를 지켜가는 것은 자기 자신과 상대를 존엄하게 대하고 그럼으로써 연대할 수 있는 인간적 품성이다. ‘왼손잡이 소녀’는 바로 그 얘기를 하는 작품이다. 감독 추시경(鄒時擎)은 대만계 미국인이다. ‘브로크백 마운틴’ ‘와호장룡’ 등을 만든 리안(李安)의 후임 격이다. 칸의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5개 부문에서 수상했던 션 베이커의 프로듀서 출신이다. ‘왼손잡이 소녀’가 션 베이커와 만든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대만판 영화라는 얘기는 그래서 나왔다. 그녀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도 프로듀서를 맡았다. 션 베이커의 작품과는 다른 질감이지만 사회 문제를 드라마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는 점에서는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음을 적시하는 작품이다. 대만 사회가 내부적으로 만만찮게 흔들리고 있고 그것을 우려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작품이다. 자본주의는 어디서든 다 마찬가지이다. 없는 사람들, 사회의 구석으로 밀려간 사람들의 문제는 북남미든 유럽이든 동북아든, 대만이든 서울이든 도쿄든 어디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공명시킨다. 특수한 지역의 얘기인 척 사실은 우리 모두의 보편적 문제다. 특수와 보편은 그렇게 교호한다. 대만은 중국의 군사적·외교적 위협만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들 세 모녀의 삶 같은 것이 진짜 문제일 것이다. 한 인간, 한 가족, 야시장에서 생존을 위해 애쓰는 사람 하나하나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이념과 체제의 안보를 지키는 것일 수 있다. 그 점이 바로 ‘왼손잡이 소녀’가 웅변하는 모토다. 들어라, 세상 사람들아, 라고 영화가 외치고 있다. 일부 예술영화전용관에만 있다. 추후 OTT에서 만나시기를 바란다.
제목을 굳이 바꾼 것은 분명 '미드나잇 인 파리'(2011)가 개봉 당시 전국에서 36만 명의 관객을 모은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지만 원제인 ‘쿠 드 상스(Coup de chance)’를 '럭키 데이 인 파리'로 둔갑시킨 것은 영화의 이미지, 느낌을 상당히 뒤바꿔 버린 효과를 가져왔다. ‘쿠 드 상스’는 ‘행운의 한방’ ‘뜻밖의 행운’이란 뜻이다. 물론 ‘럭키’라는 단어를 넣는 묘미를 부리긴 했으나 영화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그렇게 유쾌하지는 않다. 오히려 다소 섬뜩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우디 앨런은 이번 영화에서도 자신의 얼터 에고(분신)같은 캐릭터를 출현시키며, 그래서 그 이름도 알랭(앨런)인데 전작들과는 달리 천연덕스럽고 거침없이 영화 속 자신을 죽여 버린다. '럭키 데이 인 파리'는 파리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치정 살인극이다. 여전히 우디 앨런식 수다가 심해서 그렇지, 진행되는 이야기는 다분히 1940년대 필름 누아르 분위기를 가져온다. 어떤 때는 '가스등'(1944)을 보는 것 같지만, 뒷골목의 잔챙이 청부살인업자들을 등장시킬 때는 장 피에르 멜빌의 암흑가 영화를 우습게 패러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 늙은 우디 앨런(1935년생)은 이제 자기가 하고 싶은 장르의 영화를 이것저것 붙여 콜라주 형 작품을 만들어 낸다. 한편으로는 기발하고 한편으로는 이 우디 앨런이라는 감독, 영화적 인용이 너무나도 넘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갖게 만든다. 왜 아니겠는가. 수많은 세월 온갖 영화를 보고, 또 만들던 사람이 아니겠는가. '럭키 데이 인 파리'는 우디 앨런이 이렇게 충분히 기묘한 조합의 영화를 만들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장(멜빌 푸포)과 파니(루 드 라쥬) 부부는 일종의 쇼윈도 부부이다. 장은 어디선가 돈을 많이 벌고 있고 그래서 파리 상류층에 속하는 인물이지만 그 돈의 출처를 두고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대기 일쑤다. 사람들은 그의 부인인 파니를 두고도 역시 ‘트로피 와이프’라며 입방아를 찧는다. 이혼 경력이 있는 파니는 결혼이란 노력만으로 성공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계속되는 설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자다. 그녀는 이제 살짝, 장에게서 설렘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이 남자하고는 처음부터 그런 감정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는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알랭(닐스 슈네데르)이다. 둘은 예전에 미국에서 프랑스인 학교를 같이 다닌 동급생이었다. 알랭은 고등학생 시절 파니에 강한 호감을 느꼈으나 표현은 하지 못했었노라고 말한다. 갑자기 만난 두 사람은 오래 사랑해 온 연인들처럼 뜨겁게 불타오른다. 알랭은 작가다. 파니는 옥션에서 일하며 고가의 미술품 등을 거래하는 일을 한다. 파니는 남편인 장의 속물근성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예술적 열정을 알랭을 통해 자신에게서 재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급격하게 알랭에게 빠지게 되고 알랭 역시 파니와의 사랑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의심 많은 장에게 들키게 되고 남편은 이상 행동을 보인다고 생각하는 아내에게 탐정을 붙인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아낸다. 장과 파니 그리고 알랭, 세 명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정작 파니는 남편의 범죄 행각을 깨닫지 못한다. 그녀는 알랭이 자신과의 관계가 너무 깊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 말 없이 떠났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자신을 계속해서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남편에게 다시 애정을 가져 보려 노력한다. 정작 남편의 수상쩍은 행동을 알아차리는 것은 파니의 엄마 카미유(발레리 르메르시에)이다. 남편 장은 장모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장모 또한 사위가 자신이 사위의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됐다는 것을 알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위는 별장에 가면 즐기는 사냥을 기회로 장모를 살해할 음모를 꾸민다. 자, 행운의 한방이 필요한 때이다. 영화는 엉뚱한 결말을 향해 이야기를 몰고 나간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우디 앨런은 인생이라는 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얘기한다. 삶은 우연의 산물이며 모두의 삶은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기적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자신의 선택과 실수는 다 감당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일에서 우연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운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면 여전히 두렵다는 것처럼 그는 얘기한다. 그러면서도 우디 앨런은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 상대를 너무 쉽게 판단하고 정의하지 말라. 사랑이 오고 가는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 인생이 죽어가는 것,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너무 우울하게 생각하지 말라. 생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우디 앨런은 말년의 나이에 일련의 영화들을 잇달아 만들며 자신의 생을 우회적으로 정리하려 하는 셈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우디 앨런은 자신을 닮은 길(오웬 윌슨)을 통해 '애니 홀'(1977)과 '맨하탄'(1979)을 만들었을 때가 자신으로서는 일종의 벨 에포크(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의 귀족적이고 화려한 부귀영화 시대)와 같은 것이었음을 술회한 바 있다. '로마 위드 러브'(2012)에서는 자기를 똑 닮은 잭(제시 아이젠버그)이란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자화상이 얼마나 수다스럽고 좀스러운지를 거리낌 없이 까발린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특히 2000년대 이후 나온 영화들의 상당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 또 발견, 재발견함으로써 세계관과 철학을 완성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보인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답게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을 웃게 하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디 앨런의 마음 한구석에 비애가 한가득 숨겨져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이번 영화 '럭키 데이 인 파리'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인 알랭의 비극적인 처지는 우디 앨런의 기이한 항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디 앨런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와 선정적 언론이 주인공 알랭처럼 자신을 매장한 것 아니냐고 얘기하고 있는 셈이다. 우디 앨런은 수양딸인 순이 프레빈과 결혼하고도 또 다른 입양아와의 성 추문에 휘말린 적이 있다. 그는 그것 역시 우연의 산물이었으며 자신의 선택과 실수를 감당할 준비가 돼 있음에도 너무나 세파에 시달리고 그럼으로써 삶의 기적 같은 순간들을 허비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뭐, 그럼에도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말자는 주의다. '럭키 데이 인 파리'는 이제 생의 말년으로 가고 있는 우디 앨런의 자기반성적이고 자기 회고적인 영화이다. 재미있다. 그것이야말로 앨런 영화의 강점이다. 11월 12일 전국 개봉된다. 예술영화관 중심으로 상영될 것이어서 스크린 수가 그렇게 많을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