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요령부득하던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 단 한 신으로 모든 걸 정리한다. 아빠(폴 메스칼)는 사람들 틈에서 우스꽝스럽지만 나름 진지하게 춤을 춘다. 주인공 딸 소피(프랭키 코리오)의 눈에는 그때 아빠 모습이 빛과 어둠 사이에서 명멸하듯 깜박인다. 그것은 그 장면을 떠올리는, 이제 31살이 된 소피의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기억이란 늘 깜박거리며, 그럼으로써 그 사이사이에 놓인 추억을 소환시키는 법이다. 어쨌든 이 장면이 이 영화 ‘애프터썬’의 하이라이트인 이유는 순전히 그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팝 음악 하나 때문이다.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이다. 이 노래 가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영화의 주제에 밀물처럼 다가선다. 가사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이 세상이 어떤 건지 안다는 것은 정말 재앙이야/ 계속 사랑으로 극복해 보려 하지만 결국 난도질당하고 찢겨 버렸네/ 사랑은 한낱 철 지난 단어에 불과하지만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꿔 줄 거야/ 우리 스스로를 보살펴 줄 수 있게끔 만들어 줄 거야/ 이게 우리의 모습이지/ 억압 속에서 억압 속에서/ 억압!’ 이 장면과 이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 영화는 약간의 착시를 준다. 영화는 소피가 11살이 되던 해, 아빠와 했던 튀르키예 여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행복했던 유년 시절에 대한 추억담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가 절규했듯이 이 세상이 어떤 건지 알게 되면 재앙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재앙에 대한 얘기일 수 있다. 행복과 재앙 사이에 끼어 있던 어렸을 적 언제쯤에 대한 얘기이다. 소피가 세상을 알게 된 시점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때였던 듯 보인다. 이제 31살이 됐고 레즈비언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은 유년 시절의 그때만큼 행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과연 행복은 무엇인가, 삶의 저 밑바닥에 놓인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 질문에 끊임없이 휩싸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20년 간극의 소피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그 방식이 매우 특이하다. 오래된 일은 단편의 기억을 조각조각 이어 붙이게 하는 법이다. 아마도 소피에게는 그것이 ‘애프터썬’을 걱정해, 그러니까 해변에서 햇볕에 그을릴 것을 대비해 아빠가 자신의 어깨와 팔에 살살 발라줬던 선크림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촉감과, 그때의 햇살과 바람과 바닷물의 출렁임이, 연상작용으로 떠올랐을 것이며 어느 순간 그 여행의 전체가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아빠가 그때 내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바꿔 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아빠는 나를 사랑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아빠는 그때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지금의 나로 바꿔 냈을 것이다. 소피의 삶은, 우연한 기회(아빠의 캠코더를 발견한 것)에 그 사실을 기억한 지금, 또 다른 영역과 차원으로 넘어갔음을 깨닫게 한다. 영화는 그렇게 인간의 정신적 의식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표현해 낸다. 물질이 의식을 규정하지만, 때론 의식이 물질을 규정한다. 한 번의 깨달음이 세상을 바꾼다. 영화는 정신성(性)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 지니는, 그 경이의 순간을 그려낸다. 이 영화가 온갖 평론가협회에서 상찬받은 이유(런던, 전미, 시카고, LA, 보스턴, 뉴욕비평가 협회상)는 그 찰나의 각성을 물리적으로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는 글이나 문학으로 혹은 음악으로 아니면 그림으로, 더더군다나 한 편의 영화로 표현해 내기가 워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에피소드 뒤에 숨어 있는 무섭고 어두운 삶의 오라(aura), 그 고통의 평범성을 끄집어내는 것, 관객이 그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에는 매우 정교한 연출의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무엇보다 인생의 진실에 대해 꾸준하면서도 진지한 고찰이 이어져 있어야 한다. 감독인 샬롯 웰스에게서 느껴지는 부분이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엄마와 헤어져 살고 있는 데다, 집이 있는 스코틀랜드에서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아빠는 소피가 11살이 되던 어느 해 둘만의 여행을 계획한다. 아빠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은 즐겁기도 하지만 어색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여행사 단체 여행과 자유여행을 섞어 튀르키예에 온 첫날부터 아빠는 침대가 하나뿐인 것을 두고 여행사에 항의 전화를 하게 된다. 소피는 이미 잠들었고 아빠는 아이의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준 후 베란다에 나가 아이 몰래 담배를 피운다. 그는 이상한 몸짓으로 몸을 흔드는지 춤을 추는지 하는데 이때의 롱테이크 장면은 묵음으로 이뤄진다. 완벽한 밤의 침묵. 아이는 침대에서 자고 있고 그 건너 창을 열고 바깥 베란다에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몸을 흔드는 아빠. 이건 아이의 기억인가. 상상인가. 아마도 그건 이 모든 기억을 소생시킨 캠코더 속 장면일 수 있다. 소피가 이 모든 이야기를 스스로 엮어내게 된 건 아빠가 여행 중 찍었던 캠코더 속 영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니까. 영화는 다소 불길하게 느껴질 만큼 어두운 암시가 중간중간 박혀 있는데, 그건 아빠의 ‘본질이 갖는 무엇’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빠가 자신과 엄마를 버리고 떠난 것은 뒤늦게 발견한 성정체성 때문일 수 있다. 그건 소피 자신이 게이가 돼 있는 장면 같은 것, 어린 소피가 난간 위에서서 아래층 구석의 두 남자가 키스하고 몸을 더듬는 장면을 엿보는 것 등으로 짐작하게 한다. 무엇보다 아빠가 여행 중 줄곧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었던 모습은 딸을 위해 만들어 낸 매우 의도적인 가벼움의 일환일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왠지 모를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자살 충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슬쩍 보여 주는데 소피와 싸운 밤, 아빠는 비교적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려 한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주조(主潮)는 아빠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튀르키예 여행이 아빠를 만난 마지막 때였거나 아빠와의 행복했던 시간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아빠는 없다. 그 부성의 상실은 소피 자신에게 끊임없이 채워지지 않은 결핍의 원천 같은 것이다. 상실과 결핍. 인생에서 그것을 알게 되는 것만큼 외로운 것은 없다. 재앙은 없다. 퀸의 가사처럼 아빠는 누군가, 무엇인가로부터 억압받았을 것이다. 게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경제적 삶, 중하층 계급의 고단한 삶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이 주는 억압은 결코 관념적이지 않다. 무언가 구체적인 사건들이 있었을 것인 바 그 하나하나를 열거하지 않으면서도 그 억압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매우 특이한 귀착점을 보여 준다. 단체여행 중에 벌어진 노래자랑에서 아이는 혼자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 R.E.M의 ‘루징 마이 릴리전(Losing My Religion)’이다. ‘난 네가 웃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지/ 너의 노래를 들었다고 생각했어/ 네가 노력했다는 걸 알고 있어/ 모든 속삭임, 깨어 있는 모든 순간/ 난 나의 고백의 말을 고르고 있어/ 너의 눈을 맞추려 애쓰면서/ 상처받고 사랑에 눈먼 바보 같은 너’ 어쩌면 소피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이미 11살 때 삶의 진창을 알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검게 그을린 햇볕의 자국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사랑이 모든 것을 변화하게 할 것임을 그녀는 이제 확실히 깨닫는다. 그건 사라진(혹은 자살했거나 죽은) 아빠가 남겨 준 유산이다. 삶은 재앙이지만 늘 아름다운 것은 사랑 때문이다. 이 말이 단순한 관념의 서사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늘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증명하고 증거해야 하는 법이다. ‘애프터썬’은 그 모호하면서도 상세한 기억의 진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지휘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이 많다. 마스터 클래스에 나가 토크도 해야 하고, 줄리어드 음대 같은 곳에 가서 특강도 해야 한다. 집에 돌아와 아내 혹은 남편에게 약도 먹여야 하고, 아이도 종종 학교에 데려다줘야 하며, 그 와중에 틈틈이 개인 작업실에서 작곡도 해야 한다.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도 바꿔야 하고, 부지휘자도 선임해야 하는데 단원들의 투표로 결정하는 관례가 있지만 개인의 결정을 관철시키기도 해야 한다. 자신을 이끌어 준 스승과 종종 점심을 먹어야 하고, 후원 재단 대표를 맡고 있는 다른 지휘자와도 연을 쌓아 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일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지휘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은 예술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일 가운데에서 존재한다. 예술은 독자적인 척, 사실은 매우 관계‘적’인 것이며, 그 관계없이 독자‘적’일 수 없다. 예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예술적인 것과 함께 해야 하며 그 상관관계를 잃은 예술(인)은 결국 실패하거나 낙오할 수밖에 없다. 토드 필드의 역작 ‘TAR 타르’는 음악영화가 아니어서 안심(?)이 되는 작품이다. 지휘자의 얘기라는 작품 광고에 으레 이 영화는 대중들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클래식으로 범벅된, 클래식 클리셰(cliché)로 가득한 작품으로 예상되기 쉽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오케스트라 곡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과 엘가의 첼로 협주곡 정도이다. 그것도 영화 내내 전곡이 연주되는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영화의 음악감독인 힐두르 구드나토르는 화려하고 웅장한, 때로는 섬세한 클래식 선율보다는 차라리 음악의 배제, 때론 배경음악을 완벽하게 삭제하는 쪽을 선택한다. 예컨대 이 영화는 158분이라는 비교적 장대한 러닝 타임에 걸맞게 영화 앞단이 비교적 긴 시퀀스로 이뤄져 있는데, 그 시퀀스도 당연히 롱 테이크로 이어지거나 심지어 원 씬 원 컷으로 이뤄져 있다. 오프닝 장면에서의 마스터 클래스 토크 장면은 10분 가까이 이어진다. 여기서 주인공이자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랜쳇)는 자신의 음악 철학을 꽤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를 얻으며, 그를 통해 감독 토드 필드는 영화 ‘타르’가 어떤 행마를 이어갈 것인가를 관객들에게 암시해 낸다. 이 토크 장면이 진행되는 순간은, 당연히, 음악이 없다.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말과 말,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청중의 숨죽인 고요만이 이어진다. 그다음 장면이 더욱 압권인데, 여기에서도 음악은 완벽히 배제된다. 타르는 줄리아드로 장소를 옮겨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변을 토해 낸다. 왜 음악을 하는가, 음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음악가가 이뤄야 할 것과 위대한 음악가(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과 그의 인생을 어떻게 구별해서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해 얘기한다. 이 장면은 아주 긴 원 씬 원 컷으로 이뤄져 있다. 토드 필드의 카메라는 강의장 무대와 객석을 오가며 열정적인, (학생들 시각에서 보면 어쩌면) 매우 독단적인 예술관을 피력하는 타르를 한 번의 컷 없이 뒤좇으며 롱 테이크로 담아낸다. 이 강의는 나중에 타르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 되는데, 그녀를 둘러싼 성추문 의혹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된다. 때문에 이 장면 역시 음악이 없는 건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음악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음악 영화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아, 이 영화는 클래식 애호가용이 아니군’이라는 생각을 비로소 갖게 만든다. 영화는 점점 더 다른 이야기, 음악을 뛰어넘는 이야기로 비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를 매우 흥미롭게 격상시킨다. 리디아 타르는 클래식 음악계의 유리 천장을 뚫은 인물이다. 특히 여성이 차별받는 지휘자의 세계에서 당당히 베를린 필하모니의 수장이 됐다. 그런데 곰곰이 들여다보면 타르의 여성성, 여성주의의 완성이 그녀를 마에스트로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음악적 권력을 얻기 위해 남성주의의 스킬을 구사하고 있거나 그것을 병행해 왔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처럼, 클라우디오 아바도처럼 점철된 카리스마와 완벽주의로 단원들을 이끌어가고 있으며, 음악적으로 자신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래서 자신이 완전한 스페셜리스트가 되면 될수록 다른 모든 문제는 주변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여성성은 오로지 그녀가 레즈비언으로 커밍 아웃한 것뿐으로 보이는데, 바이올리니스트 단원이기도 한 파트너 샤론(니나 호스)과의 관계에서도 동반자라기보다는 가부장적 남편의 위치에 서있거나 그러려고 한다. 타르는 둘이 함께 키우는 딸 페트라가 학교 폭력을 당하자, 가해자 학생에게 찾아가 자신이 아이의 ‘아빠’라고 소개하며 윽박지른다. 또 러시아에서 온 새로운 첼리스트에게 눈길을 주고 그녀를 자신의 자서전 출판 기념회가 열리는 미국 출장에도 데리고 다니는데, 이는 당연히 샤론과의 관계에 균열을 발생한다. 가장 큰 문제는 크리스타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 지휘자가 타르에게서 받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자 그녀와의 그간 관계를 부인하거나 관계의 증거를 없애려고 한다는 데에서 벌어진다. 짐작컨대 타르와 크리스타는 한동안 혼외정사의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타르는 자신을 흠모하는 조수인 프란체스카(노에미 멜랑)에게 크리스타와 관련된 모든 이메일을 삭제하라고 한다. 타르는 말한다. “우리가 불필요한 일에 휘말릴 필요는 없잖아.” 물론 그녀로서는 맞는 말이긴 하다. 도이체 그라모폰과의 리코딩 작업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자기 음악에게만 열중하기에도 시간이 없을 지경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자신이 그러는 이유를 받아들여야 하며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후원 재단의 대표를 맡고 있는 지휘자 동료 엘리엇 캐플란(마크 스트롱)이 조언을 구하자 ‘남을 베끼려 하지 말고 자신의 것을 완성하려 노력하라’고 말할 만큼 타르는 스스로가 당당하다고 생각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크리스타의 자살을 둘러싼 의혹이 불거지고 타르는 곧 이런저런 법적, 행정적 소환에 직면한다. 리디아 타르는 그 모든 문제를 이겨 내고 도이체 그라모폰과의 실황 녹음을 완성할 수 있을까. 베를린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객원 지휘자가 아닌) 자리를 계속 지켜낼 수 있을까. 타르를 둘러싼 모든 추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토드 필드 감독이 얘기하려는 것은 사안이 지니는 진실의 절대성이나 상대성 같은 해묵은 주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예술의 독자성과 상대성, 그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쉽게 말해, 위대한 예술가는 그가 이뤘거나 이뤄 내고 있는 예술적 성취와, 자신이 갖는 모든 인간적 약점 가운데에서 어느 지점에 서있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예술을 완성한 아티스트는 수많은 실수, 위선, 오만함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의 얘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술가는 하나만이라도 잘하려 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걸 잘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며 이는 곧 스페셜리스트여야 하는지, 제너럴리스트여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사고로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더 확장하면 파시스트가 창궐하는 시대에서 예술가(음악과 미술 영화 심지어 정치까지)는 자신의 작품이 지니는 완성도에 치중해야 하는지 아니면 세상과 일상의 일에도 화답해야 하는지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 균형은 어디인가. 예술과 삶의 밸런스는 유지될 수 있는가. 과연 예술과 인생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찾아지는 것인가. 타르는 어느 날 자신의 작업실 아파트 건너편에 사는 치매 노인이 휠체어에서 넘어지고 바닥에 똥을 싸 사방이 오물 천지가 되자, 그를 간호하는 지체아 딸을 도와준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온몸을 미친 듯이 닦아 낸다. 타르는 그렇게 인생사가 언제 어느 순간에 똥바다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거나 아예 받아들이지 못한다. 타르 역을 연기한 케이트 블랜챗은 이번 작품에서 영화가 지닌 괴력만큼 엄청난 에너지를 소유한 연기자임을 유감없이 입증해 냈다. 그 구구절절하면서도 막대한 양의 대사는 단순히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타르란 인물로 자신의 인성 자체를 전환시키지 않는 한 이런 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카메라는 시종일관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블랜쳇의 모든 표정을 담아낸다. 압도적인 몰입감 없이는 그 부담감을 이겨낼 수가 없다. 영화 ‘타르’는 실제로 케이트 블랜쳇을 위한, 블랜쳇에 의한, 블랜쳇의 영화이다. ‘타르’는 오는 3월 12일에 열릴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은 물론 감독상과 여우주연상, 각본상, 촬영상, 편집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이런 작품을 두고 명불허전이라 부른다. 소름 끼친다.
무협 소설의 대부 김용의 방대한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천룡팔부: 교봉전’(이하 ‘천룡팔부’)은 짐작하거니와 내용을 따라가기에 다소 심란한 면이 있다. 무협 소설을 적어도 한 번쯤은 읽어 본 경험이 있어야 전체의 얼개, 그 오라(aura)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강호에 9대 문파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면 좋기 때문이다. 9대 문파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소림사가 그 문파 중 대표 격이며, 무당파도 들어 본 이름일 것이다. 곤륜파, 아미파 등도 있는데 아미파는 여걸들의 문파이다. 영화는 일명 거지들의 소굴이라는 개방파의 얘기다. 무협 영화는 둘 중 하나이다. 매우 흥미롭거나, 도통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데다 이야기 흐름이 너무 억지스러워 도저히 목불인견이거나이다. 때문에 무협 영화는, 매우 잘 골라 봐야 하며 이쪽 분야에 제작, 연..
이야기의 시작은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습지에서 쿼터 백 출신의 남자 체이스(해리스 딕킨슨)가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되는 데서부터이다. 이 사체는 동네 아이들이 발견하는데 그건 마치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 ‘스탠 바이 미’의 첫 장면과도 같다. 보안관 둘이 탐문을 시작하고, 이들은 오로지 남자 몸에서 나온 붉은색 털실 한 오라기를 근거로 습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여성 카야(데이지 에드가 존스)를 유력 용의자로 체포한다. 영화는 카야의 재판 과정을 추적하며, 여자 스스로 자신의 짧은 인생을 되돌아보거나 변호사인 밀턴(데이빗 스타라탄)에게 지난 10년의 삶을 들려주거나 진술하는 플래시 백의 기법을 따라 대부분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처음엔 미스터리 살인극으로 시작된 영화가 곧바로 서정의 서사시를 이어 나가는 이유다. 카야, 아니 주변 마을 사람들에..
모든 건 다 그놈의 퍼센티지(%) 때문이다. 시청률, 청취율, 지지율, 취업률, 자퇴율, 퇴사율, 할당률, 가입률, 방어율 등등 그저 ‘율율율’하는 세상 탓이다. 모든 걸 다 정량평가로만 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성평가는 사라진지 오래됐는데 특히 교육분야가 그렇게 됐으며 그건 대략 이명박 대통령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다. 오렌지가 아니라 ‘어륀지’라며 영어 발음 교육을 강조하는 교육부 장관 기자회견 때부터 수상한 분위기가 감지됐었다. 정량평가(定量平價)는 양을 중심으로 한다. 무조건 실적 위주다. 이에 비해 정성평가(定性平價)는 내용과 가치를 중시하는 평가다. 모든 게 다 정성적이어서도 안되지만 모든 게 다 정량적이어서도 안 된다. 특히 정량평가로만 기울어 있는 사회에서는 결과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모든 걸 다 수..
영화 ‘교섭’은 일종의 ‘팩션’이다.역사적 사실에서 모티브를 가져 오되 그것을 극화하는 과정에서 픽션을 가미했다는 얘기다. 이런 팩션은 사실, 기획과 연출이 줄타기의 경지를 보여 줘야 하는 작품일 경우가 많다. 팩트(fact)를 어디까지 바꿀 것이냐 혹은 그 팩트를 어디까지만 보여 주는 것이 좋으냐를 놓고 매우 정교하게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교섭’은 몇 가지 지점에서 여러 사람들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사실을 영화로 만들었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당시 발생했던, 경기도 분당 샘물교회 교인들에 대한 아프간 탈레반의 납치 사건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샘물교회를 깊숙이 다루지 않는다. 기획 단계에서(특히 기획자들의) 불필요한 종교 논쟁을 피하겠다는 의지가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극중 인물을 통해 두어 마디의 대사로 이에 대한 연출의 태도를 드러내는 정도다. 아프간 통역사 카심(강기영)은 이런 말로 짜증을 낸다. “그러게 (저 인간들은) 왜 이런 데를 와 가지고서는.” ‘교섭’이 보여주는 이 소극성은 사회정치적, 무엇보다 종교적 논쟁의 절충점을 찾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그 고심은 이해가 가지만 이 영화가 지닐 수 있었던 긍정적 폭발성을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잠재웠다는 점에서 영화 전체의 족쇄로 작용한다. 팩션 드라마는 결국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명확하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중립이란 어쩌면 그저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이다. 중립은 있을 수 없다. ‘교섭’이 요르단 올-로케이션에 여러가지 미덕을 지닌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 장점이 잘 살지 않는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일부 대중관객들의 반응 중에는 ‘교섭’을 두고 재미가 없다. 긴장감이 떨어진다 등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사실 영화는 서사 구조와 스텍터클 신이 비교적 정교하게 짜여 있는 작품이다. 서스펜스의 고조도 계산된 강도로 진행된다. 예컨대 주인공인 외교부 기획조정실장이자 교섭관(황정민)이 납치의 주범인 탈레반 지도자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짓는 장면 같은 것이 그렇다.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한미 공조를 통해 미군의 공군 폭격을 유도하며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한다. 탈레반의 은신처 바깥에서는 폭격과 굉음이 이어지고 안에서는 탈레반이 들이미는 총구의 위협이 이어진다. 이건 진짜일까? 진짜가 아니더라도 진짜처럼 찍어야 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진짜처럼 느껴진다. 고답적인 연출 장면이지만(이런 류의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이다) 진짜이든 그렇지 않든 진짜처럼 보이게 했다는 점에서 연출력, 연기 모두가 돋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 교섭관 옆에서 그와 경쟁하는 동시에 그를 돕는 국정원 요원(현빈)이 인질 협상 사기단을 상대로 액션을 펼치는 장면은 다소 지나치게 인공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건 다분히 현빈을 위해 연출이 의도적으로 만든 픽션이다. 실제로 그런 총격전, 액션 극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르적 접근상 그 같은 스펙터클 장면 하나 쯤은 필요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윤색은 용서가 된다. ‘윤색의 윤리학’에 그다지 어긋나지 않는다. 문제는 전반적으로 임순례의 정치적 태도가 밋밋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감독 스스로가 상당 부분 의도했다는 점에서, 영화 전체마저 밋밋하게 보이게 하는 치명적 한계점을 보인다. 임순례 감독은 평소의 뚝심 있는 태도와 달리 이번엔 다소 보신주의적 입장을 나타낸다. 임순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 점이 기이하게 보일 정도다. 투자와 배급을 맡은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의 전작 중 하나가 ‘헌트’였다. ‘헌트’를 생각하면 ‘교섭’은 매우 몸을 낮춘 작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른바 샘물교회 피납 사건은 명백히 종교적 이기주의가 낳은 참극이었다. 강성 무슬림의 근원지인 탈레반 지역인데다 테러 발생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기독교를 전파하겠다는 무지가 낳은 비극이었다. 샘물교회 측 교인 23명은 세 차례에 걸친 정부의 간곡한 경고와 금지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몰래 제3국을 거쳐 아프간에 잠입했으며, 피납 11일 만에 정부의 인질 협상에 의해 구조됐다. 이 과정에서 담임목사 등 두 명이 살해됐다. 샘물교회 측은 교인들이 극적으로 구조된 이후 정부가 출국금지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며 일종의 직무유기로 고소하기까지에 이른다. 이쯤 되면 종교적 광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샘물교회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짜증에도 불구하고 당시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 정부의 외교적 실책과 무능으로 공격하기 바빴다. 두 명이 살해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테러 집단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제1원칙을 어긴 점 때문에 사건 정리를 변변한 수준에서 해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인질 석방을 위해 탈레반 측에 막대한 돈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에서는 교섭관이 5000만 달러 요구를 2000만 달러에 협상을 성공시키는 것으로 나온다. 지금 돈으로 247억원 정도가 된다. 그런 팩트도 이 영화가 당시 사건을 심도 깊게 다루지 않은 ‘불편한 진실’의 한 축이다. 무엇보다 2007년의 샘물교회 사건이 2004년 한국 민간인이었던 김선일 씨가 이라크에서 저항 반군에 의해 납치 참수된 사건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당시 중동지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급박했던 분쟁사를 이야기의 줄기 중 하나로 다루지 않은 것도 ‘교섭’이 보여 준 아쉬운 점 중 하나로 거론된다. ‘교섭’에 대해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은 아마도 고난이도 첩보 정치 스릴러였을 것이다. 예컨대 스티븐 개건이 만든 2005년작 ‘시리아나’나 2008년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바디 오브 라이즈’ 처럼 예민한 국제정치의 역학이 그려지는 드라마로 예상했었을 것이다. 임순례 감독은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샘물교회 사건의 민감한 이슈, 그 역사성을 희석시키고 둔감하게 만들며 비교적 범상한 버디 영웅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데 주력한 것처럼 보인다. 일부러 잘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임순례로서는 가장 후일담이 많은 필모그래피의 작품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대한 지나친 폄훼는 온당치 않아 보인다. 영화는 그렇지 않은 척 사실은 그것이 다루는 주제와는 별개로 그것이 구현되는 시기의 정치사회적 공기(空氣)에 영향을 받는다. ‘교섭’은 지금처럼 굴절된 사회 분위기를 상대로 민감한 역사 이슈를 놓고 진짜 ‘교섭’에 애를 쓴 흔적을 보인다. 가장 근접해 있는 현대사에 대한 성찰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아야 할 영화다. 특히 우리사회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교회 문제를 이슈화 한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종교에 대해 국가가 어디까지 그리고 언제까지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 작품은 그런 문제 인식의 시발(始發)이지 착지가 아니다. ‘교섭’은 민감한 주제를 볼만한 드라마로 안착시킨 영화이다. 그 정도면 됐다. 영화가 어디 신이겠는가.
아마도 국세청 조세과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은 (그리고 이 사실은 나중에 매우 중요하다) 에이미 커(나오미 왓츠)는 요즘의 삶이 만만치 않다. 그건 순전히 남편이 1년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탓인데, 에이미 커는 아직 초등학생인 딸 그리고 이제 반항기에 들어선 고등학생 아들 노아(칼튼 곱)와 일상을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에이미는 오늘따라 학교를 가지 않겠다는 아들의 이불보를 걷어 내 깨운 후 이런저런 짜증을 가라앉히려 조깅에 나선 참이다. 그런데 조금 뛰기만 하면 전화가 울린다. 오늘 나가지 않겠다고 연락한 사무실에서 동료인지 누군가가 서류 파일을 찾는다며 전화가 오고, 다른 주에 살고 있는 친정 엄마는 몇 시간 후면 비행기로 도착할 것이라며 곧 만나자고 연락이 온다. 여느 자식이 그렇듯 에이미 역시 약간 짜증을 덧붙여 상대를 한다. 그래도 학교..
지난해 말 개봉해 1월 12일 현재 개봉 2주 만에 종영 위기를 맞고 있는 ‘젠틀맨’은 사실 매우 영리하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흥분할 정도의 걸작은 아니지만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게 할 정도의 긴장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잠깐이라도 장면을 못 보게 되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칠까 봐 조바심을 내게 할 정도는 된다. 꽤 흥미로운 작품이라는 얘기이다. 이 영화가 흥행에서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제목 때문일 듯싶다. 젠틀맨이란 제목은 정작 이 영화를 도통 무슨 영화인지 짐작하지 못하게 한다. 영국 신사들의 정장 느낌이 나는 영화라는 얘긴지, 그렇다면 댄디(dandy)한 남자의 로맨스 아니면 폭력 남자나 나쁜 남자가 주인공이서 그것을 거꾸로 강조하기 위해 붙인 제목인지, 도대체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곧 ‘젠틀맨’이 케이퍼..
미국 메이저 영화사인 유니버설 배급작품임에도 극장 개봉에 실패하고 IPTV로 직행한 ‘부활’은 레베카 홀과 팀 로스 등 스타급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이다. 감독은 생소하지만 두 배우의 인지도만으로도 충분히 손이 가는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아마도 이 영화의 마케팅을 맡았던 사람들은 요령 부득, 극장 개봉을 포기하게 됐을 것이라는 생각을 저절로 갖게 된다. 영화 내용이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매기(레베카 홀)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데이빗 모스란 남자(팀 로스)는 어떤 인간일까. 악마일까. 그냥 그저 그런 악한에 불과한 것일까. 이런 범죄 스릴러 장르를 많이 본 사람들은 으레 생각하는 결말이 있다. 남자의 존재는 알고 보면 허구라든지, 모든 게 다 여자가 보는 허..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저 ‘공산당 선언’은 이런 글귀로 시작해 이런 문장으로 끝이 난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의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속박의 사슬 밖에 없다. 그들은 세계를 얻을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런데 영화 ‘가가린’을 보고 있으면 공산주의는 진실로 유령이란 존재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언제부터인가 거리에서 배회조차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음을 느끼게 한다. 만국의 노동자는 모두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다. 한때 위대했던 이념의 시대는 완벽하게 끝이 났음을 알려 준다. 그 비정한 서사(敍事)가 기이하고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서정의 장면들과 시어들로 구성돼 있음을 보여 준다. 영화 ‘가가린’은 가가린의 일생을 그린 것이 아니다. 가가린은 유리 가가린을 의미하는데 인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