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영화는 서사와 스펙터클로 승부를 한다. 이에 비해 뮤지컬 영화는 코러스로 승부수를 가져가려 한다. 솔로도 아니다. 뮤지컬 영화에서 가슴이 뭉클해질 때는 집단의 코러스가 나올 때이다. 2012년 겨울에 개봉돼 해외보다 국내에서 보다 큰 인기를 모았던 영화 ‘레 미제라블’이 그랬다. ‘레 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 된다. 장발장의 딸 코제트(아만다 사이프리드),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 주인공 마리우스(에디 매드레인), 머리를 박박 민 판틴(앤 해서웨이) 등과 일군의 시위대들은 파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최후의 저항을 시도한다. 그들은 결연하게 함께 소리를 외쳐 노래를 부른다. 영화에는 안 나오지만 아마도 이들은 이후 옥쇄(玉碎)를 했을 것이다. 그 느낌과 오라(aura)를 보여주는 마지막 코러스는 실로 사람들의 가슴을 친다. 윤제균의 신작 ‘영웅’도 그렇다. 언뜻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에서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한일 합방을 주도했던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총리(김승락)를 암살하는 장면을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생각하기 쉽다. 근데 그렇지가 않다. 그것도 전혀 아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서 훨씬 영화가 살았다. 영화의 여운이 오래간다. 그리고 이 작품을 연출한 윤제균 감독이 매우 영리한 선택을 했다는 점에 동의하게 된다. 특히, ‘영웅’은 이전 뮤지컬 공연 작품이 워낙 인기를 모았던 터이다. 그것을 영화로 리메이크하는 과정에서 감독은 면밀하게 뮤지컬이 갖는 단점과 장점을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점은 당연히 서사(敍事)가 약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 영화 역시 서사 중심이 되기 위해서였다면 드라마 전체를 점층적 구조로 이뤄 냈어야 했을 것이다. 안중근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야기’라면 당연히 서서히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하얼빈 암살 장면으로 모든 기(氣)를 모아야 한다. 그러나 뮤지컬 영화라면 이야기보다 감정의 엑스터시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요소요소에 노래가 갖는 힘을 분산 배치시키되 그 리듬과 구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 뮤지컬 영화 ‘영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안중근(정성화)이 하얼빈으로 출발하기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진주(박진주)로부터 죽은 오빠(조우진)가 쓰던 모자(일명 뉴스보이 캡이라 불리는 것. 헌팅캡과는 약간 다르다)를 받아 들고 노래를 시작하는 장면이다. 그 직전 진주의 대사는 이것이었다. “대장님. 거사에 꼭 성공하셔서 오빠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아 주세요.” 블라디보스토크 거리에는 안중근의 장도를 마중하려는 사람들로 넘쳐 난다. 이들은 곧 안중근과 진주를 중앙에 놓고 양옆으로 마치 모세의 홍해가 나뉘듯 좍 갈라선다. 윤제균의 카메라는 그걸 풀 쇼트로 잡고 안중근과 마진주, 동지들인 우덕순(조재윤)과 조도선(배정남) 그리고 유동하(이현우)가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전진하는 장면을 정면으로 잡아낸다. 이들을 따르는 무리들의 코러스가 이어질 때는 부감 쇼트로 전체 민중의 의지를 전달한다. 이 장면이 매우 좋다. 가슴을 쿵하고 치고 나간다. 실제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기 전, 그 결단의 순간이 얼마나 살 떨렸겠는가. 그걸 혼자의 의지만으로 극복했겠는가. 얼마나 큰 공포에 시달렸을까. 얼마나 그 위험한 독배를 피하고 싶었을까. 그래서 한편으로 얼마나 도망치고 싶었을까. 안중근을 우리가 영웅이라 부르는 것은 그가 그 모든 갈등의 순간과 위기를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꼭 혼자만의 힘이었겠는가. 안중근이 혼자라고 느꼈으면 과연 ‘거사를 거사로서’ 끌고 갈 수 있었을까. 김훈의 문학 ‘하얼빈’은 바로 그 ‘개인의 위대한 결기’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소설은 기이하게도 여백이 많게 느껴진다. 작가 김훈은 안중근의 항쟁이 꼭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음을 간파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래서 여백을 많이 남겨 놓았다. 작가 김훈은, (그 민중의 뜻과 힘을)굳이 서술하지 않을 테니 읽는 사람들이 알아서 생각하고 역사적으로 상상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훈의 의도는 적중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만들어진 의미의 골짜기를 통해 사람들은 안중근이되, 안중근이 아니었던 것을 추론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소설 ‘하얼빈’은 안중근이 혼자의 힘으로 거사를 치렀지만 그 위업은 안중근만이 아니라 그 뒤에 민중들의 도도한 흐름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런데 영화는 소설의 문장이 갖는 그 같은 오라의 힘을 시각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문학이 갖는 추상성,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윤제균의 영화 ‘영웅’은 김훈이 소설 ‘하얼빈’에서 의도적으로 그려내지 않았던 민중의 힘을 정중앙에 배치한다. 바로 그 점이야 말로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놀라운 힘이다. 안중근의 독립운동은 개인만의 결단이 아니라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따른 것이었음을, 그 거대담론의 시각을 보여 주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영화 ‘영웅’의 주인공은 안중근이 아니라 안중근을 뒤에서 밀어주고, 또 안중근이 주도적으로 끌고 나갔던 민중과 시대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 암살 장면의 스펙터클, 그 서스펜스보다는 민중 전체를 보여 줘야 했을 것이다. 거기에 방점을 찍어 줘야 한다고 윤제균은 생각했을 것이다. 몹 신(mob scene), 코러스 신의 또 하나의 압권은 마지막에서 한 번 더 나온다. 그리고 그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그건 안중근의 법정 신이다. 일본인 판사는 그에게 묻는다. “안중근, 너는 왜 이토를 죽였는가?” 안중근은 이에 대해 “(과연) 누가 죄인인가?”라는 말로 화답한다. 재판정에 함께 앉아 있는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재판정 밖, 안중근의 아내(장영남)와 동생 안정근 등 무리들이 연신 ‘누가 죄인인가’를 후렴으로 소리 높여 외친다. 안중근은 그 후렴에 힘입어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그가 천명했던 동양 평화사상의 실체와 허구, 자신이 주장하는 대체 이론들 등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들을 낱낱이 그리고 샅샅이 열거한다. 마치 래퍼들의 속사포 가사처럼 안중근은 일제의 역사적 과오가 얼마나 큰 것인 가를 웅변한다. 안중근은 곧 죽을 것이고 우리 모두 그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이 법정 신은 안중근의 독립운동이 사람들, 민중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각인될 것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영웅’의 후반부에 이르는 이 장면은 톰 후퍼의 ‘레 미제라블’이 보여 줬던 마지막 바리케이드 장면을 연상시킨다. 법정 안과 밖을 리드미컬하게 교차해 가며 그려 낸 코러스 신은 ‘영웅’에서 압권 중의 압권이며 최고의 장면이다. 뮤지컬 영화가 갖는 강약의 흐름, 그 완급의 조절, 뺄 건 과감하게 빼고 드러낼 것은 완벽하게 드러나게 해야 하는 것 등등 영화 ‘영웅’의 연출은 매우 스마트한 선택과 집중을 해냈다. 무엇보다 안중근을 바라보는 인간주의적 시선이 흥미롭다. 윤제균은 다소 과도할 만큼 안중근이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였음을 강조하려 애쓴다. 옥중 교도관에게 안중근이 자신은 일본을 싫어하지 않으며 일본인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장면 같은 것이다. 자칫 친일적 시선이라고 비판을 받을 수 있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사상의 핵심인 사해동포주의를 보여 주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영화가 중간중간 코믹한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는 것도 안중근의 일상이 꽤 인간적인 무엇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혁명은 영화처럼, 때론 웃고 우는 일상의 모습 그대로 진행될 때가 많다. 엄숙주의는 역설적으로 위대한 혁명과 어울리지 않는다. 윤제균은 안중근이 웃으면서 위업을 달성했고 웃는 순간을 통해 공포의 순간들을 극복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단순하게 영화를 재미있게, 상업적으로 성공시키고 싶어서였거나. 모든 것은 균형의 문제이다. ‘영웅’에서 그려지는 코미디 코드가 그렇게 과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민비(이일화)에 대한 정치적 시선이 다소 평면적이었고 그것이 결국 ‘설화(김고은)’라는 캐릭터의 행동 동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 해도, 민비가 정치적으로 추악했던 측면(청과 일본 등 외세를 개인의 권력 유지에 이용하려고 끌어들인 점, 동학농민운동을 탄압하느라 청일전쟁을 유도한 점 등등. 안중근도 초창기, 동학농민운동 부대와 맞서 싸우기도 했었다. 그가 민중주의를 올바로 깨달은 것은 그 이후로 보인다)은 잘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는 오히려 그녀가 진정한 국모였다는 이미지만 강하게 남길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 점은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화는 역사에 대한 인식과 서술에 있어 어차피 다소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 가운데에 있는 몇 가지의 핀을 뽑아내는 것이다. ‘영웅’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기대 이상의 감정적 엑스터시를 경험하게 만든다. 좋은 평론은 영화를 보게 만들고 싶게 하는 것이다. 좋은 역사 영화는 당시의 역사적 인물을 통해 지금의 현실에 뛰어들게 만드는 것이다. ‘영웅’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많은 대중들로 하여금 안중근과 그의 독립운동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어쩌면 영화 ‘영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안중근을 만들어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웅’을 보고 있으면 짜릿한 느낌이 드는 것,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꽤 도발적인 작품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자 지금 누가 안중근인가. 누가 불의에 맞서 거사를 준비 중인가. 바로 당신인가? 영화의 총구가 당신들에게 겨눠지고 있다.
아바타: 물의 길 장르 : 액션, 모험, SF 감독 : 제임스 카메론 출연 : 조 샐다나, 샘 워싱턴, 시고니 위버 월드와이드 역대 흥행 순위 1위, 국내 개봉 당시 7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키며 외화 최초 국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아바타’가 13년 만에 후속편 ‘아바타: 물의 길’로 관객을 찾았다. 관객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 돌아온 ‘아바타’를 반갑게 맞이했다. 개봉 전부터 예매율 1위를 차지하더니, 개봉 첫 날인 지난 14일 35만 9290명(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이 ‘아바타: 물의 길’을 위해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는 열대우림에서 바다로 배경을 옮겼다. 로맨스에서 가족, 더 나아가 부족 간의 이야기로 세계관을 넓히며 다채로운 볼거리를 펼쳐낸다. 이번 편에서는 ‘제이크 설리’와 ‘네이티리’가 일군 가족의 사랑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
영화 ‘본즈 앤 올’을 다 보고나면 여러가지가 떠오르고 기억날 것이다. 역시 ‘루키 구아다니노 감독이야’ 소리가 나올 것이고, ‘티모시 살라메는 왜 저렇게 해골처럼 말랐으며 저렇게나 살을 빼야 했을까’라고도 할 것이거나 ‘테일러 러셀 이 여배우 정말 신성(新星)이로군’하는 소리도 나올 것이다. 아 그리고 무엇보다 두 연인의 식인(食人)하는 모습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끔찍해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매우 흥미로워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곧 나 같은 사람들)은 이들의 여정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게 더 특이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주인공인 18살 식인 소녀 매런(테일러 러셀)은 버지니아에서 시작해 오하이오의 컬럼버스인지 인디아나주인지에서 또 다른 식인 청년 리(티모시 살라메)를 만나, 함께 켄터키와 아이오아를 거쳐 미네소타의 퍼거스폴스란 병원에서 자신의 엄마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잠깐 헤어졌다가 네브라스카에서 다시 만나 미시간 앤 아버에서 잠깐이나마 정상적으로 정착해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곧 다시 식인의 사달이 난다. 지도를 놓고 보면 알게 된다. 이들이 다닌 거리가 얼마나 광대한 지역을 거쳐 가는지. 거의 2000㎞에 육박할 것이다. 그것도 편도로 그럴 것이다. 영화는 그 거리만큼 해당 지역의 모습을 잠깐 잠깐 스케치 하듯 보여 주려고 주력하는데, 대체로 경제수준(소득 수준)이 낮은 곳이다. 버지니아주는 인기 컨트리 가수였던 존 덴버가 히트 노래의 가사로 써서 친근한 곳이지만, 사실 미국에서 가장 못사는 지역에 속한다. 웨스트 버지니아, 오하이오, 인디아나 모두 러스트 벨트 지역이다. 한때 융성한 공업지대였으나 제조업의 쇠퇴로 몰락한 도시들이자 주(州) 들을 말한다.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스윙 스테이트에 속한 지역들이다. 부동층이 많은 주라는 의미이고 트럼프가 공을 들였던 지역이다. 그가 재임 당시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를 반대하며 버지니아와 미네소타를 해방시키라는 주장까지 나왔던 곳이기도 하다. 왜 영화는 이런 지역을 훑어 나갈까. 영화는 식인, 곧 사람을 먹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이다. 영화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이터(eater)라 부른다. 이들의 원칙 아닌 원칙 같은 것 중의 하나는 ‘이터는 이터를 먹지 않는다’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들이 왜 식인 습성을 지니게 됐는지 영화엔 나오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이터들은 사람을 먹지 않으면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참고 참아도 결국엔 먹어야만 한다는 것인데, 드라큘라가 흡혈을 아무리 참으려 해도 그러지 못하는 것과 같다. 주인공 매런은 아빠의 엄격한 통제 하에 학교생활을 하고 있지만(아빠는 아이가 자면 방 밖에서 문을 잠가 버린다. 학대하는 아빠인가?), 또래 아이들의 유혹으로 밤에 몰래 집을 나섰다가 친구 여학생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먹고 만다. 장면이 결과적으로 끔찍해서 그렇지 사실 시작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원래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들, 육체적으로 누군가에게 끌리게 되는 사람들은 종종 상대의 손가락을 빨곤 한다. 손가락은 육체적 접촉의 첫 관문 같은 신체의 일부다. 매런이 식인을 하는 모습은 마치 동성애 섹스의 전조(前兆)처럼 느껴지게 찍혔다. 이는 곧 섹스와 사랑은 식인의 행위와 다름 아닐 수 있으며, 약간 발전시키면 식인의 습성이란 어쩌면 애정의 결핍을 극단적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욕망과 욕구의 표현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아이가 입가가 피범벅이 된 채 새벽에 들어오자마자, 아빠는 딸에게 간편한 짐만 꾸리라고 채근하며 동네에서 도망갈 준비를 한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종종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아 왜 밖에서 문을 잠갔는지 이해가 된다. 이후 아빠는 새벽에 몰래 잠든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간다. 더 이상 너를 돌 볼 수 없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아이의 식인습성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놀랍게도 매런이 처음으로 먹은 인간은 유모였다. 대부분의 식인 포식자들은 유모의 젖가슴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등등의 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출생증명서를 남긴 채 떠난다. 이 출생증명서로 매런은 자신의 생모가 지금 미네소타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매런은 엄마를 만나야겠다는 일념, 곧 자신의 식인 정체성의 근원을 알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녀와 식인 남자 리의 긴긴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세상에는 소외된 계층들이 넘쳐난다. 현실적 측면에서, 곧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밀려난 계층과 계급이 엄청 많아진 세상이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물적 토대가 빚어낸 정신적 소외 계층들은 더욱 더 넘쳐 나는 세상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서적, 정신적 결핍에 시달리고 거꾸로 편집증에 가까운 집착과 이상 행동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기 마련이다. 이는 성적인 측면에서 매우 다양한 편차를 만들어 나가는데, 한때 동성애가 차별과 절대적 소외의 대상이었다면 이 영화는 그 극단의 집단으로 식인주의자들의 모습을 그려 나간다. 그들(소외된 사람들)은 사회에서 완전히 떨어진 채 자신만의 고립된 삶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소수 중에서도 완전히 소수이며 그렇기 때문에 가난하고 궁핍하며 낮은 계층을 형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가 버지니아에서 미네소타까지의 긴 여정을 통해 그 사회·경제적 배경을 보여 주려 한 이유일 것이다. 이걸 다소 극단화된 형태로 정리하자면, 가난한 자들은 다른 방식의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먹는 것이든 성적으로든 아니면 사람간의 관계와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든 늘 심각한 욕구와 욕망의 결핍에 시달리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심리가 사람들을 식인의 행위를 통해서라도 상대를 가지려는 이상 성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거꾸로 얘기하면 식인은 결국 일부 극단적 소수자들이 갖고 있는 사랑하기의 방식(the art of loving)이며 자신들의 사랑을 완전체로 가게 하기 위한 필수적 행위일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감독 루키 구아다니노는 널리 알려진 동성애자이다. 그가 지금껏 만든 영화들 ‘아이 엠 러브’와 ‘비거 스플래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통해서도 짐작케 하듯, 자신 스스로가 끊임없이 이 세상의 사랑, 남녀 간, 동성 간의 사랑을 완전체로 만들려면 어떠한 길로 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루키 구아다니노는 이 영화의 원작이 됐던 카미유 드 안젤리스의 소설에 매료됐을 것이다. 매런의 ‘엄마 찾아 삼만리’와 리와의 러브 스캔들 모두에 깊이 동화됐을 가능성이 크다. 감독의 그런 내면에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평가에 대한 갈림길이 될 것이다. 제목 ‘본즈 앤 올’은 뼈까지 싹 먹어 치우다는 뜻이다. 매런이 마지막에 뼈까지 먹어치우는 대상은 누구일까. 매런은 또 다른 포식자이자 중년 남성인 설리(마크 라일런스)에게 스토킹을 당하는데 그야말로 그녀에게 이터는 이터를 먹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게 만드는 인물이다. 식인주의자들이든 동성애자들이든 이성애자들이든 자신들의 사랑의 연대를 잘 이뤄내지 못해 비극이 생긴다. 모든 게 다 사랑 때문이다. 다 그 놈의 사랑 탓이다. 짐 자무쉬 감독의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와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렛 미 인’을 뒤섞어 연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흡혈에서 식인으로. 영화의 상상력이 여기까지 왔음을 보여 준다.
영화는 명백히 이야기 설정이 어떠한가에 따라 대중적 성공, 예술적 평가가 갈린다. 그건 어떻게 보면 백남준의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과 같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아이템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 우리는 그들을 아티스트라 부른다. 영화 ‘올빼미’는 그런 ‘씨네아스트(cinéaste)’의 탄생을 알리고 예고하는 작품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올빼미’는 조선 16대 왕 인조 때의 이야기이다. 인조는 26년간 조선을 통치했고 영화 속 사건, 곧 소현세자의 죽음은 인조실록 23년 때의 일이니 1645년이 배경이다. 사건을 겪고 인조는 우리 햇수로 4년, 곧 1649년에 사망한다. 앞선 사건이나 인조의 죽음이나 실록은 간단하게 처리한다. 그래서 알고 보면 매우 미스터리하고 수상쩍다. 감독 안태진의 착안이 시작된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역사의 공식기록인 실록조차 소현세자의 죽음을 독살 아닌 독살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짓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영화 ‘올빼미’는 60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진실을 명확하게 밝히되, 그 방법을 목격자의 증언에 따른 것으로 찾아내는 식이다. 문제는 그 목격자란 인물이 맹인 침술사라는 것인바. 다만 낮에는 못 보지만 밤에는, 특히 완전한 어둠 속에서는, (약간이나마)보이는 주맹증(빛이 없어야 보이는 시각장애) 환자라는 것이다. 그런 인물이 과연 역사 속에 실재했을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사건의 본질은 다른 데에 있다. 무엇보다 사건의 행동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사건의 근원, 경악할 만한 진짜 범인은 누구였을까. 주맹증이란 신소재의 조건 때문에 영화 속 사건은 매우 복잡해진다. 과연 주인공 침술사가 본 것은 정말 ‘본 것’인가. 그가 보지 않은 것은 무엇이고 진짜 본 것은 무엇인가. 세상을 살면서 눈을 뜨고 봐야 할 것은 무엇이며 차라리 눈을 감고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본다는 것 그 자체는 무엇인가. 많은 상념이 영화를 보는 내내 사람들의 가슴을 휘몰아친다.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침을 잘 놓는 경수(류준열)는 어의 이형익(최무성)에게 발탁돼 궁으로 들어가게 되고, 곧 그의 침술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병자호란으로 청(후금)에 인질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김성철)가 돌아오고 궁 안과 바깥세상의 분위기에 긴장감이 흐른다. 서인으로 보이는 최 대감(조성하)은 세자와 손을 잡고, 혹은 세자의 등에 업혀, 조선의 권력을 잡으려 한다. 어쩌면 소현과 최 대감은 조선과 세상을 개혁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청을 통해 변화한 문물을 접한 세자와 아직 친명적 이념의 가치를 지닌 인조(유해진)는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만성 기침에 시달리는 세자는 종종 침술 치료를 받곤 하는데, 어느 날 밤 경수는 어의 이형익이 세자에게 독이 묻은 침을 놓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경수는 곧 이 사실을 세자빈 강씨(조윤서)에게 알리지만 사건은 이상한 방향으로 일파만파,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방향으로 번져 나간다. 그리고 그의 목숨이 일각에 처하게 된다. 경수는 진짜 범인을 세상에 알리게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왜 이런 일, 이런 언어도단의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일까. 조선 27대 왕 가운데에서 인조는 가장 무능하면서도(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교활한(인조반정, 광해군 폐위) 왕으로 꼽힌다. 그가 그렇게 불리는 데는 왕권의 정통성을 거의 인정받지 못한 데 따른 것이고, 그 같은 정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해 재위 26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인조는 오로지 가문의 복수를 위해 멀쩡했던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된 인물이었다. 정통 왕권에 도전해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인 셈이다. 그가 북악산 기슭 홍제천에서 일군의 반정 세력, 무사들과 칼을 씻고 뒤로 삼각산을 넘어 창덕궁을 친 일화는 유명하다. 광해군은 그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이복형으로, 한때 능양군으로 불렸던 인조는 자신의 큰 아버지를 ‘친 셈’이 된다. 선대의 왕 선조는 두 명의 왕비와 6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광해군과 인조 모두 후궁의 핏줄로 태어난 자식이다. 인조가 광해를 제거할 때 뒀던 명분은 그가 선조의 두 번째 정실인 인목왕후와 그녀의 자식 영창대군을 죽였다는, 일종의 친족 살해 혐의였다. 그러나 그 본질은 수많은 자식을 둘러싼 권력승계 문제로 야기된, 더 깊게는 신하들과의 권력 분점 문제로 야기된 당파 싸움이 원인이었다. 당시 조선은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 ‘피 터지게’ 싸웠으며,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고, 북인은 다시 소북파와 대북파로 나뉘었다. 서인은 훗날 노론과 소론으로 갈린다. 어쨌든 인조의 옹립은 대립세력이었던 서인과 남인이 오로지 광해군을 끌어 내리고자 하는 목적의 일시적인 연합으로 가능해진 것이었다. 왕의 자질보다는 이 같은 권력 구조의 다툼을 잘 알았던 능양군, 곧 인조는 정쟁을 활용해 왕위에 오른 인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영화 ‘올빼미’가 출중한 것은 이 같은 거대담론의 줄기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른바 영화적 추론으로 당시 시대를 짐작하게 하고, 진실의 아우라에 접근하게 한다. 영화는 이형익이 소현 세자를 독살하고 침술사 경수가 그것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 서스펜스(극적 긴장감)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우리는 이제 범인이 누군지를 다 알고 있다. 관객 모두에게 범인의 음모가 만천하에 드러났는데, 영화 속 주요 인물들만이 그걸 모른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손에 땀을 쥐게 된다. 주인공에게 어서 도망가라고, 빨리 진실을 알아채라고 속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게 된다. 안태진이 뛰어난 감독이라는 것은 그 같은 서스펜스의 정통 기법을 인조실록의 몇 줄 안 되는 기록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중흥과 새로운 도약을 맞이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기회가 소현세자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시대는 그것을 걷어찼다. 조선이 다시 반짝, 기회를 얻은 때는 정조에 이르러서였다. 효종과 현종, 숙종, 경종, 영조 등 5대를 거친, 100년을 훨씬 지나서이다. ‘올빼미’가 폭로하고 있는 것은 사건의 실체와 범인에 있기도 하지만 시대를 허송세월한 권력 찬탈의 비극, 권력의 정통성이 부재할 때 빚어지는 참극에 대한 진실이다. ‘올빼미’는 보려 하지 않는 것과 그저 보게 되는 것,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보려 하는 것에 대한 영화이다. 곧 무지(無知)와 인지(認知), 인식(認識)의 차이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무지에서 인지로 건너가는 길은 어렵다. 많은 지식을 알아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지에서 인식으로 가는 길은 더욱 더 험난하다, 알게 된 것을 실천을 통해 자기화, 내면화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전체든 모든 변화의 시작은 인식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올빼미’는 조선조 16대 왕 때 벌어진 일을 ‘인지’함으로써 지금의 사회를 ‘인식’하고 그런 수순으로 세상을 바꿔 나가자고 역설한다. 이 얼마나 오묘한 행위인가. 실로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안태진의 등장을, 곧 새로운 한국영화의 시대를 목격하는 당신은 야맹증인가 주맹증인가. 지금처럼 권력의 정당성이 입증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은 영화의 주인공이 한때 그랬던 것처럼 보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어둠 속을 잘 살펴야 할 일이다. 진실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극장을 포기하고 넷플릭스로 곧장 직행한 아르헨티나 출신 세계적 감독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의 역작 ‘더 원더’는 몇 가지 키워드를 이해하면 훨씬 더 흥미로울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1860년대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이런 얘기를 왜 지금 하려 했는지 그 현재성이 느껴진다. 더 나아가 기이하게도 우리는 이 영화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보편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키워드는 영국의 산업혁명, 아일랜드 대기근 그리고 크림 전쟁이다. 산업혁명은 대체로 1760년부터 1840년에 이르기까지 진행됐다. 방직기계의 발명으로 공장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한 분야의 발전이 연관 산업으로 이어져 경제 시스템의 근대화, 자본주의 경제의 초석이 만들어졌다. 사회는 혁신되었을지 모르지만 빈부격차는 극단적으로 벌어지고, 10세 미만의 아동들이 공장 노..
영화 ‘에브리띵 윌 체인지’의 정체는 극 후반부에서 드러난다. 이건 다큐인가 극영화인가, 환경영화인가 SF인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다가 확연한 깨달음이 오는 순간이 도래한다. 이건 2054년의 세 청년이 해킹을 통해 2022년의 우리에게 영상 자료를 하나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미래에서 온 영화이다. 미.래.영.화.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미래에서 보내 온 영화라는 설정이 아니라, 단순히 그런 얘기가 아니라, 정말 미래 세계의 누군가가 이걸 보낸 것일 수도 있겠다는. 그런데 기껏해야 32년밖에 안 남았다. 32년 후를 살아가고 있는 세 친구, 곧 남자 둘과 여성 1명은 세상 바깥의 모습은 알지 못한 채 인공 지능과 안구에 장착된 인터넷 베이스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살아간다. 인간의 생체와 기계가 결합된 트랜..
공포영화는 세상을 읽는 척도다. 공포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 그 표현 수위, 통용되는 방식, 관객의 수용 태도 등등은 그 사회가 지금 어떤 문제의 지점을 관통해 내고 있는 지를 가늠케 한다. 그래서 한때는 공포영화의 그런 진지한 태도가 싫다며 팝콘형 공포영화, 곧 그냥 즐기는 오락 형 공포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스크림’이나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등이 그랬다. 그러나 공포영화는 곧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 본래적 역할, 곧 사회의 메신저 역할을 해내곤 한다. 영화를 보면 세상이 보인다는 말을 조금 좁게 치환시키면 공포영화를 보면 세상이 잘 들여다보인다가 된다. 감독부터 나오는 배우 대다수가 거의 ‘듣보잡’인 미국 영화 ‘스마일’이 쥐도 새도 모르게 10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홀연히 극장에서 사라진 것은 마치 공포영화 자체가 그렇듯, 소름 끼치는 일이다. 게다가 절대적 비수기라 불리는 기간에 벌어졌던 일이다. 영화 ‘스마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걸 보는 우리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스마일’은 극도의 편집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주인공 앞에서 깨진 유리로 목을 그어 자살했는데 그 순간 얼굴엔 기이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 표정을 목격한 주인공이 어마어마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는 설정이다. 문제는 주인공 자신도 곧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집증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고 그런 증상이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결국 다들 목을 긋거나 총을 쏘거나 하는 등등 갖가지 방식으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짧게는 나흘, 길어 봤자 일주일 상관에 벌어진 것들이어서 주인공 로즈(소시 베이컨)도 스스로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 극도로 초조해 하기 시작한다. 로즈는 과연 어떻게 죽을 것인가. 혹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지는 않을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주인공 로즈와 함께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노이로제를 느끼기 시작한다. 영화 ‘스마일’은 명백히 코로나19의 전이와 전파, 그 전염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동시에 코로나19와는 다른 얘기를 다룬다. ‘스마일’은 코로나19에 대한 얘기인 척, 사실은 하고 싶은 얘기가 따로 있음을 영화 내내 서서히 드러낸다. 영화가 코로나19에서 코로나19가 아닌 얘기로 넘어가는 순간, 바로 그 시점에 ‘스마일’이 지닌 본질적 주제가 담겨 있다. 결국 주인공 로즈의 영화 속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로즈의 생사는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 바, 그건 이 영화를 만든 파커 핀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기 때문이고 또 그가 그러기로 한 것에는 관객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판단이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무지 세상을 살아갈 쉬운 방법이 없음을 다들 인정하게 될 것이다. 영화 ‘스마일’은 한 번도 마음을 풀어 주지 않으며 오히려 공포의 강도를 점층적으로 높여 나간다. 이러한 서술방식이 이 누군지도 모르는 감독과 배우들 모두가 세상과 영화에 대해 꽤 두텁고 정교한 심미안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영화의 만듦새가 꽤나 좋다. 점점 미쳐 가는, 극도의 정신 분열에 시달리는 연기를 해 낸 소시 베이컨의 연기가 눈에 띈다. 당연히 그런 연기를 뽑아낸 연출의 힘이 평가를 받아야 한다. 당분간 사람들이 짓는 미소나 웃음이, 그 속에 결코 간단치 않은 진실을 담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웃음이 무서운 세상, 미소를 재해석해야 하는 세상은 평화롭고 아늑하며 행복한 무엇과는 담을 쌓은 상태일 수밖에 없다. 이유도 알 수 없고 비교적 급속한 속도로 전염되는 바이러스의 공포는 사실 바이러스 자체에 대한 무서움보다는 그것이 전이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심리적 위축, 그 확산이 더 큰 두려움을 만들어 냈다. 바이러스로 인해 시작된 공포는 사람들 간의 불신, 정치 사회적 차별과 탄압, 경제의 양극화로 인한 소통의 단절들을 양산해 낸다.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사람들을 극도로 고립시켰는데 영화 속 주인공 로즈의 환자들(그녀는 신경정신과 의사로, 스스로가 상담의이기도 하다)은 대다수 역시 혼자서 이상한 증세에 시달린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를 보고 느끼며 결국 그녀나 그도 죽고 자신도 죽게 된다고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로즈는 전 애인 조엘(카엘 케터)과의 관계 이후 안정적인 남자 트레버(제시 어셔)와 행복한 생활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지만, 트레버는 곧 여자의 기이한 행동들에 질려 하기 시작한다. 로즈의 고립과 고독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무도 그녀의 공포를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로즈는 어릴 때 자신 앞에서 죽어 간 엄마에 대한 기억을 소환시키기까지 하는데 그녀를 극한으로 몰아가는 건 다른 귀신이 아니라 바로 엄마 귀신이다. 어쩌면 가장 가까웠던 사람. 무조건적인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더욱더 무서운 것은 그 관계의 파탄은 이미 근원적이었고 모든 트라우마와 공포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무서운 형상으로 로즈에게 나타나 왜 ‘그때’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느냐고 힐난한다. 결국 로즈의 심리 밑바닥에 있는 공포, 그녀가 자신 앞에서 목을 그은 여자의 모습을 보고 난 후 겪게 된 트라우마의 정체는 죽어가는 엄마를(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공포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그건 최근 몇 년간의 세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의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타인의 고통, 타인의 죽음보다는 그저 나만 살면 된다는 극도의 이기적 생존 의식과 그 유전자를 확인시킨 공포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이제 극도로 고립된 상태에서 외롭게 죽어갈 것이다. 자신만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들어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그런 심리적 증상을 치유할 방법을 찾아내지도 못할 것이다. 바이러스 치료제가 나온다 한들 그런 세상에 대한 치유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영화 ‘스마일’이 다루고자 하는 공포의 정체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은 치료될 수 없다는 것, 이제 우리는 치유의 한계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줄곧 매우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쇼크에 이르게 한다. 그 괴상망측한 존재, 심지어 미소를 띠고 있는 그 기묘한 형상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 한다. 그 존재는 당신이 지금 일하고 있는 데스크나 의자 옆에 붙어 있거나 천정 위에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고 심지어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는 식이다. 영화 ‘스마일’은, 공포영화란 사람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하게 하는 장면이 세 개쯤 있어야 하고, 끔찍하게 자해하거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세 개쯤은 있어야 하며, 사람들의 시체가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게 돼 있는 장면이 세 개쯤 있고, 너무 징그러워서 욕지기가 나오는 장면이 세 개쯤은 있어야 한다는 그 원칙 아닌 원칙에 충실한 영화다. 결론은, ‘스마일’은 꽤 무서운 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그 스마일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왜 자신을 죽이기 전에 미소를 띠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이제야 마음의 짐, 가슴속 공포를 벗어나게 됐다는 식의 안도감 같은 것 때문일까. 아니면 ‘너도 나처럼 될 것이다’는 식의 저열한 심리의 소산일까. 분명한 것은 그 미소가 매우 기분 나쁘다는 것이다. 극장 문을 열고 나온 후에도 꽤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돌아가는 길, 차창 속에는 내가 웃고 있는 모습이 비칠 수도 있겠다. 진짜의 나는 전혀 웃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의식 저 밑바닥에는 어떤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가. 길가 골목에서 어처구니없이 죽은 156명의 젊은 아이들을 구해 내지 못했다는 것? 그 죄책감이 나의 이기적 생존 유전자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 영화는 자꾸 거울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내 얼굴이 미소를 짓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마음속 심연 저 한가운데에 있는 괴물을 꺼내게 만드는 세상이다. 영화 ‘스마일’은 그 깊은 우물의 공포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고속도로 가족 장르 : 드라마 감독 : 이상문 출연 : 라미란, 정일우, 김슬기 “우리 여기 너무 오래 있었잖아. 이제는 여행갈 때야.” 빠른 속도로 목적지까지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이용하는 고속도로. 그 바쁜 여정에서 식사와 피로를 풀기위해 사람들은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떠나곤 한다. 그렇게 모두가 스쳐가는 이 휴게소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이 있다. “지갑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2만 원만 빌려주시겠어요?”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가족의 이야기. 아빠 ‘기우’는 휴게소를 찾는 사람들에게 2만 원씩 빌려(?) 가족의 생계를 이어간다. 돈을 빌리기가 쉽지 않으면 적절한 때에 어린 아이들이 등장해 “아빠 배고파”를 시전한다. 그 2만 원으로 기우와 딸 ‘은이’, 아들 ‘택이’, 아내 ‘지숙’까지 네 가족은 컵라면을 먹거나 휴게소 식당 메뉴 하나를 오순도순 나눠 먹으며 끼니를 해결한다. 텐트를 집 삼아, 밤하늘의 달을 조명 삼아, 휴게소 곳곳을 캠핑장처럼 활용하는 이 ‘고속도로 가족’의 일상은 자유롭고 낭만적인 삶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들에게 돈을 내어주었던 ‘영선’을 또 다른 휴게소에서 마주치며 가족의 일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는 기우네 가족을 발견한 영선이 기우를 경찰에 신고한 것. 이 일로 기우와 가족은 헤어지게 되고, 영선은 오갈 데 없는 지숙과 아이들을 거둬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아이들이 눈에 밟혀 그들에게 손을 내민 영선은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이다. 그는 누군가 쓰다 내놓은 가구를 씻고 윤을 내, 새로운 쓰임새를 찾아주는 중고 가구점 사장이자 사회적 재난으로 아들을 잃은 아픔을 가진 인물이다. 작품은 타의로 사회의 안전망 바깥에 놓이게 된 사람들과 슬픔에 잠식된 채 지내는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 존재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문제를 바라보게 만든다. 영화는 배우들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라미란은 영선 역을 맡아 그동안의 코믹함을 덜어냈다. 차분하고 진지한 모습이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기우네 가족을 살뜰히 보살피는 따뜻함을 보여 준다. 김슬기는 지숙 역으로 분해, 기존의 밝고 통통 튀는 연기와 차별화된다. 무기력해 보이지만 이 가족의 ‘정신적 지주’인 지숙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기우 역의 정일우는 꼬질꼬질한 얼굴, 추레한 차림새로 등장인물 중 외적인 변화가 가장 크다. 극단을 오가는 감정을 표현하며 연기의 폭을 확장한다.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
실연(失戀) 같은, 개인적인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대중가요의 가사가 다 자기 얘기처럼 들린다고 한다.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가 커지면 영화의 내용이나 그 안에 나오는 대사가 다 지금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컨대 이런 대사다. 두 남자가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다. “존, 이곳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과연 증오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극복? 맙소사. 심오한 질문이네. 그래. 우리가 피를 많이 흘리긴 했지. 하지만 난 너를 형제라고 생각해. 믿는 건 너뿐이야. 그거면 됐어.” 존이라고 불리는, 질문을 받은 남자는 백인(프랭크 라우텐바흐)이다. 질문을 한 남자는 흑인이다. 이름은 부쉬(모더시 마가노). 여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지방 도시이며, 요하네스버그 근처 소도시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국제 러시안 갱들과 연결..
극장가 비수기로 통하는 가을. 지난 26일 두 편의 리메이크 영화가 나란히 개봉했다. 주인공은 ‘리멤버’와 ‘자백’. 각각 캐나다·독일 합작 영화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와 스페인 영화 ‘인비저블 게스트’를 원작으로 한다. 개봉과 동시에 실시간 예매율 1, 2위(리멤버 25.2%, 자백 20.6%·26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를 차지한 두 영화는 침체된 극장가 구원 투수가 될 수 있을까. ◇ 평생을 기억해야 했던 아픔…‘리멤버’ “내 이름은 한필주. 뇌종양 말기 알츠하이머 환자입니다. 이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되었습니다.” ‘리멤버’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80대 알츠하이머 환자 ‘한필주’의 복수극을 그렸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가족이 몰살당한 주인공이 나치 군인을 향해 복수하는 원작 설정을 우리나라 역사에 맞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