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서였다. 영화 ‘존 윅’ 시리즈의 처음 설정은 그렇게 단순하고 진부한 것이었다. 미스터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전설의 킬러였다. 그는 정말로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어느 날 이런 남자라면 늘 그렇듯이 착한 여자를 만나고 개과천선한다. 그러나 그 천사 같은 아내가 강아지 한 마리를 남기고 병으로 죽는다. 그래도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그런데 동네 건달들이 애지중지하는 강아지를 죽인 것이 화근이 됐다. 미스터 존 윅은 다시 ‘업계’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온갖 음모와 살해 위협에 시달린다. ‘존 윅 1·2·3’ 편은 대체로 그런 얘기였고, 그래서 당연히 서사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죽고 죽이는 액션만이 중요해 보이는 영화였다. 그런데 미스터 존 윅이 생존해야 하는 이유가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게 이제야 밝혀진다. ‘존 윅 4’는 킬러들의 세계에조차 지금과 같은 ‘극히 계급적인 사회 구조=시스템=강고한 조직의 규율과 원칙’이 존재하며, 그것을 지키거나 혹은 위반하는 데 있어서는 확고한 명분이 있어야 하고, 또 그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의 철학까지 갈고 닦아야 만이 ‘진정한 킬러=이 세상의 진정한 생존자’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다. 미스터 존 윅을 둘러싼 업계에는 ‘최고회의’라는 것이 존재하며 모든 킬러는 그 밑에 있고, 그 킬러들의 조직 단위는 패밀리이다. 존 윅은 어떤 패밀리에도 속하지 못한(예전엔 루스카라는 러시아 패밀리 소속이었지만 현재는 파문당한 상태) 프리랜서 킬러일 뿐이다. 최고회의가 제거하려는 것은 존 윅이라는 인물보다는 존 윅이라는 전설 그 자체이다. 존 윅은 이번 4편에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최고회의와 그로부터 막강한 지지를 받는 그라몽 후작(빌 스카스가드)의 잔혹한 위협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라몽 후작에게 1:1 결투를 신청해야 하며, 또 그러기 위해서는 루스카 조직을 이끌고 있는 카티야(나탈리아 테나)로부터 패밀리 멤버 자격을 다시 따야 하는데, 또 한 번 또 그러기 위해서는 클럽을 운영하는 악당 하르칸(스콧 앳킨스)을 죽여야 한다. 하르칸을 처리하지 못하면 그라몽 전에 카티야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에 그라몽이 고용한 또 다른 전설의 맹인 킬러 케인(도니 옌·견자단)이 존을 추격한다. 또 여기에 현상금 사냥꾼인 ‘노바디’(세미어 앤더슨)의 추적까지 이어진다. 쫓는 자만 있으면 그나마 얘기가 단순한데, 존 윅을 돕는 자까지 여럿이 등장한다. 일본 오사카의 콘티넨탈 호텔 매니저 시마즈(사나다 히로유키)가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뉴욕의 콘티넨탈 호텔을 없앤 것에 분노한 매니저 윈스턴(이아 맥쉐인)은 자청해서 존 윅의 후원자가 된다. 뉴욕 홈리스의 왕(로렌스 피쉬번)은 존 윅에게 무기와 최고급 방탄 슈트를 제공한다. ‘존 윅 4’에는 이런 부류의 영화로는 잘 차용하지 않는 과거 할리우드 고전이나 명작들의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오프닝 장면에서 존 윅이 사막을 가로지르며 말을 타고 총격을 벌이는 모습은 영락없이 데이빗 린 감독이 1962년에 만든 피터 오툴 주연의 ‘아라비아 로렌스’의 시퀀스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맹인 킬러 케인의 모습은 일본의 60년대 영화 ‘자토이치’의 캐릭터에서 가지고 왔으며, 존 윅이 클럽 악당 하르칸과 마주 앉아 카드를 칠 때 케인과 노바디가 옆에 앉아 서로를 겨누고 있는 장면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만든 1992년 영화 ‘저수지의 개들’에 대한 오마주이다. 하르칸과 킬러 셋은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남자 넷처럼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다. ‘존 윅 4’의 이야기 구조는 결국 1:1 결투를 벌이는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서부극의 그것을 따라간다. 거기에 일종의 아시아적 생산 양식에 해당하는 무협의 서사 구조를 얹히려 한다. 최고회의를 구성하는 패밀리의 존재는 무림의 9대 문파를 닮았고, 이른바 강호의 규칙과 정파(政派)와 사파(邪派)의 논리 등을 끌어다 붙인다. 영화 속에 유난히 동양사상 경구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악당인 그라몽조차 이렇게 말한다. “한 가지를 대하는 태도가 만 가지를 대하는 태도이다.” 일본 사무라이 친구 시즈마는 존 윅의 무모한 삶을 걱정하며 말한다. “좋은 죽음은 좋은 인생 뒤에만 오는 법이네.” ‘존 윅 4’의 액션신들은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최고봉이다. 존 윅은 6시 3분, 일출 시각에 결투 장소인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도착해야 하는데, 시간을 못 맞추면 패배한 것으로 인정되고 그건 곧 자신과 윈스턴 등등 모두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라몽 일당은 존 윅을 시간 내에 오지 못하도록 파리 시내와 몽마르트르 계단에 엄청난 킬러 군단을 깔아 놓는다. 존 윅이 사크레쾨르 성당에 가기 직전 폐가에서 일군의 킬러들과 근접전을 벌이는 장면은 천정이 없는 세트장에서 부감 샷으로 찍은 것인바, 대체로 원 신 원 컷의 롱 테이크로 찍었다. 그 액션을 디자인한 상상력과 기술, 스턴트의 개인기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는 계단에서 벌어지는, 총격과 근접 무술이 배합된 액션신은 향후 수십 년간 나올까 말까 한 고난도의 기술력을 선보인다. 액션의 정교함도 정교함이지만 그걸 그럴듯하게 찍어 내는 촬영술도 현대 영화의 테크놀로지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가늠하게 만든다. 감독인 채드 스타헬스키는 스턴트 배우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윅 4’의 톤앤매너는 끝나지 않는 싸움에 처한 한 킬러의 누적된 피곤함과 그 쓸쓸함에 대한 것이다. 존 윅은 이번에 유난히 힘들고 지쳐 보인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다정한 남편’이라 적히길 원한다. 사람의 야망은 그 사람의 가치를 넘어서서는 안 되는 일이다. 미스터 존 윅은 그걸 깨달은 지 오래다. 이번 ‘존 윅 4’에 나오는 대사이며 주제이다.
영화 ‘길복순’에서 의외로 놀라고 좋았던 것은 (근데 이건 감독을 둘러싼 기이한 논쟁들, 이른바 그의 ‘일베 성향’을 둘러싼 의혹들에 비하면 이상하다고 할 정도) 가상의 킬러들 세계조차 철저한 자본주의 양극화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설정이다. 이건 꽤 괜찮은 사회과학적 사고이다. 영화는 이런 패턴의 세계관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다소 비뚤어진 지역 감정과 왜곡된 역사의식의 시한 폭탄을 숨겨놓음으로써 논란을 자초했다. 근데 그건 좀 심하게 이상한 일이다. ‘길복순’은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위험성도 지니고 있는 바, 이건 순전히 감독 리스크, 곧 변성현 리스크에 따른 것이다. 변성현은 어쩌면, 세상을 보는 시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선생이 없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돈된 역사의식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다. 변성현 리스크는 영화..
미안한 얘기지만 새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달콤쌉싸름한 연애 얘기가 아니다. 시대가 어두운 만큼 사랑스러운 영화를 기대하는 심리가 높겠지만, 이 영화 ‘나의 연인에게’를 지난 2022년 베를린영화제가 괜히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멜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처절하고 비극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다. 영화는 살짝 멜로영화의 고전 격인 ‘러브 스토리’(1971) 처럼 시작하는 척, 사실은 드니 빌뇌브의 역작 ‘그을린 사랑’으로 전개되다가 폴 그린 그래스가 만든 ‘플라이트93’의 결말을 향해 가되 그 시선은 친미나 반미가 아닌 중립적인 노선을 취하려 애쓴다.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매우 복잡한 시선과 감정을 갖게 되는 영화이다. 무엇이 옳은가. 사랑은 옳아야 하는가. 옳지 않아도 사랑을 하면 괜찮은 것인..
스즈메(목소리 역: 하라 나노카)는 규슈 구마모토 현에 살고 있는 소녀다. 16살이며 엄마는 4살 때 실종,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공무원인 이모 타마키(목소리 역: 후카츠 에리)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이모는 죽은 언니 대신 스즈메를 키우느라 청춘을 보냈다. 남자를 집에 초대하지도 못했고, 마음 편하게 어디 놀러 다니지도 못했다. 스즈메는 스즈메대로 그런 이모가 한편으로 부담스러운 구석도 있다. 스즈메는 아직도 엄마가 어딘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꿈을 자주 꾼다. 엄마는 손재주가 좋았는데 책상 의자 같은 걸 직접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고가 있던 ‘그날’, 의자 다리 하나가 빠졌었다. 스즈메는 그 ‘불량’ 의자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 채 살아 간다. 엄마가 남기고 간 것이니까. 스즈메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모가 차려 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냅다 달리는 중이다. 그런데 고개 아래 길 맞은 편으로 한 잘생긴 청년(나중에 알고 보니 교원을 준비 중인 대학생), 소타(목소리 역: 마츠무라 호쿠토)를 만난다. 소타는 스즈메에게 “이 근처에 폐허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때부터 스즈메는 소타와 함께, 아니 소타를 ‘갖고’ 다니며 폐허 속 문을 찾아 문단속에 나서게 된다. 소타가 고양이 묘석 다이진의 저주에 걸려 스즈메의 다리 세 개짜리 의자로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타에 따르면, 폐허 속 문을 닫지 않으면 대지진이 일어난다. 그의 설명으로는 일본 전역 동서 양쪽에 두 개의 묘석이 박혀 있고 이 묘석이 ‘미미즈’를 가둬 놓고 있는데 미미즈는 대규모 재난을 일으키는 엄청난 에너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소타는 대대로 토지시(閉じ師, 닫는 자) 집안의 사람이다. 소타는 병석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 ‘히츠지로’ 대신 세상의 문단속을 하고 다니는 중이다. 애니메이션 판타지에 걸맞는 동화 같은 얘기지만 이 2D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와 작화, 연출을 모두 맡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메시지는 비교적 간단 명료하다. 일본에서 더 이상의 재난은 없애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으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 같은 것으로. 스즈메 같은 착한 소녀의 염원들을 모아서이다.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같은 소박하고 순수하며 어여쁜 소망이 담긴 작품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착하고 선한’ 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이해하는 데는 영화 속 스즈메의 동선을 따라가 보면 된다. 스즈메는 규슈 구마모토에서 출발해 시코쿠 지역의 에히메로 갔다가 혼슈의 고베 그리고 도쿄를 들러서 큰 문단속을 하고 결국엔 고향인 후쿠시마까지 긴 여정을 완성한다. 시코쿠의 에히메는 지난 2021년 기록적인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다. 영화에서도 스즈메가 문을 닫는 과정에서 비바람이 치고 폭우가 내린다. 스즈메는 폐허 속 버려진 한 학교의 교실 현관 문을 닫는데 성공한다. 에히메 산사태 때 학교 학생들의 희생이 컸을 것이다. 고베는 아예 ‘고베 대지진’이라는 말을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다. 1995년 규모 7.3의 대지진이 일어났고, 7000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으며 5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한, 대재해였다. 영화에서 스즈메는 의자로 변한 소타와 함께 간신히 이 지진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한 유원지에 버려져 있는 대관람차 문 하나가 막 열릴 참이었다. 당시 고베에서는 평소처럼 유원지에 놀러갔던 가족 단위의 참사가 컸다. 자, 그리고 스즈메의 마지막 행선지는 도쿄와 후쿠시마이다. 도쿄는 1923년 간토(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던 곳이다. 그때 무려 40만 명이 죽었다. 이 간토 대지진은, 직후에 벌어진 세계 대공황과 겹쳐 일본 사회를 극우 파시스트의 사회로 몰고 가게 한 직·간접적인 요인으로 작동한다. 한편으로는 도쿄에서 하급 노동자로 일하던 식민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느니, 방화를 일삼는다느니 해서 집단 학살이 일어났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스즈메와 소타는 요석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 미미즈는 나오지 못한다. 스즈메가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4살 때 집을 떠났던 후쿠시마다. 12년 전, 그러니까 2011년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던 곳이다. 규모 9.1이었다. 이 대참사로 18만 명이 매몰됐다. 이어 후쿠시마 원전 사태까지 터졌다. 일본은 아직도 이 동일본 지진의 재난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벗어나 있지 못한 상황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래서 어쩌면, 신카이 마코토식 일본 대지진의 역사 기록서로 읽히기도 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상상대로 요석이 잘 박혀 있었어야 했다. 하나는 규슈에 또 하나는 도쿄에. 그때나 지금이나 스즈메와 같은 착한 소녀 그리고 소타 같은 불굴의 토지시가 있다면 사람들은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스즈메의 엄마는 살아 있을 것이다. 그날 아침 다녀오겠다며 방글대면서 엄마와 바이바이를 했던 아이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아이들을 무심코 보냈던 엄마들, 가족을 위해 일터로 나갔던 남자들, 그 많은 사람들의 사연. 그 모두와 모든 것이 다 살아 있게 됐을 것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목놓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절박감, 그럼에도 그 폐허 위에서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무엇과도 같은 심정인 셈이다. 스즈메는 현재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후쿠시마로 향해, 집이 있었다고 짐작되는 곳에서 폐허의 문을 열고 4살 때로 돌아 간다. 그리고 곧, 꿈 속에서 늘 엄마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엄마처럼 성장한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스즈메는 비로소 엄마의 죽음을 직시하고 그 죽음의 통과의례를 거쳐 한 단계 다른 차원의 자신으로 성장한다. 스즈메가 커 나가듯 일본 사람들도 죽음의 현실을 받아 들임으로써 그 죽음을 넘어서야 한다고 신카이 마코토는 이야기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을 그리고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일종의 재난 철학, 재난에 대한 사상을 따뜻한 감성으로 전하는 작품이다. 재난은 재난을 당하는 과정에서는 분루(憤淚)의 감정에 휩싸이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는 늘 감동의 휴먼 드라마와 눈물 없이 듣고 볼 수 없는 이야기가 펼쳐지기 마련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영화 엔딩에 나오는 밴드 래드윔프스의 노래 카나타하루카(カナタハルカ, KANATA HARUKA)는 많은 것들을 함의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다. 사랑은 혁명도 초조함도 천재지변도 아닌, ‘너’였어/ 몇천 년 후 인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얼굴로 웃는 너를 보고싶어/ 너와 보는 절망은 네가 없는 희망따위 흐릿하게 빛나게 할테니까 우리는 흔히 일본 사람들, 특히 일본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비판적이 되곤 한다. 우파인 자민당 70년 체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느냐고 지적들을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는 하루하루 살아낸다는 것, 대자연재해의 트라우마를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수 있겠다. 그들은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니까. 신카이 마코토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스즈메처럼 남들을 살리려고 애쓰는 마음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며 사람들 간 연대이고, 세상의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올바른 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결코 혁명도 초조함도 천재지변도 아닌 바로 너, 내 곁에 오늘도 숨쉬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 ‘너’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하기 전에 자신 곁의 단 한 사람부터 구할 일이다. 세상은 차곡차곡, 한 발 한 발, 매우 구체적으로 바뀌어 나가는 법이다. 세상의 모든 ‘토지시’를 위하여!
Dear Mr. 브루스 윌리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서울에 사는 사람입니다. 영화 평론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데일리 신문과 방송, 유튜브로 영화를 소개하는 영화 리뷰어입니다. 당신의 최신작, 아니 거의 마지막 작품 격이 될 것 같은 영화 ‘디텍티브 나이트: 가면의 밤’을 소개하려다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한국은 잘 아시지요? 제 기억에는 1995년엔가 서울 강남 논현동이란 곳에 플래닛 할리우드라는 레스토랑을 오픈하면서 그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실베스타 스탤론인지 아놀드 슈왈제네거였는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신은 거기에 갔다가 당시 용산 미8군도 들렀었지요. 한 방송사 기자였던 나는 그 과정을 취재했었습니다. 아주 오랜 얘기지요. 플래닛 할리우드는 당신 포함, 세 액션..
알리 아바시 감독의 2022년작 ‘성스러운 거미’는 충격 그 자체의 영화이다. 많은 사람, 특히 무슬림에 대해 일정한 편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경하고, 역설적으로 신선할 정도의 소재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란 사회, 특히 테헤란도 아니고 순교자의 땅이란 뜻의 종교 도시 마슈하드에서 매춘부들이 공존하고 있는 데다 그 여성들 16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히잡을 쓰고 몸을 파는 여인들을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이란 사회가 종교적으로 폐쇄적이어서 윤락이라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강직성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지 못한다. 윤락 여성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내는 구조적인 문제이지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문제는 아니다.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여자..
다소 요령부득하던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 단 한 신으로 모든 걸 정리한다. 아빠(폴 메스칼)는 사람들 틈에서 우스꽝스럽지만 나름 진지하게 춤을 춘다. 주인공 딸 소피(프랭키 코리오)의 눈에는 그때 아빠 모습이 빛과 어둠 사이에서 명멸하듯 깜박인다. 그것은 그 장면을 떠올리는, 이제 31살이 된 소피의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기억이란 늘 깜박거리며, 그럼으로써 그 사이사이에 놓인 추억을 소환시키는 법이다. 어쨌든 이 장면이 이 영화 ‘애프터썬’의 하이라이트인 이유는 순전히 그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팝 음악 하나 때문이다.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이다. 이 노래 가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영화의 주제에 밀물처럼 다가선다. 가사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이 세상이 어떤 건지 안다는 것은 정말 재앙이야/ 계속 사랑으로 극복해 보려 하지만 결국 난도질당하고 찢겨 버렸네/ 사랑은 한낱 철 지난 단어에 불과하지만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꿔 줄 거야/ 우리 스스로를 보살펴 줄 수 있게끔 만들어 줄 거야/ 이게 우리의 모습이지/ 억압 속에서 억압 속에서/ 억압!’ 이 장면과 이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 영화는 약간의 착시를 준다. 영화는 소피가 11살이 되던 해, 아빠와 했던 튀르키예 여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행복했던 유년 시절에 대한 추억담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가 절규했듯이 이 세상이 어떤 건지 알게 되면 재앙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재앙에 대한 얘기일 수 있다. 행복과 재앙 사이에 끼어 있던 어렸을 적 언제쯤에 대한 얘기이다. 소피가 세상을 알게 된 시점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때였던 듯 보인다. 이제 31살이 됐고 레즈비언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은 유년 시절의 그때만큼 행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과연 행복은 무엇인가, 삶의 저 밑바닥에 놓인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 질문에 끊임없이 휩싸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20년 간극의 소피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그 방식이 매우 특이하다. 오래된 일은 단편의 기억을 조각조각 이어 붙이게 하는 법이다. 아마도 소피에게는 그것이 ‘애프터썬’을 걱정해, 그러니까 해변에서 햇볕에 그을릴 것을 대비해 아빠가 자신의 어깨와 팔에 살살 발라줬던 선크림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촉감과, 그때의 햇살과 바람과 바닷물의 출렁임이, 연상작용으로 떠올랐을 것이며 어느 순간 그 여행의 전체가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아빠가 그때 내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바꿔 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아빠는 나를 사랑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아빠는 그때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지금의 나로 바꿔 냈을 것이다. 소피의 삶은, 우연한 기회(아빠의 캠코더를 발견한 것)에 그 사실을 기억한 지금, 또 다른 영역과 차원으로 넘어갔음을 깨닫게 한다. 영화는 그렇게 인간의 정신적 의식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표현해 낸다. 물질이 의식을 규정하지만, 때론 의식이 물질을 규정한다. 한 번의 깨달음이 세상을 바꾼다. 영화는 정신성(性)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 지니는, 그 경이의 순간을 그려낸다. 이 영화가 온갖 평론가협회에서 상찬받은 이유(런던, 전미, 시카고, LA, 보스턴, 뉴욕비평가 협회상)는 그 찰나의 각성을 물리적으로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는 글이나 문학으로 혹은 음악으로 아니면 그림으로, 더더군다나 한 편의 영화로 표현해 내기가 워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에피소드 뒤에 숨어 있는 무섭고 어두운 삶의 오라(aura), 그 고통의 평범성을 끄집어내는 것, 관객이 그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에는 매우 정교한 연출의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무엇보다 인생의 진실에 대해 꾸준하면서도 진지한 고찰이 이어져 있어야 한다. 감독인 샬롯 웰스에게서 느껴지는 부분이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엄마와 헤어져 살고 있는 데다, 집이 있는 스코틀랜드에서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아빠는 소피가 11살이 되던 어느 해 둘만의 여행을 계획한다. 아빠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은 즐겁기도 하지만 어색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여행사 단체 여행과 자유여행을 섞어 튀르키예에 온 첫날부터 아빠는 침대가 하나뿐인 것을 두고 여행사에 항의 전화를 하게 된다. 소피는 이미 잠들었고 아빠는 아이의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준 후 베란다에 나가 아이 몰래 담배를 피운다. 그는 이상한 몸짓으로 몸을 흔드는지 춤을 추는지 하는데 이때의 롱테이크 장면은 묵음으로 이뤄진다. 완벽한 밤의 침묵. 아이는 침대에서 자고 있고 그 건너 창을 열고 바깥 베란다에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몸을 흔드는 아빠. 이건 아이의 기억인가. 상상인가. 아마도 그건 이 모든 기억을 소생시킨 캠코더 속 장면일 수 있다. 소피가 이 모든 이야기를 스스로 엮어내게 된 건 아빠가 여행 중 찍었던 캠코더 속 영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니까. 영화는 다소 불길하게 느껴질 만큼 어두운 암시가 중간중간 박혀 있는데, 그건 아빠의 ‘본질이 갖는 무엇’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빠가 자신과 엄마를 버리고 떠난 것은 뒤늦게 발견한 성정체성 때문일 수 있다. 그건 소피 자신이 게이가 돼 있는 장면 같은 것, 어린 소피가 난간 위에서서 아래층 구석의 두 남자가 키스하고 몸을 더듬는 장면을 엿보는 것 등으로 짐작하게 한다. 무엇보다 아빠가 여행 중 줄곧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었던 모습은 딸을 위해 만들어 낸 매우 의도적인 가벼움의 일환일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왠지 모를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자살 충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슬쩍 보여 주는데 소피와 싸운 밤, 아빠는 비교적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려 한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주조(主潮)는 아빠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튀르키예 여행이 아빠를 만난 마지막 때였거나 아빠와의 행복했던 시간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아빠는 없다. 그 부성의 상실은 소피 자신에게 끊임없이 채워지지 않은 결핍의 원천 같은 것이다. 상실과 결핍. 인생에서 그것을 알게 되는 것만큼 외로운 것은 없다. 재앙은 없다. 퀸의 가사처럼 아빠는 누군가, 무엇인가로부터 억압받았을 것이다. 게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경제적 삶, 중하층 계급의 고단한 삶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이 주는 억압은 결코 관념적이지 않다. 무언가 구체적인 사건들이 있었을 것인 바 그 하나하나를 열거하지 않으면서도 그 억압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매우 특이한 귀착점을 보여 준다. 단체여행 중에 벌어진 노래자랑에서 아이는 혼자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 R.E.M의 ‘루징 마이 릴리전(Losing My Religion)’이다. ‘난 네가 웃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지/ 너의 노래를 들었다고 생각했어/ 네가 노력했다는 걸 알고 있어/ 모든 속삭임, 깨어 있는 모든 순간/ 난 나의 고백의 말을 고르고 있어/ 너의 눈을 맞추려 애쓰면서/ 상처받고 사랑에 눈먼 바보 같은 너’ 어쩌면 소피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이미 11살 때 삶의 진창을 알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검게 그을린 햇볕의 자국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사랑이 모든 것을 변화하게 할 것임을 그녀는 이제 확실히 깨닫는다. 그건 사라진(혹은 자살했거나 죽은) 아빠가 남겨 준 유산이다. 삶은 재앙이지만 늘 아름다운 것은 사랑 때문이다. 이 말이 단순한 관념의 서사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늘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증명하고 증거해야 하는 법이다. ‘애프터썬’은 그 모호하면서도 상세한 기억의 진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지휘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이 많다. 마스터 클래스에 나가 토크도 해야 하고, 줄리어드 음대 같은 곳에 가서 특강도 해야 한다. 집에 돌아와 아내 혹은 남편에게 약도 먹여야 하고, 아이도 종종 학교에 데려다줘야 하며, 그 와중에 틈틈이 개인 작업실에서 작곡도 해야 한다.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도 바꿔야 하고, 부지휘자도 선임해야 하는데 단원들의 투표로 결정하는 관례가 있지만 개인의 결정을 관철시키기도 해야 한다. 자신을 이끌어 준 스승과 종종 점심을 먹어야 하고, 후원 재단 대표를 맡고 있는 다른 지휘자와도 연을 쌓아 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일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지휘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은 예술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일 가운데에서 존재한다. 예술은 독자적인 척, 사실은 매우 관계‘적’인 것이며, 그 관계없이 독자‘적’일 수 없다. 예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예술적인 것과 함께 해야 하며 그 상관관계를 잃은 예술(인)은 결국 실패하거나 낙오할 수밖에 없다. 토드 필드의 역작 ‘TAR 타르’는 음악영화가 아니어서 안심(?)이 되는 작품이다. 지휘자의 얘기라는 작품 광고에 으레 이 영화는 대중들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클래식으로 범벅된, 클래식 클리셰(cliché)로 가득한 작품으로 예상되기 쉽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오케스트라 곡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과 엘가의 첼로 협주곡 정도이다. 그것도 영화 내내 전곡이 연주되는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영화의 음악감독인 힐두르 구드나토르는 화려하고 웅장한, 때로는 섬세한 클래식 선율보다는 차라리 음악의 배제, 때론 배경음악을 완벽하게 삭제하는 쪽을 선택한다. 예컨대 이 영화는 158분이라는 비교적 장대한 러닝 타임에 걸맞게 영화 앞단이 비교적 긴 시퀀스로 이뤄져 있는데, 그 시퀀스도 당연히 롱 테이크로 이어지거나 심지어 원 씬 원 컷으로 이뤄져 있다. 오프닝 장면에서의 마스터 클래스 토크 장면은 10분 가까이 이어진다. 여기서 주인공이자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랜쳇)는 자신의 음악 철학을 꽤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를 얻으며, 그를 통해 감독 토드 필드는 영화 ‘타르’가 어떤 행마를 이어갈 것인가를 관객들에게 암시해 낸다. 이 토크 장면이 진행되는 순간은, 당연히, 음악이 없다.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말과 말,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청중의 숨죽인 고요만이 이어진다. 그다음 장면이 더욱 압권인데, 여기에서도 음악은 완벽히 배제된다. 타르는 줄리아드로 장소를 옮겨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변을 토해 낸다. 왜 음악을 하는가, 음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음악가가 이뤄야 할 것과 위대한 음악가(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과 그의 인생을 어떻게 구별해서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해 얘기한다. 이 장면은 아주 긴 원 씬 원 컷으로 이뤄져 있다. 토드 필드의 카메라는 강의장 무대와 객석을 오가며 열정적인, (학생들 시각에서 보면 어쩌면) 매우 독단적인 예술관을 피력하는 타르를 한 번의 컷 없이 뒤좇으며 롱 테이크로 담아낸다. 이 강의는 나중에 타르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 되는데, 그녀를 둘러싼 성추문 의혹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된다. 때문에 이 장면 역시 음악이 없는 건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음악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음악 영화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아, 이 영화는 클래식 애호가용이 아니군’이라는 생각을 비로소 갖게 만든다. 영화는 점점 더 다른 이야기, 음악을 뛰어넘는 이야기로 비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를 매우 흥미롭게 격상시킨다. 리디아 타르는 클래식 음악계의 유리 천장을 뚫은 인물이다. 특히 여성이 차별받는 지휘자의 세계에서 당당히 베를린 필하모니의 수장이 됐다. 그런데 곰곰이 들여다보면 타르의 여성성, 여성주의의 완성이 그녀를 마에스트로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음악적 권력을 얻기 위해 남성주의의 스킬을 구사하고 있거나 그것을 병행해 왔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처럼, 클라우디오 아바도처럼 점철된 카리스마와 완벽주의로 단원들을 이끌어가고 있으며, 음악적으로 자신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래서 자신이 완전한 스페셜리스트가 되면 될수록 다른 모든 문제는 주변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여성성은 오로지 그녀가 레즈비언으로 커밍 아웃한 것뿐으로 보이는데, 바이올리니스트 단원이기도 한 파트너 샤론(니나 호스)과의 관계에서도 동반자라기보다는 가부장적 남편의 위치에 서있거나 그러려고 한다. 타르는 둘이 함께 키우는 딸 페트라가 학교 폭력을 당하자, 가해자 학생에게 찾아가 자신이 아이의 ‘아빠’라고 소개하며 윽박지른다. 또 러시아에서 온 새로운 첼리스트에게 눈길을 주고 그녀를 자신의 자서전 출판 기념회가 열리는 미국 출장에도 데리고 다니는데, 이는 당연히 샤론과의 관계에 균열을 발생한다. 가장 큰 문제는 크리스타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 지휘자가 타르에게서 받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자 그녀와의 그간 관계를 부인하거나 관계의 증거를 없애려고 한다는 데에서 벌어진다. 짐작컨대 타르와 크리스타는 한동안 혼외정사의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타르는 자신을 흠모하는 조수인 프란체스카(노에미 멜랑)에게 크리스타와 관련된 모든 이메일을 삭제하라고 한다. 타르는 말한다. “우리가 불필요한 일에 휘말릴 필요는 없잖아.” 물론 그녀로서는 맞는 말이긴 하다. 도이체 그라모폰과의 리코딩 작업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자기 음악에게만 열중하기에도 시간이 없을 지경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자신이 그러는 이유를 받아들여야 하며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후원 재단의 대표를 맡고 있는 지휘자 동료 엘리엇 캐플란(마크 스트롱)이 조언을 구하자 ‘남을 베끼려 하지 말고 자신의 것을 완성하려 노력하라’고 말할 만큼 타르는 스스로가 당당하다고 생각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크리스타의 자살을 둘러싼 의혹이 불거지고 타르는 곧 이런저런 법적, 행정적 소환에 직면한다. 리디아 타르는 그 모든 문제를 이겨 내고 도이체 그라모폰과의 실황 녹음을 완성할 수 있을까. 베를린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객원 지휘자가 아닌) 자리를 계속 지켜낼 수 있을까. 타르를 둘러싼 모든 추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토드 필드 감독이 얘기하려는 것은 사안이 지니는 진실의 절대성이나 상대성 같은 해묵은 주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예술의 독자성과 상대성, 그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쉽게 말해, 위대한 예술가는 그가 이뤘거나 이뤄 내고 있는 예술적 성취와, 자신이 갖는 모든 인간적 약점 가운데에서 어느 지점에 서있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예술을 완성한 아티스트는 수많은 실수, 위선, 오만함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의 얘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술가는 하나만이라도 잘하려 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걸 잘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며 이는 곧 스페셜리스트여야 하는지, 제너럴리스트여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사고로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더 확장하면 파시스트가 창궐하는 시대에서 예술가(음악과 미술 영화 심지어 정치까지)는 자신의 작품이 지니는 완성도에 치중해야 하는지 아니면 세상과 일상의 일에도 화답해야 하는지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 균형은 어디인가. 예술과 삶의 밸런스는 유지될 수 있는가. 과연 예술과 인생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찾아지는 것인가. 타르는 어느 날 자신의 작업실 아파트 건너편에 사는 치매 노인이 휠체어에서 넘어지고 바닥에 똥을 싸 사방이 오물 천지가 되자, 그를 간호하는 지체아 딸을 도와준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온몸을 미친 듯이 닦아 낸다. 타르는 그렇게 인생사가 언제 어느 순간에 똥바다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거나 아예 받아들이지 못한다. 타르 역을 연기한 케이트 블랜챗은 이번 작품에서 영화가 지닌 괴력만큼 엄청난 에너지를 소유한 연기자임을 유감없이 입증해 냈다. 그 구구절절하면서도 막대한 양의 대사는 단순히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타르란 인물로 자신의 인성 자체를 전환시키지 않는 한 이런 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카메라는 시종일관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블랜쳇의 모든 표정을 담아낸다. 압도적인 몰입감 없이는 그 부담감을 이겨낼 수가 없다. 영화 ‘타르’는 실제로 케이트 블랜쳇을 위한, 블랜쳇에 의한, 블랜쳇의 영화이다. ‘타르’는 오는 3월 12일에 열릴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은 물론 감독상과 여우주연상, 각본상, 촬영상, 편집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이런 작품을 두고 명불허전이라 부른다. 소름 끼친다.
무협 소설의 대부 김용의 방대한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천룡팔부: 교봉전’(이하 ‘천룡팔부’)은 짐작하거니와 내용을 따라가기에 다소 심란한 면이 있다. 무협 소설을 적어도 한 번쯤은 읽어 본 경험이 있어야 전체의 얼개, 그 오라(aura)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강호에 9대 문파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면 좋기 때문이다. 9대 문파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소림사가 그 문파 중 대표 격이며, 무당파도 들어 본 이름일 것이다. 곤륜파, 아미파 등도 있는데 아미파는 여걸들의 문파이다. 영화는 일명 거지들의 소굴이라는 개방파의 얘기다. 무협 영화는 둘 중 하나이다. 매우 흥미롭거나, 도통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데다 이야기 흐름이 너무 억지스러워 도저히 목불인견이거나이다. 때문에 무협 영화는, 매우 잘 골라 봐야 하며 이쪽 분야에 제작, 연..
이야기의 시작은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습지에서 쿼터 백 출신의 남자 체이스(해리스 딕킨슨)가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되는 데서부터이다. 이 사체는 동네 아이들이 발견하는데 그건 마치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 ‘스탠 바이 미’의 첫 장면과도 같다. 보안관 둘이 탐문을 시작하고, 이들은 오로지 남자 몸에서 나온 붉은색 털실 한 오라기를 근거로 습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여성 카야(데이지 에드가 존스)를 유력 용의자로 체포한다. 영화는 카야의 재판 과정을 추적하며, 여자 스스로 자신의 짧은 인생을 되돌아보거나 변호사인 밀턴(데이빗 스타라탄)에게 지난 10년의 삶을 들려주거나 진술하는 플래시 백의 기법을 따라 대부분의 이야기를 진행한다. 처음엔 미스터리 살인극으로 시작된 영화가 곧바로 서정의 서사시를 이어 나가는 이유다. 카야, 아니 주변 마을 사람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