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출신의 배우 에릭 바나는 은근히 팬이 많은 세계적 스타이다. 그가 ‘블랙 호크 다운’이나 ‘헐크’ ‘트로이’ ‘뮌헨’에 나왔던 2002년~2006년은 그의 인기의 꼭짓점이었다. 모든 스타의 인기는 5년 안팎이 절정이며 그건 인생의 헤이데이(heyday)가 딱 그 정도인 것과 비교적 정확하게 닮아있다. 에릭 바나는 최근 들어 ‘블루백’ 같은 해양 환경 영화에서 작은 역을 맡는가 하면 ‘드라이’ 같은 호주의 자국 영화에 출연하기도 한다. 그는 68년생이고 57세이며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배우’이다. 그런 에릭 바나가 주인공인 넷플릭스 드라마가 ‘언테임드’이다. 6부작이다. 당연히 시청을 주저 없이 선택하게 되는 데다 샘 닐(뉴질랜드 출신)이 나오고 영화광들에게 한때 사랑받았던 로즈마리 드윗(‘레이첼, 결혼하다’, 2008, 조너선 드미 감독)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바로바로 ‘픽’하게 되는 드라마임에도 ‘언테임드’는 제목처럼 종종 길들여지지 않는 요세미티 계곡에서처럼 길을 잃는다. 그냥 잃는 정도가 아니라 많이 잃는다. 대본상의 서사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며 캐릭터의 일관성도 주인공인 카일 터너(에릭 바나)와 후배 수사관 나야(릴리 산티아고) 외에는 그리 탄탄하지 못한다. 왔다 갔다 한다. 스토리는 이야기를 벌리고 좁히는 리듬감에서도 실패해서 전체적 균질감이 그리 두텁지 못하다. 이런 유의 드라마를 두고 비평 쪽에서는 대체로 ‘못 만든 작품’이라는 단정적인 어휘를 쓴다. 최근의 한국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 주인공이 영화 속 웹 작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있다. “작가님. 이번 작품은 정말 최악이에요.” 드라마 ‘언테임드’의 연출가인 마크 L. 스미스, 엘르 스미스 (둘은 아버지와 딸이다)에게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감독님들. 이번 작품은 정말 최악이에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에 기이한 매력이 담겨 있고 6부를 이어 볼수록 작품 속으로 기이하게 스며들게 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바로 영화의 배경이 되는 요세미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에릭 바나도 샘 닐도 아닌 바로 캘리포니아의 국립공원 요세미티이다. 서울의 다섯 배 크기에 해당한다는 절벽과 폭포의 천연 지역인 요세미티는 이 드라마의 앞이자 뒤이자, 그리고 전부이다. 모든 사건은 요세미티에서 벌어지며 이 안에서의 인간들, 주인공인 카일 터너과 그의 상관인 폴(샘 닐), 그의 전처인 질(로즈마리 드윗), 그리고 부하 요원인 나야는 대체로 대책이 없다. 사건은 좇지만 그들의 노력으로 풀리기보다는 어쩌면 이 위대한 자연이 스스로 그 범행의 민낯을 드러나게 하는 면이 있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무엇보다 비평적으로 상당히 양보해서 얘기한다면, 그렇기에 대본상에서 ‘구멍이 숭숭 보인다 해도’ 이해 못 할 바가 아니다. 대본이 마치 요세미티가 지닌 자연의 위대함처럼 스스로의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다소 나이브한 생각이 감독 둘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면 수긍할 수도 있겠다. 이 드라마는 요세미티에서 가장 유명한 지점을 드라마의 적재적소에 사용하고 있다. 첫 장면, 곧 두 젊은이가 암벽을 타다가 위에서 추락하는 여인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는 장면은 요세미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하프 돔’ 절벽에서 찍혔다. 이 씬은 매우 정교하게 찍혔으며(고공에서 여자가 추락하고 두 암벽 등반의 젊은이들이 딸려 추락하도록 동선을 디자인했다) 이 드라마에 순간적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요세미티의 또 다른 유명 지역인 글레이셔 포인트(Gracier Point, 전망대)는 영화 중반 살해당한 여자아이 루시(에즈라 프랭키)의 엄마가 시한부로 죽어 가면서 종종 명상하는 지점의 배경이 된다. 주인공 카일 터너가 가끔 심하게 괴롭거나 외로울 때 찾는, 아무런 조건 없이 살을 섞는 여인으로 라나라는 이름의 호텔리어(알렉산드라 카스틸로)는 터너 앞에서 관광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방에서는 요세미티 폭포가 한눈에 들어올 거요.”(상냥하고 가식적인 미소.) 따라서 6부작 드라마 ‘언테임드’는 주인공이 요세미티 국립공원인 작품이다. 대체로 미지의 공간, 위대한 자연이 그 속살을 살짝살짝 보여주는 작품의 경우는 대체로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 그 아우라가 드라마에 스며들게 만든다. 그러니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리는 거대한 자연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를 어차피 다 알아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신비주의가 이 드라마 전체를 휘감고 있다. 나중에 루시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는 첫 장면의 제인 도우(신원 미상의 여성 시체) 모습은 마치 그 옛날의 전설적 드라마로 데이비드 린치의 최고작 가운데 하나인 ‘트윈 픽스’를 닮아있다. ISB 특수요원 카일은 비닐 백에 누워있는 여자의 처참한 시체를 보면서 대략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과거 ‘트윈 픽스’의 FBI 요원 쿠퍼(카일 맥라클란)가 로라 파머(셰릴 리)의 시체를 봤을 때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ISB(Investigative Services Branch)는 국립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의 실제 부서로 국립공원 내 범죄 수사를 담당한다. 드라마 ‘언테임드’는 절벽에서 떨어진 여성 시체의 수사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 요세미티 계곡에 많은, 게다가 추악하기까지 한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모든 사람이 다 비밀을 갖고 있음을 그리는 내용이다. 각자의 비밀은, 대개가 그렇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이 은폐한 살인 범행은 또 다른 자의 살해 행위로 이어진다. 어떤 이가 숨겨 놓은 딸은 누구의 범행 대상이었거나 아예 스스로 범죄 행위에 나서기도 한다. 다 연결돼 있다. ‘언테임드’는 결코 풀리지 않는 야생의 매듭 같은 내용이다. 그 이음새의 순간을 눈치채고 궁극의 범인이 누구일 거라고 제5회쯤에 번쩍, 깨달음이 온다면 당신은 미스터리 스릴러의 대가급 독자이거나 관객, 혹은 시청자가 될 것이다. 계곡의 살인자를 좇는 얘기이고 계곡 깊숙이 모여 사는 히피 집단이 상당히 의심스럽지만, 그것도 다 맥거핀(눈속임 설정)이다. 드라마 ‘언테임드’의 살인사건 자체가 어쩌면 맥거핀이다. 그보다 이 드라마는 ‘상처’에 대한 얘기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은 죄 트라우마를 지닌다. 카일 터너는 케일럽이라는 이름의 어린 아들을 잃었다. 짐작하건대 어떤 소아성애자에게 유린당하고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역시 그때도 ISB 요원이었던 터너는 그 아동 살해자를 찾지 못한 것으로 수사를 종결한 바 있다. 터너는 여전히 숲속에서 혼자 아이와 대화하며 지낸다. 정상이 아니다. 그의 전처인 질은 재혼해서 살지만, 그녀의 정신상태 역시 온전하지 않다. 자식을 잃은 남녀는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터너의 부하인 나야 역시 살얼음판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그녀는 폭력적인 남편을 피해 아들을 데리고 LA라는 도시 경찰의 삶을 포기한 채 요세미티에 온 인물이다. 터너의 상관인 폴 역시 손녀 한 명을 잃었다. 그의 일상은 늘 자조적이며 관조적이다. 따라서 ‘언테임드’의 등장인물들 모두는 외곽의 범인을 쫓으면서 동시에 자기 내면에 있는 어둠으로부터 쫓기고 있다. ‘언테임드’는 그 이중의 고리를 보여주려 노력한다. ‘언테임드’의 마지막 장면이 좋다. 키 워드는 카일 터너가 남기고 간 그의 애마, 뒤에 남겨진 수사관 나야, 그리고 사슴 떼이다. 이 장면 역시 잘 찍혔다. 요세미티에 가고 싶어지게 만든다. 인생은 때론 매우 비논리적이며 부조리하고 직관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드라마 ‘언테임드’는 못 만든 작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느 순간 기억 속에 이미 스며들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언테임드’는 못생겼지만 기이한 매력이 차고 넘치는 여인 같은 작품이다.
다큐멘터리 ‘풀’은 제목이 잘못된 작품이다.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환경영화, 생태 영화쯤으로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심의 등급이 청소년관람불가로 나온 것이다. 풀이? 풀 얘기가? 이게 뭐지? 아마도 ‘풀’의 원래 제목은 ‘떨’이었을 것이다. ‘떨’은 은어이다. 대마초를 비하해서 부를 때 쓰는 말이다. ‘떨을 피다’, ‘떨을 하다’는 한국 대중들 사이에 ‘마약을 하다’로 인식돼 있다. 다큐 ‘풀’은 대마를 키우는 사람들 얘기이다. 대마의 합법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일종의 액티비스트들의 얘기이며 대마라는 실체가 가진 본질, 그 정치경제학에 관한 얘기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보는 사람들에 따라 상당히 논쟁적일 수 있다. 그건 마치 동성애 문제를 두고 기독교도들 상당수가 극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대마초 문제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만든 이수정 감독의 접근 방식은 다소 쾌활한 우울모드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 대다수는 밝은 표정들이지만 그들 중 몇몇은 본의 아니게 감옥에 갔거나 갔다 왔고 그래서 한국을 아예 떠났기 때문이다. 영화는, 대마에 대한 사회적 논쟁이 현재까지는 여전히 불법임을 의식한 듯 의도적이고 평면적으로 보이게끔 찍었다. 목소리와 주장을 강하게 담아내기보다는 ‘대마의 사람들’을 스케치해 나열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전체 톤앤매너를 상당히 자제시키려 하는 느낌을 준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면, 이번은 문제 제기이자 일종의 이슈 파이팅이니 만큼, 그리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다는 식이다. 이 정도로도 청소년관람불가가 나오는 시대 환경 탓을 의식했을 것이다. 지난 쿠데타 정부(윤석열)는 마약과의 전쟁을 정권 연장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대마 역시 양귀비, 히로뽕, 아편과 같은 카테고리로 들어갔다. 그토록 천박했던 정부의 기조는 약화 됐지만, 대마 얘기는 여전히 한국에서 새로운 진영 논리의 화약고로 쓰일 가능성이 크다. 다큐 ‘풀’이 지녀야 할 프로파간다의 수위는 애초부터 상당히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 ‘풀’은 대마가 지닌 의약품으로서의 가치, 그 효용성을 보여주는 데 주력하는 ‘척’ 한다. 그러나 사실 이 다큐는 상당 부분 무정부주의적 색채를 지니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뿌리를 과거 1960년대 미국의 히피즘과 연결한다. 따라서 사실은 다소 반체제적이고 불온한 내용들이다. 기존 거버넌스, 기성 질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재미있는 것은 그 ‘불온성’을 정확히 알아보는 사람들, 특히 당국자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는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많지도 않다. 지난달 6월 18일에 개봉돼 현재까지 1004명만이 봤다. ‘풀’에 대한 얘기는 여전히 철조망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이 금기의 사회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마에 대한 자본주의 사회 경제학은 영화 속에 나오는 랩퍼 빌 스택스나 아티스트 원 브로, JJ 진 같은 이의 입을 통해 어눌하게나마 이렇게 전달된다. 국가는 인간을 한 개인으로 보기보다는 필요한 노동력으로 보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에 대해 극히 경계한다. 각 개인이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국가가 요구하는 경제단위의 노동 일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마는 신성한 노동에 반하는 물질이기에 금지 약물이 될 수밖에 없어 왔다는 것이다. 대마 금지가 새마을 운동의 박정희 시대에 시작된 이유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독점을 넘어서기 위해 블록체인이 만들어진 것처럼 인간에게 좀 더 자유로운 공동체를 위해 대마의 합법화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바로 대마초 합법화 시민연대 멤버 같은 이들이다. 다큐는 그 사람들의 생각과 주장을 에둘러 보여 주려 애쓴다. 이제서야 일부 사람들이 알고 있다시피, 대마는 인간 신체에 필요한 카나비노이드란 성분을 지니고 있고 이것이 대체로 항우울제와 각종의 진통제로 쓰이며 치료 약재가 되는 약초, 풀이다. 현대적 질병에 최적화된 의약재임에도 불구하고 대마를 재배하고 의학적으로 사용하는 것에는 수많은 제재가 가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천호균 같은 사업가(유기농 제품 쌈지 대표)는 당국의 허가 하에 비교적 큰 규모로 대마를 키운다. 그는 지금과 같은 기후 위기 시대에 탄소 흡입량이 그 어느 식물보다 높다는 대마의 재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환경생태운동가이다. 그래서 그는 대마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관여하는 ‘대마자유연대’가 결국 평화와 통일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대마 농장은 휴전선 인근 파주에 있고 여기서 자진해서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은 일탈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다. 영화는 국가냐 개인이냐, 체제 이데올로기란 과연 무엇과 누구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가를 우회적으로 지적해 나간다. 가이 리치의 2020년 영화 ‘젠틀맨’에서 마피아인 미키 피어슨(매튜 매커너히)은 대마의 대량생산으로 유럽 유통망을 장악해 막대한 자금을 모은다. 브렛 헤일리란 감독이 만든 ‘더 히어로’(2018)에서 주인공 리 헤이든(샘 엘리엇)은 퇴락한 서부영화 전문 배우인데 하루의 무료함을 견디기 위해 거의 매일같이 옆집 남자와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이 마리화나이다. 이무영 감독의 발칙한 영화 ‘아버지와 마리와 나’(2008)는 속내의 제목이 ‘아버지와 마리화나’였던 작품이다. 기존의 영화들은 지난 45년간 쇠창살 안에 가둬 놨던 약초의 이미지를 순응적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다. 이번 이수정 작 ‘풀’은 그런 관습에 대한, 사상의 전복을 꾀하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물론 그 불온성은 다소 취약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문제 제기로서는 효용성이 크다. 적어도 사람들은 대마의 또 다른 이름들, 곧 헴프(새로운 나무), 마리화나 혹은 위드(질긴 생명력을 뜻한다)라는 단어를 알게 된다. 삼베옷의 그 삼이 대마 줄기라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된다. 대마 줄기에 대해서는 허준의 동의보감 때부터 그 존재감이 인정돼 왔다. 그 오랜 세월을 같이해 온 ‘풀’이 왜 지금은 무작정 금지되고 있는지 의문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다큐는 법적 금지라는 물리적 측면보다는 인간의 생각과 자유를 규제하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문제의식을 들이대는 쪽이다. 대마는 생명공학에서 중요해지고 있고 글로벌 바이오산업의 주요 제품으로 활용되겠지만 한국은 여전히 ‘간자당’ 사람들(사이에 낀 사람들 모임)이 4월 20일(대마의 날)에 즐기는 파티의 매개체일 뿐이다. 간자당 사람들은 새마을 운동 티셔츠를 대마을 운동으로 바꿔 입고 다닌다. 그렇게 영화 ‘풀’은 의도적으로 귀엽게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끝내 우울해지게 만든다. 대마는 불법이지만 그것을 불법으로 규정한 한국의 권력들은 더 큰 불법을 저지르는 파시스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잘못된 권력이 만든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큐 ‘풀’이 말 하려고 하는 대목은 바로 그 부분에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아직 일부 소수의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찾기 힘들 것이다. 이 작품이 보는 영화가 아니라 읽는 영화인 이유이다.
3천 년쯤 살아온 여자가 500년쯤 전에 헤어진 여자와 애증의 관계에 빠진다. 두 여자 모두 불멸(immortality)이다. 두 여자 이름은 앤디 안드로마케(샤를리즈 테론)와 꾸인(응오 타인 반)이다. 꾸인은 지난 5백 년간 바다 깊은 곳에 갇혀 살았다. 꾸인은 앤디가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원한을 갖는다. 앤디는 또 다른 불멸의 인간들을 찾아내고 인류의 적과 싸우는 드림팀을 만든다. 한편 꾸인은 디스코드라는 이름의 또 다른 불멸의 여인(우마 서먼)에 의해 구해진다. 디스코드는 앤디 팀을 없애기 위해 꾸인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레그 루카 원작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영화로 만든 ‘올드 가드2’는 2020년 작 ‘올드 가드’의 속편이다. 이번에 하는 걸 보니 ‘올드 가드3’도 곧 나올 모양이다. 이번 속편을 보면 ‘올드 가드’는 그냥 1편에서 멈추는 게 좋았을 법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올드 가드’ 시리즈는 물경 40년 전인 1986년, 크리스토퍼 램버트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하이랜더’ 시리즈의 21세기판이어서 CG, 특수효과, 근접 액션 촬영 기술 모두가 다 진화했지만 정작 더 좋아지지 않은 것은 스토리이다. 배우들이 대단하다. 샤를리즈 테론이나 우마 서먼 같은 대형 여배우가 저렇게 다소 황당해 보이는 캐릭터 설정을 어떻게 다 따라가고 있을까 싶은 정도이다. 저런 캐릭터에 어떻게 동화했나 싶다. 스타는 스타이다. 돈은 돈이다. 돈이 움직이는 스타는 무조건 감독이 원하는 연기를 뽑아낸다. 샤를리즈 테론은 자신이 출연했던 ‘이온 플럭스’(2005)에서 캐릭터를 자기 복제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우마 서먼은 역시 자신의 전작 ‘킬 빌 1, 2’(2003~2004)에서 나온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올드 가드’ 시리즈에서 제일 특이한 것은 동성애 코드이다. 앤디 안드로마케와 꾸인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잠깐 원수가 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침대에 눕게 되는 관계가 된다. 이 영화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두 여자는 같이 싸우기로 한다. 두 여자는 서로를 위해 죽겠다는 심정이다. 앤디 팀의 두 남자도 애틋하다. 조(마르완 켄자리)와 니키(루키 마리넬리)이다. 니키는 조가 자신에게 얘기도 없이 또 다른 불멸의 남자 부커(마티아스 쇼에나에츠 혹은 마티아스 슈나르츠)를 만나러 간 걸 알게 되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니키는 조에게 말한다. “우리가 불멸을 잃게 되더라도 내가 널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까지나 불멸로 남을 거야.” 이상하게도 ‘올드 가드2’의 진한 동성애 감성은 비교적 속이 깊게 느껴진다.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이 분명 판타지이고 허구이지만 이 동성애 코드만큼은 현실성이 꽤 강해 보인다. ‘올드 가드2’는 로케이션이 눈에 삼삼하게 들어오는 작품이기도 하다. 시작부터 크로아티아 스플리트가 나온다. 고대 황제의 은신처이자 궁정 같은 곳에서 앤디의 팀원들은 총격전과 육탄 난투극을 벌인다. 이탈리아의 리미니 또한 매력적인 풍광으로 나온다. 여기서 앤디와 꾸인은 재회한다. 앤디 팀은 곧 로마로 옮기고 팀원들은 각자 흩어지는데 이 시간에 앤디는 대한민국 서울 재래시장 뒷골목으로 온다. 거기서 한국인 불멸의 남자 투아(헨리 골딩)를 만난다. 앤디 팀이 다시 모이는 곳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이다. 핵시설이 있는 소도시 세르퐁이 최종 승부처이다. 자, 이게 다 무슨 ‘수작’일까. ‘올드 가드’ 시리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다. 넷플릭스 작품은 크게 오리지널과 라이선스로 구분한다. 오리지널은 순수하게 넷플릭스가 기획 투자 제작을 다 한다는 것, 그래서 IP를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라이선스는 말 그대로 외부의 작품을 계약 기간 동안만 독점 방영한다는 얘기이다. ‘올드 가드2’가 보여주는 로케이션의 면면은 넷플릭스가 최근 가입자 수를 늘리기 위해 가장 공들이는 곳들이라는 걸 나타낸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특히 인도네시아가 그렇다. 한국은 넷플릭스가 항상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이번엔 그 한국의 모습을 한국, 일본(일장기가 스쳐 나온다.), 중국의 모습을 혼합시켜 보여준다.(앤디 등이 쓰는 칼, 창 등의 무기, 투아란 인물이 쓰는 서가의 모양 등) 감독의 무지인지, 의도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 제치고, 넷플릭스가 요즘 가장 핫하게 생각하는 나라는 베트남이다. 베트남 여배우 응오 타인 반을 캐스팅하고 그녀의 입에서 베트남어가 튀어나오게 하는 것, 그녀를 주인공 샤를리즈 테론과 연인 관계로 만든 것 등등에는 다 이유가 있다. 베트남은 지난 몇 년간 영화 영상 산업에 있어 새로운 이머징 국가로 주목받는 나라이다. 넷플릭스가 한참 공을 들이고 있다.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이다. 중국과 달리 넷플릭스가 들어간다. 다만 극영화만이 전송된다. 넷플릭스는 이걸 확대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이 영화 ‘올드 가드2’는 넷플릭스의 기획 상품이다.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이야말로 작금의 챗GPT와 AI 시대의 새로운 롤모델이 될 것이다. 관심 지역, 돈이 될 지역, 영화 상품이 팔릴 지역을 찾아다니며 해당 공간을 조금조금씩 보여줌으로써 현지 관객을 모으고 현지 마케팅을 수행한다. 수지타산을 맞춘다. 그걸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현지의 배우에게 주요 배역을 맡긴다. 현지에 맡는 감성 코드를 개발한다. 예컨대 동성애 코드 같은 것이다. 인도네시아와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는 이 코드가 강세일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런 류의 영화에는 스토리, 서사가 중요하지 않다. 앤디 안드로마케가 어떻게 불멸의 존재가 됐는지 그 연원 따위는 중요치가 않다. 디스코드라는 여성 빌런이 사실은 사욕을 채우기 위해 명분을 내세우는데 그게 갑자기 돌변하는 것에도 괘념치 않는다. 디스코드는 앤디 등이 더 이상 “인류사에 개입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중간에 앤디가 불멸성을 잃었다가 다시 그 능력을 되찾는 과정도 어색하든, 말이 안 되든, 어떻게든 얼렁뚱땅 넘어간다. 마티아스 쇼에나에츠, 곧 부커가 주요 역할을 한다. 부커는 1편에서 앤디에 의해 팀에서 추방됐는데 언제 또 이렇게 서로 죽고 못 살 만큼 전우애를 불태우게 됐는지도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올드 가드2’의 특징은 많은 서사의 생략이자 점프 컷이다. 러닝타임은 1시간 47분이며 많은 것을 포기하면 그런대로 킬링타임용으로 좋다. 다만 3편은 이것보다는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게 하는 면도 있다. 영원히 사는 영생의 문제, 반대로 유한의 삶이라는 존재 조건은 태도의 문제에 달려 있다는 주제를 갖고 있다. 그 주제가 살아나면 이 시리즈 영화는 조금 더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샤를리즈 테론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우마 서먼이 젊어졌다. 넷플릭스가 시즌 드라마 8~12편 만드는 방식에서 영화를 한 편 또 한 편 만들어 덧붙이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시험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은 이제 옛날 방식이다. 자, 위기의 한국 영화계가 이런 기획 상품형 작품들을 추구할 것인가. 다소 민망하더라도 글로벌 차원으로 시장을 넓힐 수 있겠다. 남한 5천2백만 시장으로는 이제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고 아우성들이다. 작품은 후져도 시장은 넓혀 가는 전략이 좋을지, 그 가늠자 역할을 하는 것이 ‘올드 가드2’이다. 조금 생각해 볼 문제다. 영화냐 장사냐, 그것이 문제로다.
알렉스 가랜드(맞다. ‘시빌 워 : 분열의 시대’의 그 감독이다)가 쓰고 대니 보일이 만든, 게다가 세계적 스타 킬리언 머피가 영화의 제작비를 댄, 그래서 프로덕션 라인이 거의 드림 팀 수준인 영화 ‘28년 후’는 좀비 영화이다. 아니다. 좀비 영화가 아니다. 그것도 아닌가. 결국 좀비 영화인가. 결론적으로 ‘28년 후’는 좀비가 나오지만 좀비 영화만은 아니다. 아마도 이건 가랜드와 머피, 대니 보일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댄 흔적이 역력한 일종의 인류 멸망보고서이다. 세 사람은, 알려지기로는, 이번 작품을 시작으로 이 비극과 희망의 트리올로지, 3부작을 기획했으며 마지막 3부에는 킬리언 머피가 출연할 예정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번 ‘28년 후’는 대니 보일의 전작 ‘28일 후’(2003)와 ‘28주 후’(2007)의 완결판이 아니며 새로운 3부작의 시작이다. 대니 보일의 머릿속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 있을 것이다. ‘28년 후’의 마지막 시퀀스는 ‘28일 후’라는 중간 제목이 붙는다. 그러니까 영화 속 28년 후는 과거의 28일 후(2003년 작품때처럼)로 갔다가 다시 한번 28주 후로 더 돌아간 후 또다시 지금의 28년 후로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타임은 슬립되고 또 슬립된다. 굳이 이성적이고 물리적으로 시간이 주는 개념을 따지고 매몰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번 영화 ‘28년 후’에도 좀비가 가득 나온다. 그 ‘만행’들은 더욱 끔찍해졌다. 감염자 중 돌연변이에 해당하는 ‘알파’급 무리의 우두머리 삼손(치 루이스 페리)은 2미터가 넘는 거구이자 한마디로 짐승이다. 그는 사람의 머리를 한 번에 잡아당겨 척수를 통째로 뽑아낸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특수 분장, 특수효과 처리의 진수를 보여 주며 일부 관객들에게는 혐오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스웨덴 소속 나토군인 에리크(에드번 뤼딩)는 삼손에 의해 머리가 척추째 뽑혀 죽는다. 영화에서 끔찍하게 죽는 인간 중 1인이다. 영화의 주요 공간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해안가에 있는 홀리아일랜드이다. 스코틀랜드는 하이랜드와 로우랜드로 나뉜다. 영화에서는 본토인 잉글랜드를 잇는 로우랜드까지 완전히 차단된 상태로 나온다. 오직 하이랜드만이 살아남았고 그것도 일부의 사람들만이 모여 그곳을 ‘성스러운 섬’이라 이름 짓고 중세의 생활 방식으로 살아간다. 모든 물자의 공급이 끊긴 상태인 만큼 화살과 창을 만들어 자신들을 지키는 식이다. 종종 이들은 본토와 연결된 제방 둑길을 따라 좀비 떼가 득실거리는 본토로 수렵과 사냥을 나간다. 이를 위해 평소 철저히 훈련을 하고 아이들도 일정 나이가 되면 수업의 실습을 경험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좀비들에게 죽은 사람이 그간 부지기수이다. 영화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12살 꼬마 스파이크(알파 윌리엄스)는 아빠인 제이미(애런 테일러존스)의 손에 이끌려 제방 밖으로 나간다. 이 길은 썰물 때에만 열린다. 밀물이 되면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니 시간을 제때 맞춰야 한다. 스파이크는 활을 잘 쏜다. 아빠에게 그렇게 배웠다. 그는 좀비의 목과 심장을 맞춰줄 안다. 엄마인 아일린(조디 코머)은 왠지 모를 병으로 끙끙 앓는다. 발작이 잦다. 그녀는 죽어가는 중이고 이 설정이 영화의 중반 이후 반을 채운다. 왜냐하면 아빠의 거짓말(제이미는 아들 스파이크가 본토 수렵을 나가 좀비 여럿을 해치웠다는 식의 영웅담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아픈 엄마를 두고 마을의 유부녀 로즈와 섹스를 한다)에 실망한 스파이크가 엄마 아일린을 데리고 제방 둑길을 건너 좀비 소굴인 본토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이 본토에는 뜻밖에도 인간이 한 명 있는데 군 의무관 출신이라는 이안 켈슨 박사(랄프 파인즈)이다. 어린 스파이크 생각에는 이 의사야말로 엄마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인물이다. 영화는 앞단과 뒷단이 다르다. 전반부는 좀비 떼로 인한 인류 멸망 직전의 아수라장을 보여 주는 데 주력한다. 달려들고 물어뜯고 인육을 찢어발기며 악다구니로 먹어 치우는 좀비의 모습이 끔찍하다. 이들 존재는 다소 정치적인데, 바이러스의 정체가 바로 분노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원인 모를(아니면 생화학무기연구소에서 누출된) 바이러스로 세상은 붕괴했는데 그게 꼭 지금 전 지구상에 떠도는 극우 파시즘의 광기를 연상케 한다. 대니 보일은 인간의 이념적 광기가 언젠가 세상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라 경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나리오를 쓴 알렉스 가랜드는 그런 정치적 서사의 은유에 능한 인물이다. 전반부가 인류 최후의 모습을 극단화해 표현해낸 장면들이라면 후반부는 마치 신인류 생존보고서 같은 느낌을 준다. 여기에는 엄마의 존재(세상을 잉태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해 준다는 의미로)가 중요하고 그 존재의 철학적 당위를 뒷받침하는 박사가 있다. 켈슨 박사는 어린 스파이크에게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인생철학을 가르친다. 하나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이고 또 하나는 메멘토 아모리스(사랑하며 살라)이다. 알렉스 가랜드 & 대니 보일은 지금 세상의 모든 비극은 죽음(의 방식, 그 과정, 그것이 남기는 교훈)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에 따른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전쟁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반목과 갈등, 테러의 악순환을 일으키며 살아가고 있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전쟁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사람이 사람을 계급과 자본으로 억누르고 위협하며, 그럼으로써 극우 정치인과 자본가가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앞세워 광기의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식인의 정치사회학’적 사태를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 좀비의 대장 삼손은 마치 괴물로 변해버린 이 시대 자체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파이크의 엄마 아일린은 좀비가 된 어떤 여인에게서 아이를 받는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감염되지 않았다. 이 설정은 다소 의외일 수도 있으나 이 아이가 성장하는 향후 2, 3부의 에피소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켈슨 박사의 얘기대로 메멘토 아모리스, 곧 서로서로 사랑하게 하는 존재, 인간과 좀비 사이를 잇는 긍정의 돌연변이, 신인류이자 궁극으로는 성스러운 그 무엇의 여인이 될 것이다. 1부의 주인공 아이 스파이크는 이 어린 여자아이를 지키는 수호신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여자아이는 점차 생존자들의 희망, 구원자 같은 존재로 변해 갈 것이다. 대니 보일 스스로 인생 역작으로 만들어 내는 디스토피아 3부작이지만 멕시코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2006)의 일부를 차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2027년이 배경인 내용이었고 전 세계가 핵으로 인해 박살 난 상태인 데다 전 세계 여성 모두가 원인 모를(아마도 환경오염 탓으로) 불임을 겪어 18년 동안 신생아가 태어난 적이 없는데, 마침내 18살 흑인 소녀가 런던에서 임신한 상태로 발견된다는 설정이다. 이 소녀를 ‘확보’하려는 정부군과 이를 막으려는 저항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 새로운 인류, 새로운 출산, 새로운 메시아의 출현을 통한 새로운 구원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이번 ‘28년 후’는 메시아 영화의 계보를 잇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좀비와의 싸움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수위를 갖는 영화인 셈이다. 윌 스미스의 영화 ‘나는 전설이다’도 연상케 한다. 이 영화에서 좀비의 대장 격 인물은 자신의 좀비 여인을 구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좀비에게도 사랑의 DNA가 있음을 보여 준다. ‘28년 후’에서 좀비의 여인에게서 태어난 여자아이는 괴물 좀비인 삼손의 자식인 것 같은 느낌의 밑자락이 느껴진다. 이 관계가 향후의 에피소드를 규정해 갈 것이다. 메멘토 아모리스. 좀비에게도 부성애와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얘기로 이어갈 공산이 크다. 그렇게 인류와 좀비는 공생할 수 있다는 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좀비 엄마에게서 태어난 여자아이 이름은 스파이크 엄마의 이름과 같은 아일린이다. 이 아일린이 인류의 희망이 될 것이다. 영화 ‘28년 후’는 아일린 같은 신인류의 출현을 기원하는 영화이다. 그 기원이 현실적일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영화의 전반부가 보여 준 것처럼 지금 세상이 극도의 아수라라는 점은 철저하게 동의하게 되는 영화이다. 영화는 주변을 잘 보라고 권하고 있다. 영화 ‘28년 후’는 한편으로는 자본의 좀비, 이념의 좀비, 권력의 좀비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작품이다.
물이 반 잔이나 남았다, 반 잔밖에 안 남았다는 식의 얘기거나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것이라거나 아니면 세상은 이미 망했다 식의 얘기처럼 영화란 인간의 삶과 일상에 의미를 주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영화는 아무리 그래도 재미가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후자의 사람들은 대체로 영화를 코미디 장르로 만들거나 코미디 요소를 강하게 집어넣는 경향성을 보인다. 적어도 이들에게 있어 영화의 재미와 의미의 비율은 6대4거나 7대3이다.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베니니가 그랬고(‘인생은 아름다워’) 작금의 한국 영화계는 바로 감독 강형철이 그렇다. 강형철은 ‘과속 스캔들’과 ‘써니’에서 보여 준 자신의 ‘내추럴 본 코미디’의 자질을 새로 소개된(이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유아인 스캔들로 지난 2년간 공개가 미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하이파이브’에서 다시 한번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강형철을 코미디 전문 감독이라고만 규정지을 수는 없겠다. 그가 만든 ‘타짜 : 신의 손’(2014) ‘스윙 키즈’(2018) 등의 필모그래피는 강형철의 재능이 코미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이 탄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하이파이브’는 일단 설정이 발칙하다. 국내에 슈퍼 히어로가 암약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이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살을 했는데(너무나 강한 책임감 때문에?) 그의 장기가 총 6명에게 이식이 됐고 그 6명 모두에게 초능력이 전이됐다는 설정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6명 중에 악당이 하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5명의 신입 초능력자와 슈퍼 파워로 영생을 얻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싶어 하는 악당과 선악의 대결이라는 이야기 구조가 설득력을 얻게 된다. 악당의 캐릭터 설정에 있어서도 강형철의 스토리는 너무 나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 역시 특이한 부분이다. 아마도 영화 제작의 시작이 윤석열 시대 시작쯤에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서의 빌런은 정치권이나 재벌 같은 부류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그보다는 이 악당은 이단 종교의 지도자이다. 새신교의 교주 영춘(신구)은 자신이 거짓으로 이뤄 놓은 종교 제국을 ‘즐기기’ 위해 영생과 초능력을 얻으려 한다. 그는 슈퍼맨의 췌장을 이식받고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나며 후계자인 딸 춘희(진희경)의 음모로 다른 초능력자 5명에게서 그들이 이식받은 장기를 뺏어와 1인의 슈퍼 파워맨이 되려 한다. 다른 5명은 이 슈퍼맨 악당을 막기 위해 힘을 합친다. 다른 5명으로는 심장을 이식받아 강력한 파워와 속도를 지니게 된 태권 소녀 완서(이재민)와, 폐를 이식받고 엄청난 폐활량으로 강풍을 일으킬 수 있는 지성(안재홍)이 있다. 안구를 이식받아 인간 해커가 된 ‘양아치’과 남자 기동(유아인)도 있다. 간을 이식받고 치유 능력이 생긴 허약선(김희원)이라는 새신교 신자, 그리고 이 모든 능력을 흡수하고 연결시키는 능력의 김선녀(라미란)가 합세한다. 이들은 각각 나인 걸(구하는 소녀에서 구걸이라고 했다가 나인 걸이 된다.), 탱크 보이, 블루투스 맨, 밧데리 맨, 후레쉬 걸이라는 새로운 닉네임을 갖게 된다. 자신들 팀 이름도 하이파이브로 짓는다. 그러나 곧 하이파이브 멤버들은 사이비 교주 영춘 조직에 납치돼 장기가 적출된다. 영춘은 밧데리 맨 허약선의 간을 탈취해 급속도로 젊은 교주(박진영)로 변신한다. 하이파이브 초능력자 팀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하이파이브’는 기본적으로는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 ‘판타스틱 포’에서 이야기 구성을 가져오고(이들은 우주 비행사로 우주탐사에 나갔다가 초능력을 얻고 돌아오게 된다.) 여기에 잭 스나이더가 만든 ‘저스티스 리그’를 합치되, 소위 ‘빠다 맛’ 그러니까 할리우드 느낌을 완전히 빼버리고 순 한국식의 토종 느낌으로 만든 작품인 셈이다. 이 정도면 모방이 아니라 창작의 수준이다. 특이함이 유별나면 보편적이 된다. ‘하이파이브’는 해외 시장에서도 그리 이상하거나 촌스럽다는 취급을 받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독특하고 재미있으며 경제적인 면에서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을 공산이 크다. ‘저스티스 리그’ 같은 영화는 3억 달러(3563억 원)를 쓰지만 이번 ‘하이파이브’는 150억을 쓴 영화이다. ‘하이파이브’의 손익분기점은 국내 기준으로 290만 관객 선이다. 초능력의 현란한 신세계가 펼쳐지지만 이 영화 ‘하이파이브’의 진짜 미덕은 부성애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연대의 가치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나인 걸 완서의 아버지(오정세)는 태권도장 관장이다. 아이들에게 댄스에 가까운 태권 품새를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고 저녁에는 대리기사를 하면서 돈을 보충해서 번다. 실로 열심히 산다. 오직 딸 완서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아이의 병원비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아내도 심장병으로 잃었고 아버지도 심장마비로 돌아갔다. 완서의 아버지는 오직 완서만 바라보며 사는 팔불출이다. 그는 자주 찔찔 짠다. (이때의 오정세 연기는 발군이다.) 그는 아이가 초능력의 소유자가 된 걸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발차기만이 완서에게 몰려오는 악당의 수하들을 무찌른 줄 착각한다. 사실은 뒤에서 완서가 도운 것이다. 완서 아버지는 늘 이렇게 호언장담한다. “완서야. 아빠 뒤에 딱 붙어 있어. 아냐 아냐 저기 구석에 가 있어. 거기 가만히 있어. 이놈들은 아빠가 알아서 할게.” 푼수끼가 농후한 아빠지만, 그래서 만화 캐릭터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위기에 처한 하이파이브 팀을 최후의 순간에 구해내는 것은 결국 완서의 아빠, 곧 부성애이다. 세상의 아빠는 늘 말한다. 무슨 일 있으면 아빠를 찾아. 아빠를 불러. 그래서 이 영화의 완서도 결국에는 이렇게 외친다. “아빠!” 그 순정의 마음이 가슴을 울린다. 좋다. 하이파이브 팀은 마음이 잘 맞는 팀이 아니다. 늘 말들이 많고 티격태격하기 일쑤이다. 특히 탱크 보이 지성과 블루투스 맨 기동이 그렇다. 그들은 한 살 차이, 혹은 몇 개월 차이를 가지고도 내가 형이네, 네가 동생이네를 놓고 싸운다. 그들은 서로 팀의 주도권을 쥐려고 애쓴다. 그러나 각자의 능력만 가지고는 새신교 교주의 교활한 조직을 일소해 낼 수 없다. 그들은 결국 힘을 합쳐야 하며 프레쉬 걸 선녀를 통해 서로 연결돼야 한다. 연대가 힘이다. 각자 스스로의 잘난 맛을 내려놓고 모자란 것을 서로 보충할 때만이 진정한 슈퍼 파워가 태어날 수 있다. 대중의 집단지성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하이파이브’가 재미를 넘어 추구하는 의미는 바로 이 부분에 있다. ‘하이파이브’는 유쾌하고 따뜻하며 그래도 이 사회와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다. 아직 컵에 물이 반이 차 있다. 물이 반 밖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하이파이브’의 주제이다.
‘논나’와 같은 뻔한 드라마를, 뻔한 줄 알면서도, 뻔하게 보게 되는 이유는 어쨌든 새출발의 꿈을 가진 사람들, 그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래서 신의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종된 단어 혹은 상실된 어휘인 희망과 우정, 화해, 그리고 가족의 화합, 이웃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영화 ‘논나’는 우리가 뭘 잃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코미디의 어법으로, 신파의 논리로 가르쳐 준다. 꽤나 가슴을 적신다. 제목 ‘논나’의 논나는 이탈리아어로 할머니란 뜻이다. 이 영화를 보면 논나는 결국 한 집안에서 내려오는 특유의 음식을 만드는 할머니란 의미이고 이른바 ‘엄마손(맛)’ 할머니들을 말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개성 만두집, 보쌈 김치집, 통배김치 한정식집 등의 원조 할머니(엄마)를 생각하면 된다. 영화 ‘논나’는 결국 음식 영화이고, 할머니들의 여성영화이며, 가족영화인 데다, 궁극의 휴먼 드라마이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CJ ENM 컴패니가 투자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 조 스카라벨라(빈스 본)는 뉴욕에서 살아가는 엔지니어 노동자이다. 그는 어머니가 죽고 나서 뉴욕 이탈리아계 논나 들을 셰프로 데려와 스태이튼 아일랜드에서 ‘에노테카 마리아’란 이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열 계획을 세운다. 맨하탄이 아니고 스테이튼 아일랜드라는 게 중요한데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서울 시내 광화문이나 경복궁 혹은 강남의 어디가 아니라 강화도나 영종도에다 식당을 내는 꼴이다. 요리 전문가나 음식 평론가들이 관심을 가질 동네는 아니라는 얘기이다. 에노테카 마리아는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어머니는 조에게 보험금 유산으로 20만 달러를 남긴다. 식당을 연다는 건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세계 그 어디에서나 표준율을 공유하는 나라에서라면 각종 규제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방법도 있고 식품위생법도 있으며 각종의 법을 준수하고 자격 요건을 얻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대출 모기지 이자를 내야 하며 매력적인 공간으로 보일 만큼 인테리어를 해야 하는 등 투자할 대목이 많다. 식당을 한다는 건 속된 말로 앞으로 남고 뒤로 손해를 보는 일이 되기 십상이다. 주인공 조는 그 엄청난 장애를 타고 넘어가 어머니의 레시피, 할머니 논나의 레시피를 세상에 내놓으려는 막무가내 모험을 시도한다. 조의 프로젝트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류의 드라마는 실패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조가 성공하기까지 무수하게 좌초의 위기를 겪어 가는 에피소드를 이어 나가며 사람들을 쫄깃쫄깃하게 만든다. 사람들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며 안달하게 한다는 얘기이다. 그 과정에서 조는 불알친구 브루노(조 맹갈리에노)와 크게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며 스테이튼 아일랜드 동네사람들의 텃세에 시달리기도 한다. 주인공 조가 새로 열겠다는 식당 ‘에노테카 마리아’ 자리는 원래 ‘도미니크 스피리토’란 또 다른 이민자가 50년 넘게 식당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라 스태이튼 아일랜드 사람들은 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텃세’ 때문에 조의 식당은 조기에 폐업 위기를 겪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논나’가 불굴의 의지 ’따위’를 그려 나가는 드라마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일상으로부터 얻는 작은 생활의 지혜를 통해 비교적 ‘통 큰’ 성찰을 이어 나가게 하는 내용이다. 그래서인지 생활의 지혜 급에 해당하는 이탈리안 격언들이 많이 나온다. ‘밥상에서는 늙지 않는다’라든가 ‘슬플 땐 배를 채워야 한다’같은 말이 나온다. ‘음식은 사랑’이며 ‘나이는 병이 아니고’ ‘비밀이니까 특별한 것인데’ ‘위대한 것은 늘 세월을 이기는 법’이다 같은 말이 줄줄 이어진다. 그런 대사들, 그와 같은 에피소드들을 보고 있으면 슬쩍 미소가 지어지게 된다. 영화 ‘논나’가 추구하는 것은 폭소가 아니라 잔 웃음이다. 영화 ‘논나’는 ‘미소의 교환’ 같은 작품이다. 논나 셰프들 역으로 네 명의 노년 배우들이 필요했다. 미용실을 하던 지아 역으로 수잔 서랜든이 나오고 실버타운에서 좌충우돌 살아가던 로베르타 역으로는 로레인 브라코가, 나중에 주인공 조의 연인이 되는 올리비아(린다 카델리니)와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가는 할머니 안토넬라 역으로는 브랜다 바카로가 나온다. 수녀 출신의 논나, 테레사 역으로는 탈리아 샤이어가 캐스팅돼 있다. 모두가 다 전설의 명배우들이다. 수잔 서랜든의 영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명작들이 많고 로레인 브라코는 마틴 스콜세이지의 ‘좋은 친구들’에서 돈과 마약에 찌들어 가는 갱단의 여자로 나왔었으며 탈리아 샤이어는 '록키'와 '대부' 시리즈의 그 여인이다. 브랜다 바카로를 잘 모를 수 있지만 잘만 킹의 그 유명한 에로 영화 ‘레드 슈 다이어리’의 배우였다. 모두들 대단한 배우들이고 나이들이 로레인 브라코를 제외하고 다 80대 들이다. 브랜다 바카로는 86세, 탈리아 샤이어와 수잔 서랜든 공히 79, 로레인 브라코는 71세이다. 영화 ‘논나’는 이처럼 한편으로는 여성 고령화 사회를 겨냥하고 있는 작품이지만 아무래도 시장성이 크지 않은 관계로 극장용으로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작품이다. 넷플릭스의 유용성이 다시 한번 드러난 작품인 셈이다. 네 할머니들의 티격태격 싸움도 잔잔한 재미를 준다. 안토넬라는 시칠리 출신이고 로베르타는 볼로냐 출신인데 이 두 지역은 우리의 영남과 호남만큼 적대적이다. 지아는 할머니치고 가슴 볼륨이 커서 안토넬라, 특히 로베르타는 그녀를 천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나중에 지아의 가슴이 할머니치고 풍만한 이유가 유방암 제거 수술 탓이라는 걸 알게 된다. 테레사가 수녀원을 나온 것은 그 안에서 젊은 수녀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음도 알려진다. 네 할머니들이 화해를 이루어 나가는 모습도 이 영화를 보는 잔잔한 재미 중의 하나이다. 이탈리안 음식 이름은 통 알 수가 없다. 카푸젤레가 어떤 음식인지, 주인공 조가 그토록 만들려고 했던 그레이비가 무엇인지, 닭고기 테트라치니, 크랩 케이크, 시금치와 치즈 캐서롤이 대체 어떤 맛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굳이 알아낼 필요가 없다. 음식은 지식이 아니다. 음식은 사랑일 뿐이다. 영화 ‘논나’를 보고 있으면 어머니가 나를 위해 해주시던, 맛을 보라며 떠먹여 주시던 음식이 기억이 난다. 영화 ‘논나’는 그래서 엄마가 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영화 ‘논나’는 또 그래서, 이상하게 눈물을 훔치게 만든다. 어릴 때 우리가 울면 엄마는 늘 그랬다. 엄마는 먹을 것을 해줬다. 울면서 먹으면 체해, 울지 말고 어여 먹어, 라고 하셨다. 엄마의 손맛과 그 손맛을 지닌 엄마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바로 ‘논나’이다. 영화는 때론 소품으로 진심을 나타낸다. 작은 영화가 좋은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도대체 나미비아는 어디인가. 일본 영화 ‘나미비아의 사막’ 제목을 들으면 응당 들게 되는 생각이다. 근데 나만 모르는 것일까. 사람들은 나미비아란 곳을 알고 거기에 사막이 있다는 것도 알까. 나미비아는 당연히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이다. 보츠니아 왼쪽,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서쪽에 위치한 국가이다. 영화 제목처럼 사막으로 유명한 곳이며 특히 해안가 사막(백사장이 아니고)이 특이한 나라인데 영화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조지 밀러 감독의 영화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가 촬영된 곳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일본 영화 ‘나미비아의 사막’도 일종의 근미래 SF 액션 풍의 영화인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이 영화는 한 일본 여성이 하루 종일, 영화 내내 ‘어슬렁거리는’ 영화이다. 여주인공 카나(카와이 유미)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20대의 여성이다. (영화 중반이 지나 카나는 스물 한살이라는 것이 알려진다.) 그녀의 일상은 나이만큼이나 부정확하다. 하는 일이 무엇인지, 누구와 사는지, 주로 누구와 놀고 누구와 얘기를 하는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 지가 불분명하다. 카나의 일상은 서서히 드러난다. 영화는 그 점이 궁금하도록 서사를 짰다. 도저히 궁금해서 영화를 끝까지 안 볼 수 없게 만든다. 도대체 나미비아의 사막은 어디 있는 것이며 이 영화의 여주인공 카나 같은 젊은 여자, 흔히들 얘기해서 요즘 젊은 (일본)여자애들, 여성들은 뭘 바라며 인생을 사는 것인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궁금하게 만든다. ‘나미비아의 사막’을 만든 감독 야마나카 요코도 28살의 여성감독이다. 이 영화는 엄청난 걸작이거나 수작이어서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 기성의 세대로 하여금 새로운 세대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어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지금의 20대들이 어떤 고민 속에서, 나름 얼마나 치열하고 다이내믹하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느끼게 해 준다. 영화의 첫 장면은 도쿄의 한 대형 버스 터미널을 롱 쇼트로 비교적 길게 보여 준 뒤 저 멀리서 종종 걸음으로 걸어 오는 여주인공 카나의 모습을 그려 나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철저한 익명 속에서, 아주 작은 일개인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정체성을 보여 준다. 카나는 카페에서 친구인 이치카를 만나는데 둘은 어릴 때 친구인 사노 치아키가 자살했다는 대화를 나눈다. 치아키는 컴퓨터 충전 케이블을 문손잡이에 걸고 스스로 목을 졸라 자살했다. 카나는 무심한 듯 그렇게도 죽을 수 있다더니 (결국 걔는 그걸 해냈네)라는 투로 말을 받는다. 카나의 뒤에는 그녀 또래나 그보다는 나이가 조금 많은 세 명의 남자들 대화가 큰 소리로 섞이고 있다. 한 남자가 말한다. 노팬티 샤부샤부 집이란 게 있어. 또 한 남자가 그게 뭐냐고 묻는다. 남자가 답한다. 샤부샤부 집인데 여자들이 노팬티로 서빙을 해. 근데 바닥이 거울이야, 라는 식의 대화이다. 영화 ‘나미비아의 사막’은 오프닝 시퀀스부터 꽤나 발칙한 분위기를 이어 갈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주인공 카나는 처음엔 혼다(칸 이치로)라는 착실하고 여성스러운 남자를 애인으로 사귄다. 혼다는 술 먹은 그녀를 챙기고 재워주고 아침밥을 해주고, 꼬박꼬박 피임약도 먹여 주는 착한 남자이다. 그는 직장인이다. 부동산 회사에 다닌다. 그러나 카나는 그런 혼다 몰래 다른 남자 하야시(카네코 다이치)를 만난다. 그러다 하야시에게 점점 빠지게 된다. 카나는 친구 이치카와 함께 호스트 바를 가기도 한다. 이치카 없이도 ‘호빠’를 가곤 한다. 그럼에도 카나의 가장 중요한 일상은 무료함이다. 영화는 그녀의 ‘혼자’를 가장 많이 보여 준다. 카나가 혼자 있을 때 그녀가 뭘 하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그려 낸다. 카나는 어슬렁거린다. 혼다와 사는 집 근처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그가 출근을 했을 때나, 출장을 갔을 때 그의 집안을 어슬렁거린다. 무료하기 그지없고 무심하고 무상하기 그지없다. 그녀의 삶은 지루한 것이 아니라 지리멸렬한 것인데 자신의 인생이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근데 20대들은, 20대의 감독들은, 20대들이 만든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반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꼭 삶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해? 무엇을 향해 나아 가야만 해? 목적이나 목표가 꼭 필요해? 인생을 그냥 부유하면 안 돼? 떠돌면서 살면 안 돼, 라고 묻는다. 목적이나 목표는 당신들 거 아냐? 라고도 묻는다. 표면적으로 말하면 카나는 대책 없는 젊은이이다. 그녀가 일하는 곳은 제모 시술 에스테틱이다. 그녀는 시술 보조원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을 하지는 않는다. 맡은 시간에만 가벼운 화장기의 얼굴로 예의 바르게 손님들을 대할 뿐이다. 거기에 비하면 그녀의 다른 일상은 비교적 격렬하다. 혼다와의 동거를 끝내고 하야시와 살면서 둘은 말 그대로 무지하게 싸워 댄다. 젊은이들은 그것을 사랑 싸움이라고 생각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다들 자신이 자신을 이기지 못해 그러는 것일 뿐 사실 뚜렷한 이유는 없다. 정밀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카나는 혼다와의 사이에서 임신을 한 적이 있고 혼자서 중절 수술을 받아 마음의 상처가 있었던 듯이 보이며 현재 동거 중인 남자 하야시가 과거의 여자 카나코(주인공 카나와 이름이 같다.)와의 사이에서 임신과 중절을 겪은 사실을 알게 되고 광분을 한다. 카나는 하야시에게 툭하면 시비를 건다. 뻑하면 그에게 손찌검을 하려고 한다. 그 와중에 전 남자 혼다는 카나에게 와서 울고 불며 한바탕 난리를 친다. 카나는 모든 것, 모든 일상에 다 질려한다. 카나는 에스테틱 일도 그만둔다. 카나가 이유없이 화를 내는(것처럼 보이는) 것은 혼다가 됐든 하야시가 됐든 자신의 트라우마의 원인이 뭔지는 모른 채, 안다고 착각을 한 채, 상처를 줘서 미안해, 라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미국 생활을 조금 하다 돌아온 하야시의 부모는 일본인들이 미안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고 산다며 비웃는다. 카나가 느끼는 점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끊임없이 제모를 하러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안하다는 말로 자기의 행동을 ‘제모하지만’ 결코 마음속은 그렇게 ‘제모가 되지’ 않는다. 카나는 결국 인격성 장애이자 양극성 장애자이다. 이런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은 결국 조울증으로 발전한다. 경계성 장애란 옳고 그름의 판단의 경계에서 자신의 결정을 계속 유보하고 억누르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정신 장애이다. 예컨대 자신을 범하려 했던 아버지가 있고(카나의 아버지는 중국인이다. 카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런 그를 최악의 남자라고 생각하며 많은 남자들 또한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지만 일상 속에서는 그런 남자(들)의 또 다른 면을 인간으로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분노를 억제하게 되면 그 사람의 일상은 돌발적이고 돌출적이 되기 십상이다. 이런 사람의 행동을 두고 보통 그 앞에 ‘미친’이란 형용사를 쓴다. 카나의 행동이 점점 미친x 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나미비아의 사막’은 결국 카나라는 이름의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인격성 장애를 앓고 있는 일본 사회의 모습을 직시하는 작품이다. 이중인격이 고착화 되어 있는 사회가 각 인격체에게 강제하는 것, 그래서 그 고통이 무엇인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상실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려 한다. 그러니 다들 이제는 나미비아를 찾아가야 한다. 나미비아의 사막 모래를 만져 봐야 한다. 영화의 제목이 암시하는 나미비아는 궁극적으로는 미지의 자신이다.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알아내는 것, 그것이 개인의 방황을 그치게 하고 사회가 지닌 정신병적 증후군(노팬티 샤부샤부 같은 일탈적인 성 취향)을 극복하는 길이다. 그런 생각이나 판단까지도 필요 없는 얘기이다. ‘나미비아의 사막’은 그런 생각까지 꼭 해야 해?,라고 묻는 20대 감독의 도발적 시선이 담겨져 있다. 그냥 겪어내고 어슬렁거리며 그 고통의 시간들을 경과시키면 된다고 얘기한다. 그런 식으로 20대들의 생각, 행동의 일단을 훔쳐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영화에 대한 동의나 공감조차 그건 각자의 몫이다. 그 충돌의 정서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일본 영화는 요즘 꽤나 젊어지고 있다. 부러울 뿐이다.
영화 '야당'은 일부의 오해처럼 정치영화가 아니다. 여당이니 야당이니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것이다. 결국 이 '야당'도 여야의 이야기, 정치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모든 건 다 정치와 연결된다. 특히 한국사회가 그렇다. 한국사회를 그리려는 영화는 어쩔 수 없다. 정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영화 '야당'에서 야당이란 마약 조직 내부자와 대규모 거래를 위한 판을 짜고, 그 정보를 검찰에 넘기면서 조직 일부는 살리고 조직 일부는 검거하게 하는, 일종의 고도의 밀정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 혹은 단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 있는 말이 아니라 마약 범죄에서 쓰이는 은어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야당질 당했다'는 얘기는 마약 조직 혹은 마약범이 한 사기꾼의 술수에 넘어가 조직이나 돈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야당'은 이강수(강하늘)란 인물을 중심으로 그를 철저하게 이용해 먹고 버리는 간악한 검사 구관희(유해진)와, 구관희에게 뒤통수를 맞고 수뢰혐의로 구속까지 당하는 서울경찰청 마약수사대의, 일명 옥황상제라 불리는 형사 오상재(박해준) 등 세명이 벌이는 삼각 관계의 속고 속이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대통령 후보 아들로 마약 중독자인 조훈(류경수)이라는 파렴치범이 나오고 이 인간 탓에 중독자가 됐다가 추락한 여배우 엄수진(채원빈)이 얽힌다. 잔혹한 마약상 염태수(유성주)가 있고 북한산 마약을 밀매해 들여 오는 김학남(김금순)이란 여자가 활개친다. 인물들이 얽히고 설킨다. 이야기를 풀어 가는 게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영화 '야당'은 일종의 하이퍼 리얼리즘(극사실주의) 계통의 영화이다. 류승완의 '부당거래'(2010),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3), 우민호 감독의 '내부자들'(2015)과 같은 계보의 작품이다. 하이퍼 리얼리즘 영화란, 사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 내되, 거의 모사(模寫)에 가까울 만큼 현실성을 극대화하는 작품을 말한다. 그러나 앞선 작품들이 워낙 큰 인기를 모았던 탓인데다, '내부자들'과 '야당'이 같은 제작사인 하이브 미디어코프의 작품 탓이어서인지 마치 자기복제를 한 느낌을 준다. 바로 그 점이 개봉 초기 '그 얘기가 그 얘기 아니냐'는 선입견을 불러 일으켰고 그래서 흥행 조짐이 뒤늦게 불이 붙게 된 작품이 됐다. '야당'은 오히려 개봉 일주가 지난 후, 순전히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흥행 바람을 타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도 영화가 지닌 역동성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대중 관객의 만족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야당'은 '내부자들' 류의 영화와 같으면서도 다른 지점에 착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건 대중들이 서있는 위치가 10년 전인 2015년 전후와 지금이 많이 달라져 있다는 '사회학적 요인'도 작동하고 있다. 그간 우리사회는 얼마나 더 뒤틀려졌으며 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더 시달려 왔는가, 그렇다면 영화는 지난 10년의 일그러진 그 고통을 잘 담아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 대중의 반응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 '야당'은 다소 폭력적이고 과장된 비틀림이 있다손 치더라도 지난 몇 년간의 한국사회가 지닌 병적인 욕망, 그 추악한 민낯을 그려내는 데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관객들이 현재 이 영화에 열광하고 있는 것은 과도한 폭력이 주는 기이한 쾌감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이런 내용의 영화야 말로 지금의 사회를 수렁 속에서 건져 내는 밧줄과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감 때문이다. 영화 속 검사 구관희는 끊임없이 머리를 굴린다. 마약 '판'을 짜고 사람을 이용해 먹고 가차없이 잘라 내며 비열한 뒷 공작으로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워 재판과 투옥이라는 '영혼 털이'를 자행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구관희는 서부지검의 부부장 검사까지 오르고 결국 그 위와 더 그 위로 점차 올라가려 한다. 구관희는 유력 대통령 후보의 아들 조훈이 벌인 마약파티를 은폐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멀쩡한 경찰을 감옥에 보내는 한편, 뇌물 제공 혐의로 구속시킨('구속된'이 아니고) 대기업 오너에게 진술을 달달 외우게 해 상대당 후보에게 몇날 며칠에 돈을 건넸다고 연습 시킨다.(이건 마치 한명숙 총리가 구속됐던 뇌물수수사건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구관희는 다그치는 조훈에게 "내가 대통령을 만들 수도, 대통령을 못하게 할 수도 있다"고 큰 소리를 치는가 하면 결국 소변 검사를 위조해 조훈을 석방 시키려 한다. 동시에 상대당 대통령 후보에게 뇌물이 건네졌다는 자신의 각본에 맞춰 여성 대변인에게 구속 '영장을 치겠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악마의 끝판왕이지만 이런 내용에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는 건 지난 4~5년간 우리 사회 내부에 그런 일이 횡행했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한국사회가 정치 검찰들의 왕국이었으며 그들이 자행하는 온갖 법기술로 이런 저런 사람들이 난자돼 왔음을 잘 알고 있다. 영화 '야당'은 마약 거래 이야기로 시작해 정치 영화로 끝을 낸다. 그 이야기를 전환시키는 연출 솜씨가 만만치 않다. 영화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곧 스토리와 스토리 텔링(스토리를 구축하는 방식), 캐릭터 설정 모두에 모자람이 없다. 원숙하고 출중하다. 영화를 만든 황병국 감독은 노장급에 속한다. 그의 데뷔작 '나의 결혼 원정기'(2005)는 발군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연출 호흡은 너무 더딘 편이어서 '특수본'(2011)이 실패한 이후 연출 대신 수많은 영화의 개성있는 조역으로 영화적 입지를 유지해 왔다. 이번 '야당'은 황병국의 연출 실력이 녹슬지 않았으며 영화적 패기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유해진의 남다른 연기가 돋보이며 박해준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강하늘은 최선을 다했지만 이번 역에 있어 자신의 연기 톤을 '카우보이 비밥'의 주인공 스파이크 흉내를 낸 것처럼 느껴진다. 그걸 알고 한 것인지 아니면 모르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늘-이강수 캐릭터가 영화 전체를 약간 코미디처럼 만든 부분도 있다. 이건 호오가 엇갈릴 것이다. 영화 '야당'은 어려운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영화가 펼쳐 놓는 여러가지 우리 사회의 모습과 그 해법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영화 '야당'은 이야기와 인물을 여러 가닥으로 꼬아 놨지만 그 매듭의 시작을 알고 나면 그리 복잡한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심사가 꽤나 복잡해진다. 영화 '야당'은 겉으론 꽤나 통쾌하고 대범한 척 한다. 그러나 역시 뒤로 가면 갈수록 이상한 울분이 쌓인다. 영화 '야당'은 알고 보면 겹겹이 주제를 감추고 있다. 양파 껍질 벗기듯 그 하나하나의 주제를 알아채다 보면 이 영화가 꽤나 심지가 있는 작품이란 걸 알게 된다. 올 상반기 한국 영화 중 거의 유일하게 괜찮은 수작이다. 상업영화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
포르투갈 감독으로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인 미겔 고메스의 영화 ‘그랜드 투어’는 언뜻 보면, 그리고 대중 관객들이 보면, 도통 ‘제멋대로인’ 작품처럼 보인다. 이 ‘제멋대로인’ 작품을 두고 칸영화제는 지난해 왜 감독상을 주었으며 예술영화전문 배급사인 M&M은 무슨 용기로 수입을 했고, 그런 거 다 떠나서 미겔 고메스는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 했던 것일까. 그걸 알아내는 과정이야말로 이 영화 ‘그랜드 투어’가 계획한 장대한 여정 같은 것이다. 시놉시스는 엉뚱하고 '괴랄'하다. 단 몇 줄로 요약된다. 당연히 시놉시스와 영화의 전체 톤앤매너는 매우 다르다. 어쨌든 그 몇 줄은 이것이다. 영국인 에드워드(곤칼로 와딩톤)는 버마의 수도 랭군에서 파견 공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아마도 영사관 직원쯤.) 런던에서 약혼녀인 몰리 싱글턴(크리스타 알파이에타)이 결혼을 위해 찾아온다는 전보를 받는다. 에드워드는 몰리를 피해 줄행랑을 치는데 그녀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속 거처를 옮긴다. 처음엔 싱가폴로 갔다가 다음엔 방콕, 그 다음엔 사이공에서 마닐라로 갔다가 이후 도쿄까지 간다. 에드워드의 마지막 행보는 상하이를 갔다가 장강을 타고 충징으로 가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거기서 다시 티벳(동티벳=킴티벳)을 거쳐 청두로 간다. 그는 여자를 피해 멀리멀리도 도망을 다닌다. 그렇다면 이건 로맨틱 코미디인가. 로드무비 러브 스토리인가. 특이한 것은 영화의 시대 배경이 1918년이라는 것이다. 1차 대전이 끝난 지 한 해밖에 되지 않았고 제국주의의 광풍은 아직 한가운데에 있던 시대 때의 얘기이다. 그런데 더욱더 특이한 것은 에드워드가 다니는 길, 이후 그의 여인인 몰리가 에드워드를 추적하는 길에서 만나는 풍광은 1910년대 후반이 아니라 지금 현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콕으로 가는 기차가 밀림 속에서 탈선사고를 일으키는데 거기서 만난 미지의 여인(나중에 이 여인은 몰리가 만나게 되고 이름은 응옥이다.)의 짐 옆에서 휴대폰이 울리는 식이다. 사이공의 거리는 오토바이가 가득 차 흐르고 있고 상하이에는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게다가 영화 속 인물들은 다들 각자의 언어로 대화를 한다. 중간중간의 내레이션은 버마 어이거나 태국어 같은 해당 국가의 언어들이다. 이 모든 건 이상한 중첩이다. 이야기와 언어, 시대와 공간이 중층적이고 다층적으로 겹겹이 쌓여 있다. 인물은 과거에 살고 있지만 그 인물이 다니는 공간은 현재라는 것.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상징하고 의미하는가. 에드워드는 도쿄에서 한 고승을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눈다. “그림자는 뭔가 숨기는 게 아니라 드러나게 하는 것이오. 일본인들은 그걸 잘 알고 있어서 도망치지 않고 찾아간다오.” 에드워드는 말한다. “제가 말한 그림자는 그것과 다릅니다. 설명이 안 되는 불편한 현상입니다. 자연법칙은 명료하게 설명돼야 하죠.” 고승이 다시 묻는다. “자연법칙은 어디서 배우셨소? 자연법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에드워드는 항변한다. ‘사람은 없는데 그림자만 보이면 보통 사람도 불안해지지요.” 고승은 말한다. “산을 오르시오. 원숭이를 잘 봐요. 큰 나무 아래를 걸어 봐요. 세상에 몸을 맡기시오. 세상이 당신에게 얼마나 관대한지 알게 될 거외다.” 이때의 고승은 처음엔 일본어로 얘기하고 나중에는 포르투갈어로 얘기를 한다. 에드워드의 언어는 시종일관 포르투갈어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영화가 그려내는 선문답의 최고봉이다. 물은 물이되 산은 산이로다, 일까? 이 같은 선문답은 에드워드가 청두에서 만나는 시그레이브 영사(주앙 페드루 베나르)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는 지친 표정으로 에드워드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제국의 종말은 필연적이야. 백인들은 아시아를 절대 이해할 수가 없어.” 미겔 고메스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결국 제국(서구의 정신과 이데올로기)의 몰락이며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려 했던 지난 1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인류와 세계, 특히 고승이 말한 대로 일본(동양)인들은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찾아내며, 그렇게 세상에 몸을 맡기면서, 세계에 대해 공격적이지 않고 순응적으로 ‘세상이 그래도 관대하다는 것을 깨닫는’ 지혜를 얻었음을 얘기한다. 에드워드는 자연법칙, 일종의 다윈의 법칙을 얘기하지만 시그레이브의 말마따나 그런 법칙을 지닌 제국은 종말이 불가피하며 자신들이 서구의 가치관을 고집하는 한 동양을 이해할 수(지배하거나 교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서구적 가치 철학이 지난 100년간 철저하게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가르쳐 주는 말(대사)들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 ‘그랜드 투어’는 결국 한 서구인의 눈으로 본 지난 100년의 동서양 역사, 그 흔적, 그리고 그것이 현재 어디로 가고 있느냐의 문제를 남녀의 추적 여행기로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칸영화제가 이 작품에 ‘다소’ 흥분한 것은 바로 그러한 서구 정신의 몰락을 독특한 여행기로 그려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반부에 에드워드가 보여주는 도망기보다 후반부에 그려지는 몰리의 추적기가 조금 더 리드미컬하다. 몰리가 청두에 이르러서는 명소인 ‘낙산대불’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는 거의 전부가 흑백이지만 몰리의 에피소드 부분에서는 이상한 채색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영화는 초반부에 버마의 시골에서 회전 대관람차를 인부들이 몸으로 직접 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부분과 이후 전통 인형극만이 컬러이다.) 영화는 간간히 컬러 톤을 전체 흑백 화면에 섞어 씀으로써 이 영화가 시공간을 나누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음을 나타낸다. 20세기와 21세기는 과거의 푸티지 화면과 현재의 실사 화면으로 마구 뒤섞인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1918년의 에드워드와 몰리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우리가 머무는 곳은 2025년이고 따라서 그 시대적 이미지는 중첩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의식과 관념의 흐름은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식과 관념을 그리는 영화가 굳이 차곡차곡 색감과 시간, 공간을 나누어서 그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게 바로 미겔 고메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몰리는 응옥(랑케 트 란)과 우정을 나누고 샌더스(클라우디오 다 실바)라는 농장주와 싫어하는 척 점점 그에게 빠지게 된다. 응옥은 점술사인 바동에게 몰리를 데려 가는데, 그녀는 불길한 점을 친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고 말한다. 몰리에게는 두 명의 남자가 보인다고도 말한다. 몰리는 여행길에 병에 걸리고 샌더스가 치료하지만 점점 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진다. 제국은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다면 몰리의 운명도 어느 정도 정해졌다는 것일까. 영화는 점점 기묘한 결론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그랜드 투어’는 결코 쉬운 영화가 아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작품도 아니다. 제목은 여행이지만 물리적인 여행길을 장황하게 보여주는 내용도 아니다. 그보다는 내면과 정신의 여행, 세계 역사가 지나온 흔적과 지금의 모습, 그 미래를 인류학적으로 짚어 낸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결코 흥행에 성공할 수가 없다. 지식인용 영화이다. 영화가 지식인용으로 쓰여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붙을 수도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지식인용으로 절대 쓰여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때로 영화는 매우 지적이어야 한다. ‘그랜드 투어’는 때로 그래도 되는 영화 중의 한편이다. 지난 3월 26일에 개봉했다. 전국 14개쯤 분포돼 있는 예술영화전용관에서 상영 중이다.
‘계시록’은 넷플릭스가 가장 사랑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는 연상호의 신작 영화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연상호가 왜 이렇게 ‘정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상상력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 냈을까,가 하나이고(원작 웹툰은 연상호와 최규석의 공동저작이다. 아마도 연상호가 스토리를, 최규석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또 하나는 도대체 멕시코의 대표적인 감독 알폰소 쿠아론(‘그래비티’, ‘로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 수상했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 영화의 기획에 참여했을까 라는 점이다. 뒤의 것은 특히 연상호가 인터뷰를 통해 직접 밝히는 것 외에는 알 길이 없는 내용이다.(공식 인터뷰는 24일 있을 예정으로 이 글은 그 전에 작성된 것이다.) 영화 ‘계시록’은 연상호의 유명 드라마인 ‘지옥’ 시리즈나 ‘방법’같은 작품과는 다른 선상에 있는 것이다. ‘지옥’에서는 지옥의 사자가 나오고 ‘방법’에서는 죽은 자들이 살아나 살인을 저지른다. 극단의 상상력의 캐릭터를 앞세운 작품이라는 얘기이다. 이번 ‘계시록’은 그보다는 현실 세계에 좀더 발을 붙이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대중들에게 다소 외면받았던, 연상호의 저주받은 걸작에 해당하는, ‘염력’이란 영화에 더 가깝게 서 있는 작품이다. ‘염력’은 이른바 용산사태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진혼곡 같은 내용이었다. 무자비한 철거 전쟁에서 사람들을 살리고자 했다면 차라리 염력을 쓰는 남자가 있었어야 한다는, 연상호 특유의 사회적 상상력과 인간적 고민이 개입된 작품이었다. 이번 영화 ‘계시록’도 같은 선상에 있다. 폭력성이 내면화 될 대로 내면화 돼 있어서 어떻게 손 쓸 재간이 없을 만큼 망가져 있는 지금의 한국사회에 대해 연상호는 그 나름대로의 치유책, 치료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사회의식을 한층 더 개입시키고 발전시킨 작품이다. 지옥의 사자나 좀비 같은 캐릭터의 도발성을 없앴지만 사회의식 면에서는 자신이 더욱 도발적인 면을 지니게 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계시록은 요한 묵시록의 다른 이름이다. 성경의 마지막 권이며 총 22장 22절로 돼있다. 사도 요한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규율을 지키지 아니하고 믿음을 저버리면 7년 환난 등이 도래할 것이라는, 다소 무섭고 위협적인 내용으로 돼있다. 흔히들 성경의 종말론으로 해석하고 있어서 교파, 특히 이단들은 이를 예수 재림의 근거로 삼으며 기행과 비행을 일삼는 ‘말씀’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영화 ‘계시록’은 제목만으로도 한국 교회’들’의 비이성적 상황을 설정으로 삼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주요 인물은 세 명이다. 경기도 무산이라는 곳(가상의 공간이다.)에서 개척교회를 일구고 있는 목사 성민찬(류준열)이 있다. 여기에다, 여자나 여아를 유괴납치해 학대를 일삼는 이상성격의 범죄자 권양래(신민재)가 성민찬과 얽힌다. 형사 이연희(신현빈)는 자신이 아끼던 여동생 이연주(한지현)를 권양래에게 잃었다. 이연주는, 권양래에게서 간신히 탈출했지만 법원이 그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외눈박이 귀신’에게서 정신을 지배받고 있다는 정신과 의사(김도영)의 법정 진술에 따라 가벼운 형을 언도하자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언니 이연희 경위는 복수심에 강력반에 지원을 한다. 그녀는 권양래의 뒤를 좇고, 캐고 있는 중이다. 사건의 발단은 교회에서 벌어진다. 권양래는 범죄 욕구가 다시 도진다. 그는 중학생인 신아영(김보민)의 뒤를 좇아 오다가 교회까지 오게 되고 목사 성민찬의 눈에 띄게 된다. 성민찬은 그가 전자발찌를 차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성민찬의 아내는 목사 부인임에도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성민찬도 그걸 알고 있다. 성민찬은 무산시에 들어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직을 노리고 있어서 아내의 간음 행위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내는 여느 때처럼 동창 모임이 있다며 불륜남을 만나러 나가고 그날 저녁 아이가 사라진다. 성민찬은 그것이 권양래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추적하다가 천일산 여우고개라는 길목에서 그를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 영화의 드라마는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 성민찬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경사 이연희는 권양래를 체포해 없어진 중학생 아이 아영의 행방을 찾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면서도 종종 환각 속에 나타나는 죽은 동생 연주의 명령대로 가차없이 그를 죽이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린다. 이 둘과 맞닥뜨리게 되는 권양래는 스스럼없이 둘 다를 향해 자신보다 더 미친 인간이라고 소리지른다. 권양래가 외눈박이 괴물에 시달리는 것과 목사 성민찬이 모든 것을 하늘의 계시라고 부르짖는 것, 형사 이연희가 환각에 시달리는 것은 사실은 모두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이다.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성격의 이상질환이다. 그 모든 것은 개개인 스스로가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핑계나 해법을 위해 창조해 낸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잘못된 확신이며 유괴범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목사가 하느님을 내세워 혹세무민 하려는 것, 형사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모두가 같은 소행이다. 연상호의 영화 ‘계시록’이 보여주려는 주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연상호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갖가지 이상 징후에 시달리고 있고 그 원인은 개개인 모두 스스로의 환각과 광적인 확신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교회가 문제의 핵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스토리가 다소 극단적으로 포장돼 있지만 연상호가 내리는 진단의 요체는 꽤나 명징한 셈이다. 연상호의 기독교 비판은 일관적이다. 그건 ‘지옥’같은 드라마에서도 두텁게 제기됐던 부분이다. 연상호는 기독교가 사람들을 광적으로 만들고, 잘못된 확신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타락의 최극단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순전히 사업상의 이익을 위해 신도들을 모으고 결국 대형화의 욕망을 저버리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것도 여전하다. 이번 ‘계시록’ 또한 그 같은 자신의 기독교관을 여지 없이, 과감하게 개진하고 있다. 교회는 위선적이고 타락했다. 연상호가 그려내는 공간 또한 늘, 한국사회만큼 불안하고 불길하기 그지 없다는 것 역시 특징 중 하나이다. 비가 자주 내리고 음습한 산길의 구부러진 길이 종종 부감 쇼트로 보여진다.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 그것이 마치 하늘 위에서 누가 내려다 보는 것 같은 시점 쇼트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폐건물, 남루한 골목길, 영세민의 집안 풍경 등 연상호가 그리는 한국 사람들의 일상은 비루하기 이를 데가 없다. 영화 ‘계시록’이 묵시록이자 종말론의 내용을 암시하는 것인 양 지금의 우리사회가 매우 어두운 지경과 그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려 애쓴다. 무섭고 끔찍하며 잔혹한 이미지와 서사를 즐겨 사용함으로써 호러 장르 감독의 카테고리에서 거의 벗어난 적이 없는 연상호는 이번 ‘계시록’에서만큼은 그다지 무섭지 않게 그려낸다. 물리적 폭력이 즐비하게 표현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안의 내면은, 과할 만큼 불길하다.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극단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지, 또 얼마나 쉽게 그런 생각이나 이념, 종교에 사로잡히게 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상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이번 ‘계시록’은 그 어떤 작품보다 한국사회에 대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유의미성 만큼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 때문에 영화가 다소 재미가 없어졌거나 연상호 특유의 감각이 떨어졌다거나, 기이한 ‘글로벌 표준율’같은 작품이 됐다거나 하는 지적은 있을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지옥’의 연상호보다 이번 ‘계시록’의 연상호를 더 지지하게 된다. 넷플릭스에 지난 3월21일 공개됐다. 아직 글로벌 순위에서는 그리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지는 못하다. 호불호가 크게 엇갈릴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