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출신의 감독 아리 에스터의 영화들(‘유전’, ‘미드 소마’ 등)은 난독증의 필사본이다. 그의 최신작으로 국내에서 막 개봉될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절대 해독 불가 아리 에스터 월드’의 최고봉이다. 이런 영화를 만드는 아리 에스터도 놀랍지만 이런 영화에 돈을 대고 문을 열어 주는 투자자와 극장들도 놀랍다. 이건 돈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 들인 돈만큼을 수익으로 환원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관객들을 영화 인식의 인내로 내몬다. 미지(未知)와 불가지(不可知)가 마구 뒤섞여 있는 영화. 노력하면 결국은 알 수 있는, 아직 모르고 있을 뿐(未知)이지만 동시에 그래도 결국엔 알 수 없는(不可知) 얘기가 혼재돼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인공인 보(호아퀸 피닉스)가 어렸을 때부터 싱글 맘인 모나(패티 루폰)로부터 정서적 학대에 시달려 왔고 그것이야말로 성인이 돼서도 그의 편집증의 궁극적 원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끊임없이 살모(殺母)라는 존속 살해의 강박증을 가지고 있음은 느낄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 정신병리학적인 것이라는 점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보가 한 번도 섹스를 해 보지 않은, 에이섹슈얼(asexual : 무성애자. 무성생식)인데 나중에 보니 아들이 셋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보통의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에 맞지 않는다. 알 수가 없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1975년생인 보란 인물, 현재 48세인 남자가 겪고 있는 신경증적 질환에 대한 이야기이(일 수 있)다. 다분히 신경정신학이나 정신질환 연구, 심리학자들일수록 이해도가 빠른 영화일 수 있겠다. 무려 179분이나 되는 이 영화는 총 4개의 장(章)으로 구성돼 있는데 뉴욕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보의 일상이 1부이고 거리에서 칼에 찔린 후 어떤 중년 부부의 집에서 치료를 받는 상황이 2부이고 그 집안의 괴물(또 다른 환자로 이라크 파병 이후 PTSD를 앓고 있는 전직 군인의 공격으)로부터 탈출해 숲속에서 히피로 지내는 이야기가 3부이며 4부는 괴물로 변한 전직 군인에게 쫓기다 엄마의 장례식에 오게 된 후 어릴 적 여자 친구인 일레인(파커 포시)과 기습적으로 섹스를 하게 되는데 그가 평생을 걱정해 왔던 것과는 달리 남자인 자신이 복상사(腹上死)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인 일레인이 성관계 중 돌연사를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서 자신이 부계가 모두 복상사를 했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터이다. 자신이 태어나게 된 것도 그렇게, 단 한 번의 사정(射精)으로 엄마를 임신시킨 후 사망한 아버지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엔 주인공 보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를 죽이고 세상에 나온 것이다. 프로이트 심리학의 핵심 키워드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살부(殺父) 개념을 형상화한 셈이다. 남자는 어릴 때 처음 만난 이성이 어머니임으로 아버지에게 경쟁심을 느끼게 되고 그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 반대가 엘렉트라 콤플렉스(딸이 엄마에게 경쟁심을 느끼게 되고 죽이고 싶어 하는 심리.)인데 가부장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부권의 권위가 사라진 현대에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아버지, 어머니 모두에게 해당하거나 교차하는 특성을 지닌다. 주인공 보가 엄마인 모나에게서 느끼는 것은 오이디푸스도 엘렉트라도 아닌, 아니면 두 개가 동시인 심리이다. 영화의 1장에 해당하는 첫 번 째 에피소드가 가장 현실에 근접해 있는 내용이다. 뒤의 세 장은 모두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이다. 그건 실재라기보다는 감독인 아리 에스터가 반항하고 저항하려는 가부장 혹은 모계사회의 불필요한 권위의식, 종교의 외피를 쓴 가식적인 윤리 의식, 자본주의(특히 중산층)가 만들어 내는 끝없는 허위의식에 대한 관념적 비판과 비난의 서술이다. 머릿속에서 하는 얘기이기 때문에 두서가 없을 뿐이다. 핵심은 자기 식의 비판이다. 첫 에피소드에서 보는 자신의 정신과 의사(스티븐 헨더슨)와 상담하는 것을 오프닝 시퀀스로 보여 준다. 의사는 아버지의 기일에 맞춰 엄마 집을 방문하게 돼서 좋으냐고 질문한다. 보는 의사에게 ‘꼭 갈 필요가 없고 자신이 가도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얘기한다. 의사는 자신의 노트에 ‘죄의식(GUILT)’이라 메모한다. 의사는 그에게 신약을 주면서 꼭 물과 함께 먹으라고 한다. ‘꼭’이라고 몇 번을 강조한다. 집에 돌아온 보는 일찍 잠자리에 들지만 옆집에서 두 시간에 한 번씩 보내는 항의 쪽지에 시달린다. 음악 소리를 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복도 바깥에서는 헤비메탈의 강렬한 폭발음이 터지는 중이다. 보의 환청은 무음인가, 아니면 음악 소리가 환청인가. 항의 쪽지 때문에 잠을 설친 보는 엄마 집으로 가기 위해 슈트 케이스를 싸고 방 키를 들고 나서지만 그 찰나 방에 놓고 온 무엇 때문에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같은 복도에 사는 아파트의 누군 가가 트렁크와 열쇠를 가져가 버린다. 황당해 하고 있는 그에게 아파트 청소원이 지나가면서 ‘너는 이제 X됐어.’라고 말한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 비행기 티켓까지 끊어 놨는데 가방과 열쇠를 잃어버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엄마는 넌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고 쏘아붙이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린다. 극심한 불안과 혼란한 정신 때문에 의사가 준 신약을 먹으려고 하자 이번엔 생수가 바닥이 나고 수도가 고장이 났는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약을 그냥 삼킨 후 용법을 살펴 본 보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데 물 없이 이 약을 먹으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돼있었기 때문이다. 물을 먹기 위해 집 건너편 편의점을 가려다가 보는 이런저런 걸인들과 부딪혀 도망 다니느라 헐덕댄다. 급기야 그는 목욕 중에 있는 자신을 욕탕 천정에 매달려 있다가 그를 덮친 청소부와 몸싸움을 벌이게 되고(이 장면은 명백히 엄마 배 안 물속에 있는 태아를 누군가 공격한다는 것으로 인간은 출생 전부터 심각한 위협에 시달린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자를 피해 벌거벗을 채로 길가에 나온 보에게 역시 나체로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을 이미 넷이나 찔러 죽인 거지가 휘두른 칼을 맞고 정신을 잃는다. 이런 등등의 서사들은 알프레드 히치콕이 1945년에 만든 영화 ‘스펠바운드’ 속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풍 환상 장면(주인공 존 발렌타인 박사, 곧 그레고리 펙은 같은 내용의 꿈을 반복적으로 꾸는데 얼굴 없는 남자가 녹아내린 시계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리는 장면이다. 동료 박사인 콘스탄스, 곧 잉드리드 버그먼은 존이 하얀 식탁보에 난 포크의 삼지창 자국을 없애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그가 극심한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간파한다.)을 연상케 한다. 아리 에스터 식 ‘환상특급’이자 ‘기묘한 이야기’의 결정판이 이번 ‘보 이즈 어프레이드’인 셈이다. 영화는, 인간이 지닌 정신병적 증후군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 카테고리나 심도에 비해 수사학적으로 지나치게 과장 왜곡돼 있거나 말이 말을 낳은 경우라는 점, 정신병이 사실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스템이 인공적으로 만들고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죄의식이란 무엇인가. 오이디푸스든 마더 콤플렉스든 그 모든 것이 지적 허영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얘기가 바로 이 영화의 키포인트로 보여진다. 관념을 관념의 끝으로 밀어붙여 그 추상의 실체를 더듬게 만드는 기이한 방식의 영화이다.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린 식으로 재단할 영화가 아니다. 자기에게 대입해 보면서 느끼고 직관하는 영화이다. 영화는 때론 그렇게 정신적일 때가 있다. 이게 다 죄의식 탓이다. 자 근데 그게 과연 무슨 말인가.
지난 2월 국내 극장 개봉 당시 41만 명이라는 비교적 괜찮은 흥행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세간의 화제를 얻는 데는 실패했던 작품 ‘서치 2’는 영화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다. ‘서치 2’는 매우 영리하고 똑똑한 영화이다. 어느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작 ‘서치 1’처럼 ‘서치 2’도 누군 가를 찾는 얘기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만 연작의 특징을 가질 뿐 두 영화는 연관성이 없다. 1편의 원제는 그대로 Searching(수색)이고 2편은 Missing(실종)이다. 이건 내용 면에서 큰 변별력을 보이는 대목이다. 서사의 구성 면에서 2가 1보다 진화했다. 영화가 훨씬 풍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두고 사람들이 별다르게 뜨거운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1편과 달리)은 영화를 따라가는 ‘정서’가(‘기술’이 아니라) 점점 더 MZ 세대 중심이기 때문이다. 영화 ‘서치 2’는 디지털 세계의 기술적 다양함을 넘어선, 믿을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구사할 줄도 모르는 올드 세대 관객들에겐 그 서사(敍事), 곧 줄거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영화가 중간중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서치 2’는 애초부터 올드 세대 관객들을 껴안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아예 배제하고 간 셈이다. 기획부터 영화의 큰 성공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영화는 비교적 단란한 가족을 보여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곧이어 전개되는 아빠의 죽음, 부성의 부재 속에서 자란 18세 된 딸과 43세 엄마의 일상에 대한 얘기이다. 배경은 LA이다. 엄마 그레이스 엘렌(니아 롱)은 남편에 대한 상처를 잊고 열심히 살아가려 노력하는 싱글 맘이다. 그녀는 최근 케빈이라는 동양계 남자(켄 렁)와 연애 중이며 그와 함께 콜럼비아 여행을 떠날 참이다. 그래서 참 신경 쓰이는 사람이 청소년 딸 준(스톰 리드)이다. 그레이스는 딸을 준버그(우리 식으로 라면 똥강아지 준)라고 부르며 당연히 딸 준은 모든 청소년들이 그렇듯이 엄마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에 짜증을 낸다. 엄마 그레이스는 남친과 여행을 가기 전 자신의 친구이자 가정문제 전문 변호사인 헤더(에이미 랜테커)에게 딸을 좀 들여다봐 달라고 부탁한다. 당연히 이 문제도 딸 준은 엄마에게 부글부글 성질을 부린다. 자신의 나이엔 더 이상 보모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구구절절, 영화 초반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런 스릴러 영화일 수록 모든 인물에 복선이 깔려 있다. 영화 속 사건을 풀어 가는 해결의 실마리, 그 답은 인물과 인물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엄마 그레이스는 딸 준에게 자신이 LA로 돌아오는 날 공항에 픽 업을 나와 달라고 한다. 며칠 신나게 파티를 즐겼던 준은 엄청난 숙취 때문에 가까스로 일어나 구글에서 서비스 업체를 찾아 내 난장판이 된 집의 청소를 맡기고 공항으로 엄마를 마중 나간다. 이 모든 것은 실시간으로 그녀의 모바일 폰에 셀카 녹화 형식으로 담겨진다. 하지만 엄마는 공항에 나타나지 않는다. 엄마는 실종된다. 남자 친구도 없어진다. FBI 수사관인 일라이저 박(다니엘 헤니)이 개입한다. 콜럼비아 현지에서는 일종의 흥신소 역할을 하는 서비스 프리랜서 자비(조아큄 알메이다)가 준의 의뢰로 현지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구글 맵이 동원되고 준은 두 사람의 셀 폰 내 위치 추적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준의 개인 서칭은 디지털 기기의 모든 기능을 총망라시킨다. 심지어 엄마와 엄마 애인이 다녔던 콜럼비아 내 유명 관광지의 CCTV까지 원격 조종으로 열어 볼 정도다. 그녀의 기술, 요즘 아이들이 디지털 기능을 이용하는 수준은 실로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영화는 수사관 일라이저 박, 곧 다니엘 헤니가 전화 목소리 만에서 비로서 얼굴을 드러내는 중반쯤부터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한다. 엄마의 애인 케빈이 사실 사기 전과가 있는 남자라는 것이 알려지고 이 모든 것이 그가 엄마의 돈을 노리고 일으킨 사건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사게 된다. 이윽고 콜럼비아의 CCTV나, 케빈의 모든 SNS에 실린 여행에서의 사진 속 여자가 알고 보니 엄마가 아니라 엄마를 닮은 대역이라는 엄청난 사실이 드러난다. 엄마 그레이스는 콜럼비아로 가기 전, LA 공항으로 가는 우버 택시 안에서 이미 납치돼 실종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더욱더 수상한 것은 지금까지 준이 알고 있었던 엄마의 이름 그레이스도 12년 전 한번 바뀐 적이 있다는 것이며 이전에 다른 정체가 있었음이 알려지게 된다. 이쯤 되면 엄마는 납치, 실종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취를 감추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점입가경이다. 엄마는 실종됐을까. 딸을 버리고 사라졌을까. 아니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살해됐을까. 영화 ‘서치 2’는 화려한 미스터리 스릴러의 이야기 구조이지만 두 가지 다른 측면에서 주목할 거리가 준다. 디지털이 전하는 수많은, 정말 수도 없이 많은 그 난장판의 이야기도 사실은 진실의 조각에 불과할 수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모든 것이 조작될 수 있고 그 조작 여부도 사용자의 취사선택에 따라 선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준도 그렇고, 그레이스도 그렇고, 케빈도 그렇고, 언제든지 모두들 위치 추적기를 끌 수 있으며 구글이든 페이스북이든 기분과 특정 목적에 따라 계정을 폭파시킬 수 있으며 아니면 가상의 계정을 만들어 다른 사람인 양 정체를 숨길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상당수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영화는 그 ‘리얼’을 보여 줌과 동시에 디지털 세상이 지닌 허구, 곧 디지털은 사실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척, 그 안에 담겨 있는 팩트들이 상당 부분 ‘해석이 필요한 진실’임을 나타내고 있다. 디지털 세상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며, 진짜가 아니라 진짜라고 믿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의 사이비 욕망이 만들어 내는 가상의 세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믿고 있는 가정의 가치가 실제로는 많은 허점과 구멍을 지니고있다는 점이다. 진짜 가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모성도 마찬가지이고 부성도 마찬가지이다. 그건 훈련되고 쟁취되는 것이지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다들 무슨 말인가 할 것이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게 된다. 맞다 꼬시는 것이다. 영화를 보시라는 것이다. 결론을 밝힐 수는 없다. 다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해피 엔딩이어서 다행이라는 점 정도이다. 그러나 모르겠다. 실제 삶은 꼭 해피 엔딩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서치 2’는 할리우드 영화이다. 할리우드는 해피 엔딩을 좋아한다. 감안해서 봐야 할 영화라는 얘기이다.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주의 감독인 스웨덴의 루벤 외스틀룬드가 칸에서 두번째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 ‘슬픔의 삼각형’은 제목이 주는 느낌처럼 슬프거나 혹은 그 반대로 재미있거나 유쾌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찝찝하고 불쾌하며 심지어 反 희망적이고(비관주의나 염세주의란 말은 너무 약하다.) 우울해지는 작품이다. 물론 너무나 신랄하고 조소가 가득해서 반어적 의미에서 재미와 흥미가 가득 찬 작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왜 지난해 칸 영화제가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대신(감독상) 이 작품을 선택했는 가를 일응 수긍할 수 있게 한다. 칸은 두 가지 갈래에서 감독의 손을 들어 주곤 하는데 ‘매우 사회정치적인 작품이거나 아니면 매우 예술적인 작품이거나’이다. 외스틀룬드의 영화는 매우 사회적 리얼리티가 강한 작품이다. 이 세상을 묘사해 낸 내용들이 너무 적확해서 거꾸로 내용 하나하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칸 심사위원들은 지금 세상에 이런 영화가 필요하다고 봤을 것이다. ‘슬픔의 삼각형’은 자본주의 세상에 대한 뛰어난 분석서이며 일종의 新 자본론이다. 아마도 마르크스가 봤다면 박장대소하고 웃으면서도 동시에 세상이 자신의 말이나 예언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어서(자본주의는 망하지 않으니까) 소리 내어 울지도 모를 영화이다.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을 소개하기 어렵지만 세상은 도돌이표처럼 처음으로 돌아간다. 뒤집어진 계급관계는 또다시 뒤집어질 것임을, 원래대로의 계급사회, 그것도 더욱 양극화된 사회로 돌아갈 것임을 보여 준다. 우리는 쳇바퀴 안의 다람쥐이다. 돌아갈 수 없다. 잠시 그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2억 5000만 달러짜리 초호화 크루즈에서 화장실 매니저였던 에비게일(돌리 드 레온)은 표류한 섬에서는 자신의 모시던 손님과 상사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정상처럼 보이지 않는다. 왠지 캄보디아의 학살자 폴 포트를 연상케 한다. 그녀는 자신만이 고기를 잡을 수 있고 불을 피울 수 있다는 이유로, 또 폭파된 요트에서 가져 온 프리첼 과자를 다량으로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구명정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부리기 시작한다. 지식인과 부자를 무조건 때려 잡으며 원시 공산제를 추구했던 폴 포트 정권의 미친 짓, 크메르 루즈의 광기를 서서히 내비치기 시작한다. 그녀는 심지어 과자를 미끼로 모델 남자 칼(해리스 디킨스)의 몸을 탐하기 시작한다. 칼은 같은 모델로 (계약의 관계처럼 보이는) 애인인 아야(찰비 딘)의 분노와 묵인 하에 새로운 지배자 에비게일의 늙은 몸에 봉사를 하며 섬 생활을 이어 나간다. 같이 표류한 사람들은 칼의 매춘 행위를 지켜보며 조롱은 해도 비난하지 않는다. 도덕과 윤리는 생존보다 뒤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외스틀룬드의 이 영특한 자본주의 분석서는 모두 세 개의 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칼&아야’가 1부, ‘요트’가 2부, 3부는 ‘섬’이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발칙한 오프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칼을 포함한 패션모델 남자들의 오디션장에서 웃통을 다 벗고 모여서 테스트에 앞서 선배 급으로 보이는 게이 방송 진행자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다. 이 진행자는 예비 모델들을 모아 놓고 상반된 표정과 몸짓을 보여 줄 것을 요구하는데 이런 식이다. “자, 당신은 발렌시아가 모델이에요. 도도한 표정을 지어 주세요. 자 그러면 이번엔 H&M 모델이에요. 그냥 착하고 평범한, 왠지 해피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봐요. 자 모두 발렌시아가! 다시 H&M! 다시 발렌시아가! H&M!“ 남자 모델 모두들 그가 시키는 대로 표정을 바꿔 가며 연기를 한다. 인간은 돈과 명성 앞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징그럽고’ ‘귀엽게’ 묘사해 낸다.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모두 2부인 ‘요트’에 몰려 있다. 여기서 선장 토마스(우디 헤럴슨)와 러시아 부자 디미트리(즐라트코 버릭)는 뜬금없는 사상 논쟁을 벌인다. 토마스는 디미트리를 가리켜 러시아의 돼지 자본가라 부르고 디미트리는 토마스에게 미국 공산주의자라 하지만 선장은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라 하는데 디미트리는 마스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썼기 때문에 그게 그거 아니냐고 되받아친다. ‘선장 토마스의 세상 현실 인식=감독 루벤 외스틀룬드의 세계관’은 토마스가 디미트리와 같이 떠들어 대는 술주정 대사 하나하나에 다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의 노트를 뒤적이며 이렇게 말한다. 디미트리는 그런 그에게 선내 마이크를 대 준다. 배 안의 사람들은 모두 선장의 얘기를, 좋거나 싫거나, 귀 기울여 듣게 된다. 디미트리는 그런 그를 보며 ‘공산주의 나라에서는 항상 듣기만 해야 한다’고 비아냥 대지만 선장 토마스의 비판을 부인하지는 않는 표정이다. “마틴 루터 킹, 로버트 케네디, 말콤 엑스, 존 F. 케네디 모두 미국정부가 죽였다. 미국은 민주적이고 정직하며 선한 타국의 지도자들을 죽였다. 칠레 베네주엘라 아르헨티나 페루 엘살바도로 니카라과 파나마 등등. 미국은 영국과 손을 잡고 중동을 망가뜨린 후 마음대로 국경을 그어 놓고 독재자를 앉혔다. 미국의 가장 돈 되는 사업은 바로 전쟁이다. 1918년 유진 뎁스의 말대로 전쟁은 정복과 약탈의 수단으로 사용돼 왔다. 지배계급이 전쟁을 선포하면 피지배계급은 나가서 싸운다. 지배층은 당신이 전쟁에 나가서 도살되는 게 애국이라 주입해 왔다.” 요트 밖 바다는 엄청난 풍랑이 이는 중이다. 요트 안은 한마디로 뒤집어진 상태다. 사람들, 곧 온갖 명품과 보석으로 치장한 최고의 부르주아들은 모두들 뱃멀미로 토하고 난리가 아니다. 선장이 마련한 파티에서 최고급 음식을 먹는 과정도 흥미롭다. 사람들은 초면에 인사를 나누는데 어느 점잖은 척하는 노부부는 자신들이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수류탄 장사꾼이다. 디미트리는 자신을 똥팔이라고 부른다. 돼지 똥을 팔기 시작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비료 장사로 일확천금을 벌었기 때문이다. 디미트리는 이 선상 파티에 아내와 젊고 풍만한 정부(情婦)를 함께 데려왔지만 정작 두 여자는 서로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돈이 있으니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디미트리의 늙은 아내(선니이 머레스)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이 오물을 토하는데 남편이 선장과 술을 마시며 정치적 논쟁을 벌이느라 노닥거리는 상황에서 혼자 거의 벌거벗은 채 객실의 화장실을 뒹굴며 구토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녀의 변기는 결국 똥물로 넘치기 시작하며 비싼 카펫이 깔려 있는 선내 파티 룸에 똥물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이 마시던 고급 샴페인 모엣 샹동이 똥물 사이로 떠다닌다. 자본가는 디미트리 마냥 똥팔이이며 자본주의는 현재 똥물로 넘쳐나고 있음을 풍자한다. 미국의 공산주의자, 아니 마르크스주의자인 선장 토마스도 자신을 가리켜 ‘개똥 같은 사회주의자’라고 비아냥댄다. 왜냐하면 그저 자신이 하는 일이라곤 개똥철학만 나불대기 때문이다. 이른바 좌파 지식인들이 늘 하는 일이 그것인 것처럼. 3부인 ‘섬’ 부분은 조금 줄였으면 좋았을 법 하다. 명백히 1974년, 리나 베르트뮬러가 만든 ‘귀부인과 승무원(한국 비디오 제목 ‘무인도의 열정’)’과 그 리메이크작인 가이 리치 감독, 마돈나 주연의 2002년작 ‘스웹트 어웨이’를 벤치마킹한 내용 이자 확장판이기 때문이다. 3부를 조금 줄였으면 오히려 간결미가 돋보였을 것이다. 감독이 워낙 할 말이 많았던 듯이 보인다. 그 많은 수다 중에 감독이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는 여기에 담겨져 있다. 다시 선장 토마스를 통해서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면서 풍요 속에서 헤엄칠 때 세계는 빈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어. 너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맞다 그러는 거 아니다. 착잡한지고. 아주아주 착잡한 일이로소이다.
안타깝게도 국내외 모두에서 흥행에 실패한 실사영화 ‘인어공주’는 몇 가지 지점에서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도 두드러질 만큼 아주 다른데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인어공주가 흑인이라는 점이 제1의 요소는 아니다. ‘공주=흑인’은 차이라기 보다 비교적 단순한 특징, 캐릭터의 외모 설정에 불과하다. 인어공주가 흑인이기 때문에 내용이 달라지거나 극 전체의 톤 앤 매너가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냥 피부가 까매서 처음엔 다소 ‘신기하게’ 느껴지다가도 이내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이번 ‘인어공주’가 안데르센의 원작이나 1989년에 나온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와는 궁극의 지점에서 각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1) 원작과는 결말을 완전히 다르게 갔다는 것이고 2) 1989년 애니메이션과는 왕자의 캐릭터가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이번 실사영화에서 왕자는 ‘백마를 탄’ 이미지가 아니다. 그는 다른 선원들과 함께 갑판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백성처럼, 일반 국민처럼 살아가려는, 그래서 ‘보통 사람의 정치학’을 깨달아 가려는 꽤 괜찮은 덕목의 지도자 청년으로 나온다. 심지어 왕자는 그리 잘생기지도 않았다. 외모상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도적으로 평범한 인물로 그리려 애쓴다.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의 원작은 비극이었다. 이번 실사 영화는 해피 엔딩이다. 인어공주는 원작처럼 물거품이 돼 사라지지 않는다. 원작에서 왕자는 다른 여자(우아한 옆 나라 공주)를 선택해서 인어를 배신하지만 이번 실사에서는 다시 인어공주인 에리엘(할리 베일리)에게 돌아간다. 왜냐하면 다른 여자가 곧 흉측한 문어 마녀 울슐라(멜리사 매카시)인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건 꽤나 진부한 선택인데다 안데르센이 지닌 잔혹하고 우울한 취향을 ‘배반한’ 것이어서 작품을 완전히 다른 지점에 갖다 놓은 최고의 동력이 된다. 감독 롭 마샬(뮤지컬 전문 감독으로 ‘시카고’와 ‘나인’, ‘메리 포핀스 리턴즈’를 만들어 성공했다. 최고의 작품은 ‘숲속으로’이다. 극영화로는 ‘게이샤의 추억’이 성공했다.)이, 안데르센은 안데르센이고 자신은 자신으로서 자신만의 인어공주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면 원작과 다른 결말이야말로 그걸 성공하게 한 요인이 된다. 하지만 이런 결말은 이미 1989년의 애니메이션에서 일정 부분 차용해 온 것이어서 그다지 신선한 것은 아니다. 디즈니는 세계 청소년 관객들을 위해 잔혹한 비극의 결말을 ‘결단코’ 피해 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 점에서 이번 실사 판 ‘인어공주’는 디즈니의 제작 철학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실사영화에서 롭 마샬이 강조점을 두려 했던 것은 인종 문제, 미국 내 인종차별의식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양시키려 하는 것 ‘따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흑인 인어공주’는 디즈니의 얄팍한 상술이자 세계 시장을 겨냥한, 일종의 맥거핀(진짜 이야기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 있어 그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앞서 전개시키는 가짜 이야기. 트릭.)이다. 디즈니는 의도적으로 논란을 만들어 냄으로써 최대치의 마케팅 효과를 노린 셈이다. 할리우드는 청년 세대들을 겨냥해 혁명마저 상품으로 내다 파는 진짜 장사꾼들이다. 2011년 뉴욕 증권가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진 청년들의 격렬했던 시위 ‘오큐파이 월스트리트(Occupy Wall Street)를 점령하라’ 이후에 나온 영화가 제니퍼 로렌스 주연의 ‘헝거 게임’시리즈였다. 할리우드는 좌파나 우파나 가리지 않는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스스로 게릴라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흑인 인어공주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이번 실사판 ‘인어공주’의 주제는 왕자의 대사에서 나온다. 왕자 에릭(조너 하우어 킹)은 뱃머리에서 저 멀리를 바라보며 신하 그림스비 경(아트 말릭)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저 외부로 나아가야 합니다. 외부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 (섬) 왕국이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에릭의 왕국은 여왕(노마 두메즈웨니)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데 여왕은 현재 바다의 신 트리톤(하비에르 바르뎀)과 대립해 싸우고 있다. 트리톤은 여왕의 나라에 의해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를 잃었다. 그는 현재 7대양의 바다에 인어공주 딸 7명을 키우고 있으며 그중 막내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인어공주’의 원제는 the little mermaid, 곧 ‘막내 인어’이다.) 영화 ‘인어공주’의 설정, 곧 섬 왕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미중 G2의 갈등을 의미하며 에릭은 (트럼프처럼) 장벽을 쌓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일국 자본주의나 자국 우선주의에서 벗어나 공생과 연대의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개방만이, 오픈 마인드만이 살 길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그런 에릭에게 적국의 막내 공주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매우 정치적인 승부수에 해당하는 일이다. 영화는 결국 둘이 결실을 맺게 한다. 그건 세계 평화를 이루어 내거나 이루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자는 얘기와 동음이의어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아들이 러시아 푸틴의 딸을 사랑한다면 두 나라는 전쟁을 멈출 수도 있겠다. 실로 동화 같은 상상이지만 그럼에도 흐뭇해지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어공주’의 진짜 주인공은 인어가 아니라 왕자이며 적어도 각각이 아니라 이 남녀 커플 두 명 모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탈(脫) 인종주의가 아니라 탈 패권주의에 의한 세계 평화와 공존이라는 것이 ‘인어공주’의 핵심 메시지이다. 롭 마샬은 뮤지컬의 대가이고 노래와 춤의 연출에 있어서 전문가 중 최상위 급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당연히 ‘인어공주’의 백미는 주인공 에리얼의 노래이다. 할리 베일리의 노래는 이 영화를 두고 벌어진 이런저런 논란과 논쟁을 잠재울 만큼 최고 수준이다. 영화는 별로지만 베일리 노래 하나는 끝내줘, 라는 식이다. 또는 영화도 괜찮은데 정말 노래가 대단해, 라는 평가도 이어진다. 그만큼 할리 베일리의 음성과 노래 실력은 신의 영역이다. 베일리가 워낙 압도적이라 다른 배우들의 안무와 노래는 빛이 나지 않는다. 그럴 바에야 아예 비중을 줄이는 것이 낫다고 롭 마샬은 판단했고 그 대신 만화 캐릭터인 갈매기 스커틀(아콰피나)과 게 세바스찬(데이비드 디그스), 물고기 플라운더(제이콥 트렘블레이)가 바다속 생물들과 합창을 하는 노래 ‘언더 더 씨’에 각을 줬다. 이 영화의 하일라이트에 해당한다. 굉장히 행복하고 유쾌해 보이는 척, 노래 가사는 참혹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언더 더 씨’는 영화 ‘인어공주’의 모든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에리얼 내 말 좀 들어 봐 / 인간 세상은 엉망이야. / 바다 밑의 삶이 그 어떤 것보다 낫다구.. /.. 너는 육지로 올라가는 걸 꿈꾸지만 그건 큰 실수야…/…. 저 바다 밑 저 바다 밑…/…저 물가에서는 하루 종일 일하지 / 태양 아래의 노예처럼….』
캄보디아계 프랑스 감독 데이비 추가 만든 ‘리턴 투 서울’은 의도한 건지 오해한 건지, 서울과 한국이라는 공간 그리고 거기에 얽힌 시간을 굴절시킨다. 마치 깨진 거울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보는 느낌을 준다. 데이비 추는 코끼리 엉덩이를 만지듯 한국의 일상을 담아낸다. 시작부터 김추자의 ‘꽃잎’ 같은 노래를 흘린다. 영화 내내 김추자나 신중현 같은 한국의 올드 팝이 사용된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다소 뜬금없거나 지나치게 감독 개인 취향으로 보인다. 데이비 추는 자신 스스로가 인상 깊었던, 자신이 알고 있는 내에서만 한국의 공간을 그려내는데, 그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보다 정확하게는 맞지 않지만 맞지 않지만은 않다. 아마 사람들 눈에 비친 이방인의 삶은 일정 부분 그렇게 왜곡될 것이다. 이국적이고 이색적일 수 있다. 칸 영화제가 이 작품..
올해 실제 나이 77세(1946년생)인 실베스터 스탤론이 극 중 75세 마피아 역을 맡은 국내 OTT 채널 TVING의 파라마운트 시즌 드라마 9부작 ‘털사 킹’은 미국 털사(Tulsa)를 배경으로 한다. 털사는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주의 두 번째 도시로 인구는 40만이 좀 넘는, 인구밀도가 낮은, 미국 기준으로 보면 이른바 ‘깡촌’ 개념의 지역이다. 인디언 크리크족이 카지노를 운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이 인디언 후예들도 신종 마피아로 불린다. 털사가 있는 오클라호마주는 위로는 캔사스가 있고 아래로는 텍사스가 있는 지역이다. 소위 바이블 벨트에 속한 지역 중 하나인 곳이다. 바이블 벨트는 미국 중남부에서 동남부에 걸친 기독교 지역으로 대체로 보수적이고(공화당, 심지어 트럼프를 찍고) 동성애에 대한 반대론이 강한 지역이다. 미국 최대 도시인 동부 뉴욕이나 서부 LA 등지에 있다가 이곳 털사로 온다는 것은 한 마디로 좌천이나 유배를 뜻한다. 주인공 드와이트 데이빗 맨프레드(실베스터 스탤론)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뉴욕 마피아 보스 피트 인버니치(A.C.피터슨)의 아들 치키(도미닉 롬바르도치)가 1997년에 저지른 살인사건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25년을 복역한 후 만기 출소한다. 조직 보스 피트와 드와이트는 두목-부하관계라기보다 절친 사이다. 드와이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25년을 버틴다. 조직의 비밀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함구한다. 그러나 인비니치 패밀리는 감방에서 돌아온 그를 애물단지로 여긴다. 그냥 두자니 이제 실질적인 보스가 된 치키에게 걸리적거릴 것이고, 버리거나 처치하자니 조직의 룰이나 의리상 그럴 수가 없다. 새 보스 치키는 그에게 털사로 가라고 명한다. 거기서 새롭게 조직을 일구고, 개척하며 살라는 것이다. 이제 드와이트는 인비니치 패밀리의 털사 지부장이 된다. 드와이트는 거칠고 폭력적이지만 나름 지혜롭고 현명한, 게다가 25년의 복역 기간 중 책을 엄청나게 읽어서 꽤 유식하고 지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샐러리맨의 죽음’을 쓰고 마릴린 몬로와 살았던 미국 최고의 희곡작가 아서 밀러를 설명하면서 헨리 밀러와는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하는데(헨리 밀러가 쓴 건 ‘북회귀선’이야 라고 말하면서), 털사에서 조직하게 되는 신종 단원 중 그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의 운전기사가 된 25세 흑인 청년 타이슨(제이 윌)은 물론 대마초 판매상 보디(마틴 스타)조차 우드스탁이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세상은 무식해졌다기보다 바뀌었다. 25년이라는 큰 강이 생긴 것이다. 마피아 깡패 드와이트가 겪는 털사의 삶, 신천지의 인생이 격랑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드와이트는 옛날 방식으로, 25년 전에 맺었던 인간관계의 방식으로(그는 주로 현금을 쓴다) 자기만의 마피아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털사 킹’은 9부 에피소드 내내 다양한 사건과 상황들을 전개시키며 보는 사람들을 TV 앞에 바짝 붙여 앉힌다. 로맨스도 비교적 상당한 분량으로 나오는데, 이 늙은 마피아는 스테이시라는 미모의 중년 여성(안드레아 새비지)을 사귀지만 끝은 그렇게 좋지가 못하다. 그녀는 에피소드 내내 드와이트 옆에서 묘한 관계를 맺는다. 연방 기관 AFT(Bureau of Alcohol, Tobacco, Firearms and Explosives :미국 주류 담배 화기 단속국) 요원인 여자가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가 자신과 같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잘 나가던 요원이었던 여자는 9·11의 트라우마를 겪었고 이른바 설리 사건(미국에서 항공기가 허드슨강에 불시착한 사건) 때 큰 실수를 해 털사로 밀려온 인물이다. 스테이시는 드와이트와 동침한 다음 날 그에게 나이를 묻는다. 드와이트는 그녀에게 그렇게 직접적으로 묻지 말고 JFK가 암살됐을 때 몇 살이었냐는 식으로 물어보라고 한다. 그때 몇 살이었냐고 여자는 다시 묻고, 남자가 고등학생이었다고 하자 여자는 혼비백산 바로 옷을 챙겨 입고 호텔 방을 나선다. 나가면서 여자는 이렇게 소리친다. “난 당신이 꽉 찬 쉰다섯인 줄 알았다고!” 드와이트가 정작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여성은 스테이시보다는 나이가 좀 더 든 마가렛 드베로(다나 델라니)라는 인물이다. 목장의 여주인이고 아마도 이번 시즌1보다는 시즌2에서 드와이트를 위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목장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드라마 내내 늙은 백마 한 마리가 나온다. 파일럿이란 이름의 이 말은 종종 목장에서 탈출해 말발굽 소리를 또각거리며 시내 곳곳을 다닌다. 파일럿은 늙어서 소용없는 말이지만 여전히 품위 있는 자태를 지녔다. 새벽, 차가 비어 있는 거리에서 말갈기를 휘날리며 걸어가는 파일럿의 모습은 주인공 드와이트의 모습과 대구(對句)된다. 드와이트 역시 파일럿처럼 늘 말갈기를 다듬으며(정장으로 빼입으며) 다닌다. 그 역시 외롭고 늙은데다 쓸모가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마피아 패밀리 중간보스로서)품위가 있고 매력적이다. 여자들이 드와이트에게 빠지는 이유이다. ‘털사 킹’은 그래서, 마피아 이야기인 척 마피아 이야기가 아닌 드라마이다. 드와이트는 털사의 터줏대감인 조직 폭력배로 바이크 갱단 카올란왈트립 일당(리치 코스터)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 그 와중에 AFI와 FBI 양쪽의 추적을 받는다. 왈트립의 수하로 들어간 지역 경찰까지 그를 귀찮게 한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 드와이트가 회복하거나 되찾는 것은 이들을 물리치고 새롭게 건설하는 조직 패밀리 ‘따위’가 아니다. 그가 털사에서 새롭게 얻는 것은 가족관계 같은 파트너들, 젊은이들이다. 드와이트는 실제로 자신의 딸을 되찾기도 한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 티나는 오랫동안 범죄자인 그를 증오해 왔지만 결국 아빠 곁인 털사로 오게 된다(이 부분이 다소 억지스럽다). ‘털사 킹’은 갱스터 드라마가 아니다. ‘털사 킹’은 갱스터 드라마인 척, 갱스터 드라마를 변주한 가족 드라마이다. 9개의 에피소드를 흥미 깊게 혹은 주의 깊게 지켜보게 되는 이유이다. ‘털사 킹’은 고령화 사회를 우회적이면서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에는 많은 사회적 정치적 메타포가 담겨져 있는데, 드와이트와 운전기사 타이슨의 관계를 통해 신구세대 갈등과 흑백 갈등 문제를 이야기하곤 한다. 세상의 어느 사회처럼 기이하게 부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미국사회에 대해 한 늙은 현자의 안타깝지만 따뜻한 시선을 담아 내고 있다. 드와이트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에서 어두워지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피투성이가 됐지만 패배하진 않았어. 다운이 됐어도 여전히 난 링 위에 서있어.” 미국이 갖고 있는, 올드하지만 여전히 의미있는 자본주의적 가치, 인간이 지니고 있어야 할 존엄성과 품격을 말한다. ‘털사 킹’의 매력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대본, 시나리오가 돋보인다. 현재 미국 할리우드의 가장 잘나가는 시나리오 작가 테일러 쉐리던(‘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 ‘윈드 리버’)이 전편을 썼다. 텍사스 출신인 그는 털사가 고향인 것처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 낸다. 사실 이 ‘털사 킹’의 제목은 아벨 페라라 감독이 1990년에 만든 ‘킹 뉴욕’에서 가져 온 것이다. ‘킹 뉴욕’은 잔혹했다. ‘털사 킹’은 인간적이다. 세월이 바뀐 만큼 마피아 두목도 폭력배로서만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법이다. 그건 자본주의가 점점 인간적인 얼굴이 돼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마피아적 삶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것에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전설의 영화 ‘대부1·2·3’ 시리즈가 오랜 시간 늘 해왔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넷플릭스 신작으로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영화 ‘내 이름은 마더’에 대해 쓰는 이유는 100퍼센트 순전히, ‘영화는 이렇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반면교사의 지점을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OTT 넷플릭스에 탑재된 수백 수천 편의 영화 가운데 얼마나 ‘사소한’ 작품들이 많은지(영화는 좋은 영화인지 혹은 나쁜 영화인지로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사소한 영화인지 아닌지로 나뉠 뿐이다)를 유감없이 선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온통 클리셰(clich) 덩어리이다. 설정 자체가 말이 안 되거나 무리한 것이다. 그리고 앞뒤가 안 맞는다. 액션은 이런저런 영화에서 온통 다 끌어다 쓴 것이거나 익숙한 장면들을 이어 붙인 것들이다. 가장 최악인 것은 정치적 올바름과 젠더 이슈에 대한 강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럴 경우 자..
극장에선 조기에 종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영화 ‘무명’이 알 만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모았던 이유는 1930·40년대의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때가 지금보다 훨씬 멋있었다. 시대도 그랬고, 예술도 그랬다. 패션은 더더욱. 무엇보다 사람들이 멋있었다. 저항할 줄 알았고, 그 와중에 즐길 줄 알았으며, 반드시 사랑들을 했다. 그것도 모두 치열하게. 지금 시대에는 사라진 단어, ‘혁명’과 ‘사랑’이 이 시대에는 존재했다. 영화 ‘무명’이 다루는 이야기는 바로 거기에 있다. ‘무명’은 1941년 상하이에서 암약한 제5열(상대 진영 내부나 후방에서 암약하는 스파이 조직)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잡한 것은 제5열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셋이라는 것이며 혹은 제5열 안에 또 다른 제5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간첩 혹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
사랑과 고고학은 멀리 있는 듯 사실은 가깝게 있는 개념이다. 고고학하면 카르멘 로르바흐가 쓴 ‘나스카 유적의 비밀’이나 아놀드 C.브랙만의 ‘니네베 발굴기’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페루 나스카 평원에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봐야만 전체가 보이는 물경 45m 안팎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고고학 하면 이런 걸 발견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혹은 앗시리아의 옛 수도인 니네베에 묻혀 있는 4000년 전, B.C.2000년 전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것이거나. 고고학자가 되는 것은 나름 매우 매력적인 일이다. 그래서 인디아나 존스처럼 세계 오지를 떠돌며 인류사의 흔적을 뒤좇고 온갖 모험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다. 시몬 스톤의 2021년 넷플릭스 영화 ‘더 디그’의 주인공 바질 브라운(랄프 파인즈)처럼 고고학자는 끊임없이 파고 또 파고, 쓸고 닦고, 비질과 세척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고고학은 생각지도 못한 예상 외의 ‘막’노동을 요구하며 그러면서도 지질학 같은 별도 학문을 병행시킨다. 고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스윗하지가 않다. 그러기는커녕 이만저만 고생을 시킨다는 면에서 고고학과 진배없다. 사랑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 진실의 땅을 파고 또 파고 또 파게 만든다. 그래서 간신히 뭔가 하나를 발굴했다고 생각하면 이번엔 그것의 겉면을 솔로 빗겨내고 다듬는 과정에서 손상을 입히기 십상이다. 아니 애초부터 수백 수천 년을 땅의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갑자기 빛을 받은 유적, 곧 사랑의 본질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가치가 떨어진다. 고고학의 유적이 그렇고 남녀 간의 사랑이 그렇다. 어찌 보면 그냥 파묻혀 있는 게 나은 셈이다. 주인공 영실(옥자연)은 고고학도이다. 순전히 밥벌이를 위해 고등학교 체험 실습 특강 같은 걸 하는데, 거기서 그녀는 어린 학생들에게 자신의 직업에 대해 사명감만 있고 미래 비전은 없으며 절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가능하면 고고학을 전공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영실은 지금 막 한 남자와의 기이한 동거를 끝내려고 한다. 학교 선배인 듯 보이는 남자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적 관계와 남녀 간 육체적, 정신적 관계가 혼재된 사이의 상대이다. 당연히 서로가 서로에게 지쳐 있는 상태이고, 남자에게 영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이제 그만 내 집에서 나가 줘’이다. 아니면 언제쯤 나갈 거냐고 묻거나.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셋돈도 자신이 마련했으니, 상대가 나가야 하는데 이 남자 도통 급할 게 없는 태도이다. ‘아 나간다니까’가 그의 말버릇이다. 그런 남자와 좁은 공간에서 같이 살면서 밥도 같이 먹고 샤워도 번갈아 하며, 빨래도 같이해 개어 주기까지 하면서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 혹은 연인처럼 살아가지만, 영실의 일상은 늘 살얼음판이다. 뭔가에 집중하고 자신을 정비해 나갈 수가 없다. 사람을 잘못 만나서 이렇게됐다기 보다는 사람을 만나 지내다 보면 이렇게 된다는 걸, 사랑은 영원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 이 지경이 됐다. 그런 영실은 또 한 번의 연애를 준비한다. 음악을 하는(아마도 방송음악이나 영화음악을 하는 것 같은) 인식(기윤)이라는 남자이다. 인식은 영실에게 어떠한 얘기를 듣더라도 그녀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며 그녀를 끝까지 지켜줄 거라고 말한다. 영실은 반신반의 하지만, 연애와 사랑이 지니고 있는 선의를 믿고 과거의 남자, 과거의 관계에 대해 알려 준다. 사람이 사는 건 이렇게 저렇게 ‘스몰 월드’인지라 둘이 연결된 이런저런 사람을 통해 인식도 영실이 학교 시절 누구와 어떻게 만나고 어떤 관계를 만들며 살았는지 듣게 된다. 영실의 남자관계가 자유분방했는지 방종했는지 아니면 문란했는지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법. 상대를 하나의 인격체로 얼마나 존중하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사람들은 의외로 많은 사람과 연애를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런 감정을 교류하거나 그래서 때론 가벼운 육체관계를 맺거나 잠깐이라도 사귀게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들 얘기를 안 하고, 감춰두고, ‘발굴되지 않게끔’ 땅속 깊이 묻어 둬서 그렇지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한다. 인식은 영실을 8년 동안 쫓아다니며 들들 볶는다. 다른 남자를 입에 올리며 그 남자와 잘 때는 어땠느냐 혹은 그 남자한테도 이랬느냐는 둥 천박하고 상투적인 질문 고문을 퍼부어 댄다. 그러고 나서 미안해하기를 반복하고 또 조금 지나서는 온갖 꼬투리를 잡아 대며 영실을 못살게 군다. 영실은 그런 상황을 견디다 견디다 못해 인식을 떠나지만, 종종 전화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서 섹스해달라는 남자의 요구까지는 거절하지 못한다. 다시는 안 가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영실은 인식을 완벽하게 떨궈 내는데 늘 실패한다. 그것이 8년이 걸린다. 사랑은 고고학의 비질처럼 오랜 시간 살살 다뤄야 한다. 그래서 얻어 내는 유물은 둘 관계의 사랑이 지닌 본체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웬걸 결국 그렇게 어렵게 찾아낸 것은 자기 자신, 곧 자아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애’라는 위대한 진실의 유물이다. 다른 관계들을 일시적이나마 반복적으로 계속 밀어내면서라도, 자신을 온전히 지켜야만 영원한 사랑을 해 낼 수가 있다. 사랑은 남자나 여자 같은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하는 것이다. 영실이 그걸 깨닫기까지 실로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물경 163분 동안 줄곧 목도하게 되는 인식의 광적인 집착, 그 야비한 행태 때문에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쪼그라든다. 사랑이 지닌 그 비루함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지긋지긋해지는 마음이 된다. 인식 같은 남자를 만나면 후미진 골목길에서 흠씬 패주고 싶지만, 그런 인식의 모습이 우리의 평균치 남성들의 모습과 다름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그래서 역설적이다. 절망적인데 반대로 어떻게든 자신을 되찾아 가는 영실의 모습,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아를 회복해 가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밝고 희망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실제로 영실이 자립을 시도해 가는 모습은 대체로 밝은 야외이다. 친구나 선배와 카페 테라스 같은 데서 커피를 마시거나 호감을 갖게 된 어떤 남자(이 남자는 발굴 현장의 인부인데 조경 일을 하기도 한다)의 나무 재배장 같은 곳에서 얘기를 나눈다. 인식을 벗어나면 영실의 삶을 비추는 조명은 환해진다. 내가 없는 사랑은 없다. 나를 지키지 못하면 상대와의 사랑을 이어 나가기가 힘이 든다. 변하지 않는 사랑도 없다. 내가 변하고 그렇게 변하는 나를 지키면서 변화해 가는 상대를 인정하면, 비교적 지속적인 사랑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느니 반드시 영원해야 한다느니 하는 강박에서 제일 먼저 벗어 날 수 있어야 한다. 감독 이완민이 남자 인식의 모습을 통해 가장 말하고 싶은 부분일 것이다. 사랑은 고고학이다. 끈질기고 인내심이 강한 자, 자기와의 싸움에 능한 자만이 유적, 사랑의 본질을 발굴한다. 감춰진 진실이다.
다소 으쓱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 ‘외교관’은 이런 부류의 영화, 곧 전문가를 다루는 내용의 작품에 있어 미국, 할리우드가 앞서도 한참을 앞서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여기 나오는 배우들을 실제 외교 현장에 데려다 놓아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캐릭터 하나 하나가 정교하며 이야기가 갖는 리얼리티가 높다. 이런 부류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최고 급으로 분류되는 영국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 이후 또 한편의 탁월한 국제정치 시즌 드라마가 나온 셈이다. 일단 이런 저런 설정이 현재의 국제 정세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오며, 미-러시아의 군사적 갈등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핵심 소재로 등장한다. 여기에 급박한 중동 정세(이란과의 오랜 적대 정책)가 오버랩 되고, 아프간에서 친미국적 활동을 한 사람들을 구해 오지 못한(사실은 구하지 않은) 바이든 정부의 의도적인 외교 참사 같은 것이 여주인공의 행동 동기의 배경으로 자리한다. 잉글랜드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스코틀랜드 및 북아일랜드의 정치상황도 매우 중요한 모멘텀으로 작동한다. 핵 전쟁에 대한 위기감, 러시아가 전술핵 정도는 별거 아니라며 언제든 쏠 수 있을 것이는 발언과 진술 등등은 기본 메뉴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영국의 전함(戰艦)이 정체 모를 미사일 공격을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불시의 공격으로 영국의 장병 41명이 사망한다. 영국은 이 미사일이 이란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란은 온갖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는 미국을 우회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비열하게도 영국에게 테러를 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그건 미국 백악관도 조심스럽게 동의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중동 전문가이자 뛰어난 현장 요원인 케이트(케리 러셀)가 이런 상황에서 레이번 대통령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신임 주런던 미국 대사로 발령받는 이유다. 상대가 이란이니 만큼 급한 불을 끄라는 얘기인 셈이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자 전문 외교관인 핼(루퍼스 스웰)과 런던에 오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양 불편해 한다. 외교가(街)가 아닌 아프가니스탄에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런던에 오기 전 카불로 떠나기 위해 막 짐을 싸던 중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극중 내내 파티용 드레스를 입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고 늘 구두를 벗어서 들고 다닐 정도다. 무엇보다 케이트는 남편 핼과 이혼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 정작 레이번 대통령은 케이트를 차기 부통령 후보로 고려 중이다. 현 여성 부통령은 남편의 부패 스캔들이 터지기 직전으로, 사임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핼은 부통령이 될지도 모를 아내 때문에 혹은 아내를 위해서 이혼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그게 케이트의 정치생명을 위한 것인지, 자신의 정치적 재기를 위한 것인지 다소 모호하다. 케이트에게는 이란에게 대대적인 보복 공습을 생각하는 영국 여론을 달래는 것이 1차 과제이다. 이란이 공격했다는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사일 공격의 주체, 국가 혹은 테러 집단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도 중요한 임무이다. 잘못하면 자칫 엉뚱한 나라를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게 만약 이란이라면 미국으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뜩이나 어려운 중동 정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와중에서 또 하나의 국제적 악재를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영국 총리 니콜이 기름을 붓는다. 그는 정치 지도자로서는 용의주도하지(외교적이지) 못하게, 장병 유가족들 앞에서 이란이라는 국가 이름을 언급하며 피의 보복을 약속한다. 이란과의 전쟁은 일촉즉발 상황에 빠진다. 케이트는 영국의 외무 장관 데니슨(데이비드 기아시)과 교묘하게 협력하며 미영 양국의 강경 노선을 완화시키려 한다. 이 와중에 둘은 주런던 이란 대사로부터 테러의 배후에 러시아가 있고, 용병 군사조직인 ‘렌코프’가 동원됐다는 기밀을 입수한다. 이때부터 상황은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시작한다. 이제는 상대가 핵 전쟁을 마다 않는 푸틴의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케이트와 데니슨 장관, 교활한 외교적 술수로 유명한 남편 핼, 케이트의 공관 차석인 스튜어트(아토 에산도흐) 그리고 그의 비밀 애인이자 공관 내 CIA 지부장인 에이드라 박(알리 안)은 러시아와의 전면전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 와중에도 영국 총리 니콜은 이름도 모르는 러시아 한 지역에 대규모 공습을 가할 계획을 세운다. 총리는 스코틀랜드 보궐 선거의 결과로 분리 독립 운동이 거세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대 러시아 전쟁은 다분히 국내 정치용인 면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의 미사일 테러가 정말 렌코프 조직이 일으킨 것이냐는 점이다. 영국과 미국의 동맹 외교는 중차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총 8부작의 결말은 실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국제 외교와 세계 전쟁에 있어 진짜 적은 누구인가. 어리숙한 정치인들은 외교적 언사를 마다하고 주적(主敵)을 함부로 입에 올린다. 이들이 국익,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데 있어 그 행동 폭을 스스로 좁히는 우를 범하는 이유다. 미국의 국무장관인 게넌(미구엘 산도발)은 영국 총리가 주선한 디너 파티에서(이날 게넌 장관은 니콜 총리가 제안한 리비아 내 렌코프 조직을 제거하는 군사 작전을 거부한다) 아랍 속담을 들먹이며 이렇게 말한다. “제일 좋은 것은 진실을 알고 그걸 말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진실을 알아도 그냥 야자수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케이트는 강경 영국 총리 옆에 서려는 레이번 대통령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정치는 늘 49대 51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주인공 케이트는 한때 전설의 외교관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대사의 ‘부인’이 된 남편 핼과의 사이에서도 외교적(개인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케이트는 핼이 자신을 부통령으로 만든 후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고 의심한다. 그녀의 그런 생각은 일종의 합리적 의심이다. 그러나 중동을 누비며 같이 활동했던 일이 케이트로 하여금 핼과의 사이를 애증의 골짜기로 밀어 넣는다. 핼은 그녀의 정치적 경쟁자이자 동반자이다. 마치 그건 국가적 동맹 관계와 비슷한데, 영국 총리 니콜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 반면에 미국과 등을 지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고.” 레이번 대통령은 영국과의 전통적인 동맹을 운운하는 것에 대해 ‘초등학교 10살 때 했던 약속 같은 것’이라고 경멸한다. 외교를 모르는 인간들이나 동맹을 찾는다는 것이다. 기이하게도 미국 드라마이지만 ‘외교관’은 지금 우리가 처한 국제 정세와 외교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뿐 아니라 어느 국가의 정치외교 상황에도 빗댈 수 있는 보편적인 스토리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미덕이다. 누구에게나 반면교사가 되는 드라마라는 말이다. 미숙한 외교 행정으로 빈축을 사고 있는 국가들에겐 꽤 괜찮은 국제정치 교과서가 될 수도 있겠다. 드라마가 현실을 너무나 잘 그리면 종종 그 현실이 갖고 있는 문제의 해법까지도 찾아 내는 경향을 보인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배우라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