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세계은행은 ‘What a Waste 2.0’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펴냈다. 세계의 쓰레기 위기에 관한 내용이다. 이 보고서는 세계에서 배출하는 쓰레기(고형 폐기물)의 양은 2016년 약 20억 톤에서 2050년 34억4000만 톤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환경부의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기준 국내 하루 평균 폐기물 처리량은 26만 톤이다. 지난 2001년부터 2019년까지 연평균 3.2%씩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중 건설 폐기물(21만 톤, 46%)과 사업장 폐기물(17만 톤, 38%)이 가장 많다. 둘을 합치면 84%나 된다. 앞으로 더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비해 이를 처리할 수 있는 소각 시설과 매립 시설 등은 감소하고 있다. 정부의 규제가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폐기물 배출을 줄이거나 이를 재활용하..
어느덧 무더위가 시작됐지만 수도권을 중심으로 코로나19 집단 감염 확산 추세는 지속되고 있어 걱정이 크다. 더욱 우울한 소식은 올해 안에 코로나19 종식이 어려운데다 예방 백신이 나오지 않으면 이 상황이 2년 이상 이어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예방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일이다. 손 씻기 생활화, 기침 예절준수, 마스크 착용, 거리두기 등이다. 특히 마스크 쓰기는 필수다. 8일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 본부장은 정례 브리핑에서 최근 영국 의학 학술지 ‘랜싯’에 나온 연구 결과를 설명하며 마스크 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19 등과 관련한 문헌 44개를 메타 분석한 연구 결과다. 이에 따르면 병원에서 마스크를 쓰면 코로나19 감염 위험이 85% 감소하며 물리적 거리를 1m 유지할 경우 감염 위험은 82% 감소한다는 것이다. 1m 간격씩 추가될 때마다 효과는 2배 이상 늘어난다고 한다. 정본부장은 더워지는 날씨에 불편하고 힘들어도 마스크 착용과 거리 두기 유지를 일상생활에서 습관화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열대야까지 시작된 여름철 마스크를 상시 착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통풍이 잘되고 호흡곤란을 일으키지 않는 덴탈마스크를 권장하고 있지만 현재 공급물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최근 코로나19 산발적 집단감염이 일어난 클럽, 물류센터, 교회, 방문판매회사, 탁구장 등은 방역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확산세가 지속되자 당국은 마스크 착용을 거듭 호소했다. 지난달 26일부터는 버스와 택시, 지하철 등 대중교통에서 마스크 의무 착용 규정을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불응한 승객이 운전기사와 역무원을 폭행하는 일까지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강제 규정이 아니므로 기사가 마스크 착용을 권고해도 승객이 이를 거부하면, 현실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다. 지난달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니는 안일한 사람들 때문에 이 사달이 났다”며 마스크 미착용 시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청원이 올라왔다. 또 다른 청원자는 “마스크 안 쓴 사람들은 당당하고 오히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그들을 피해 다니는 이상한 상황이 됐다”며 마스크 미착용은 경범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스크 미착용자에 대한 벌금 부과 등 실효성 있는 단속 방안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하는 국민들이 많다. 조속한 종식을 위해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식탁이었다. 큰 꽃잎 문양이 수놓아진 식탁보 한가운데 해바라기와 이름 모를 꽃들로 장식된 화병이 놓였다. 냅킨이 곱게 접혀있었고 은색 숟가락과 포크가 놓여있었다. 큰 접시들에는 구운 오리고기와 오믈렛과 샐러드, 미군들이 먹는다는 햄과 베이컨과 ‘에그 프라이’가 그득했다. 선교사님이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이모와 사촌 형, 누나들이 자리에 앉자 선교사님이 기도를 했다. 나도 고개를 숙이고 주기도문을 외웠다. 이모님이 나를 위한 기도를 특별히 하셨다. 이모는 나를 부를 때 ‘미스터 고’ 라고 했다. “미스터 고가 주님의 은총으로 명문 ㅇㅇ대의 법대에 입학하였습니다. 주님의 종으로 크게 쓰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모의 기도는 밝고 높은 톤이었다. 특히 법대라는 대목에 강한 악센트를 주셨다. 이모는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 조카의 앞날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선교사님과 이모는 영어로 대화를 나눴고 누나들도 가끔씩 영어로 농담을 했다. 그들은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손짓을 했는데 나는 몇 마디 단어를 알아들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아이 언더스탠드’ 라고 겨우 대답했다. 그러나 덕담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내 이모의 충고가 시작되었다. 이모는 한국의 모든 것이 불만이었다. 한국 사람은 게으르고 더럽고 무엇보다 법을 지키지 않는 무식한 민족이었다. 한국 사람은 무식하게 술을 많이 먹었고 심지어 밥상에 책상다리로 앉아서 밥을 먹는 것도 미개한 행동이었다. 그에 반해 미국은 모든 것의 표준이었다. 이모는 ‘아메리칸 스탠다드’라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해서 말했다. 나는 그런 이모의 말에 주눅 들었다. 무엇보다 영어는 내 인생의 큰 콤플렉스였다. 전곡에 사는 이모는 선교사의 초청으로 식구들을 전부 이끌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그때부터 전곡이모는 미국이모로 불렸다. 나에게 미국이모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미국이모는 세련됨 그 자체였다. 나는 미국이라는 제국을 동경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인연은 내 생애 딱 한번 뉴욕에 열흘 출장 간 경험밖에 없었다. 벤처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나는 미국이라는 제국에 탑승하지 못한 승객으로 살아왔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미국으로 갔던 사촌형이 제일 먼저 귀국했다. 형은 십 년을 미국에서 살았는데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귀국한 형은 술에 쩔어 살더니 어느 해 여름 홍수로 차가 흙탕물에 휩쓸려 돌아가셨다. 이내 두 누나가 귀국했다. 누나들은 영어학원에서 강사를 한다고 했다. 그 후 미국이모도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몇 년 전 나는 이모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재회를 위해 전곡에 갔다. “아이고 행곤아, 너도 많이 늙었구나.” 미국이모에게 나는 더 이상 미스터고가 아니었다. 호호백발이 되신 이모의 주름진 얼굴이 애처로웠다. 이모는 더 이상 미국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모의 아메리칸드림은 깨진 걸까? 최근에 미국에서 들려온 지인들의 증언이 자꾸만 귀를 울린다. “코로나가 분명하지만 병원비가 겁나서 진료를 포기했다.” 흑인을 목 졸라 죽인 백인 경찰의 득의만만한 표정과 시위하는 시민에게 경찰차를 몰아가는 뉴욕경찰의 모습을 CNN 뉴스에서 본다. 숨이 막힌다. 나의 아메리칸드림은 깨졌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고용시장 충격으로 5월 취업자 수가 39만 명 이상 감소해 통계 작성을 시작한 1999년 이후 21년 만에 최악을 기록했다. 그런데도 고용노동부는 일자리를 창출해야 할 기업들을 옥죄는 노동조합법 개정을 예고했다. 문재인 정권 초기 호기롭게 표방했던 ‘일자리 정부’ 구호가 떠오른다. 배고픈 국민은 기다릴 여유가 없다. 코로나를 핑계로 허술히 가고 있는 점은 없는지 면밀하게 살펴 고쳐가야 할 때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5월 고용 동향’에 따르면 실업자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만3천 명 늘어난 127만8천 명을 기록했다. 실업률은 0.5%포인트 오른 4.5%로 역대 5월만 놓고 보면 통계 작성 후 최고 수준이다. 경제활동인구는 1년 전 대비 25만9천 명 감소했다. 구직 의지가 없는 비경제활동인구는 전년 동기 대비 55만5천 명 증가한 1천654만8천 명으로 집계됐다. 연령별 고용률을 살펴보면 60세 이상 고용률만 0.3% 늘어난 43.1%를 기록했고 나머지 연령대에서는 전년 대비 모두 감소했다. 특히 청년층(15~29세) 고용률은 1.4%포인트 줄어든 42.2%로 하락 전환했다. 이미 예상됐던 코로나19가 잇따라 몰고 오는 경제 혼란 쓰나미가 드디어 시작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 깊어지고 있다. 정부가 고용 창출을 위해서 먼저 집중해야 할 정책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60대 이상의 아르바이트 자리는 아무리 늘려도 ‘좋은 일자리’가 증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청년층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진정한 일자리는 정부가 아닌 민간기업이 만들어낸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반기업적’ 대선공약에 발이 묶여 시의적절한 정책들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공약은 ‘늘·줄·높’(일자리는 늘리고, 비정규직·근로시간은 줄이며, 일자리의 질은 높인다)으로 요약된다. 집권 3년을 넘긴 지금 뭐가 그렇게 달라졌는지 딱히 짚이는 구석이 없다. ‘해고자·실업자 노조가입 허용’, ‘노조 전임자(專任者) 임금 지급 금지조항 삭제’ 방향으로 추진하고 있는 노동조합법 개정안에 대한 재계와 경영자단체의 반발이 거세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페이스북에 밝힌 “고용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는 말이 자꾸만 초라한 변명으로 들린다. 핑계만 있고 감동적 성과는 보이지 않는 ‘일자리 정부’ 공약(空約)에 대한 국민적 아쉬움이 깊어가고 있다.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실용적’인지 깊이 점검해볼 시점이다.
도시화는 영국에서 18세기 중엽에 시작된 산업혁명을 계기로 영국에서 발원하여 유럽 및 전 세계로 확산됐다.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주택이나 도시 시설의 건설이 불가피해지면서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됐다. 도시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뿐만 아니라 각종 교육과 문화적 편리함을 제공한다. 반면, 환경오염, 열섬현상, 소음, 범죄, 교통사고, 이웃 간의 갈등 등의 부작용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거니와 도시생활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이다. 지금 인간이 체험하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은 인간의 무분별한 도시개발이 원인이며 도시화가 빚어내는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 전염병이라는 사실은 예상하지도 못했고 지금 우리가 그것을 처음 겪고 있다. ‘유럽연합 공동연구센터(JRC)’는 세계인구의 76%가 도시에 집중해 살고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국토교통부와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조사한 '2018년 도시계획현황 통계'를 보면, 한국 국민의 92%가 국토면적의 17%에 불과한 도시에 모여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시에 인구가 모이게 되면 도시개발이 (인구이동이 먼저인지, 도시개발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산림훼손이 수반된다. 야생동물은 바이러스를 몸에 지닌 채 대부분 별 이상 없이 공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서식지와 먹이를 잃게 되어 마을로 이동하면서 바이러스를 전파한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야생동물이 기침을 하면 그 바이러스가 77억의 사람과 그보다 더 많은 가축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대도시는 바이러스 전파의 최적지인 셈이다. 한국의 경우 지금까지 코로나19 확진자의 약 80%가 수도권을 포함한 대도시에서 발생했다. 영국의 사우샘프턴대를 비롯한 3개국 연구기관이 공동 조사한 바에 의하면 코로나 확산 위험이 있는 세계의 30개 지역은 모두 대도시였다 (서울은 4위로 분류). 국내에서 한때 발병이 주춤하는가 싶더니 다시 수도권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연구결과를 결코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전염병 확산의 근원지가 되는 대도시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할 때다. 아무리 편리한 여건이 갖춰져 있다 해도 생명과 건강보다 앞서는 가치는 없다. 민선 경기도지사들은 정부와 지방의 자치단체를 상대로 수도권규제법령을 철폐하는 투쟁과 논쟁을 끊임없이 지속했다. 더 나아가 A지사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초강대도시’ 육성을 주창한 바 있는데, 경기도가 이미 포화상태이며 난개발이 만연한 상태에서 이런 주장들은 정부와 국민의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성과도 극히 미미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들의 주장이 국내외 현실 인식, 지방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이타주의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는 도시정책을 코로나19 이후의 시대에 맞춰 전면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자체장의 치적을 위한 도시개발을 멈추고 현재의 도시가 지속가능한 차원에서 인구의 적정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부터 진단해야 한다. 규모가 초과상태라면 인근 지자체들과 협력하여 분산을 모색하고 필요하지 않은 과잉 도시시설을 덜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필자가 만나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 중에는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전원주택을 구입해 교외나 농·산촌으로 이사할 계획을 구상 중이거나 실제로 실행에 착수한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 또한 조그마한 전원주택과 텃밭을 갖는 것이 꿈이다. 대도시의 종말과 중소도시의 부활의 시대가 오고 있다. 뉴노멀 시대의 도시 모델은 숲, 농지, SOC가 적절히 조화롭게 갖추어져 있고, 적당한 사회적거리를 유지하고도 공동체의 숨결이 살아있으며, 도시 자체나 인근 지역에 적정한 근린생활시설을 구비한 중소도시가 대세가 될 것이다.
환경운동가 출신의 염태영 시장이 세 번 째 연임중인 수원시는 ‘환경수도’, ‘생태도시’, ‘레인시티’임을 자부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수원시는 타 지방정부에 앞선 환경정책을 추진해오고 있다. 그중 하나가 증가된 강우 유출로 인한 오염 부하를 최대한 자연친화적인 기법으로 관리하기 위한 ‘레인시티’ 사업이다. 빗물정원, 빗물을 이용한 사계절 노면 살수, 빗물침투화단, 투수블록, 빗물침투도랑, 빗물저금통, 빗물주유기, 나무여과상자, 투수성주차장 등 빗물 이용시설과 중수도 시설, 그린 빗물 인프라 등 물 순환하는 사업들이 시작됐다. 이후 빗물의 표면 유출량이 감소되고 빗물 침투량은 증가했다는 물수지 분석 결과도 발표된 바 있다. 창가에 녹색식물을 심어 태양광을 차단함으로써 실내온도를 3℃ 이상 낮추고 전기에너지를 절감하는 효과를 거두..
미래통합당에서 시작된 어젠다들이 뉴스를 장식하면서 제1야당이 총선 대패의 충격에서 조금씩 빠져나오는 인상이다. 진보적 어젠다를 선제적으로 내놓으면서 대중의 관심을 일깨우고 있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비대위원장)에 대해 기존 통합당 중진들이 비판을 꺼내 들고 있다. 그러나 ‘보수’를 표방했던 미래통합당(자유한국당, 새누리당 포함)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김종인의 이슈 파이팅을 비판할 게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고 논쟁을 시도하는 게 맞다. 통합당의 잠재 대권 잠룡으로 분류되는 원희룡 제주지사가 뜻밖으로 한바탕 ‘보수 타령’을 늘어놓았다. 원 지사는 9일 미래통합당 ‘대한민국 미래혁신포럼’에서 “실력을 인정할 수 없는 상대한테 3연속 참패를 당하고, 변화를 주도했던 우리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잃어버렸다”며 “보수는 우..
텔레비전 화면에서 송해를 볼 때마다 아련한 생각이 든다. 너무 오래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KBS배 쟁탈 전국노래자랑’이란 제목으로 1972년에 시작했다가 1977년 4월까지 진행했다. 1980년에 ‘전국노래자랑’으로 재탄생한 뒤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송해는 1988년 5월부터 1994년 4월까지 5년 11개월 동안 맡다가 몇 개월 다른 사람이 맡던 것을 1994년 10월부터 다시 맡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뒤에 맡은 기간 만도 26년, 그 전까지 합치면 30년이 넘는 세월이다. 얼마전 그만 둔 강석, 김혜영은 각각 36년, 33년 동안 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진행자의 재능 여부를 떠나서 특정인의 전유물처럼 보인다. 비슷한 경우로는 ‘가요무대’가 있다. 1985년 11월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의 사회는 김동건 아나운서가 맡고 있다. 2대째인 1985년 11월부터 2003년 6월을 진행한 뒤 다시 2010년부터 4대째를 이어받아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4대만 본다면 10년, 2대 9년까지 더하면 19년을 같은 프로그램 진행을 맡으면서 해당 프로그램의 상징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와는 달리 진행자가 바뀌면서도 장수하는 경우도 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프로다. 1964년 ‘라디오 서울’(RSB)에서 첫방송을 시작한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동양방송(TBC)을 거쳐 한국방송공사(KBS)로 넘어간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성화 아나운서가 초대 진행을 맡은 이후 37명째 진행자가 바뀌었지만 같은 타이틀로 56년을 이어 오고 있다. 1991년 프로그램 개편으로 폐지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이듬해에 같은 제목으로 다시 살아나 최장수 프로그램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1969년부터 시작해 오남열, 차인태, 이종환, 조영남, 이문세, 이휘재 등 27명의 진행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지난 5월부터 김이나 작사가가 27대 진행자를 이어 받았다. 역대 진행자들은 각각 다른 솜씨의 진행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했지만 진행자가 바뀌어도 프로그램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이어 장수 프로그램으로 통하고 있다. 어느 진행자가 특정 프로그램을 오래 맡고 있다면 나름의 개성이 있거나 방송국의 전략적 의도가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특정한 프로그램이 장수하는 것은 탓할 일이 없다. 특정한 진행자가 장수하는 것과는 다르다. 방송은 공공재적인 성격을 지닌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동원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진행자가 오래될수록 해당 프로그램은 진행자와 동일시되거나 진행자가 그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본인이나 기획자가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사유화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특정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장수하면 상대적으로 진행자의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각인된다. 널리 알려질수록 친근함도 높아져 유명인이 되기 쉽다. 어느 진행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는가 하면 곳곳에 기념물이 세워지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 기여도가 큰 인물 중에서 그만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진행자는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광고를 내보내기까지 한다. 특정 프로그램에 광고를 붙이는 일은 진행자가 결정하는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프로그램 진행과 광고를 함께 듣는 기분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유쾌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방송을 사유화하는 것은 방송의 공공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진행의 능숙함 여부와는 상관없는 문제다. 해당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능숙하다거나 그만한 진행자를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안일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진행자가 바뀌어도 프로그램은 온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밤을 잊은 그대에게’, ‘별이 빛나는 밤에’는 증명하고 있다. 세상 모든 분야에는 정년이 있고, 정년이 아니더라도 물러 나야 할 때가 있다. 공공방송이라면 더욱 그렇다. 공공재인 방송이 특정인의 노후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서는 안된다.
“비 맞은 닭이 구시렁구시렁 / 되똥되똥 걸어와 후다닥 헛간 볏짚 위에 오른다 / 그리고 아주 잠깐 사이 / 눈부신 새하얀 뜨거운 알을 낳는다 / 비 맞은 닭이 구시렁구시렁 미주알께를 오물락거리며 다시 일 나간다” 이시영 시인의 「당숙모」라는 작품이다. 당숙모는 종숙모라고 부르는 5촌으로 시골에서는 흔히 ‘아지매’라 부르기도 했다. 새끼를 여러 마리 품고 있는 암탉의 사진들을 종종 보듯 여기 ‘당숙모’는 그런 암탉으로 그려져 있다. 암탉이 집밖에 나갔다가 꼬꼬댁거리며 집안에 들어오듯 밭일을 나갔다가 당숙모가 집에 들어온다. 아이들이 난장판을 벌이며 놀고 있다. “이놈 새끼들아 제발 좀 어지르지 말고 치우면서 놀아라.” 구시렁거리면서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따뜻한 밥을 차려 내온다. 집안에 할머니에게도 차려주고 애들도 먹고 자신도 한 술 뜨는 둥 마는 둥 다시 일을 나간다. “싸우지 말아라. 흙 장난질 치다 옷 버리지 말고…” 또 구시렁대며 밭일을 간다. ‘미주알께’를 오물락거리며. 미주알은 항문을 이르는 말이니 정말 우스꽝스럽지 아니한가. 다소 수다스럽지만 생활력이 강한 푹 퍼진 아지매의 뒷모습이 저절로 그려진다. 몸배바지를 입고 뒤똥거리며 일 나가는 모습이 그려지면서 절로 웃음을 머금게 하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이 주는 것이 바로 해학의 미학이다. 복잡한 현대 생활을 살아가면서 생활의 윤활유 같은 역할을 문학이 해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문학에서 재미성, 더 나아가 해학성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현대시나 시조가 고(古)시가보다 못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점에서일 것이다. 고시가에서 해학적 요소는 중요한 미적 요소인 반면 현대시나 현대시조에서는 이러한 면에서 너무 진지한 쪽으로 변모해버렸다. 해학은 잘 알다시피 사회적 현상이나 현실을 우스꽝스럽게 드러내는 방법이다. 해학은 풍자와 함께 혼용되는 중요한 미학적 방법이다. 둘은 주어진 사실을 곧이곧대로 드러내지 않고 과장하거나 왜곡하거나 비꼬아서 표현하는 기법이다. 해학이 공격받는 대상에 대한 동정으로 인하여 읽는 이에게 그런 상황을 공감하게 하여 우호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 특징이 있는 반면, 이와 비슷하게 쓰이는 풍자는 대상에 대해 부정적 비판적 태도를 취하므로 아이러니(Irony)와 비슷하다. 그러나 풍자는 어떤 면에서 아이러니보다도 더 날카롭고 노골적인 공격 의도를 지닌다. 예를 들어 『흥부전』에서 ‘흥부’는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대상이라면, ‘놀부’는 노골적인 공격의 풍자 대상이 된다. 소설에서는 김유정이 「봄봄」, 「동백꽃」, 「만무방」 등의 작품을 통하여 고전문학 속에 나타나는 해학성을 계승하면서 당대 서민들의 현실을 형상화하여 웃음으로 비참한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주기는 했지만 시나 시조에서 이러한 전통계승은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해학적인 시나 시조들이 많이 창작되어 어려울수록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면 좋겠다. 모두가 힘들게 넘어가고 있는 2020년 여름 「당숙모」같은 친근한 웃음이 그리워진다.
미국이 난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상황에서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까지 겹치면서 심각한 사회혼란을 겪고 있다. 방송에서는 상점을 약탈하는 시위대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시위대의 자정 노력에 의해 약탈 행위가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이다. 문제는 이러한 약탈자가 대부분 흑인 중심의 유색인종이라는 것이고, 여기에는 역사적·사회적 맥락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보였던 미국이라는 국가의 반인권적이고 비윤리적인 인종차별주의가 2020년에 다시 나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종차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노예제 폐지를 두고 격돌했던 남북전쟁 이후에 인종차별이 더 공고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인 원인이 있었다. 1861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남부의 7개 주는 미연방에서 탈퇴하였지만, 테네시주의 앤드류 존슨은 링컨을 지지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남북전쟁 중이던 1864년 링컨이 재선에 도전하였고 민주당의 앤드류 존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발탁해 선거에서 승리하게 된다. 그러나 1865년 4월 링컨이 존 윌크스 부스에게 저격을 당해 사망하였고, 앤드류 존슨이 제17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남부 출신의 앤드류 존슨은 남부 주들이 해방 노예의 권리를 제한하는 주(州) 법안을 만들어도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는데, 이는 노예해방 전쟁이었던 남북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남부 지역이 오랫동안 흑인에 대한 차별이 상존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화 ‘그린북’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영화는 천재 피아니스트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분) 박사의 운전기사로 고용된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분)가 미국 남부 지역으로 콘서트투어를 떠나면서 겪게 되는 차별과 혐오를 그리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흑인이 미국 남부를 여행할 때 출입 가능한 레스토랑과 숙박업소를 알려주는 책이다. 현실에서도 ‘흑인’ 아버지에서 ‘흑인’ 아들로 대물림 되었던 책! ‘그린북’은 미국의 인종차별 정책이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증거물이었으며, 과거의 유물쯤으로 치부되었던 그 책의 음울함은 아직도 미국사회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미국의 다문화주의를 표현할 때 ‘용광로(Melting Pot)’ 모델이라고 한다. 거대한 사회인 용광로에 다양한 민족을 ‘미국’이라는 가치로 녹여낸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백인 주류 문화를 중심으로 소수 민족과 유색인종을 대상화하여 통합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 주류 사회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로 대변된다. 이 용어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수 디그비 발트첼(E. Digby Baltzell)이 그의 책(The Protestant Establishment: Aristocracy & Caste in America. 1964년)에서 언급하면서 대중화되었는데, 사회학적, 문화적, 민족지칭어라고 할 수 있다. WASP는 백인이면서 앵글로-색슨 민족이며 개신교도를 일컫는데, 미국의 다문화정책은 개신교 신자인 백인의 정체성을 근간으로 ‘위대한 미국’의 건설만이 목표였고 이민족이나 흑인의 다양성은 존중받지 못하였다. 남북전쟁 이후에도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을 위한 정책은 북부지역에서 조차 보잘 것 없었다. 피츠버그에서는 백인과 흑인학생이 함께 교육받지 못했고 로드 아일앤드에서는 백인과 흑인의 결혼이 금지되었었다. 이와 같은 차별과 배제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교육 받을 권리에서 멀어져 있다. 2019년 미국의 4학년, 8학년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전국학업성취평가(NAEP)를 보면 흑인 및 히스패닉 계열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역사적으로 지속되면서 흑인들은 그들의 정체성이 백인 주류사회와는 다른 ‘터그라이프(Thug life)’라고 생각한다. 터그라이프는 폭력을 일삼는, 쿨(cool)한, 얽매이지 않는 등의 의미로 해석 할 수 있지만 사실은 백인 주류 사회를 향한 저항이자 다른 사람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으며 스스로의 삶을 세상에 내던져버린 막장의 삶이기도 하다. 2020년 오늘의 미국사회는 기로에 서 있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청산하고 오욕의 역사를 바로잡을 것인가 아니면 백인 중심의 사회를 고집하면서 반복되는 사회혼란을 감내할 것인가. 과연 트럼프의 트위터는 어떤 메시지를 준비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