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검색결과
상세검색모든 이야기는 ‘그놈의’ 기차 때문에 시작된다. 모든 게 기차와 기차역 때문이다. 경상북도 최북단, 강원도 접경 지역인 봉화군의 한 작은 마을, 전곡리 원곡 마을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변변한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사람들이 마을=세상 밖으로 나가려면 옆 마을인 분천리까지 걸어서 가야 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터널 속 외길의 기차 철로를 통과해야 한다. 터널을 걸어갈 때 기차가 오면 모두 다 죽은 목숨이 된다. 그래서 아이는 어릴 때부터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다. 마을에 기차역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당연히 청와대는 역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대신, 편지를 쓰던 아이 준경(박정민)이 커간다. 고등학생이 된 준경은 마을 어른들과 함께 간이역을 세운다. 양원역이란 이름도 짓는다. 그러나 양원역은 결국 기차가 서지 않는 역이 되고 만다. 준경의 엄마는 준경을 낳다가 죽었다. 엄마 대신 누나 보경(이수경)이 그를 키웠다.(고 그 자신은 생각한다.) 성격이 까칠한 아버지(이성민)는 기관사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무심하다. 마을에 기차역이 없다는 사실에도 무감하다. 오로지 시간을 엄수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차를 운행하는 일뿐이다. ‘우리 같은 사람은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주의의 인물이기도 하다. 기차 운행 시간이 겹치기 때문에 그는 준경의 졸업식이든 다른 학교 행사에 한 번도 얼굴을 내놓지 못한다. 준경은 수학 천재이다. 그에게는 같은 반 여학생 라희(윤아)가 있다. 라희는 그에게 끊임없이 추근댄다. 물론 준경도 싫지 않다. 라희의 아버지는 지역 국회의원이다. 라희는 아버지를 졸라 준경과 함께 서울로 대학을 가려고 하지만 남자아이는 가족을 떠나지 않기로 한다. 영화 ‘기적’은 수학 천재인 한 시골 소년의 성장기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어디까지가 실화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보는 사람들 스스로 경계선을 넘나들게 만든다. 아이의 얘기는 다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양원역이 전국에서 가장 작은 역이고, 지금도 백두대간협곡열차가 하루에 딱 두 번만 선다는 정도만이 사실일 것이다. 그것 하나만을 모티프로 이장훈 감독은 한 사람과 가족, 세상의 이야기를 꾸민 셈이다. 좋은 영화는 작은 우물에서 큰 바다로 나아가게 한다. 작은 공간의 이야기로 전체 세상의 운행 법칙을 알게 해 준다. 좋은 영화는 이른바 그렇게 ‘점층법 적인’ 영화이다. 영화를 쓰고 만든 감독 이장훈이 남다른 이야기꾼임을 보여준다. 이장훈의 영화적 자산은 꽤나 ‘현대일본영화적’으로 보인다. 이번 영화 ‘기적’은 일본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1999년작 ‘철도원’의 주인공(다카쿠라 켄)에게서는 아버지의 캐릭터를 가져왔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만든 2011년작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는 ‘기차’와 ‘기적’이라는 제목을 가져온 듯한 느낌을 준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그 스타일과 분위기가 상당 부분, 잘 만들어진 일본영화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정적이고 정제돼 있으며 깔끔하게 세공돼 있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디테일이 좋다. 그의 전작은 동명의 일본영화를 리메이크한 ‘지금 만나러 갑니다’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 영화의 후반부는 영국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를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이 영화나 저 영화나, 여기나 저기나, 영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아버지는 똑같은 생각을 한다. 아비는 자식이 정말 천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는다. 어쩌면 모든 기적은 그렇게 아비의 마음, 부성의 지극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 있다. 1987년을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이 영화에는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 점이 특이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좋다. 영화는 그래서 판타지 드라마로 느껴진다. 인공적인 느낌을 준다. 세상에 저런 순수한 공간과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진다. 근데 아마도 그건 감독 이장훈이 바랐던 부분이었을 공산이 크다. 철저하게 정치와는 무관한 공간과 이야기를 보여 줌으로써 오히려 그 전복(顚覆)의 의미에 다가가려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탈(脫)정치의 정치화, 혹은 현실의 판타지를 통해 현실의 각박함을 좀 더 드러나게 하는 식이다. 1987년의 영화 속 마을 밖은 아수라장이었을 것이다.(6·10 항쟁과 6·29 선언이 있었던 해이니까. 무엇보다 다음 해에 서울올림픽이 열렸을 때였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저 마을은 저럴 수가 있지 싶어진다. 동시에, 워낙 저래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이의 성장 과정에 주어지는 사회적 기능은 저렇게 순수의 원형질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다. 영화 ‘기적’의 핵심은 바로 그렇게 순수의 시대로의 복원인 셈이다. 1987년에도 실패했고 2021년에도 실패하고 있는 순수의 시대로의 귀환. 우리는 지금 무엇을 잃고, 무엇을 잊고 살아가는가. 영화가 묻고 있는 대목이다. 영화는 중간에 엄청난 반전을 때리며 객석에서 보는 사람들을 긴박하게 만든다. 시선을 꽉 붙들어 맨다. 죽은 엄마로 인한 모성의 결핍은 주인공 준경으로 하여금 누나 보경없이는 살 수 없게 한다. 여자친구 라희는 그걸 알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뮤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준경의 어린 삶에는 세 여자의 존재/비존재가 실존적으로 작동하고 관통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부성(父性)의 눈물겨운 사연을 이어가게 한다. 얘기가 너무 먼 산을 휘휘 도는 것 같은가. 어쩔 수가 없다. 영화 속 그 큰 ‘반전’과 스포일러를 피해가기 위해서는 이 영화의 뭔 얘기가 뭔 얘기인지 설명할 길이 없다.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저 영화를 보기를 권할 수밖에 없다. 이성민, 박정민, 이수경 같은 연기파 배우들이 왜 한결같이 이 영화를 선택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연기 한번 기가 막히게 해낸다. 윤아의 연기는 어느 때처럼 발랄하고 귀엽다. 단 하나, 박정민과 윤아가 모두 고등학생으로 나오는 것은 과하다 싶은 생각도 든다. 근데 그것도 감독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인공(人工)의 모습일 수 있다. 아역과 성인 연기자로 더블 캐스팅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이런 부분 역시 영화를 봐야 느낄 수가 있다. 영화는 백날 얘기해 봐야 소용이 없다. 백번 떠드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최고다. ‘기적’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영화를 보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할리우드 제임스 완 감독의 공포 영화들은 의외로 재미가 있다. 여기서 ‘의외’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영화에는 늘 의외성이 크다는 것, 상상하지 않았던 사건과 반전이 벌어진다는 뜻이다. 제임스 완은 말레이시아 출신이다. 그는 요즘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감독이다. 이번 영화 ‘말리그넌트’는 그의 그런 의외성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공포 영화가 도무지 어디로 튈지 짐작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공포가 아니라 롤러코스터를 탄, 판타지 액션을 보는 느낌을 준다. 제임스 완의 이번 ‘말리그넌트’는 여러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레퍼런스를 구사하고 있다(고전영화의 일부 장면을 그대로 차용하거나 인용해서 참조하는 것)는 점에서도 흥미롭고 놀랍다. 첫 장면과 영화 중간중간 계속해서 나오는 주인공 매디슨(애나벨 월리스)의 집 전경은 알프레드 히치콕이 만든 전설의 영화 ‘싸이코’의 베이츠 모텔을 그대로 닮았다. 딱 봐도 음습하고 살인이 일어날 것 같다. 그 집 안의 공간 구조는 셜리 잭슨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그 유명하고도 유명한 작품 ‘힐 하우스의 유령’을 닮았다. 2층 회랑의 복도에서 유령의 검은 그림자가 밤사이에 늘 휙휙 지나다닐 것 같게 꾸며져 있다. ‘말리그넌트’는 그런 무대를 배경으로 원한의 혼령과 이상 성격을 지닌 범인의 연쇄 살인,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혈육의 수수께끼, 과도한 살인 행위 등등 온갖 미스터리/서스펜스/연쇄 살인/공포 영화의 흔적들을 이어간다. 제임스 완이 감독이 되기 전에 얼마나 많은 공포 영화를 보고 자랐는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더 나아가 제임스 완 같은 인물도 자기가 만든 영화 속 캐릭터들 마냥, 어느 정도는 정상이 아닐 것이라는 점을 느끼게도 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 영화 전문 감독이 되는 것도 얼마나 고전과 인문(人文)에 충실한 길을 걸어야 하는 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공포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정신의학은 물론 범죄심리학, 심지어 인체 해부학에도 나름 지식의 폭이 커야 함을, 그게 평소 켜켜이 쌓여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도 제임스 완은 스스로 남다른 점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해 낸다. 여주인공 매디슨은 폭력 남편 밋첼(제이크 아벨)에게 시달린다. 남자는 평소에는 다정다감하다가도 자기 성질을 견디지 못할 때면 여자에게 손찌검을 해 댄다. 정신병이다. 사회문제다. 어쨌든 매디슨은 이날도 남편이 밀치는 바람에 벽에 머리를 부딪혀 정신을 잃는다. 매디슨은 지금껏 세 번 유산했는데 그게 다 남편의 폭력이 빚어낸 것이라는 암시가 이어진다. 어쨌든 이날 밤 아내가 침대를 걸어 잠근 탓에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자던 남자는 누군가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다. 경찰이 곧 수사에 나서고 아무래도 아내가 의심을 받게 되려는 찰나…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잔혹하게 살해되기 시작한다. 신경정신과 의사, 정신병 상담의 등등이 거의 난도질을 당한다. 그 와중에 도시 여행 가이드 여자가 납치되기도 한다. 경찰은 이 동떨어진 사건들에서 폭력의 일관성을 발견하고(잔혹하다는 것 하나!)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해 단둘이서 수사에 들어간다. 그러던 중 맨 처음 살인 사건의 용의자인 매디슨이 알고 보니 8살에 입양됐다는 것, 원래 이름은 에이미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수사는 미궁에 빠지고 열의를 갖고 있던 남자 수사관 케코아 쇼(조지 영)마저 부상을 당하자 이제 사건의 열쇠를 캐는 인물은 매디슨과 죽고 못 사는 관계의 여동생 시드니(매디 해슨)에게로 넘어간다. 이야기는 널을 뛰고 인물과 인물 사이로 껑충껑충 뛰어다니지만 그게 그리 밉상은 아니다. 오히려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제임스 완의 공포영화는 그렇게 B급과 메인 스트림의 스타일/분위기를 자유자재로 오가는데 그 특징이 있다. 어쨌든 영화 후반부 여동생 시드니가 밝혀내는 언니 매디슨의 아프고도 끔찍한 과거는 보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영화의 결말을 이렇게 끌고 가는 제임스 완에 대해 그것 참 꽤나 발칙하고 재미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 준다. 처음에는 이거 무슨 얘기하려는 건가 싶다가도 극장을 나올 때는 비교적 높은 평점을 주게 된다. 영화를 귀엽고 재밌어하게 된다.(공포 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공포 영화의 주제는 ‘내 안의 살인마’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그건 유명 미스터리 작가 짐 톰슨이 아예 같은 제목의 소설(‘Killer inside me’)로 갈파한 적도 있다. 여기서 ‘내 안’이란 물리적으로 한 인간 개체 안에 들어가 있는 해로운(말리그넌트 : malignant) 악마성/이중성/분열성을 얘기하는 것일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내 안’의 의미는 사회 자체로 확대 해석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악마성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가. 인간의 악의(惡意)는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인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영화는 나름 심오한 주제를 슬쩍 치고 나간다. 그러나 제임스 완 스스로는 그것도 이것도 아니라고 하는 듯이 보인다. 제임스 완은 자신의 영화에 함부로 이런저런 의미를 붙이고 해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재미있게 보면 되는 거 아냐’라는 식이다. 제임스 완의 이번 영화 ‘말리그넌트’는 그 ‘재미의 의미’에 치중한 작품이다. 공포 영화가 재미있다고? 그게 말이 돼? 근데 그게 말이 되는 영화다. 이 영화의 결말은 거의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알려 드릴까? 싫으면 500원! 영화를 즐기시기들 바란다. 하 수상한 세상이로소이다.
세상이 시궁창일 때, 생각하는 영화를 보는 것도 일종의 사치일 수 있다. 게다가 특정 집단이 온갖 권력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억압하는 모습이 계속되면 저항의 심리 때문에 급 피곤해진다. 잘못된 권력의 우두머리를 잡아다가 흠씬 두들겨 주고 싶어진다. 그렇게 좀, 마음을 쉬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 그럴 때는 액션이다. 액션 영화가 주는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가 최고다. 영화 ‘SAS 특수부대 : 라이즈 오브 블랙 스완’이 극장보다 OTT 넷플릭스를 택했다는 것은 자신이 킬링타임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근데 이 영화, 다분히 ‘사도마조히즘적 도스토예프스키풍’으로 구성돼 있다. 이 영화에 대해 평론이랍시고 리뷰를 쓰는 이유이다. 영화는 당연히 악당과 그에 맞서는 공정한 정부 병력(그런데 지금 세상에 그런 게 있기나 할까?)간의 전투 얘기를 후자의 시선으로 그린다. 아니 그러는 척한다. 상업 영화는 늘 선(善)이 이기는 해피 엔딩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중간중간 트랩을 심어 놓는다. 그래서 살짝 헷갈리게 만든다. 이제는 용병도 기업이다. 영화 속에서는 블랙 스완이라는 용병 조직이 기업형으로 움직인다. 이들은 얼마 전 러시아 조지아에서 작전을 벌였다. 그 와중에서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했다. 당장 국제사회의 뭇매를 맞는다. 이들의 체포를 위해 영국의 대 테러작전 부대 SAS가 나선다. 1차 작전에서 SAS는 블랙 스완의 리더격인 그레이스 루이스(루비 로즈)를 놓친다. 그녀는 곧 자신의 나머지 대원들과 함께 영국-프랑스간 해저 터널의 고속열차를 탈취하고 인질극을 벌인다. 그런데 때마침 이 열차 안에는 밀월여행을 떠나겠다며 SAS의 민완 요원 톰 버킹엄(샘 휴건)이 여자친구와 함께 탑승한 상태이다. 당연히 톰의 영웅적인 ‘나 홀로 전투’가 시작된다. 몇 가지 점에서 이 영화는 배경 설정에 ‘각을 줬다.’ 러시아 조지아 민간인 학살이 왜 벌어졌는가가 첫 번째이다. 이 시골 마을에 천연가스관이 통과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천연가스는 이래저래 말썽을 많이 일으킨다. 천연가스는 프래킹(fracking) 기법으로 채굴된다. 그런데 이 획기적인 방식은 안타깝게도 대지를 극도로 오염시키고 지진 위험을 배가시킨다. 그래서 천연가스 개발은 늘 지역사회에 극심한 논쟁을 일으킨다. 그리고 또 하나, 천연가스 수송관 건설이 문제다. 천연가스를 유통시키는 방식은 놀랍게도 대륙열차를 건설하는 것과 비슷하다. 발굴지에서 사용지까지 대형 가스관을 이어간다. 이 가스관 건설을 위해 다국적 천연가스 회사는 통과 지역을 통째로 사들이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보상 문제나 지역 보존 문제와 갈등을 일으킨다. 이 영화 ‘SAS 특수부대’는 바로 이 문제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조지아의 한 시골마을에 보상철거를 둘러싸고 대규모 시위와 저항이 이어진다. 다국적 기업은 여기에 용병을 투입한다. 몰아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학살로 이어졌고 다행히도 그 죽음의 과정은 휴대폰 카메라에 담겨 세상에 공개된다. 중요한 것은 용병의 우두머리 그레이스가 대륙 간 해저 횡단 터널의 중간지대를 점거하고 열차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이유이다. 그레이스는 자신들을 고용한 사실상의 주체가 SAS사령관 조지 클레멘트 장군(앤디 서키스)이었고, 그 장군 뒤에는 놀랍게도 영국 총리가 있는데 이 총리의 정치적 후견인이 다국적 천연가스 회사의 회장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러시아 그루지아 학살은 블랙 스완이 아니라 SAS가 저지른 셈이다. 그리고는 오히려 입을 씻을 요량으로 그 일을 시킨 자들을 소탕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소탕의 주역이자 영웅 행세를 하는 남자는 버킹엄 가문의 후예이다. 왕족이다. 이것 역시 나름 상징하는 바가 작지 않다. 영화는 세상의 선과 악이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다. 또 다른 영화 ‘모가디슈’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인 한신성 주 모가디슈 한국 대사(김윤석)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살다 보니까 진실이 꼭 한 개가 아니더라고요.” ‘SAS 특수부대’는 진실이 여러 개임을 보여주려 나름 안간힘을 쓰는 영화다. 천연가스 개발 문제, 다국적 기업과 그들이 움직이는 친기업형 정부의 문제, 금권으로 구축된 정부조직의 오염도 문제, 어디서든 뻔뻔하게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피해 가는 지도자들의 문제, 국가 병력(검찰과 경찰을 포함해)의 폭력성 문제를 늘어놓는다. 나름 생각할 거리가 있는 액션 영화다. 단, 보여지는 얘기들을 좀 뒤집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영화 속 용병 블랙 스완과 우두머리 여자 그레이스는 나름 성전(聖戰)을 벌이고 있는 셈일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원제는 ‘SAS: Red Notice’이다. 세상은 이미 빨간불이 켜진 지 오래다. 당신은 어느 쪽 편인가. 편 갈라 먹기도 참으로 애매한 세상이다. 그놈이 그놈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액션 영화에서조차 그려지는 세상의 타락이 실로 극악한 수준이다. 그래서 편을 정할 때가 되긴 했다. 잘 고르시기들 바란다.
소설 한번 쓰겠다. 이중첩자 얘기다. 무심코 영화 <토탈 리콜>을 다시 보다가 든 생각이다. 다시 본 건, 1990년 폴 버호벤이 만든 희대의 걸작 원판이 아니라 렌 와이즈먼이 2012년에 만든 리메이크 판본이다. 이게 더 영화 속 이중간첩의 행보를 알기 쉽게 풀어냈다. 주인공 더그(콜린 파렐)는 자신이 저항군의 행동대장인 칼 하우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것도 사실은 가짜다. 독재자인 코하겐(브라이언 크랜스턴)이 저항군의 지도자 마티아스(빌 나이히)에게 접근시키기 위해 그를 저항군 편에 서게 한 것처럼 기억을 조작해 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칼 하우저는 애초부터 저항군을 파괴하려는 제5열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저항군에서 암약하면서 여자 멜리나(제시카 비엘)를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자신의 기억이 조작됐다는 것을 모르는 하우저는 진짜로 저항군의 핵심이 됐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마저 다 헝클어진다. 왜냐하면 그는 코하겐에 의해 끌려 와 다시 한번 기억이 조작되기 때문이다. 그는 더그라는 이름의 노동자로 아내 로리(케이트 베킨세일)와 살아가는 평범남이다. 로리는 그를 감시하는 요원이다. 어쨌든 현재의 그는 ‘노바디’다. 그러던 그가 우연히 토탈리콜 사라는 곳에 가서 기억의 저편을 꺼내려다 일대 혼란에 빠진다. 이 영화의 핵심은 내가 나를 누구인지 모르면서 싸우는 상대의 정체를 알려 한다는 것이다. 이중의 정체성은 삼중 사중, 다중으로 확대되고 영화의 이야기는 두어 번 더 중첩된다. 앞에 소설을 쓰겠다고 얘기한 것은, 김웅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윤석열이 보낸 이중첩자였을까. 상대 경선 지역을 사실상 폭파시키려는 목적의 요원이 아니었을까. 마치 칼 하우저가 그랬던 것처럼 완벽하게 상대 진영으로 넘어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게끔 스스로 ‘가스라이팅’이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유승민 캠프에서 누군가를 만났고(아니면 유승민에게 실제로 감화가 돼서) 진짜 유승민 진영의 전사가 된 것이 아닐까. 하우저가 독재자 코하겐과 맞서듯 그렇게 윤석열 진영에 덫을 놓으려는 것은 아닐까. 고발장을 전달에 전달을 하는 복잡한 과정에서 원래는 ‘저쪽’ 편이었으나 지금은 ‘이쪽’ 편에 서서 아직도 ‘저쪽’ 편인 듯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상 모든 고백의 일단은 김웅의 입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얘기하지만 이건 모두 소설의 일단이다. 얘기하다 보니 언젠가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선 후보마다 넷플릭스 드라마 <D.P.>를 얘기한다. 평소에 영화 좀 보면서 그러면 덜 민망하겠으나 그나마 이번 드라마 시청이 흔히 얘기하는 이대남(20대 남자)에 아부하려는 것 때문이라면 정말, 번지수를 잘못짚었다. 정작 <D.P.>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대목은 4부에 나오는 ‘몬티홀의 역설’을 소재로 한 에피소드다. 보기 1, 2, 3 중 답이 있고 그 중 3을 선택했는데 1이 답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져서 그 1을 버려야 할 때 당초 택한 3을 2로 바꿔야 하는 것이 맞느냐 틀리느냐 하는 것이다. 답은 수학적으로 확률이 2/3로 늘어나기 때문에 바꿔야 한다가 맞다고 한다(내 머리속은 그걸 확실히 이해하고 있지 않다. 어쨌든 답이 그렇다고 한다). 일명 청부 고발로 불리는 검찰의 쿠데타 사태에 대해 보기는 세 가지이다. 1) 윤석열 전 총장이 깨끗이 자복(自服)한다. 2) 진실 규명을 놓고 정치적 공방이 끝없이 이어진다. 3) 윤석열과 검찰이 끝까지 부인한다. 며칠의 상황을 지켜보면 1번이 답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만약 답을 3번으로 찍어 놓은 상태라면 ‘몬티홀의 역설’대로 2번으로 바꿔야 정답이 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진실을 놓고 물타기에 물타기가 거듭될 것이다. 그 같은 국면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맞다는 얘기이다. 끝없는 부인과 거짓 증언에 화를 내거나 매달리지 말고. 대선까지는 6개월이 남았다. 그건 정말 긴 시간이다. 축구에서처럼 만들어진 공간을 잘 파고들어 가야 한다. 드라마 <D.P.>에서 추출해내야 할 요체는 모병제냐 징병제냐 따위가 아니다. 절묘한 선택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뤄내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D.P.>는 매 에피소드마다 그걸 가르쳐 준다. 근데 김웅은 정말 칼 하우저일까. 진정 그것이 알고 싶다.
9월 2일 현재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평소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몇 가지 지점에서 기이한 영화다. 첫째, 이건 할리우드 영화인가 중국 영화인가. 둘째, 이건 마블 영화인가 중국 무협 영화인가. 셋째 이건 미국과 전 세계 글로벌용 영화인가 아니면 중국어권 아시아에서 인기를 모을 작품인가. 모든 질문에는 앞에 답의 방점이 찍혀 있다. ‘샹치’는 중국 무협 영화를 할리우드식 액션으로 가공해 나온 색다른 작품이다. A+B를 해서 비교적 다른 C가 나왔다. 거칠게 비교하자면 이안의 ‘와호장룡’을 ‘캡틴 아메리칸’ 판 SF 액션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생각보다는 재미있다. 그런데 또 막상 영화를 보고 있으면 진짜 기이한 생각이 든다. 아니 어떻게 주연 샹치(시무 리우)보다 조연인 쑤 웬우(양조위)가 더 멋있을까. 영화는 아들보다 아버지를 더 돋보이게 찍었다. 이건 영화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연출일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런 생각도 든다. 이 영화가 과연 중국에서 상영될 수 있을까, 없을까. 아니나 다를까. ‘샹치’에 대해 중국 정부는 최근 상영금지 조치를 내렸다. 보다 정확하게는 중국 내로 들여오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유는 영화가 중국인을 모욕했다는, 다소 불분명하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인 것이다. 한 마디로 감히 미국이 중국의 이야기를 액션 블록버스터로 만드느냐는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영화 제작과 전 세계 배급, 그 이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종의 미-중, 중-미 무역전쟁이자 외교 갈등의 한 축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정치다. 정치도 영화다. 생각해 보면 미국은 이번에 가장 중국적 오락의 정수라는 무협의 이야기를 할리우드에서 가장 오락적 장치의 정수라는 마블 액션으로 만들어서는, 전 세계 시장을 요동치게 만들고 있다. 그걸 중국이 좋아할 리가 만무하다. 중국은 자기 콘텐츠 분야에서 미국에게 시장 주도권을 뺏긴 셈이 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는 ‘샹치’를 통해 앞으로 이런 부류의 영화에 있어 시장 선점효과를 단단히 거둔 셈이 됐다. 완벽한 경제 전쟁의 일환이 아닐 수 없다. ‘샹치’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실로 유치찬란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껏 나온 많은 무협소설들이 다 원래 그랬다. 무림강호에는 사(邪)파와 정(正)파가 있고, 이들은 9대문파로 나뉘는데 소림/무당/곤륜/아미파 등이다. ‘샹치’에 이 9대 문파가 나온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에 준하는 무술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어쨌든 천년을 살아 온 악의 우두머리(라기보다는 어둠의 세력을 대변하며 세상의 권력만을 추구한 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쑤 웬우이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한쪽에 각각 다섯 개씩, 양팔에 10개의 링을 차게 되고 그걸 이용할 수 있는 무술을 갖췄는데 이 링이 그로 하여금 초인적인 힘과 불사의 능력을 갖게 했다. 그는 하다 하다 이 세상 최고의 고수들이 산다는 신비의 숲까지 쳐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여인 쑤 샤링(장멍얼)을 만나게 된다. 둘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아이 둘을 낳는다. 그 아이 중 큰아이가 바로 샹치다. 아버지 쑤 웬우는 이제 링 열 개의 초능력을 쓰지 않는다. 악의 대표직도 사임한다. 여자와의 평범한 생활에 빠져든다. 그런데 그런 부부를 세상(무림)이 가만 놔두지 않는다. 아내는 괴한들에게 살해되고 아버지 쑤는 다시 양팔을 텐 링즈로 채운다. 곧 아들에게 엄마를 죽인 자의 복수를 시키지만 아들 샹치는 그런 참혹한 복수극이 이어지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아버지 곁을 떠난다. 나름 엄청난 고수인 샹치는 이름을 션이라 바꾸고 캘리포니아에서 호텔 주차요원으로 신분을 숨기며 살아간다. 그의 동료로는 버클리 대학을 나와 자유롭게 살아가겠다며 주차 일을 하는 중국 이민 3세인 케이티(아콰피나)가 있다. 이들은 곧 샹치의 누이동생 리(진법랍)와 함께 아버지에 맞서 악의 근원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려 애쓴다. 그런 젊은 아이들을 죽은 엄마의 언니인 이모 난(양자경)이 돕는다. 이상하게도 이런 유아적인 이야기는 무협소설로 읽거나 영화로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된다. 선악이 분명한 데다 읽거나 보는 자신을 정파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거나 역할을 대입하게 되면서 대리만족을 강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심리학적으로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샹치’는 선과 악을 넘나드는 캐릭터, 곧 ‘쑤 웬우=양조위’ 캐릭터로 단순 액션 블록버스터의 수준을 뛰어넘고 있다. 양조위는 ‘아주’ 적당히 늙고, ‘아주’ 적당히 말랐는데 그래서 이 영화에서 ‘아주’ 최고의 매력을 선보인다. 영어 발음이 너무 좋다. 목소리가 양조위답지 않게 저음에 허스키하다. 배우는 목소리까지 바꾼다. 양조위가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가를 마블에서 보여주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이래저래 이제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영어가 필수라는 점을 보여주는 셈이어서(양조위조차 영어를 하니까) 한편으로는 씁쓸하게도 만든다. ‘와호장룡’을 시진핑 판으로 만들어야지 ‘캡틴 아메리칸’ 판으로 만들었으니 중국이 삐질 만도 하겠다. 우리야 뭐 딱히 누구 편을 들 필요는 없다. 영화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배가 산으로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독인 데스틴 다니엘 크레톤이 그러려고 이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는 하와이계 미국인이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어릴적 무협지 좀 꽤나 읽었다고 하는 성인들의 킬링타임용 영화이다. 한편으로는 영화 밖 세상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주는 작품이다.
사람이나 사회나 품격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없는 것이 바로 그 품격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존엄성을 헌신짝처럼 취급한다. 기이한 것은 배운 사람들일수록 그런 행태가 더 하다는 것이다. 서울대를 나왔든 미국 어디서 유학 생활을 했든 그래서 국내에 돌아와 KDI(한국개발연구원)같은 유수의 기관에서 몸을 담았든 오히려 품격 제로의 현상을 보인다. 그저 자기네들이 옳으니 너희들은 따라오기만 해라, 라는 식이다. 안하무인도 이런 안하무인이 없으며 악다구니도 이런 악다구니가 없다. 한국사회를 가로지르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자(勞資) 모순이 아니다. 半봉건적 양반-상놈의 대물림의 신분, 계급의식도 아니다. 오로지 당신이 엘리트냐 그렇지 않으냐(서울대를 나왔느냐, 미국 유학을 다녀왔느냐, 판검사나 의사, 교수, 조중동같은 언론사에 다니느냐) 하는 엘리트주의이다. 그야말로 품격 없는, 천박한 선민의식이다. 이 ‘나 잘난 주의’가 한국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모든 장점, 모든 미덕을 가로지른다. 열심히 일한 사람들의 공로를 가로챈다. 넷플릭스의 6부작 드라마 ‘더 체어’는 미국 동부에 있는 명문 대학 펨브로크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 전체 8개 아이비리그 중 가장 작은 학교이고 전통적으로 공학부가 강세라는 설정이다. 드라마는 영문학부 교수들의 얘기인데 공대가 중심인 학교에서 당연히 늘 총장의 눈밖에 있는, 인원 감축대상의 학과이다. 사실상 매년 학생 수가 30% 이상씩 줄어들고 있는 상태여서(누가 요즘 문학을 공부하려 하겠는가.) 새로 학과장으로 부임한 한국계 미국인 지윤 킴(산드라 오)은 첫날부터 총장(데이빗 모스)에게서 연봉만 많고 수강생은 거의 없는 ‘늙다리’ 교수 세명을 ‘명퇴’ 시키라는 압력을 받는다. 지윤 앞에는 세 가지의 중층 모순-해결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는데 첫째 늙은 교수들을 내몰지 않고 그들의 품위를 유지시켜 주는 것, 동시에 학생 수를 늘리고 학과의 운영과 경영을 정상화시켜야 하는 것, 거기에 영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한국인 아버지(나중에 유창한 영어를 구사해 깜짝 놀라게 한다.)와 조숙해서 일찍 사춘기를 맞고 있는 입양 딸을 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를 잃고 딸아이마저 멀리 보낸 후 실의에 빠져 사는 ‘또라이’ 남자 동료교수 빌과의 우정과 로맨스도 어찌어찌 지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윤은 이 모든 난관의 약한 고리를 찾으려 애쓴다. 그 과정이 때론 눈물겹고 때론 좌충우돌 웃음을 만들어 낸다. 첫 장면부터 다소 웃기고 상징적인데 학과장실에 호기롭게 들어와 학과장 자리에 앉자마자 낡고 오래된 의자가 부서져 지윤은 옆으로 나자빠지고 만다. 학과장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울뿐인 자리라는 걸 보여 준다. 이 드라마가 사람들 사이에서 요즘 강하게 회자(膾炙)되고 있는 건 내용이 갖고 있는 휴머니즘, 脫엘리트주의, 품격 우선주의 등등 여러 가지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한국 시청자들을 더 놀라게 하는 건 미국 드라마의 주인공이 그것도 명문 대학교의 학과장 역이(세탁소 주인 역이거나 편의점 주인, 안마시술소 여급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정확한 한국 이름을 가진. 그녀의 아버지가 구사하는 한국어도 완벽한 한국어이다. 한국 사람이 미국 사회에서 이제 완전히 주류사회로 편입됐음을 알려 준다. 심지어 이 드라마에서는 한국식 돌잔치와 돌잡이 장면까지 나온다. 한국이 그 정도가 됐다. 2,3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국가의 품격이 올라간 것이다. 탈레반으로부터 400명 가까운 아프간 ‘친구’들을 극적으로 구조해 낸 ‘미라클 작전’도 국가의 품격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온 것인가를 보여 주는 사례다. 이건 단순히 군사적 작전만이 아니다. 이번 작전에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뒤따랐다. 이건 내가 해야 할 일뿐이야 라는 묵묵한 자기 겸양의 노력이 이어진 결과다. 모든 사람은 같다는 수평적 관점의 인류애가 이번 작전의 핵심이다. 한국 사회와 한국 기층 민중들의 수준이 그 정도가 됐다. 현재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가적 품격은 대중과 낱알의 민중들이 한켠 한켠 쌓아온 것이다. 어떻게 정치인만 되면 저 모양들이 되는지 미스터리다. 영화 소재 감이다. 자신도 투기용으로 집 네 채를 갖고 있으면 누가 시세차익을 노리고 집을 사고팔았다 해서 나서서까지 비난하지는 못한다. 염치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SH공사 사장 자리를 달라고는 못한다. 사람의 얼굴은 두껍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가 땅을 3000평 정도 사놓은 게 있고 그 와중에 나는 집을 옮겨 다니느라 잠시 전세와 월세를 살고 있지만 사실은 어딘 가에 집을 소유하고 있으면 나는 임차인이다 라는 말은 하지 못한다. 해석에 따라 현재 임차인으로 살고 있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해도 사실은 그러면 안된다. 사람은 양심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그게 좀 이상하고, 거짓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염치는 영어에 쉐임(shame)이 들어 간다. ‘쉐임 온 유(Shame on You)!’ 하면 창피한 줄 좀 알라는 뜻이다. 윤희숙, 김현아, 차정인 씨 등에게 하고 싶은 얘기다. 각각 누군지는 찾아보시기들 바란다.
지난 25일 개봉된 새영화 ‘레미니센스’는 호오가 엇갈린다. 평단에서는 그다지 점수가 높지 않다. 동의하지 않는다. ‘레미니센스’는 이야기 구조와 설정, 무엇보다 그것을 끌어 가는 연출의 솜씨가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이른바 웰 메이드(well-made) 영화이다. 게다가 러브 스토리다. 이런 영화를 마다할 필요는 없다. 제목 ‘레미니센스’의 정확한 발음은 레머니슨스(reminiscence)이다. 기억보다는 추억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긴 에피소드의 추억이 아니라 메모리급의 단편적인 회상을 말할 때 레머니슨스라고 한다. 원래는 심리학 용어이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 닉(휴 잭맨)은 기억을 재생시켜 주는 사람이다. 일종의 전문 최면술사이자 정신과 의사인 셈이다. 다만 요즘보다 훨씬 업그레이드 된 초 첨단 장비를 이용하는 것이 다르다. 그런 장치가 개발돼 있다. 그러나 장치는 장치일뿐, 사람을 기억으로 인도하는 방식은 지금의 정신과 의사와 비슷하다. 근데 이런 직업의 사람이 주변에 있을까? 있다. 지금은 없지만 가까운 미래세계에는 있다. 이 영화 ‘레미니센스’는 근미래의 생활상을 담은 SF멜로영화이다. 세계는, 할리우드 입장에서 보면 그 세계가 미국이지만, 어쨌든 영화 속 세계는 물에 잠겼다. 해수면이 높아진 건데 그 얼마 전에 큰 전쟁이 두 번 있었다는 설정이다. 해수면이 그렇게 된 데에는 전쟁이 원인이 됐다는 식이다. 구체적인 배경이 되는 마이애미 그리고 뉴올리언스는 일종의 수상도시가 됐다. 지금의 베니스를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엄연한 재해 상황이다. 수면이 더 이상 높아지는 걸 막고 있는 건 거대한 댐이다. 이 댐 안에는 작은 규모의 땅이 있고 부자들은 여기에 모여 산다. 미래세계의 초 재난 상황 역시 지금처럼 영락없이 계급적이다. 이 영화의 모든 사건도 부의 잘못된 대물림이 원인이 된다. 그러니 영화의 기본 배경은 어느 정도 정치사회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댐 역시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니 도시는 사실상 세기말 분위기이다. 사람들은 낮에 일을 안한다. 밤에만 일을 하는 일상으로 변모한지 오래다. 세상이 밤이 됐다는 것은 사람들이 별다른 희망이나 비전을 갖고 살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람들의 거의 유일한 낙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기억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다. 레머니슨스를 하는 것, 자신의 좋은 추억을 다시 꺼내 즐기며 지내는 것, 그것이 마치 마약처럼 그리고 유행처럼 번져 있는 시대의 얘기가 영화 ‘레미니센스’의 기둥 줄거리이다. 주인공 닉은 바로 그 기술을 팔아서 먹고 사는 전문 테크니션이다. 과거에는 군인이었다. 자세히 보면 발을 살짝 전다. 그에게는 오랜 사업 파트너가 있다. 에밀리(탠디 뉴튼)이다. 군 복무 시절 만난 특등사수 출신의 여성이다. 어느 날 이 둘 앞에 한 여성이 나타난다. 싸구려 바의 무대 가수 메이(레베카 퍼거슨)다. 닉은 메이가 부르는 노래의 자태때문…보다는 그녀가 부르는 노래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노래이다. 당연히 닉은 메이에게 단박에 빠지게 된다. 처음엔 여자도 남자에게 전적으로 매달리고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사라진다. 마치 목적을 달성하고 도망간 것처럼 느껴진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무엇인가를 빼돌리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닉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닉은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메이를 찾아 나선다. 그러던 와중에 경찰 수사를 도와 어느 범죄자의 기억을 꺼내는 과정에서 닉은 남자의 두뇌에서 재생되는 메이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게 된다. 오랜 동료 에밀리의 계속되는 지적대로 메이가 의도를 갖고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영화 ‘레미니센스’의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지기 시작한다. 거대한 탐욕의 음모가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의 힌트는 두 사람의 바로 이런 대화에서 주어진다. 눈치 빠른 관객은 그 대목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닉은 메이에게 말한다. “당신은 아주 좋은 목소리를 가졌군요.” 메이가 대답한다. “그런 얘기 해 주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근데 가수가 그런 소리를 처음 듣는다고? 영화는 멜로이고 러브 스토리이지만 미스터리 스릴러의 기법을 쓰고 있고, 기본적으로는 누아르(noir)의 분위기이다. 다크하고 디스토피아적이며 비관적이고 비극적이다. 그래서 매우 매력적이다. 여러 영화들의 레퍼런스가 담겨져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기억을 재생하는 방법, 장치 같은 것은 1995년 캐서린 비글로우가 만든 저주받은 걸작 ‘스트레인지 데이즈’를 닮았다. 현실과 가상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상상력은 웬지 크리스토퍼 놀란 표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아니나 다를까 제작자 중 한 명이 조나단 놀란, 곧 크리스토퍼 놀란의 동생이고 감독인 리사 조이의 남편이다. 영화의 배경이나 누아르적인 분위기는 칼 프랭클린의 영화들을 닮았다. 프랭클린이 2003년에 만든 ‘아웃 오브 타임’이나 1995년에 만든 ‘블루 데블’을 비교해 보면 좋다. 모두 팜므 파탈이 나오는 하드 보일드급 영화들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1974년에 만든 ‘차이나 타운’이 자꾸 떠올려진다. 자본의 탐욕이 개인의 삶과 일상을 어떻게 파괴하는 가, 그렇다면 개인은 그것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 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 ‘레미니센스’, 레머니슨스는 이런 엉망인 세상과 시대에 지고지순한 사랑이 과연 있느냐고 묻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배신하지 않는 사랑이 있느냐는 질문을 함께 던진다. 갑자기 류승완의 영화 ‘베를린’이 떠오른다. 거기서 류승범이 말한다. “인간은 배신을 해!” 맞다. 사람은 배신을 한다. 사랑도 배신을 한다.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도 말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변한다. 사랑은 원래 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랑이 배신‘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와 시대에서는 사랑을 도저히 시작할 수 없게 된다. 사랑이 만들어 내는 궁극의 선한 세상을 꿈꿀 수가 없게 된다. 사랑이 불임인 세상은 죽음의 공간이다. 사랑, 약속, 신의, 헌신, 희생 등등 그 순수의 영원함이 지켜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세상이 좋아진다. 사람과 사랑은 배신을 하기 마련이지만 다시 돌아올 때가 많다는 것 역시 믿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해야 할 것,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나중에 닉의 선택이 그래서 중요하다. 메이의 선택은 더할 나위가 없다. 그 결말이 눈물겹다. 그리고 아름답다. 그렇다면 결론은 영화에서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배신한다는 얘기일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분명한 건 비교적 지고지순한 러브 스토리라는 것, 순애보의 영화라는 것이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극장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영화 ‘프리 가이’ 속 주인공 프리 가이는 프리 시티 안에 사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프리 시티’라는 온라인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얘기다. 온라인 게임을 만들거나 그런 회사를 둘러싼 막대한 이권 다툼의 얘기이거나 하는 것만이 아니다. 실제로 온라인 게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온라인 밖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제 영화의 상상력은 머릿 속과 머리 밖을 연결시킨다. 꽤나 복잡해진다. 그러나,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얘기 하나는 기가 막힌다. 그렇다고 요즘 젊은 ‘애’들 생각과 취향은 정말 남다르군…하지는 말라. ‘아차’하게 된다. 이걸 만든 감독 숀 레비는 1968년생 50대 중반 아저씨다. 영화를 만들고 보는 것, 그리고 세상을 살고 이해하는 것이 결코 나이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나이 먹은 장년층들, 이런 영화 본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나는 컴퓨터 게임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징징댈 필요도 없다. RPG(Role Playing Game) 게임이 뭔지, 그게 어떤 건지 들어 보지도, 해 보지도 않았다고 ‘성질’을 낼 필요도 없다. ‘프리 가이’는 영화를 본 지 한 10분쯤 지나면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그만큼 스토리가 좋다. 아무리 온라인 게임을 영화로 만든다 한들, 아니면 설령 온라인 게임 그 자체이든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스토리’임을 생각하게 한다. 스토리의 힘!! 그래도 ‘프리 가이’를 단박에,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딱 하나의 용어는 알아야 된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NPC라는 말이다. 논 플레이어 캐릭터(Non Player Character)이다. 포털 백과사전에 따르면, 롤 플레이를 기반으로 한 게임에 등장하는 ‘플레이어 외의 캐릭터’를 말한다. 이 NPC는 AI, 곧 인공지능이 조종한다. 온라인 게임 속에서 서비스 공급업체가 직접 조종하는 캐릭터란 얘기다. 게임 속의 몬스터나 상인, 스토리 진행 캐릭터들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배경 캐릭터들을 말한다. 주요 등장인물들을 위한 ‘병풍’ 캐릭터이다. 게임 속 악당들의 희생양 혹은 주인공들이 구해주는 캐릭터들이다. 꼭 있어야 하지만 어떤 캐릭터가 돼도 상관없는 등장인물들이다. 이는 곧 현실에서는 기억될 만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얘기다. 현대사회에서 조직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노바디다. 영화 ‘프리 가이’에서 주인공 프리 가이(라이언 레이놀즈)는 NPC이다. 게임 속에서 그는 은행원이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금붕어에게 인사하고, 출근하고, 일하고, 은행강도에게 당하고, 목숨을 부지하고, 다시 그다음 날을 맞는 등등이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이 게임 속에는 오로지 선글라스를 낀 캐릭터들만이 주요 역할을 한다. 빌런, 곧 악당이거나 아니면 이들을 물리치는 슈퍼 히어로들이다.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등급이 있는데 예를 들어 주인공 슈퍼 히어로인 밀리(조디 코머)같은 경우 악당을 많이 없애고, 그들의 무기를 많이 빼앗고, 이런저런 페이버(favor)를 많이 받아서 등급이 거의 200까지 올라가 있다. 그런데 그렇고 그런 히어로는 기껏해야 두 자릿 수이거나 한 자릿 수에 불과하다. 온라인 게임 밖에서는 플레이어들이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프리 가이 캐릭터는 플레이어가 없다. 회사가 지정한 AI가 정해진 값에 의해 조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게임 안에서 프리 가이가 갑자기 히어로 캐릭터의 전유물인 선글라스를 쓰게 된다. 그리고 갑자기, 그리고 점점 더 히어로 캐릭터로 변신해 간다. 등급이 1, 2 수준이었던 캐릭터가 나중엔 2백 몇십까지 올라가서는 엄청난 능력의 캐릭터가 된다. 그래서 게임 밖 현실에서는 난리가 난다. 배경에 불과했던 이 캐릭터를 과연 누가 조종하는 것이냐고 말이다. 도대체 누구인가? 이 게임을 차지하려는 해커의 소행인가. 해커가 개발해 놓은 어떤 장치가 AI로 하여금 스스로 진화하게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인공지능이 사람처럼 돼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게임 밖의 전쟁은 게임 안의 전쟁으로 극화되고, 그렇게 발전된 게임 스토리와 게임 안의 전쟁은 현실세계로 다시 확대된다. 게임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게임이 된다.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게임 속 수많은 NPC들, 배경 캐릭터들이 자기 역할들을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AI가 진화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갖는 정치적 의미의 핵심 포인트이다. 현실 속에서도 사실은 수많은 익명의 대중들 한 명 한 명이 주체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이 대중이 집단으로 지성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집단지성) 잠재성을 늘 지니고 있음을 은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프리 가이’의 안에는 나름 심오한 ‘민중주의’가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 역시 50대 중반의 감독이 만든 영화같다는 생각을, 영화 후반에 갖게 되는 이유다. 하여, 이 영화는 온라인 게임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거나 앞으로도 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꽤 유의미한 작품이다. 온라인 게임이 갖고 있는 현재성, 그 사회적 연결성을 깨닫게 해 준다. 현실 속 신구 세대의 연결점이 무엇인지를 은근히 갈파시킨다. 무엇보다 현실 세계가 얼마나 가상의 무엇과 연결돼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 상상력의 한계가 계속 확장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영화에 비교적 높은 평점을 주게 되는 이유다. 영화 ‘프리 가이’를 두고 ‘트루먼 쇼’가 연상된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전혀 아니다. 그보다는 와쇼스키 자매 감독의 ‘매트릭스’에 가깝다. ‘매트릭스’도 컴퓨터 안과 밖을 오가며 세상의 질서를 회복해 나간다. ‘매트릭스’가 묵시록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이라면 ‘프리 가이’는 낙관적이고 유토피아적이다. 그 희망이 다소 순진해 보여서 탈이지만. 라이언 레이놀즈의, 라이언 레이놀즈에 의한, 라이언 레이놀즈를 위한 영화다. BBC 드라마 ‘킬링 이브’의 킬러 이브 역으로 큰 인기를 모은 조디 코머도 돋보인다. 두 사람을 보는 재미도 삼삼하다. 주말에 ‘픽’할만한 작품으로 권해 드린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평론가에게도 쉬운 영화가 있고 어려운 영화가 있다. 장르영화는 쉽다. 장르 안의 규칙을 잘 보면 되니까. 대체로 할리우드 영화가 그렇다. 반면에 오랜 역사의 얘기나 전설, 설화, 민담을 소재로 한 유럽 영화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거기에다 현대와 연결되는 상징, 기호들이 이것저것 붙여져 있기까지 하면, 쉽사리 그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숲과 나무의 경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최근 국내 개봉돼 예상밖에, 비교적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그린 나이트’가 그런 작품에 해당한다. 기대 이상의 인기는 이 영화가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의 1925년 원작 ’가웨인 경과 녹색의 기사’를 원작으로 하고 있어서일까. (톨킨은 이를 14세기에 쓰여진 시에서 영감을 받아 썼다.) 그렇다면 많은 젊은 층 관객들이 이미 이 원작을 섭렵했고, 그것이 영화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무척 궁금해한다는 얘기일까. N차 관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영화가 갖는 깊은 상상력때문인가, 아니면 몇 번을 봐야지만 완벽하게 이해가 갈 만큼 이야기가 복잡해서인가. 실제로 영화는 온갖 상상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학적 기호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영화 후반에 나오는 거인 여성들(마치 진격의 거인의 여성들 같은)은 누구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궁금한 것이 많아져 오히려 유쾌해진다. 어렵지만 또 보고싶어 하는, 바로 그 역설이야말로 이 영화에 대한 흥미와 관심, 지지를 높이고 있을 것이다. ‘그린 나이트’는 아서 얘기다. 아서왕의 전설에 나오는 한 인물을 콕 집어서 다시 스토리로 만든 일종의 스핀 오프(spin-off), 곧 외전(外傳)이다. ‘그린 나이트’의 주인공은 아서의 조카, 가웨인 경(卿)이다. 정확하게는 가웨인이 작위를 받기 전, 청년시절에 경험하는 일종의 성장담이다. 아서왕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시킨다. 그가 보여준 낭만의 영웅담을 기억하게 한다. 아서가 뽑은 엑스칼리버의 얘기는 모르는 이가 없다. 존 부어맨 감독은 1981년 아예 이 검(劍)의 얘기만을 소재로 ‘엑스칼리버’를 만든 바 있다. 리처드 기어와 줄리아 오몬드가 나왔던 1995년 영화 ‘카멜롯의 전설’은 또 어떤가. 아서가 이끈 원탁의 기사 중 원외 멤버였던 랜슬롯은 아서의 지극한 아내 귀네비어와 사랑에 빠진다. 그 달콤한 불륜이라니. 클라이브 오웬 주연의 2004년 작 ‘킹 아더’는 조금 더 역사성을 띠는데, 여기서 아서는 로마군의 일원으로 나온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를 배경으로 지금의 잉글랜드 땅인 브리튼에 앵글로 색슨족이 침략하자 이를 물리친 이가 바로 로마-브리튼 장군인 아서였다는 설정이다. 당시 브리튼은 로마령이었고, 로마는 현지 브리튼족을 내세워 대리 통치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서의 뿌리는 사실 켈트족이다. 어쨌든 이렇게 아서 얘기만 해도 무궁무진하다. 거기에 마법사 멀린의 얘기까지 합치면 실로 한도 끝도 없어진다. 멀린과 대립각을 세웠던 이가 바로 아서의 여동생인 모건이다. 모건은 여자 마법사다. 아서는 모건과 근친의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이를 하나 얻는다. 그게 바로 가웨인이다. 그런데 이 이상한 관계의 얘기는 그동안 그다지 내세워지지 않았다. 숨겨져 있거나 잘 쓰여지지 않는 얘기이다. J.R.R. 톨킨이 쓴 원작에서 주인공 가웨인은 이미 기사이지만 영화에서는 아직 기사가 안 된 철없는 청년으로 설정돼 있다. 따라서 영화는 한 청년의 성장기 쪽에 더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스스로 깨달아 가는 성장 스토리…라고 얘기를 하기 전에 줄거리를 살짝 정리할 필요가 있다. 영화 ‘그린 나이트’는 설령 스포일러가 된다 하더라도 미리 얘기를 듣고 가서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저런 일이 벌어지는지 따라갈 수가 없다. 때는 크리스마스이고 아서왕이 늙고 병들어 가고 있을 때이다. 아서왕은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자신의 조카인 가웨인을 옆에 앉힌다. 그는 왕위를 조카에게 물려줄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가 아직 어리다는 것이다. 원탁의 기사들과 ‘우리가 색슨을 물리칠 때…!!’라며 축배를 들려는 찰나 갑자기 녹색 기사(그린 나이트)가 들이닥친다. 그리고 한 가지 게임을 제안한다. 자신의 도끼로 자신을 베는 자에게 1년 후 다시 만날 때 똑같이 상대를 베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 용기가 있는 자 나오라고 한다. 그러자 대뜸 어린 가웨인이 나선다. 그리고 그는 녹색 기사의 머리를 벤다. 그런데 웬걸, 녹색 기사는 잘린 자신의 머리를 들고 말을 타고 떠난다. 1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하면서. 가웨인은 꼼짝없이 1년 후에 머리가 날아가게 생겼다. 이때부터 가웨인의 고민이 깊어진다. 그리고 1년은 정말 금세 지나간다. 가웨인은 녹색 기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녹색 교회를 향한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가웨인은 여정에서 친절한 척, 그의 물건을 탈취하는 소년 도둑을 만나기도 하고 목이 잘린 성녀 위니프레드를 구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의 곁은 붉은 여우가 따라 붙는다. 가웨인은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나 버틸락 성에 잠시 머물게 된다. 성주는 가웨인이 떠나기 직전 그가 머무는 동안 갖게 된 각자의 획득물을 나누는 게임을 하자고 한다. 3일 동안 가웨인은 성주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는데 그는 사정(射精)을 할 만큼 욕정을 느끼면서도 그녀와의 통정은 끝내 거부한다. 여자는 그에게 마법의 허리띠를 주는데 이건 가웨인이 여정을 시작하기 전 마법사인 엄마가 그의 허리에 둘러준 것이다. 가웨인은 성주 아내로부터 얻은 획득물을 성주와 나누지 않는다. 가웨인은 허리띠를 두른 채 녹색 기사를 만나고 그에게 머리를 자르라고 목을 내민다. ‘그린 나이트’에는 한 청년의 성장기를 통해 정직과 명예, 인생에서 지켜야 할 진정한 가치, 그 자아 실현에 대한 얘기가 들어 있는 한편(이 모든 것은 아들을 어른으로 키워 내려는 엄마 마법사 모건의 농간이 개입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녹색기사로 대표되는 타자(他者)의 내면화, 곧 나 아닌 타인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 가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 녹색 기사는 곧 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류가 당초 자연과 약속했던 것에 대해 강조하는 얘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건 꼭 구미에 맞는 분석이 아니다. 그보다는 다분히 체제 전복적이다.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구 시대의 특성들이 여성성으로 치환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셈이다. 마법사도 엄마, 여자이다. 성녀 위니프레드, 붉은 여우, 거인인 여성들, 그리고 성주의 아내 등등까지 이 영화의 주요 동력은 다 여성이다. 전설과 구담(口談)의 주체가 여성으로 이전됐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건 곧 지금 시대의 변화된 모습을 은유하는 것이다. ‘그린 나이트’는 실로 오랜만에 경험하게 되는 ‘읽는 영화’이다. 그 풍부한 구어체의 어법에 놀라게 된다. 이야기가 전해지는 구전과 입소문의 방식은 2000년이 넘었다. 문학은 한 천년쯤 됐다. 영화는 기껏 백년이 갓 넘었다. 영화가 결코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혀 끝을 따라 잡지 못하는 이유다. 문학을 능가하지 못하는 이유다. 톨킨의 위대한 서사 문학을 훌륭하게 영화로 받아 적은 데이빗 로워리의 연출 능력은 당분간 두고두고 회자(膾炙)될 것이다. 진짜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가짜의 얘기만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린 나이트’는 진짜의 이야기를 듣고, 보는데 있어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 오랜만에 구전 설화를 실컷 즐기시기들 바란다.
인류의 미래가 희망적인지 비관적인지를 놓고 벌인 석학들의 토론(이 무슨 쓰잘 데 없는 짓인가,라고 처음엔 생각하기 쉽다.)을 보면서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됐다. 이 토론은 ‘사피엔스의 미래(전병근 譯, 모던아카이브刊)’라는 책으로 엮여서 시중에 나왔다.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은 스티븐 핑커, 매트 리들리, 알랭 드 보통, 그리고 말콤 글래드웰이다. 이들은 캐나다의 유명 토크 쇼인 ‘멍크 디베이트’에 참가했다. 이 토론회에는 3000명의 관객이 객석을 가득 채우고 캐나다 공영방송 CPAC. 그리고 미국의 C-SPAN을 통해 북미 전역에 방송된다. ‘멍크 디베이트’는 캐나다 금광재벌인 피터 멍크가 만든 세계 석학들의 대담, 토론 프로그램이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우주여행을 개인적으로 할 생각을 하지만 어떤 사람, 특히 멍크 부부 같은 사람들은 인류의 삶을 어떻게 하면 더 낫게 만들까를 고민한다. 이 책의 토론자 넷이 다 어떤 사람들인지 지면 관계상 일일이 소개하지는 않겠다. 어쨌든 지적인 측면에서는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알랭 드 보통은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소설가이자 철학자이다. 하바드 출신이다.(적어도 하바드 출신이라면 이 정도의 깊이와 겸손함,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갖춰야 한다. 요즘 국내 정치권에도 하바드 출신이 적지 않다. 사뭇 다른 느낌이다.) 앞의 두 사람은 인류의 미래를 낙관한다. 뒤의 두 사람은 비관론자이다. 토론 배틀을 읽어 나가다 보면 이 무슨 소모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류의 미래는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있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면 모든 지적 시스템은 붕괴할 수 있다. 토론 그 자체에 대한 의미 부여가 인류의 삶을 진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스티븐 핑커가 낙관론의 예시로 내건 10가지 범례 즉, 인간의 수명과 건강 / 교육 / 물질적 풍요 / 평화 / 안전 / 자유 / 지능 / 인권 / 양성평등의 지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 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해 보인다. 다 좋아졌다. 반면에 이를 반박하는 말콤 글래드웰은 핵무기가 80% 감소했다고 해서 그 위협과 위험의 수위가 낮아진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말한다. 글래드웰은 ‘우리는 위험의 감축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위험의 재구성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다.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비관론을 ‘비관적 현실주의’라는 말고 교정한다. 인류의 전망은 어둡지만 그 해결책을 찾아 나서야 하며, 해결책의 일부는 찾아 나설 수 있다고 보는 실용적이고 이성적 판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비관적 현실주의도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들이다.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기후변화의 문제가 경제(학)의 문제냐 아니냐를 놓고 벌어진 핑커와 글래드웰의 설전이다. 핑커는 여러 예 중 하나로 원자력 얘기를 하는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원자력이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는 사실도 압니다. 하지만 문제는 감축 규모에요.” 원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하겠느냐는 것이고(화석연료를 줄이고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비용을 감당하겠느냐는 것) 그렇다면 어떤 유인책을 써야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정치의 영역을 언급하고 있는 셈이다. 네 사람의 논쟁 중에는 리처드 이스털린이나 앵거스 디턴이 얘기했던 ‘상대적 빈곤’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소득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더 이상 소득 증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앵거스 디턴은 이를 연봉 7만 달러 수준으로 규정한 바 있다. 연 8000만원 정도를 버는 사람은 연봉이 1억이나 1억 2000이 된다 해도 더 이상 행복감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모든 논쟁을 지면으로 지켜보면서 윤석열이라는 대권 주자가 후쿠시마 원전 얘기를 하기 전에, 그리고 밀턴 프리드먼 얘기를 하기 전에 이 책 ‘사피엔스의 미래’를 읽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읽지 않겠지만. 그리고 읽어도 뭔 소리인 줄 모르겠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읽고 나서도 의도적으로 안 읽은 척, 딴 소리만 하겠지만. 세계에서 가장 지적이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격렬한 토론을 벌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중간에 상대의 말을 끊고 들어가는 일은 다반사다. 상대에 대해 비아냥 거리고(말콤 글래드웰은 스티븐 핑커와 매트 리들리를 폴리아나 부부로 부른다. 소설 ‘폴리아나’에 나오는 어리석을 정도록 낙천적인 여성에 비유한 것이다.) 외모에 대한 비하 발언(대머리, 곱슬머리)도 서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에 대한 예의만큼은 잃지 않는다. 선은 넘지 않는 것이다. 민주당의 후보 경선 토론 주자들이 이 ‘멍크 디베이트’를 눈여겨봤으면 싶다. 후보 경선이 격이 떨어지고 천박한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좀 지적이거나 그렇게 돼 가야 한다. 지성적이 되는 게 먹고사는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얘기하는 건 1·4 후퇴 때, 흥남부두 철수 시절에나 하는 얘기다. 젊은 세대들도 자각해야 한다. 유재석은 좋은 친구지만 ‘유퀴즈 온 더 블록’ 같은 버라이어티 TV 프로그램만이 다는 아닌 것이다. 역사를 정면으로 배울 생각을 해야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같은 프로그램으로 배울 일은 아니다. 지적 관심의 증대가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를 진화시킬 것이다. 특히 지금의 한국 사회가 그렇다. 책 ‘사피엔스의 미래’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전쟁은 세 단계로 나뉘어진다. 전전(戰前)과 전쟁 중, 그리고 전후(戰後)이다. 어느 단계가 가장 고통스러운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전쟁 중보다는 전후가 그렇다. 사람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통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적에게 자신을 팔아 먹었다면 그 일을 과연 어떻게 잊고 살겠는가. 그에 대한 원한을 어찌 쉽게 떨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보다 더, 더, 더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은 상대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다소 모호할 때이다. 팩트도 불분명한데다 그 배신이 배신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석될 때이다. 살다 보면 진실은 늘,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세 개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모호함이 만들어 내는 불신이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법이다. 회복되지 못하는 관계의 이어짐이 삶을 파국으로 만든다. 전쟁 후에는 대개, 사람들이 그런 감정들로 살아간다. 물질적으로 피폐해진 건 곧 재건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복구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독일 현대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적 아우라의 폭이 가장 넓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의 ‘피닉스’가 바로 그런 얘기다. 주인공 넬리(니나 호스)는 아우슈비츠 생존자다. 가까스로 살아난 사람들이 그렇듯 그녀도 얼굴이 엉망이 됐다. 아마도 가스실에서 살아남은 모양이다. 그녀의 얼굴은 거의 짓이겨진 상태다. 그런 그녀를 친구인 레네(니나 쿤젠도르프)가 전쟁 직후 간신히 찾아낸다. 그리고 뛰어난 의사를 고용해 성형수술로 그녀의 얼굴을 다시 정상으로 만들어 낸다. 당연히 돈이 많이 든다. 하지만 넬리에게는 막대한 유산이 있다. 얼굴이 회복되고 나니 넬리는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에 헤어진 남편 조니(로날드 제르펠드)를 찾으려 한다. 문제는 넬리가 유대인임을 고발한 장본인이 바로 남편이라는 사실이(라고 레네가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편이란 작자는 과거 아내였던 여자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이런저런 사기행각을 벌이려 한다. 친구 레네는 넬리에게 그 점을 경고하지만 여자는 일단 남자부터 찾겠다는 심정이다. 레네의 말을 다 믿지는 않는다. 설마하는 생각도 있다. 그보다는 사랑했던 기억이 더 강하다. 넬리는 결국 남편을 찾긴 찾는다. 하지만 과거 남편은 성형으로 바뀐 아내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왠지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느끼는 정도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내 대역을 시키려고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아내가 생환했다고 거짓으로 알리고 그녀와 재결합하는 척, 여자의 재산을 가져와 서로 나누어 갖자는 제안을 한다. 이제부터 진짜 아내는 가짜 아내가 되어 진짜 아내인 척 연기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남자는 끝까지 여자를 긴가민가해 한다. 넬리는 넬리대로 점점 더, 이 남자가 자신을 신고한 게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 혼란스러워한다. 두 남녀는 혼돈의 사랑이 그나마 각자가 안고 살아가는 과거의 고통을 잊게 할 것인지, 실낱같은 희망으로 자신들의 연극을 이어 나간다. 그 과정이 눈물겹게 펼쳐진다. ‘피닉스’는 현대영화가 보여 준 러브 스토리 가운데 가장 비극적이고 참혹한 내용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러브 스토리인 척하는 것뿐일 수 있다. 두 남녀의 관계를 통해 독일의 역사를 치환시켜 보여주려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것이 이 영화의 텍스트를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넬리의 얼굴은 전후 독일의 모습 그 자체이다. 그런 그녀를 치료하는 솜씨 좋은 의사는 전후 독일을 점령했던 미군과 미국을 의미한다. 의사는 넬리에게 권한다. “아주 다른 얼굴을 만들어 드릴 수 있소. 그게 더 좋을 겁니다.” 그러나 넬리는 가능한 한 과거의 얼굴에 가깝게 복원해 달라고 애원한다. 미국의 간섭과 지원 하에 이루어진 전후 독일의 재건 과정이 독일 국민들의 자존심에 얼마나 상처를 입혔었는가를 은유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항상 흥청대는 곳은 미군 전용 재즈 클럽이다. 그곳에서 독일 여자 무희들은 벌거벗은 몸을 팔아 살아가고, 남자들은 허드렛 일로 품을 팔아가며 살아간다. 한때 잘나가는 피아니스트였던 남편 조니는 재즈클럽의 불목하니로 끼니를 이어 간다. 어쨌든 넬리는 그렇게 가까스로 예전 모습을 되찾으려 애쓰지만 ‘전 남편 조니=독일의 어리석은 민중들’은 그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이제는 돈, 돈, 돈만을 생각하며 살 뿐이다. 언제 자신이 배신했었냐는 듯, 언제 자신들이 나치와 히틀러를 선거로 뽑은 적이 있었냐는 듯, 과거의 잘못과 악행을 이런저런 변명을 동원해 가며 다시 이어가려 할 뿐이다. 넬리의 마음은 그래서, 평화를 얻지 못한다. 독일이 오랫동안 전후의 혼란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그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어쩌면 여태껏 치료되지 않았다고,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은 말한다. 펫졸드는 전쟁이 사람을 얼마나 일그러뜨리는지, 잘못된 정치적 선택이 인간관계를 얼마나 파괴시키는 지를, 무엇보다 그 상처가 얼마나 영원한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보고 있으면 심하게, 아주 심하게, 마음이 아프다. 독일의 역사와 가장 근접한 나라는 바로 우리들이다. ‘피닉스’는 독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얘기인 셈이다. 우리에게도 넬리와 조니, 레네와 같은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넬리를 끝까지 지키려 했고 또 사랑했던(친구로서든 동성의 연인으로서든) 레네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이제…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어.” 아마도 레네는 히틀러의 독일 치하에서 몇 안남았던 독일의 지식인층을 대변하는 것일 수가 있다. 레네는 자신이 사랑하는 친구가 또 다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을 지켜보기가 힘들다. 과거에 매달릴 수도, 그렇다고 앞으로만 나아 가기에도 풀어야 할 문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레네의 선택이, 그리고 넬리의 선택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이나 정신을 멍하게 할 만큼 가슴을 친다. 두 여자가 처한 운명의 기로는 마치 영화 ‘이다’에서 안나와 완다가 처한 상황을 보는 것 같은 느낌, 기시감을 준다. ‘이다’는 폴란드 파웰 파우리코우스키 감독의 2015년 작품이었다. 하긴 그 영화도 전후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었다. 유럽의 감독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아픈 과거사, 치욕의 역사를 영화로 정리해 내고 있다. 그 노력에 경외를 표하는 바이다.
류승완이 이번에는 외곽을 친다. 그런데 그 수법이 꽤나 노련하다. 신작 ‘모가디슈’에서 류승완은 1990년 소말리아의 쿠데타 사건을 다룬다. 소말리아는 이후 내전에 휩싸이고 미국과 다국적군은 군사적으로 개입하지만 오히려 처참하게 실패한 후 군대를 뺀다.(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에 잘 나와 있다) 그 와중에 빌 클린튼은 모니카 르윈스키와 백악관에서 지퍼를 내렸다.(일명 ‘지퍼 게이트’) 영화 ‘모가디슈’는 소말리아 내전의 불길하고 폭력적인 전조(前兆)를 다룬다. 그런데 그게 외곽을 때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소말리아 내전에 휩싸인 사람들의 얘기를 그리는 척, 사실은 그때 당시의 한국 정치 상황, 분단의 현실, 더 나아가 지금에 이르러서도 우리가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어떻게 지향해야 할 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1990년의 소말리아가 아니라 2021년 한반도 문제를 성찰하게 만든다. 그렇게 외곽을 노련하게 때린다. 그런데 그 정치적 시선이 매우 올바르고 따뜻하다. 류승완이 정신적으로, 사회과학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과하고 모자람이 없다. 균형미가 좋다. 극 전체를 이끌어 가는 톤앤매너의 균질감이 뛰어나다. 액션, 특히 자동차 추격 액션은 전 세계 관객들이 입을 딱 벌릴 정도로 잘 찍었다. 탈출의 에피소드는 벤 에플릭의 ‘아르고’ 만큼 풍부하고 긴장감이 넘친다. 총격 씬은, 내가 보건대, 마이클 만이 ‘히트’와 ‘마이애미 바이스’를 만든 이후, 격발의 반동이 가장 격렬하게 느껴질 만큼 리얼하게 연출했다.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는 실사와 VFX(특수효과)의 융합이 최고조를 이뤘다고 할 만큼 높다. 일명 밀리터리 액션형(型) 작품으로서 영화적 쾌감이 거의 극의 수준이다. 이 영화는 1990년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의 혼란스러운 정정(政情)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남북한 대사관의 대사와 직원들 얘기다. 남한의 한신성 대사(김윤석)는 남한의 UN가입 문제로 사사건건 대립하던 북한의 림용수 대사(허준호)를 돕게 되고, 그(들)와 함께 이탈리아 대사관을 향해 극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 과정이 박진감이 철철 넘친다. 게다가 눈물이 날 만큼 구석구석 넘치는 인간미를 향해 영화가 달려간다. ‘모가디슈’가 뛰어난, 진정한 이유는 영화가 갖는 힘의 원천인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정신적 기반, 무엇보다 정치적 시선이 올바르고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한신성은 림용수를 향해 그의 대사관 보위부 직원 태준기(구교환), 그리고 자신의 안기부 직원 강대진(조인성)에게 말한다. “뭐.. 남북통일하자고 모인 것도 아니고 살아남자고 하는 거니까…” 림용수는 북한 대사관을 빠져나와 폭도와 반란군이 넘치는 모가디슈의 뒷골목에서 자신의 가족과 직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우리의 투쟁 목표는 생존이야. 다들 알가써!” 한신성과 림용수는 바깥의 총격 소리를 들으면서 둘이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 “살다 보니까 진실이 두 개더라구요.” 두 사람은 천신만고 끝에 케냐로 탈출한 후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의도적으로’ 갈라선다. 그 헤어짐의 과정이 이 영화의 최고봉이다. 이념이나 주의 따위는 다 개나 줘 버리자는 심정이 된다. 세상은 매우 구체적인 과정으로 바뀌고 개혁되며, 수사(修辭)의 자구(字句)에 갇히는 것이 아님을 류승완은 이번 ‘모가디슈’에서 갈파한다. 림용수와 강대진의 마지막 악수는 실로 뜨겁게 느껴진다. 그 구체성의 변증법을 구사하는 류승완의 놀라운 식견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모가디슈’를 보기 전에 소말리아 역사를 살짝 알고 보면 좋다. 소말리아는 소위 ‘아프리카의 뿔’로 불리는 나라다. 이 나라는 홍해 맞은편에 있는데 홍해로 들어가는 좁은 해협(아덴만)의 길목에 있다 보니 해적 활동을 하기에 딱 좋은 지형의 국가이다. 2009년에는 조그만 배에 탄 해적들이 미국의 거대한 유조선을 납치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톰 행크스 주연의 ‘캡틴 필립스’) 한때는 해적이 창궐해서 우리나라 선적이 납치되기도 했는데, 당시 해군은 ‘아덴만 작전’을 펼쳐 선장 석해균 씨를 구출해 냈다. 소말리아 내전의 근원을 따지면 19세기 말 이탈리아와 영국이 소말리아를 분할 식민지로 삼았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때문에 국가 내부의 부족 간에 심각한 분열이 생기게 됐다. 이후 독립해 정부가 들어섰지만 60년대에 바레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장기 집권을 이어갔으며, 이에 대한 반정부 시위가 결국 내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반정부 단체였던 USC(United Somali Congress 통일소말리아의회)가 사회주의 독재 정권이었던 바레 정부(영화에서 북한 대사관이 이들과 왜 가까워 보이는지 알게 된다)를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내부의 마흐디 대통령과 아이디드 의장 간 권력다툼이 오래고 긴 내전 상황으로 나라를 몰아간 셈이다. 영화 ‘모가디슈’는 그 혼란의 와중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의 휴먼 드라마다. 류승완은 이번 영화를 인간주의로 시작해 살짝 남북한 간 이념의 대결, 남한과 북한 각자의 체제가 갖는 경직성/독재적 시스템의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통일의 문제라는 어젠다를 지나가게 한다. 그리고 다시 휴머니즘으로 복귀시킨다. 그 일련의 스토리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우리 남북이 어떻게 다시 결합(통일 말고)할 수 있는지, 결합을 하든 안 하든, 우리 각자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 성숙한 사고와 사유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키 포인트이다. 허준호의 연기가 명불허전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번 영화 ‘모가디슈’의 주인공은 류승완 감독 그 자신이다. 그의 귀환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이다.
방송을 보면서 아나운서들이 제일 짜증이 날 때는 장본인과 주인공을 구분하지 못하고 마구 섞어 쓰거나 아예 장본인이라는 표현밖에 모르는 것 같을 때이다. 장본인은 여러 (나쁜) 일을 일으킨 바로 그 사람이다. 주인공은 여러 (좋은) 일을 만들어 낸 바로 그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네가 이 모든 일을 그르친 그 장본인이냐’가 맞는 말이고, ‘바로 이 분이 이번 대형 화재에서 어린 아이들을 구한 그 주인공 영웅이십니다’가 맞는 표현이다. 그런데 국영/공영 아나운서조차 이걸 구분 못하고 ‘이번에 올림픽 경기를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다’식의 표현을 쓴다. 한심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 선수단을 소개할 때 체르노빌 원전 사진을 내보내고 아이티 선수단을 소개할 때 대통령이 암살된 얘기를 하는 등의 행태는 위와 같은 무식의 소치인가. 그 지경을 넘어선 것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무엇보다 정치적 올바름에 문제가 있다. ‘라떼에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아버지가, 혹은 선생님이 항상 말씀하셨다. ‘걔가 그래도 애는 착해. 그러니까 너무 싫어하지 마. 사람들 앞에서 너무 뭐라 그러고 그러면 안된다 알았지?’등등의 말씀이셨다. 사람의 좋은 면을 먼저 봐야 한다는 얘기들이다. 긍정적인 면을 부각해 주라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적인 것이라는 가르침이셨다. 우크라이나를 생각하면 설령 체르노빌이 떠오르더라도 방송 같은 데에서 시청자들에게 무엇을 보여 줄 때는 우크라이나의 번성한 수도 키예프의 이미지를 찾든지, 우크라이나 특유의 드넓은 해바라기 밭을 보여줬어야 옳았다. 할리우드 배우 리브 슈라이버가 연출을 한 '우크라이나에서 온 편지' 같은 영화에 그런 이미지가 나온다. 그런데 머릿속에 그런 의미의 우선순위가 아예 없다. 우크라이나 해바라기 전원 같은 건 꿈에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자신들 제정(帝政)의 역사 속 선조들이 대부분 우크라이나에서 왔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 있던 류리크 공국은 12세기 모스크바대 공국의 뿌리였다. 러시아의 마지막 왕조 로마노프 가문도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그래서 ‘푸틴=러시아’는 정서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포기하지 못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과거의 우크라이나가 매우 번성한 대국이었음을 보여준다. 하긴, 그런 거 ‘따위’ 전혀 몰라도 된다. 다만 요즘 젊은 세대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영화 ‘어벤저스' 시리즈의 캐릭터 ‘블랙 위도우’의 여주인공 이름이 나타샤 로마노프라는 것만이라도 생각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거기서 살짝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지적 호기심’이 일었다면 저런 ‘방송 사고’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타샤 로마노프=블랙 위도우’도 결국 우크라이나 출신이니까. 다 교육의 탓이다. 공교육이 잘못된 탓이다. 그저 사지선다(四枝選多)의 답만 고르게 하고 점수를 1점이라도 남보다 더 따게 하는 것만 옳다, 옳다 한 기성세대, 부모, 선생의 탓이다. 그러니 조국의 딸 조민이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음에도 경쟁심리와 보복심리로 그녀를 본 적이 없다고 거짓 증언하게 한 것이다. 증언을 한 아이가 그런 잘못을 저지른 데에는 그 젊은이 자체의 문제보다는 그를 그렇게 만든 사회 분위기에서 연원을 찾아야 한다. 결국 사회 교육의 시스템에 심각한 왜곡이 진행돼 왔기 때문이다. 유력 일간지 신문기자라고 하는 인간들이 사흘을 4흘이라고 쓰고 인도계 이민 2세를 인도계 2민 2세라고 쓰는 것을 더 이상 ‘귀여운’ 실수로 간주해 주면 안 된다. 속된 말로 싸대기를 처맞아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무엇보다 해당 기자를 손가락질하기보다는 해당 기자의 관리를 맡고 있는 데스크들, 부서 장들을 데려다 곤장을 쳐야 한다. 세상에… 신문사에 데스킹 시스템, 게이트 키핑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데스크들은 뭐하시고 계신 것인가?낮술 드시고 사우나에서 주무시는 거 아닌가. 그러니 ‘우크라이나=체르노빌 사진’이 나가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 교육의 시스템을 복원해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짧고 단순하고 명료한 답을 주되 그 답이라고 하는 게 상황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변할 수 있고 진리는 늘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 그 단계적인 의식의 발전 방안에 대해 사회는, 학교는, 가정은, 자체적인 교육 커리큘럼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선생들 스스로, 혹은 부모들 스스로, 답을 딱 하나만 갖고 산다. 오로지 이 사회에서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는 답. 그 밑에서 아이들이 올바로 성장할 수가 없다. 일베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 부모와 선생이 유식해져야 한다. 세상의 답과 진리가 늘 상대적이고 진실의 X파일은 저 산너머에 있다는 것을 체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잘못 키워진 아이들이 아시아 사람이라는 이유로 지하철 안에서 얼굴에 침을 뱉고 낄낄대게 된다. 잘못 키워진 애들이 룸펜 프롤레타리아들과 휩쓸려 다니며 폭력을 일삼는다. 잘못 키워진 아이들이 유겐트가 돼서 나치 친위대가 된다. 그런 아이들이 맹목적으로 히틀러를 숭배하고 그의 악행을 돕는다. 그런 아이들 때문에 세상의 파시즘이 부활한다. 자 어떤가, 이제 슬슬 소름이 돋는가?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일본 오키타 슈이치의 신작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중층의 텍스트이다. 여러가지의 얘기가 겹겹이 쌓여 있다.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일단 일본의 초고령화 사회에 대한 시선이 남다르다.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여성주의가 겹쳐져 있다. 그것도 일본식으로. 한국의 가족주의와는 철저히 다른 기조를 갖고 있는 일본의 개인주의가 지금 어떤 정점을 찍고 있는 가에 대한 사회적 고찰(考察)도 엿보인다. 그런 등등이 참으로 특이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주인공 모모코(다나카 유코)는 영화 내내 대사가 거의 없다. 일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에 딸이 왔을 때 잠깐 대화를 할 뿐, 일상에서 말을 나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나누는 대화는 거의 전부가 독백이다. 혼자서 마음 속으로 하는 얘기다. 입 밖으로 대사를 하지 않는 캐릭터가 극 전체를 주도하게끔 이야기가 구성돼 있다. 그것 참 별일이다. 모모코는 혼자 사는 늙은 여자다. 75세여서 사실 일본이나 우리의 현 고령화 사회를 생각할 때 아주 늙은 나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아직 젊다. 때문에 모모코를 수식하는 말에서는 ‘혼자 사는’과 ‘여자’에 더 방점이 찍혀져야 한다. 모모코는 일본 북부 아키타 현 출신이다.(사투리가 심하다) 20대 초반, 부모의 중매결혼에 반발해 도쿄로 도망 나왔다.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던 그녀는 같은 지역 출신의 노동자 슈조(히가시데 마사히로)에 반해 결혼한다. 아들과 딸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지만 남편은 일찍 죽고 아이들도 모두 분가했다. 그렇게 일찍 혼자가 됐다. 슬프고 외롭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모처럼만의 자유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많이 배우거나 삶의 경험이 녹녹한 것도 아니어서 그녀의 페미니즘은 비교적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녀는 식당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에게 말한다. “결혼은 (집안에서 정해주는 사람하고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하고 해야 해!”, “(결혼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랑보다 자유와 독립이야!” 모모코는 어찌어찌 길을 돌아 오긴 했지만 나이 70대에 이르러 자유와 독립에 대한 자기 나름의 성취를 이룬다. 이제 그녀는 그녀 대로 혼자의 말년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가려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여간 외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에서는 일본의 ‘늙은이’들이 얼마나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 고립의 무력감이 낱낱이 드러난다. 그게 참 처절하다. 고독한 비명의 메아리가 느껴진다. 늘 정갈하고, 줄 잘 맞추고, 자기 차례를 끈기 있게 기다릴 줄 아는 (군국주의로 길러진) 국민성답게 일본의 노인들은 버스 정류장에서도 ‘가지런히’ 앉아 있다. 모모코가 가는 병원에는 늘 늙은이가, 아니 늙은이들로만 가득한데 소파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자기 차례를 묵묵히 기다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모모코의 독백은 이렇게 이어진다. “오늘도 세 시간을 기다려 의사를 1분 만나고 돌아왔다.” 그런 모모코의 일상은 일본 고령화 사회가 어쩔 수 없이 잉태하고 있는 일단(一旦)의 비극성같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저러다가 다들 고독사를 하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모모코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한 남자의 환영을 보는데 그 남자, 항상 똑같은 말을 한다. “더 자. 일어나봐야 달라질 게 하나도 없는 날이야. 그냥 더 자.” 모모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러지 않으면 영영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모모코에게도 물론 친구가 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비현실의, 상상속의, 정확하게 얘기하면 모모코 스스로가 만들어 낸, 모모코 자신의 분신(alter-ego)들이다. 마치 백설공주의 난장이 친구들 마냥 이들 세 명은 늘 모모코와 일상을 함께 한다. 그녀와 대화하고, 때론 그녀의 행동을 비웃고, 때로는 칭찬하며, 어떤 때는 재즈도 연주해 주고 춤도 같이 춰준다. 누군가 이들 세 명과 대화를 하거나 뭔가를 같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영락없이 실성한 노친네 형국이다. 하지만 모모코나 이 세상의 수많은 노인들은 다들 그렇게 자신만의 친구를 두고 살아간다. 노인들이 종종 혼잣말을 하는 건, 어쩌면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자신의 정신 속에만, 혹은 기억 속에만 출입하는 친구들이 있는 까닭이다. 모모코가 이들 세 명의 분신과 노는 장면은 마치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는 느낌을 준다. 부드러운 성격의 여성 리어왕을 보는 것 같다. 영화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그렇게 셰익스피어 식 정통 연극의 요소는 물론 가부키나 엔카 공연, 재즈 공연, TV 요소까지 마구 버무려 놓았는데, 그 형식의 자유로움이 매우 놀랍다. 오키타 슈이치 감독의 연출 능력이 다층적인 곳에서 만들어졌고, 으레 연출은 그렇게 하이브리드하고 뮤턴트(돌연변이의)한 캐릭터여야 한다는 것, 그런 ‘괴짜 양식’이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일본식 개인주의가 일정한 경계를 넘어서면 그것이 페미니즘과 같은 사회적 ‘주의(主義)’와 연결되고 일맥상통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다. 모모코는 어찌 보면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기’ 때문에 자유와 독립, 여성으로서의 주체를 세우고 살아갈 수 있었던 셈이다. 일본의 여성들은 주체적이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혼자 살아가기 때문에 주체적이 된다. 그 말이 그 말이고, 그 말이 그 말 같지 않지만, 여기에는 뭔가 통하는 기류가 있다. 일본식 특수성이다. 특수는 때론 보편으로 이어진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와카타케 지사코의 동명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일본은 역시 이런 사(私)소설 격 영화에 기량이 높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특이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얘기하자면, 특수는 보편이고 보편은 특수이다. 일본의 한 노인 이야기인 척, 사실은 우리 자신의 얘기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근 몇년 사이에 본 일본영화 중 최고다. 일본영화, 아직 죽지 않았다.
현재 세계 극장가에서 단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는 ‘블랙 위도우’이다. 이 영화는 나름 심오한 정치철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근데 그건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어벤져스’ 시리즈 상당수가 그렇다. 예컨대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이 그랬다.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만든 절대적 인공 지능 울트론이 독단화 되면서 인류에 저항한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이념이나 주의(主義)가 절대화될 때 빚어지는 사회적 참극, 그 현실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어벤져스 : 인피니티워’(2018)와 ‘어벤져스 : 엔드게임’(2019)에 등장하는 타노스(조슈 브롤린)의 존재에서 정점을 찍는다. 타노스는 인류를 살리기 위해 인류의 반을 죽여야 한다는 철학을 지닌 절대 악이다. 그래서 후반으로 가면 꼭 미워할 수만은 없는 존재로도 느껴진다. 이쯤 되면 이 시리즈는 꼭 애들만 보는 마블 영화가 아닌 셈이 된다.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이 그토록 찾고자 평생토록 사유(思惟)에 사유를 거듭했던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진실은 무엇인가. 인간은 단 하나의 진실과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가.” 칼 마르크스는 또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는 딱 하나이다.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어벤져스’ 시리즈는 정의와 진리의 실체에 대한 다면적인 접근, 다층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작품이다. ‘블랙 위도우’ 어벤져스의 일원 중 한 명인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만든 일종의 스핀오프(spin-off), 곧 외전(外傳)이다. 영화는 나타샤가 로스 장군(윌리엄 허트)의 정부 병력에 쫓기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킬러 엘레나 벨로바(플로렌스 퓨)가 누군가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상대에게 해독제 가스를 맞고 세뇌 상태에서 깨어나는 과정이 펼쳐진다. 둘은 사실 자매 사이다. 나타샤와 엘레나는 곧 자신들이 다른 킬러들의 표적이 돼 있음을 알게 된다. 나타샤와 엘레나 모두 러시아의 최첨단 첩보조직인 레드 룸이 키워 낸 킬러들이다. 레드 룸은 여성 킬러들 모두를, 대뇌학(大腦學) 연구를 통해 개발한 일종의 ‘세뇌 작업’을 통해 조직의 명령만 수행하게끔 스파이들을 길러냈다. 일종의 강철 로봇인 셈이다. 나타샤는 이미 여기를 탈출해 어벤져스 팀에 합류했다. 레드 룸의 우두머리 드레이코프(레이 윈스턴)는 그런 그녀를 호시탐탐 제거하려 한다. 나타샤와, 해독제 가스로 정신을 차린 엘레나는 어릴 적 자신들을 양육한 양부모 멜리나 보스토코프 박사(레이첼 와이즈)와 레드 가디언(데이비드 하버)을 찾아가 레드 룸 위치를 알아낸 후 이를 파괴하기 위해 내부로 침투한다. 엄마 멜리나는 대뇌학 선구자이고 사실상 레드 룸 작전의 설계자였다. ‘블랙 위도우’에서 가장 중요한 얘기는 바로 이 ‘세뇌 작업’에 대한 얘기이다. 러시아 첩보행동 조직의 세뇌 작업은 그 핵심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없애는 것에 있다. 그런데 멜리나 박사는 혹시 하는 마음에서 해독제를 만들어 놨고, 이 가스를 맞으면 인간에게 다시 자유의지가 생기게 된다. 아주 우스운 얘기 같지만, 여기에는 과거 소련 제국이나 그에 준하는 국가 체제 혹은 사회가 왜 붕괴하게 되는지를 마블 식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연방(聯邦)이라고 불리는 국가나 그렇게 의도적으로 국토와 사회의 이념을 병합해 낸 국가들 대부분은, 블랙 위도우의 가족들 나타샤·엘레나·멜리나·레드 가디언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의사(擬似) 가족국가’로서의 한계를 지닌다. 영화 속에서 딸 둘이 스파이로서 성장하는 과정과 그걸 체제에 일임하는 양부모의 모습은 소 연방의 구성 과정과 1990년대에 이르러 그 결속이 급속도로 해체되던 과정을 은유하는 듯이 보인다. 이념으로는 연대했지만 연대감은 그다지 강하지 못했던 ‘가족=국가’가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었다.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동구권 국가들이 해체 독립 과정에서 몸살을 앓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1995년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는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노선의 차이로 등장한다. 인류 사회는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넘어간다는 구조주의적 결정론에 따르면 다른 얘기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 그냥 그 같은 사회적 법칙에 따르고 순응하기만 하면 된다. 소련이 과거 기계주의적 유물론과 전체주의적 사고관에 빠져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실패한 이유는 인간의 ‘자유의지=창의력’을 말살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사회는 대체로 소수 정치 엘리트들이 독단과 독선, 독재의 행태를 저지른다. ‘블랙 위도우’는 러시아의 첩보기관 레드 룸을 통해 과거 소련의 사회가 왜 붕괴할 수밖에 없었는지, 한편으로는 미국 역시 그 같은 권력 독점의 방법론에 매료돼 왔었음을 고백하고, 그것이 이른바 미-소 냉전이나 이후의 미-러시아간 대립으로 이어지는 역사임을 ‘돌아돌아’ 보여주려 한다. 그런 이면의 얘기가 매우 흥미롭다. 영화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조차 영화라고 하는 것이 당대의 정치경제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전의 영화 ‘블랙 팬더’도 1960년대 미국의 신좌파 운동을 주도했던 블랙팬더당의 이상과 실패를 우회적으로 그려낸 내용이었다.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이 한창이던 때였다. 이 영화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전편이 여성성의 절대적 존재감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이다. 나타샤와 엘레나는 물론, 진화된 인물 모두가 다 여성이다. 대뇌학 전문의 박사도 아빠(남자)가 아니라 엄마다. 위도우들, 최악의 빌런(악당)인 태스크 마스터, 곧 안토니아(올가 쿠릴렌코)도 여자다. 영웅이든 악당이든 다 여자다. 이그젝티브 프로듀서(투자기획자)는 주인공 역의 스칼렛 요한슨 본인이고 감독인 케이트 쇼트랜드는 호주 출신 여성이다. 영화 내용이 됐든, 자본이 됐든, 그것을 운용하는 시스템이 됐든, 세상의 많은 일들의 주도권이 여성으로 이전됐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와 페미니즘, 이 두 가지가 영화 ‘블랙 위도우’의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다.
현재의 한국정치 사회구조, 조금 좁혀서 정치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1990년대의 미국 민주당의 흐름을 복기하면 조금 도움이 된다. 그 학습을 위해 출판사 모던 아카이브가 출간한 카툰 북 《버니》를 참조했음을 미리 밝힌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기 전 닉슨은 월남전의 여파로 재선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때문에 1972년 그가 재선에 성공한 것은 꽤나 놀랄 만한 일이었는데, 그건 베트남전을 비롯해서 중남미에서 연이어 일어난 좌파 혁명의 성공과 그 분위기로 인해 미국 사회가 오히려 보수화된 결과이기도 했다. 미 국내에서의 지난(至難) 했던 반전 시위가 피로감을 가져온 것도 일부 사실이다. 이때부터 미국 민주당은 급격하게 우클릭한다. 민주당 내 우파 그룹은 처음엔 DNC (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 민주당 전국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이후엔 CDM(Coalition for a Democratic Majority : 민주적 다수를 위한 연합), 혹은 DLC(Democratic Leadership Council : 민주당 지도자회의)라는 이름으로 민주당을 끊임없이, 그리고 줄곧, 우경화된 상태로 밀어 넣는 역할을 한다. 이들의 한결같은 논조는 이것이었다. “여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중도파를 끌어들이고 계속해서 중앙으로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 어디서 많이 들은 소리이고 우리에게서 툭하면 나오는 소리이다. 어쨌든 이들로 인해, 루스벨트 이후 줄곧 가난한 이들을 위한 큰 정부 정책을 추진했던 민주당은 결국 ‘무늬만 민주당(DINO : Democratic in Name Only)’으로 전락했다. 레이건 시절, 민주당 당내에는 ‘레이건 민주당원’이라고 명명되는 인물들이 판을 쳤을 정도다. 사람들은 그런 민주당을 가짜 보수라고 봤고 가짜 보수에 표를 주느니 진짜 보수를 뽑겠다며 공화당에 표를 몰아주는 기 현상이 벌어졌다. 어리석지만 화나고 욱하는 마음에 찍은 결과이기도 하다. 월터 먼데일, 마이클 듀카키스 등 민주당 후보들이 잇따라 선거에서 진 이유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 정치권 내에 일종의 고질병을 만들어 냈는데 정책 대결의 스펙트럼이 중도우파에서 우파의 범주로만 극히 좁아졌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오랜 기간 우편향화한 결과다. 빌 클린튼이 됐든 버락 오바마가 됐든 미국의 양극화 사회의 깊은 골을 극복하지 못했던 건 그 때문이다. 우와 우만의 싸움으로는 정치는 사회의 올바른 균형자가 되지 못한다. 미국의 현대 정치사를 반면교사로 삼는다면(미국의 정치와 한국의 정치는 그 사이즈와 콘텐츠가 다르다는 지적을 예상한다 해도) 지금의 우리 역시 중도우파와 우파 간의 선거구도에 함몰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대사회의 최대 이슈인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지긋지긋한 부동산 논란은 영영 잠재울 수가 없게 된다. 누군가 핏대를 올려 토지공개념을 밀고 나 갈 때가 돼도 한참 지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당을 비롯한 이른바 개혁정당은 중도로 외연을 확장한다는 둥의 ‘헛소리’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더욱더 확실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 옳다. 앞으로의 대선후보 중에 한 명이라도 확실하게 좌 클릭된 인물이 나와야 하는 이유다. 대선 과정에서 후보들로 하여금 양극화 해소/토지공개념/차별금지/환경/성평 등 같은 진보적 어젠다를 전면에 내세우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명 샤이 좌파들과 냉소적인 지식인들을 광장으로 모으게 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의 페론처럼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스트가 아니라 대중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진정한 포퓰리스트를 밀어야 한다. 지난 미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나왔던 엘리자베스 워렌이나 버니 샌더스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우리에게 노회찬이 살아 있었다면 한국의 버니 샌더스가 됐을 것이다. 정작 필요한 사람들을 많이 잃었다. 그게 참 아쉽다. 불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라이브 더빙쇼로 재탄생한, 1957년 제작된 최초의 컬러 영화 ‘이국정원’이 누군가에겐 추억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선물했다. 지난 9일과 10일 양일간 인천 부평아트센터 해누리극장에서는 라이브 더빙쇼 ‘이국정원’ 무대가 펼쳐졌다. ‘이국정원’은 한국 전창근 감독과 홍콩 도광계 감독, 일본 와카스기 미츠오 감독이 공동 연출을 맡은 최초의 한국-홍콩 합작 영화로, 김진규와 윤일봉, 최무룡 등 당대 최고의 한국 남자 배우들과 홍콩의 여배우들이 출연한 파격적인 멜로 드라마이다. 필름이 소실돼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으나 수십 년이 지나 홍콩 쇼브라더스 창고에서 ‘이국정원’의 필름이 발견됐고,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정교한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 영상을 복원해냈다. 반세기를 지나 무대 위로 소환된 이 작품은 필름 영화의 영상미와 현장에서 생동감을 더한 배우들의 대사, 분위기에 맞춘 밴드의 라이브 연주로 한층 풍성해졌다. 등장인물의 발걸음부터 차 시동거는 소리, 천둥소리까지 고스란히 전달하는 폴리 아티스트의 퍼포먼스도 재밌는 볼거리였다. 극 중 유명 한국인 작곡가 수펑은 어린 시절 헤어진 어머니를 찾기 위해 향한 홍콩에서 미녀가수 방음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방음의 어머니 빙심은 수펑의 사연을 듣고 둘의 결혼을 반대한다. 사실 방음의 어머니 빙심은 젊은 시절 한국 사람과 결혼해 남매를 낳았지만 사정상 딸만 데리고 홍콩으로 건너온 남모를 아픔이 있었다. 수펑과 방음이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의혹과 함께 비극에 빠지는 파격적인 멜로드라마가 무대 위로 펼쳐졌다. 주인공 수펑 역의 박형규와 방음 역의 이수안은 우연히 만나 운명임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 설레는 모습부터 부모님의 결혼 반대에 부딪혀 괴로워하고 멀리 떠날 결심을 하는 애절한 연인의 모습으로 호흡을 맞췄다. 빙심 역의 손현정을 비롯해 1인 다역을 소화한 철고 역의 김기창, 임나와 화미를 연기한 나미희도 저마다 사연을 노래하며 열연을 펼쳤다. 다른 한쪽에서 직접 구두를 신고 내는 여자 주인공의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부터 문을 열고 닫는 소리, 자동차 엔진 소리까지 다양한 사운드를 표현해내는 박영수 폴리아티스트.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또 다른 무대 속 주인공과 같았다. 그가 수펑과 방음이 포옹하는 장면에서 옷깃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내고, 배우들이 유머스러운 대사를 할 때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화 사운드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 대사, 음향, 음악을 100% 라이브로 볼 수 있는 공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빠져들었다. 무대가 끝난 뒤 배우들을 향한 응원의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이어 배우들이 ‘안녕하오’라는 노랫말을 부르자 관객들은 손뼉을 치면서 따라불렀다. 모두 하나로 호흡하면서 공연을 완성해가는 분위기였다. ‘이국정원’에 생명력을 불어넣겠다며 총괄 제작자로 나선 오동진 영화평론가와 연출을 맡은 전계수 감독의 꿈은 머리가 희끗한 노부부뿐 아니라 부모님과 함께 공연을 보러온 학생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며 관객들에게 새로운 추억을 안겨줬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이번 주 소개 영화는 미안하게도 OTT에 걸려 있는 작품이다. 일본영화 ‘바람의 검심 최종장 : 더 파이널’이다. 제목만으로는 시리즈의 맨 마지막 회 같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짜 최종회는 ‘바람의 검심 최종장 : 더 비기닝’이라고 해서 프리퀄이 하나 남아 있다. 이 시리즈는 총 5회이다. 자 그러니 일각에서는, 앞의 세 편을 다시 다 찾아봐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들린다. 대답은 그래도 되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에피소드는 비교적 독립적인데다 과거의 이야기를 할 경우 그 핵심적인 내용은 플래시 백 기법을 써서 그 연결 지점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번 4편 ‘바람의 검심 최종장 : 더 파이널’도 그 이전의 회차들과 기본 줄거리 면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역날검의 명수이자 최고의 검객 소리를 듣는 주인공 히무라 켄신(사토 타케루)이 도쿄 인근에서 연인 카오루(타케이 에미)가 운영하는 무예도장에 은둔해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켄신에게 악의 세력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대형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악의 세력들 모두, 흔하게 얘기해서 간단치 않은 무공과 칼 솜씨를 지닌 무사 출신들이다. 일명 밧토우사이(발도제, 抜刀斎 / 발도술, 拔刀術 혹은 발검술, 拔劍術의 달인이라는 의미로 칼집에서 칼을 빼는 속도, 정확성 등이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사를 말한다)라 불리는 켄신은 언제나 그렇듯, 거의 혈혈단신으로 이들과 맞서 자신에 대한 복수극을 정리하고 대참사를 방지한다…고 얘기하면 이거 무슨 만화 같은 얘기냐고 할 것이다. 맞다. 이야기 구조만 봐서는 매우 만화적이다. 실제로 출판만화가 원작이기도 하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영화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두 가지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으면 좋다. 신선조(新選組)라는 무사 그룹,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그것이다. 메이지 유신은 19세기 들어 일본이 급격한 중앙집권을 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전국의 정치사회구조를 개조한 일종의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대략 1860년대부터 그 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이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자본주의화를 앞당겼음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일본사회가 군국주의로 가는 길목을 열었다. 천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권력을 위해서는 일본식 봉건제인 막부 체제(당시는 에도 막부)의 조속한 해체가 필요했으며 또 그러기 위해서는 막부의 맨 앞에 서 있는, 호위무사이자 무장병력인 사무라이들을 무력화시킬 필요가 대두됐다. 신선조는 이에 반발한 사무라이들이 자위(自慰)를 위하여 스스로들을 무력화한 일종의 무장단체다. ‘바람의 검심’ 시리즈는 앞서 이들 신선조의 검객들을 대거 제거한 청부살인업자가 있었다는 설정이고 그게 주인공 히무라 켄신인데, 그는 처음엔 시대가 변화를 요구하는 한 자신이 그 악역을 떠맡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이다. “나의 더럽혀진 피 묻은 칼과 / 희생된 목숨들의 건너편에 / 누구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 새로운 시대가 있다면 / 나는 하늘을 대신하여 / 사람을 벨 것이다.” 그런데 그가 생각한 새로운 시대, 곧 메이지 유신 역시 특정 권력을 위한 눈속임일 뿐이라는 깨달음이 온다. 그래서 그는 살육의 현장을 떠난다. 히무라 켄신은 이후 자신의 검을 개조해 역날검을 만든다. 역날검으로는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 그는 다시는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한다. 신선조 출신의 검객들은 켄신이 죽인 사람들의 복수를 위하여, 혹은 당대 최고의 검객 소리를 듣기 위하여, 그것도 아니면 권력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 위하여 켄신에게 끊임없는 도전과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다. 켄신은 더 이상 죽이고 싶지 않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믿음도 잃었다.(이건 극 중 이토오 히로부미를 대하는 켄신의 태도나, 신선조 출신이었다가 특무경찰로 변신한 후지타와 협력도 대립도 안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중립을 지키며 사랑하는 여인과 새로 사귄 친구들과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혼돈의 시대는 그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영화 ‘바람의 검심’ 시리즈는 주인공 켄신의 그러한 심리적 갈등과 적(예전에는 동지)과의 대대적인 물리적 충돌을 오가며 서스펜스 액션의 감도를 극대화 시킨다. 일본 현대영화의 테크놀로지가 꽤나 선진화됐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온갖 현란한 카메라 워크와 스턴트, 특수효과, CG를 선보인다. 칼싸움 장면은 스턴트의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이를 어떻게 잘게 분할하느냐 통으로 길게 찍느냐, 그 리듬을 어떻게 구성해 내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다. 이 영화의 칼싸움 씬은 마치 리얼액션을 보는 듯하다. 영화 속 켄신이 고민하는 것은 자신이 선택한 ‘쪽’이 절대 권력화되고 그게 결국 군국주의라는 야만의 시대를 연 것이 아니냐는 지점에 서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前근대적인 시스템이 사람들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막부시대에도 특정 영주가 권력을 독점했고 민중의 고혈을 짜냈다. 켄신은 그것을 바꿔야 한다고 믿었었다. ‘바람의 검심 최종장 : 더 파이널’은 시대의 변화 한 가운데에 끼어 있는 지식인의 처참한 고민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리즈가 지닌 철학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세상사에 중립지대라는 것이 존재나 하는 것이냐고 묻고 있다. 중간은 없다. 선택만 있다. 세상사의 이치는 그렇다. 그 선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다. 다만 얼마나 공정하고, 얼마나 인간적일 수 있느냐에 그 올바름의 영역이 확장된다. ‘바람의 검심’ 시리즈는 지금의 일본사회가 왜 이렇게 흉물스러워졌는지, 군국주의의 원류는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를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만화 원작의 영화에서 그러한 것을 읽어내는 게 투 머치(too much)일 수 있다. 거기에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는 순전히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제주도 말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무엇일까. 제주 해녀의 이야기를 그린 소준문 감독의 ‘빛나는 순간’은 영화 내내 가르쳐 주지 않다가 맨 끝에 가서야 얘기해 준다. 그래서 ‘아하, 이 영화의 러브 스토리는 그리 해피 엔딩이지 않겠구나’하는 예감을 갖게 한다. 그런데 결국은 가르쳐 주긴 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제주말로 ‘이녁 소랑햄시다’이다. 완전히 다른 말이다. 제주와 ‘육지것’들은 소통하기 힘든 언어를 지녔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감독의 그런 장치, 곧 당신을 사랑합니다의 서울말과 제주말의 구현에 시간 차를 두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된 기조(基調)이다. 그 점을 알아채는 사람은 비교적 영화의 감이 좋은 사람들이다. 영화를 좀 봤구나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 영화가 너무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간다고 느낄 수 있겠다. 그래서 다소 고답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빛나는 순간’은 그렇게 기성의 질서에 머무는 작품이 아니다. 무엇보다 제주 해녀의 얘기로 시작해서 찬란한 러브 스토리를 이끌어 낸다. 그것도 아주아주, 좀 더 강조해서 ‘아주아주아주아주’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래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영화는 70살이 다 된 제주 해녀와 그녀의 휴먼다큐를 찍겠다며 제주에 온 프로덕션 PD의 연애담을 그린다. 그런데 이 남자 30대이다. 둘은 단순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이 둘은 살짝살짝 육욕을 느낀다. 스치고 만지고, 안아서 숨을 나누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니 결코 범례의 관계는 아니다. 이 연인의 사랑이 성공할 수 있을까. 앞서 얘기한 대로 이 영화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맨 나중에 가르쳐 준다. 그러니 결론은 이미 정해진 상태다. 근데 그런 것까지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까?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영화는 도대체, 사랑이 성공한다는 게 과연 무엇일까라는 생각과 의문, 성찰을 갖게 한다. 사랑은 서로가 항상 붙어 있고, 나 외에 다른 사람과는 손끝도 스치면 안되는 것이며 무엇보다 각자 바다 건너 떨어져 있으면 안되는 것인가. 현실에서는 멀어졌어도 마음속에, 각자의 가슴속에, ‘불길의 낙인(烙印)’이 남았다면 그 사랑은 그래도 성공한 것이 아닐까.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 남녀의 나이 차이만큼 그 역할을 연기한 고두심과 지현우의 나이 차이도 엇비슷하다는 것이다. 고두심은 1951년생, 지현우는 1984년생이다. 33살 차이의 남녀 배우가 키스신을 벌인다. 아차, 이건 확실한 스포일러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해 두라는 의미에서 밝히는 것인 만큼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기들 바란다. ‘빛나는 순간’을 보고 있으면 아네트 베닝과 제이미 벨이 나왔던 ‘필름 스타 인 리버풀’이 생각난다. 원제는 ‘필름 스타는 리버풀에서 죽지 않는다(Film Stars don’t die in Liverpool)’이다. 이 영화도 70살 전후의 여성과 20대 후반의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 ‘빛나는 순간’보다 더 과감한데 둘은 영화에서 키스 신, 베드 신, 섹스 신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네트 베닝은 1958년생, 제이미 벨은 1986년생. 28살의 나이 차이다. 사랑을 하는 데 있어 세상의 이러저러한 장벽이 다 무너지긴 했다. 그럼에도 연상 여인의 나이가 거의 서른 살 차이가 나는 문제는 아직 극복되지 않았다. ‘빛나는 순간’에서도 주인공 경훈(지현우)에게 선배라는 사람(김중기)은 둘의 관계에 대해 듣자마자 안된다는 소리부터 한다. 왜 안되냐는 경훈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역겨워!” 따라서, 영화 ‘빛나는 순간’은 단순한 파격의 멜로 드라마가 아닌, 이 사회의 금기를 넘어서려는 또 한 번의 영화적 노력이자 시도처럼 읽혀진다. 아직 이 사회가 역겨워 하는 것이 할머니 뻘 여자와 아들뻘 남자가 연애‘질’을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만약 그 금도(琴道)를 넘어서게 되면 그 앞의 금지 품목들은 자연스럽게 풀리지 않을까 하는 의도가 이 영화 속에는 숨겨져 있다. 당신이 만약 이 영화를 보는 시선에 전혀 거부감 같은 것이 없다면 우리 사회의 수많은 편견들, 특히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열린 시선을 갖춰 낼 가능성이 높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수법’이다. 이런 거 저런 거 다 집어치우고 ‘빛나는 순간’은 고두심의, 고두심에 의한, 고두심을 위한 영화이다. 고두심은 제주 출신이다. 제주 방언이 그녀의 입에 딱딱 들어맞는 이유다. 극 중간에 그녀가 카메라 앞에 혼자 앉아 독백을 하는 신이 있는데, 롱 테이크로 찍혀진 이 장면에서 고두심은 끝없이 얘기하고 울고 또 얘기하고 그런다. 그 긴 대사를 어떻게 외웠으며 그 긴 감정의 호흡을 어떻게 이어갈까 감탄이 이어진다.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배우라는 평가가 옳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장면이다. 그런 고두심을 보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순간’은 유용하고 유의미하다. 빛나는 순간을 빛나는 순간일 때 알아차리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생에서 빛나는 순간은 다 과거형이다. ‘다들 내게도 저럴 때가 있었어’, ‘내게도 그럴 때가 있었지’ 하는 식이다. 사랑을 할 때에는 빛나는 순간보다 어두운 순간이 더 많다. 괴롭고 힘들다. 상대에게 미안하고 죄스럽다가도 그런 마음을 안겨 준 상대가 미워지기도 한다. 그래도 사람을 바꾸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아무리 어려운 사랑이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과감하게 해 나가는 것, 그것이 실패하더라도 늘 시도하는 것이 더 낫다고들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랑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다 계획이 있다. 사랑이 답이다. 다들 뜨겁게 사랑하고 살라는 것이 이 영화 ‘빛나는 순간’이 주는 궁극의 주제이다.
학기가 끝나고 성적을 입력하면서 젊은 친구들에 대한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임시 교편’ 과정에서 좋은 학생들을 만났다. 한 번도 출석에 빠지지들 않았고 과제를 거른 적도 없으며 비대면 수업이지만 학습 태도들도 좋았다. 모두들 훌륭한 점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과제 명은 ‘올리버 스톤의 영화로 본 미국 현대사 1954~1974’이다. 올리버 스톤 감독이 변방의 한국에서 자신의 영화가 역사 공부에 쓰이고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영화감독으로서 나름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영화 중 ‘플래툰’과 ‘7월 4일생’ 그리고 ‘하늘과 땅’은 베트남전쟁사와 그와 연관된 미국 국내사를 들여다보는 데 있어 최적의 텍스트다. 특히 ‘플래툰’은 미군에 의한 미라이양민학살사건을 그리고 있고 이로 인해 미국 국내에서 반전 운동이 어떻게 확산되는지, 거기에 CBS TV 기자이자 앵커였던 월터 크롱카이트 등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올리버 스톤의 ‘베트남 3부작’은 통킹만 사건에서부터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반정부 게릴라가 연합한 구정 大공세, 치열했던 다낭 전투 등 전쟁 전사(全史)를 복기하며 그려 낸다. 한편 그의 또 다른 영화 ‘JFK’와 ‘닉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쿠바 미사일 사태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1959년의 쿠바 혁명 과정과 흐루시초프 시대의 소련을 뒤져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역사는 씨줄 날줄로 연결된다. 그 모든 일들은 존 F. 케네디의 암살이 누구의 손에 의해서 자행됐는지 린든 B. 존슨 대행 체제에서 어떻게 베트남전은 확전 됐고 또 어떻게 말콤 X가 살해되는 길로 연결됐으며, 민권법(흑인 참정권을 전면 보장하는 법안)이 통과됐음에도 불구하고 마틴 루터 킹은 왜 앨라배마 셀마 시에서 평화행진을 벌였는지, 그러던 그가 왜 결국 암살될 수밖에 없었고 같은 해 로버트 케네디는 또 왜 죽어야 했는지를 연결, 연결, 또 연결해서 공부해야 한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영향을 받은 체 게바라가 아프리카와 볼리비아를 다니며 또 다른 혁명을 꿈꾸다 사살되는 과정은 덤이자 외전(外傳)의 역사 이야기다. 역사는 방법이 없다. 특정 연대와 사건의 기록들은 무조건 외워야만 한다. 역사는 암기를 통해 기초가 형성되며 그럼으로써 전체 드라마를 그려 낼 수 있게 된다. 역사의 나무만 보느냐, 숲까지 다 볼 수 있느냐는 어쩌면 학생보다는 선생의 몫이다. 그렇게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학생들은 처음 듣는 지명(심지어 니카라과 같은 국가 이름), 처음 들어 보는 사건(이란-콘트라 사건), 처음 알게 된 인물(다니엘 오르테가나 올리버 노쓰)이 많다고들 했다. 무엇보다 이런 일들을 꼭 알고 살아야 하는 건지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배워 놓고 보니 앞으로는 더욱 알고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런 지점에서 이번 ‘특별 학기’는 꽤나 성공적이었다는 생각이다. 역사적 인지 능력을 시공간적으로 확대시키는 것이야 말로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박근혜로 이어지는 근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남한에서 이루어진 반공 역사관은 한편으로는 이른바 순화교육을 동시에 진행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김구와 윤봉길의 역사적 거사(巨事)에서 전투적이고 공격적인성향 혹은 그 정신을 숨기기에 급급한 면이 있다. 김원봉·김산 등은 아예 삭제시켰다.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둔갑시켜 그 역사성을 거세시켰다. 그러나 이들 모두 아나키스트이자 ‘극렬’ 테러리스트였다. 그들의 ‘테러’가 없었다면 한국의 역사는 씨가 말랐을지도 모른다. 일제에 의해 완전히 편입됐을 가능성이 높다. 폭탄 테러를 위해 택시를 불러 떠나는 윤봉길을 향해 김구가 말했다고 한다. “지옥에서 만납시다.” 학생들은 그때의 사건을 넘어 김구와 윤봉길의 마음속에 일던 그 광풍(狂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역사의 바람에 머리가 흩날릴 수 있어야 한다. 김구와 김원봉, 윤봉길의 격한 투쟁이 독립의 정신과 애국의 정신을 이어가게 했다. 그런데 남한의 오랜 반공 정권은 폭탄을 던지던 윤봉길의 실천적 모습보다는 그의 생애 등등이나, 그가 파평 윤씨 가문 출신이라는 점 등등 일상적 이미지로만 그리고 남기는데 급급했던 감이 적지 않다.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은 폭탄을 던지는 순간의 그의 행동, 그의 마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일종의 순화된 애국주의다. 국민을 그쯤에서 멈추게 하려는 의도된 역사교육이다. 윤석열이 윤봉길 기념관에서 대권 도전 선언을 한 것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될 일이다. 이건 역사를 욕보이는 일이다. 역사는 한번 욕보이면 버릇처럼 계속 욕보이게 되고, 결국 왜곡되기 때문이다.아이들이 친일파도, 혹은 친일적 사고를 가진 사람도, 윤봉길 기념관을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 있는 걸 보면서 기념관은 이제 그냥 공원이나 강당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윤봉길이 보여 준 그 격렬한 독립운동의 정신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해도 그렇게 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역사를 곡해시키려는 자, 구국을 논하지 말라. 구역질이 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