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은 큰 바위 하나를 일으켜 의적 임꺽정을 숨어 살게 하였다. 꺽정은 바위 동굴 속에서 한탄강 하류를 바라보며 서울을 도모하였다. 전곡 문산 장단 지나 임진과 합수하여 탄현에서 곧장 좌로 들어 한강을 치고 올라가면, 거기 백성의 나라가 눈물겹게 펼쳐져 있었으니, 백성의 왕보다 강한 권력을 가진 사대부를 모조리 참살하여 광화문 높이 걸고자 한 꿈. 사대부 우두머리 피 흐르는 모가지를 들고 어전에 뛰어들어가 왕의 무릎 아래 통곡하려던 꿈. 그리하여 임꺽정의 한탄강은 지금도 흐르고 있느니.
사람은 타인에 대한 아첨과 허영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신을 섬기기가 수월해지고, 그 반대의 경우 역시 진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마음을 졸이며 살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도록 살라. (류시 말로리) 남의 결점에 대해서는 불쾌하게 느끼면서도, 자신 속의 결점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법이다. 남의 얘기를 할 때, 그 사람을 흉보는 사람은 그게 바로 자신에 대한 얘기임을 알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보다 빨리 우리의 결점을 바로잡아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떨어진 거리에서 우리의 결점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당연히 그 결점이 싫어지기 때문이다. (라 브뤼에르) 선한 사람들이 편히 쉬는 곳은 그들의 양심이지 결코 다른 사람들의 입술이 아니다. 입을 다물고 있어도 비난하고 말이 많아도 비난하며 또한 말이 적어도 비난한다. 세상에 비난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법구경) 절대로 변명하지 말라. 진리를 존중하지 않는 친척보다 진리를 사랑하는 남이 더 낫다. 아무리 선량한 행위에도 어느 정도는 허영과 세상 사람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사람들은 ‘송파구 세 모녀 사건’이라고 불렀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지난 26일 오후 9시 20분께 송파구 석촌동의 한 주택 지하 1층에서 이 집에 살던 박 모(60)씨와 두 딸 A(35) 씨, B(32)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 현장에서는 현금 70만 원이 든 봉투와 함께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가 나와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나는 왜 이 세 모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장애인 가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머니가 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국민연금이 나올 시기도 아니고, 마땅한 직장조차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기초생활 수급자였으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국가에서 생계비 보조를 받았을 텐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성장한 두 딸이 있었는데 두 딸도 직장을 다닐 수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 혼자 식당일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세 모녀를 살릴 수 있는 대책이 없었나? 이 세 모녀는 왜 삶을 놓아버린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수치스럽게 했을까? 정말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나? 나는 만일 기본소득이 있었
정치가 사법부, 그것도 검경 밑으로 스스로 기어서 들어가는 꼴은 어제오늘의 참상이 아니지요. 여야가 전방위적으로 소통하여 난해한 국가적 이슈를 풀어가는 ‘멋진 정치’의 낭만이 있던 시대는 사라진 지 오래예요. 의사당에서 삿대질하면서 싸우는 것, 방송에 나와서 온갖 궤변 동원하여 시종일관 똑같은 주장만 펼치면서 시청자에게 고구마를 먹이는 것 말고 여야 정치인들은 도무지 소통을 안 해요. 오로지 밤낮 저질 청백전만 벌이죠. 날로 가열되고 있는 대선전이 드디어 특검(특별검사) 도입을 놓고 벌이는 새로운 막장극 국면으로 접어들었군요. 이른바 고발사주 의혹과 대장동 문제를 놓고 ‘쌍 특검’이니 뭐니 희한한 아이디어들이 속출하고 있네요. 정치권 논쟁이 고소·고발전으로 비약해 세월아 네월아 하고 유치한 공방전만 하염없이 벌이던 관성이 드디어 대선판으로 옮겨 붙은 건가요? ‘특검 대선’이라니, 보다보다 참 별 얄궂은 선거를 다 겪게 됐네요. 선거가 철저하게 네거티브 격투기 형태를 띠면서 등장빈도가 높아진 ‘만약에(If)’라는 가정법 종속접속사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어요. 상대방에 관한 털끝만 한 의혹만 생겨도 그걸 침소봉대하여 ‘만약에’를 앞에 붙여 찔러 물은 다음…
사회적경제기업은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자활기업 등 4종의 유형이었지만 2021년 7월, 중소벤처기업부가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개정해 ‘소셜벤처기업 지원제도 운영요령’을 제정하면서 소셜벤처에 대한 법적근거 시행과 함께 명실공히 소셜벤처가 사회적경제 활성화의 주체로 발돋움하고 있다. 소셜벤처란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으로서 사회성, 혁신성장성 등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사회적가치를 추구해야 하며, 기술혁신성과 시장성 등에 따른 사업성 역시 충분해야 한다. ‘사회성’과 ‘혁신성장성’ 점수 합계가 각각 70점 이상인 경우, ‘소셜벤처기업’으로 판별받게 되며, 자가진단표의 사회성 진단표 및 혁신성장성 진단표 점수 합계가 각각 60점 이상 시 신청이 가능하다. 기술보증기금은 창업 활성화 및 성장촉진을 위해 ’소셜벤처 판별표‘와 평가모형’을 활용, 소셜벤처가 추구하는 사회성과 혁신 성장성을 평가하여 소셜벤처를 판별하고 창업, 기술개발, 투자, 보증 등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중간지원조직은 중앙행정기관 또는 지방자치단체와 소셜벤처기업 간의 가교역할을 하며 소셜벤처의 협력과 연대촉진, 역량 강화 및…
선한 사람은 아무리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해도 남에게 슬픔을 주지 않기 위해 배려한다. 선한 사람은 자신에게 악을 행한 자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자신의 이웃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학식이 있다 한들 그것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사람이 아침에 남에게 악한 마음을 품는다면, 저녁에는 악이 그를 찾아올 것이다. (인도의 쿠랄) 우리는 악이 세상과 맺어져 있다 해서 그 세상에서 달아나서는 안 된다. 악은 우리의 것, 진리의 법칙에 대한 우리의 무지의 결과이다. 진리의 법칙에 대한 무지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불행하게 만들고, 가는 곳마다 불행을 만든다. 무엇보다 무지에서 해방되도록 노력하자. 그러면 우리의 불행은 저절로 물러갈 것이다. (류시 말로리) 악인은 남을 해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해치는 법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인간은 하늘이 내리는 불행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부른 불행은 피할 수 없다. (동양 속담) 누구나 자기가 남에게 이렇게 되라고 가르치는, 그런 사람이 스스로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기를 이기는 자가 다른 사람들도 이길 수 있다. 자기를 이기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참은…
완벽한 대본이라 해도 NG는 생긴다. 정해진 대사와 지문이라 해도 피할 길이 없다. NG는 대본 따라 연기하는 배우들만의 것이 아니다. 촬영을 멈추게 하는 요인은 의외로 많다. 도로를 통제해도 날아드는 비둘기를 막을 수 없고, 급작스러운 바람에 조명이나 소품이 넘어질 수도 있다. 정해진 것은 대본뿐이다. 정해진 대본에 맞춰서, 날씨와 장소와 시간과 상황과 감정을 연출하는 건 쉽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크게 다를 게 없다. 누구에게나 가슴에 품은 완벽한 대본이 있지만, 대본 따라 살아지는 건 아니다. 아이의 꿈이 또 무너졌다. 삼 년 째다. 아이의 침묵은 무너지는 빙산처럼 시리고 아득하다. 손을 뻗어보지만 헤아릴 길 없는 벽이다. 벽 너머에서 침묵이 눈처럼 쌓인다. 예고도 없이 쌓이는 눈 때문일까. 취준생 가족의 겨울은 목부터 얼어붙는다. 남은 한 장의 달력조차 칼날이 되어 가족의 목을 겨눈다. 재작년이 그랬고 작년 겨울 역시 그랬다. 이런 겨울은 아이가 꿈꾸는 대본 어디에도 없다. 없는 내용의 대본을 펼쳐 놓고 아이는 침묵과 마주한다. 마주한 둘의 틈을 누가 파고들 수 있을까. NG를 외치며 멈춰 세울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어깨동무를 하면
#불안하다. 영화 ‘부산행’으로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가 ‘반도’와 ‘방법: 재차의’ 등으로는 비교적 혹평을 받았던 감독 연상호가 이번엔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으로는 글로벌 순위 1위에 올랐다. 연상호의 화려한 부활이다. ‘지옥’ 뿐만이 아니다. ‘오징어 게임’은 여전히 2위이고 ‘갯마을 차차차’, ‘연모’, ‘마이 네임’ 등도 인기가 최고 수준이다. 다들 국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28개국, 많게는 70여 개 국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K콘텐츠의 인기가 최절정이고 상한가 중에 상한가다. 그런데도 왠지 불안하다. 이런 분위기가 과연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문화의 발전은 정치의 그것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 영화와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는 더욱더 그렇다. 중국의 영화계가 제5세대 감독(첸 카이거, 장예모)과 제6세대 감독(로예), 지하전영 감독들(지아장커)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왜 걸작의 불모지가 됐는 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시진핑의 권위주의 국가 시스템 때문이다. 정치가 닫히면 영화가 닫힌다. 일본의 영화와 드라마들이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하마구치 류스케 같은 감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변방으로 밀려났는지도 아
-외교적 결례? 누가 미안해야 하는가? 외교관계에서 역사를 언급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이걸 상대를 곤란하게 한다고 “결례”라고 하는 자들이 있다. 최근 이재명 후보의 “태프트-가쓰라 밀약” 발언에 대한 어느 언론의 공격은 “아는 체한다”였다. 실체도 없는 걸 가지고 이른바 “운동권적 궤변”을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자들과 세력은 정치적 공격을 위해 엄연한 역사적 진실조차도 왜곡하고 있다. 일본에 대해서도 그렇고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더더욱 역사논쟁을 벌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맹렬하게 비난한다. 그간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덕(恩德)을 모르는 망덕(亡德)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는 “역사 지식의 틈새”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건 “틈새”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황무지”다. 우리의 교육체계에서 역사과목은 날로 위축되고 있는 중이다. 사유의 깊이를 만들어낼 국민적 상식이 되어야 할 바가 단순 암기과목으로 처리되고 국영수에 밀려 변두리로 쫓겨나고 있은 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 이런 역사왜곡 전문가들의 기만이 통하기도 한다. 역사교육을 쥐고 있는 쪽이 그 사회의 정신과 영혼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중대한 영역을 이 나라 국가교육 체계는 철저하
글 쓰다 막힐 때는 시집들이 꽂혀있는 책장 앞으로 간다. 그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 아무 시집이나 꺼내 들어 아무 곳이나 펼쳐 든다. 날카롭게 벼린 시어 하나가 툭 튀어나와 막힌 생각을 뚫어줬으면 하는, 주술에 기대는 듯한 마음으로 뒤적인다. 오늘 손에 잡힌 시집은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좍 펼쳐지는 부분은 닳도록 읽은 시 ‘그대가 늙었을 때(When You are Old)’가 담긴 쪽이다. 예이츠가 평생 사랑했던 운명의 여인 모드 곤(Maud Gonne)에게 바친 시인데, 내가 아는 사랑의 시 중 이 이상의 절창이 있을까 싶다. 이탈리아의 가수이자 작곡가인 안젤로 브란두아르디(Angelo Branduardi)도 이 시에 반해 노래로 만들었다. 기타 전주는 사랑 고백을 앞두고 떨리는 사내의 심장 소리 같고 노래는 오랫동안 삭힌 그리움, 두려움을 들킨 순정한 사내의 마음이 느껴진다. 노랫말은 예이츠 시를 거의 그대로 썼다. ‘그대 늙어 머리 희고 졸음이 많아져 /난로 앞에서 고개를 꾸벅일 때/ 이 책을 가져가요/ 그리고 천천히 읽으며/ 그대 눈이 한때 지녔던 부드러운 눈빛, 깊은 그림자를 꿈꿔봐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대의 기품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