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역사학과는 대개 인문계열에 소속되어 있다. 역사학을 인문학의 범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라고 하면 문사철을 떠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학은 정말 인문학인가? 역사학자들이 인문대학 등 인문계열 소속으로 되어 있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으로써 굳어진 인식이다. 역사학을 인문학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역사에는 일관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대신에 인문학을 교양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교양인의 조건에 인문학과 예술은 필수이지만, 자연과학이 배제되는 건 우습다. 자연현상의 이치에 대해 무지하고도 교양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학자나 철학자들이 기득권 보호 차원에서 인문학을 지배계급의 넓은 교양으로 간주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는 19세기 유럽의 분위기에서 등장한 실증사학의 영향이 크다. 역사를 단순히 사실의 집적과 나열로 인식하는 것이다. 역사학의 대상은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이다.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해 모여 살게 된 이후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역사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역사학의 대상이 그러한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역사서의 대
‘한옥 마당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오실래요?’ 지난 주말, 피아니스트 지인으로부터 하우스 콘서트 초대장을 받았다. 비로소 코앞에 다가온 ‘위드 코로나’가 실감되었다. ‘좁은 공간에서 다닥다닥 붙어 앉아 관람하는 것이 특징’인 하우스 콘서트라 엄중한 코로나 시기에 숨 죽을 수밖에 없었다. 1년 넘게 갈 수 없었던 하우스 콘서트 소식에 기대와 설렘이 교차했다. 처음 하우스 콘서트를 알고, 찾아다니던 때도 같은 감정이었다. 20여 년 전, 유럽 배낭여행 중 ‘하우스 콘서트’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음악회라 하면 공연장은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을, 무대는 클래식 연주를 떠올렸던 내게 개인 집 정원이나 동네 카페, 성당 등 작은 공간에서 소수의 사람이 모여 가볍게 여는 하우스 콘서트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월드뮤직 무대도 자주 열렸다. 이탈리아 지방 바닷가 마을 오시모에서 만난 하우스 콘서트장은 개인집의 마룻바닥 거실이었다. 대여섯 평 됐을까. 스무 명 가까운 관람객은 옆 사람과 붙어 앉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관람석 바로 앞에 선 연주자의 숨소리와 땀냄새가 느껴졌다. 악기 소리가 마룻바닥을 타고 온몸에 전해져 감전되는 경험을 하면서 ‘최고의 무대는 대형공연장 로얄
-연예뉴스로만 소비되는 <오징어 게임>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넷플릭스에 올라 세계적 유명세를 발휘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단지 화젯거리 연예 뉴스로만 소비되고 있는 중이다. 정작 이 드라마는 엄청난 정치사회적 메스를 우리 사회의 목덜미에 예리하게 들이대고 있는데 그런 건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야만을 찔러댄 영화가 자본주의의 문화통치에 빨려 들어가 버린 꼴이다. 영화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는데 현실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걸 오락처럼 즐기고 있다. 자본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는 언론들은 ‘뽑기’로도 불리는 ‘달고나’가 어디에서 얼마나 팔리는지를 궁금하게 만들고 있으며, 외국인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열심히 따라 하고 있는 장면을 호기심거리로 제공하는 작업에 몰두할 뿐이다. 이 영화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비극, 벼랑 끝에 몰린 빈곤의 현장과 그 비명소리는 철저하게 외면한다. <오징어 게임>에서 보여주고 있는 갖가지 게임은 아이들의 놀이를 모방했다. 그러나 그건 그냥 놀이가 아니라 생존투쟁이다. 여기서 승패는 곧 생사의 문제가 된다. 죽음은 정확하게 조
전쟁의 모든 참화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고, 그것의 가장 큰 악의 하나는 인간의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는 것이다. 군대가 존재하고 군사비가 지출되는 것을 어떻게든 설명해야 하는데,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이성이 비뚤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강 건너편에 살고 있고, 그의 황제가 내 황제와 싸우고 있다는 이유로 그와 나 사이에 무슨 나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에게 나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얘기가 또 있을까? (파스칼) 사람들이 전쟁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4세기 전에 피사와 루카의 주민들은 서로 맹렬하게 미워했는데, 마치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피사의 짐꾼까지도 신분이 높은 루카 시민에게 뭔가 신세를 지는 것을 피사에 대한 수치스러운 배신이라고 여겼다. 지금 그 적개심의 흔적이 어디엔가 남아 있을까? 마찬가지로 현재의 프러시아인의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에는 장차 무엇이 남을까? 그러한 감정이 장차 우리의 자손에게, 마치 아테네인의 스파르타인에 대한 증오심이나 피사의 주민의 루카 주민에 대한 증오심과 마찬가지로 보일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다. 사람들은 이윽고 자신들에게는 서
1.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전망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재집권에 대한 적신호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10월 11, 12일 한국갤럽 여론조사는 다음 선거에서 정권 교체를 원한다는 응답이 56.7퍼센트임을 알리고 있다. 민주당 정부 계속 집권을 원하는 응답은 고작 35.6퍼센트다. 우려되는 것은 중장기 추세다. 동일 조사기관의 지난 8월 조사에서 정권교체 지지 여론은 47퍼센트였다. 이 수치가 9월에 49퍼센트로 높아졌다가 10월 5일~7일 조사에서 52퍼센트로 다시 상승했다. 그러다가 엿새 만에 무려 4.7퍼센트라는 급속한 증가를 보인 것이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기관의 발표가 대동소이하다. 이런 흐름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다. 도대체 문재인 정부는 어느 지점에서부터 민심의 신뢰를 잃고 있는 건가. 사람들은 2가지를 지적한다. 첫 번째는 인사 문제요 두 번째는 부동산 폭등 문제다. 2. 홍남기 기재부 장관이 10월 8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실토를 했다. 올해 31조 5000억 원의 초과세수가 발생했다고. 2021년 본예산 편성 시점과 비교해서 무려 11.2 퍼센트에 달하는 세금을 더 걷은 게다. 장관 자리를 내걸고 재난지원금 전 국민 일괄 지원을 좌절시키면서 그가 내건…
그림이나 사진은 때때로 글보다 더 강력한 매체가 된다. 언론의 목적인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리거나 어떤 문제에 대해 여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글보다 더 강한 이미지를 만든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림이나 사진이 기록, 교육, 권력 등에 활용된 여러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사례는 동굴벽화와 암각화이다. 인류는 글이 만들어지기 전 그림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우리나라의 울주 반구대 암각화는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무덤벽화는 사서(史書)가 기록하지 못한 풍부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사례는 종교화와 역사화이다. 유럽 중세 기독교는 히브리어 와 헬라어로 된 성경을 읽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해 성경의 내용을 전하는 방법으로 성당의 벽과 창을 조각(부조) 및 그림(모자이크화, 스테인드글라스)으로 채웠다. 우리나라 고려시대 사경(寫經)에는 반드시 불경의 내용이나 교의를 함축한 변상도(變相圖)를 맨 앞에 두었다. 이러한 그림의 교육적 활용은 중세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데, 교훈을 담은 역사화가 지속적으로 제작되는가 하면 시민혁명으로 탄생한 프랑스 혁명 정부가 루브르 궁을 세계 최초의 공공미술관으로 개방한 이유도 그림을 포
이재명 경기지사가 민주당 차기대선 후보로 공식 선출되었다. 대선후보 경선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튀어나온 대장동 의혹사건을 정면 돌파하며 얻은 승리였다. ‘침묵’을 지키던 이낙연 씨가 승복함으로써 ‘잡음’도 사라졌다. 이번 민주당 후보경선 과정을 보면 큰 변수는 없었지만 마지막이 ‘드라마틱’했다. 서울지역 3차선거인단 투표에서 이낙연 후보가 62.37%를 얻어 28.3%를 얻은 이재명 후보에 두 배 이상 앞섰기 때문이다. 1~2차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재명 후보는 20% 이상의 차이로 이낙연 후보를 압도하고 있었고, 그 어떤 여론조사에서도 이낙연 후보에 뒤진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대장동 의혹사건 영향으로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별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다. 그 건으로 이재명 후보 지지자가 갑자기 대거 이탈했다면 이후보와 지지자가 거의 겹치는 추미애 후보의 득표율이 크게 올랐어야 한다. 결과를 보면 오로지 이낙연 후보의 지지율만 급격하게 올랐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민주당의 선거인단에는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 역선택이 가능한 구조다. 대장동 의혹이 갑툭튀! 불거지는 과정도 수상했
신은 기도를 드리고 아첨을 떨어야 하는 우상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해야 하는 이상(理想)이다. (류시 말로리) (* 한자어 理想은 ‘생각을 분별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옮긴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신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신을 알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오직 이 사실 위에서만 모든 사람들에 대한, 또 자신에 대한, 나아가서는 초지상적, 초시간적인 생명에 대한 관계가 확립된다. 나는 그것을 신비주의로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그것과 반대되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신비주의이며, 그 사고방식 자체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하고 엄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신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신이란 내가 자신을 그 일부로 의식하는 무한한 존재이며, 전체라고. 신은 나에게는 정진의 목표이고, 그것을 향해 정진하는 것이 바로 나의 삶 그 자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도저히 그것을 이해하거나 이름을 부르거나 할 수는 없는 지고한 존재이다. 만약 내가 신을 이해했다면 나는 이미 신에게 도달했을 것이고, 그러면 정진의 목표도 없어지므로 내 삶도 사라질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어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즉 ‘10·4 선언’을 남북한 정상이 공동으로 채택하고 전세계적으로 발표하였다.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 민족공동의 번영과 통일을 실현하는데 따른 제반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협의한 결과물로 요즈음 논란이 되고 있는 ‘종전선언’에 대한 합의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일부 조항에 대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10·4 선언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있는 한반도 평화번영과 통일로 가는 교과서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채택이후 우리 정부의 교체가 있었고 북한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10.4 선언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은 당초 8월에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당시 대동강이 범람하는 등 평양의 대홍수로 인해 10월로 연기되었다. 남북간 합의 이행을 위해서는 분야별 후속 실무회담을 통해 이행방안을 마련하는 게 일반적인데 10월에 정상회담이 개최되다 보니 후속협의 진행기간이 12월 대통령선거와 정부 교체기간과 겹치게 되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정부가 이전 정부에서 북한과 합의한 사
20년 전에는 학교에서 주는 것들이 거의 없었다. 색종이나 가위처럼 필요한 것들은 준비물로 가져와야 했고 없으면 혼나고 나서 친구 물건을 빌려 써야 했다. 저학년 때까지는 도시락을 싸서 다니다가 고학년 때 전학을 가면서 처음 급식이란 걸 해봤다. 그런 급식도 돈을 내고 먹었으니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했다. 요즘은 학교 활동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아이들에게 준다. 잔반이 너무 많이 남아서 교장 선생님을 슬프게 하는 급식도 주고, 준비물은 갑작스럽게 필요한 게 아니면 미리 준비해놨다가 아이들에게 제공한다. 이번에는 아이들에게 주는 것은 과일 컵이다. 교육부에서 2024년부터 학교에서 컵 과일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과일을 쉬는 시간에 먹게 하거나 급식에 과일을 추가해서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장 내년부터 초등 6학년을 대상으로 시행해본 다음에 점차 학년을 늘려나가겠다는 게 교육부의 계획이다. 기사 내용을 살펴보니 사업의 초기 아이디어는 과수 농가 소비 촉진을 위해서 나왔다. 어려운 농가를 돕고 성장기 아이들에게 다양한 영양 공급원을 제공하자는 취지 자체는 좋은 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학교 현실을 바라보면 이게 마냥 좋은 일인지 잘 모르겠다. 과일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