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대본이라 해도 NG는 생긴다. 정해진 대사와 지문이라 해도 피할 길이 없다. NG는 대본 따라 연기하는 배우들만의 것이 아니다. 촬영을 멈추게 하는 요인은 의외로 많다. 도로를 통제해도 날아드는 비둘기를 막을 수 없고, 급작스러운 바람에 조명이나 소품이 넘어질 수도 있다. 정해진 것은 대본뿐이다. 정해진 대본에 맞춰서, 날씨와 장소와 시간과 상황과 감정을 연출하는 건 쉽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크게 다를 게 없다. 누구에게나 가슴에 품은 완벽한 대본이 있지만, 대본 따라 살아지는 건 아니다. 아이의 꿈이 또 무너졌다. 삼 년 째다. 아이의 침묵은 무너지는 빙산처럼 시리고 아득하다. 손을 뻗어보지만 헤아릴 길 없는 벽이다. 벽 너머에서 침묵이 눈처럼 쌓인다. 예고도 없이 쌓이는 눈 때문일까. 취준생 가족의 겨울은 목부터 얼어붙는다. 남은 한 장의 달력조차 칼날이 되어 가족의 목을 겨눈다. 재작년이 그랬고 작년 겨울 역시 그랬다. 이런 겨울은 아이가 꿈꾸는 대본 어디에도 없다. 없는 내용의 대본을 펼쳐 놓고 아이는 침묵과 마주한다. 마주한 둘의 틈을 누가 파고들 수 있을까. NG를 외치며 멈춰 세울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어깨동무를 하면
#불안하다. 영화 ‘부산행’으로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가 ‘반도’와 ‘방법: 재차의’ 등으로는 비교적 혹평을 받았던 감독 연상호가 이번엔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으로는 글로벌 순위 1위에 올랐다. 연상호의 화려한 부활이다. ‘지옥’ 뿐만이 아니다. ‘오징어 게임’은 여전히 2위이고 ‘갯마을 차차차’, ‘연모’, ‘마이 네임’ 등도 인기가 최고 수준이다. 다들 국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28개국, 많게는 70여 개 국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K콘텐츠의 인기가 최절정이고 상한가 중에 상한가다. 그런데도 왠지 불안하다. 이런 분위기가 과연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문화의 발전은 정치의 그것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 영화와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는 더욱더 그렇다. 중국의 영화계가 제5세대 감독(첸 카이거, 장예모)과 제6세대 감독(로예), 지하전영 감독들(지아장커)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왜 걸작의 불모지가 됐는 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시진핑의 권위주의 국가 시스템 때문이다. 정치가 닫히면 영화가 닫힌다. 일본의 영화와 드라마들이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하마구치 류스케 같은 감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변방으로 밀려났는지도 아
-외교적 결례? 누가 미안해야 하는가? 외교관계에서 역사를 언급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이걸 상대를 곤란하게 한다고 “결례”라고 하는 자들이 있다. 최근 이재명 후보의 “태프트-가쓰라 밀약” 발언에 대한 어느 언론의 공격은 “아는 체한다”였다. 실체도 없는 걸 가지고 이른바 “운동권적 궤변”을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자들과 세력은 정치적 공격을 위해 엄연한 역사적 진실조차도 왜곡하고 있다. 일본에 대해서도 그렇고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더더욱 역사논쟁을 벌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맹렬하게 비난한다. 그간 우리에게 베풀어준 은덕(恩德)을 모르는 망덕(亡德)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는 “역사 지식의 틈새”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건 “틈새”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황무지”다. 우리의 교육체계에서 역사과목은 날로 위축되고 있는 중이다. 사유의 깊이를 만들어낼 국민적 상식이 되어야 할 바가 단순 암기과목으로 처리되고 국영수에 밀려 변두리로 쫓겨나고 있은 지 이미 오래다. 그래서 이런 역사왜곡 전문가들의 기만이 통하기도 한다. 역사교육을 쥐고 있는 쪽이 그 사회의 정신과 영혼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중대한 영역을 이 나라 국가교육 체계는 철저하
글 쓰다 막힐 때는 시집들이 꽂혀있는 책장 앞으로 간다. 그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 아무 시집이나 꺼내 들어 아무 곳이나 펼쳐 든다. 날카롭게 벼린 시어 하나가 툭 튀어나와 막힌 생각을 뚫어줬으면 하는, 주술에 기대는 듯한 마음으로 뒤적인다. 오늘 손에 잡힌 시집은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좍 펼쳐지는 부분은 닳도록 읽은 시 ‘그대가 늙었을 때(When You are Old)’가 담긴 쪽이다. 예이츠가 평생 사랑했던 운명의 여인 모드 곤(Maud Gonne)에게 바친 시인데, 내가 아는 사랑의 시 중 이 이상의 절창이 있을까 싶다. 이탈리아의 가수이자 작곡가인 안젤로 브란두아르디(Angelo Branduardi)도 이 시에 반해 노래로 만들었다. 기타 전주는 사랑 고백을 앞두고 떨리는 사내의 심장 소리 같고 노래는 오랫동안 삭힌 그리움, 두려움을 들킨 순정한 사내의 마음이 느껴진다. 노랫말은 예이츠 시를 거의 그대로 썼다. ‘그대 늙어 머리 희고 졸음이 많아져 /난로 앞에서 고개를 꾸벅일 때/ 이 책을 가져가요/ 그리고 천천히 읽으며/ 그대 눈이 한때 지녔던 부드러운 눈빛, 깊은 그림자를 꿈꿔봐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대의 기품을 사
“단순히 말하고 쓴다고 모두 언론이라고 할 수 없다. 진실을 공정하고 이성에 맞게 정확하게 (전하고), 강자와 지배자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민과 공공의 현명한 판단 자료가 되는 양질의 정보를 책임감 있고 불편부당한 자세로 제공해야 비로소 (언론이라 할 수 있다.)... 언론은 수없이 숭고한 생명과 정신이 피 흘려 싸운 결과로 얻어진 고귀한 이름이다.” (리영희 선집 ‘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 2020, 452~453쪽, 괄호 안은 필자가 넣음) 요즘 언론인들은 공공연히 ‘기레기’로 불린다. 이는 시민들이, 품격마저 잃고 불평등 구조의 개혁과 사회적 진보에 맞서는 기득권 세력과 한 패가 된 언론 현실을 풍자하며 붙여준 명예롭지 못한 별명이다. 필자 또한 언론인으로서 가없이 부끄럽다. 언론행태에 대한 비판은 검찰개혁 이슈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부패와 독선으로 점철된 검찰 비리에 대한 개혁 목소리에도 언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사실상 ‘살아 있는 권력’으로 꼽히는 검찰, 극우 정치세력과 손을 맞잡고 시민들의 정당한 개혁 요구를 왜곡보도로 맞받아쳤다. 조중동의 보도에서는 이제 민주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되찾아 오기 위해…
선은, 받는 자에게 필요한 정도나 베푸는 자의 희생의 정도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성립되는 신과의 합일의 정도에 의해서만 헤아릴 수 있다. 삶은 반드시 선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좋은 삶만이 선하고 행복하다. (세네카)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선보다 자신이 입을 피해를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은 금방 잊혀지지만, 모욕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세네카) 우리가 대가를 기대하면서 의무를 행할 때, 그것은 선이 아니라 기만에 찬 선의 모형, 선의 유사품이다. (키케로) 비난과 불명예가 거꾸로 너를 덮치지 않도록 남을 비방하지 말라. 악령은 앞에서 덤벼들지만 비방은 언제나 뒤에서 몰래 덮친다. 분노에 몸을 맡기지 말라 분노에 몸을 맡긴 사람은 자신이 할 일을 잊고 자신의 선행을 놓치기 마련이다. 근면하고 과묵하며, 자신의 노동으로 살고, 자기가 생산한 것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저축하라. 그러한 습관은 네 행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어리석은 자와는 시비를 따지지 말라. 악인한테는 돈을 빌리지 말라. 비방하기 좋아하는 자와는 함께 일하지 말라. (동양 금언) 하나의 선행을…
김한길 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윤석열 캠프에 합류하는 문제를 두고, 김종인 전 위원장이 반대의 목소리를 냈던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한길 전 대표는 호남 출신 정치인은 아니지만, 새천년민주당의 김대중 총재 비서실장을 역임할 정도로 동교동계의 핵심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평생 동안 정치를 함께했던 동교동계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와 함께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다.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것은 이들 동교동계 정치인들의 이념 성향이,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중도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박주선 전의원과 김동철 전의원 그리고 김한길 전 대표가 국민의힘 선대위에 합류한다는 것은, 호남과 중도층으로의 지지층 확대를 꾀한다는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김종인 전 위원장도 중도와 호남에서의 지지층 확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김종인 전 위원장이 할 일과, 김한길 전 대표를 비롯한 동교동계 정치인들의 역할이 일부 중복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에서 일각에서는, 김종인 전 위원장과 윤석열 후보 사이에 힘겨루기가 있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즉, 윤석열 후보 측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자 '축제'다. 시민들은 그 축제를 통해 자신들의 희망을 투영시키고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축제 중에서도 대통령 선거가 단연 으뜸이다. 한 국가의 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끊임 없이 시민들과 호흡하는 과정이다. 유세 현장은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환호로 함성이 들리고, 언론에서는 연일 그 모습을 다룬다. 호흡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은 현재의 어려운 삶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고 선거를 바라본다. 민주화를 이룩하고자 했던 열망은 박정희에 이은 전두환 군사독재를 끝내고 DJ·노무현 정부를 탄생시켰고, 탐욕에 이은 문고리 정치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은 촛불을 통해 문재인 정부를 출범시켰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국민들의 바람이었다. 그런데 이번 20대 대통령 선거에선 그런 축제의 모습은 커녕 이곳저곳에서 의혹과 한탄의 목소리만 들려온다. "뽑을 사람이 없다"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나온다. 특히 각종 여론조사에서 20~30대, MZ세대의 '지지 후보 없음' 여론 조사 결과는 대한민국의 미래 중추들이 느끼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과감없이 보여준다. 여당의 이재명 후보는 성남시장 시절 진행된 대장동…
우리가 지난날을 괴로워하며 미래를 망치는 것은 오로지 현재를 경시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는 환상이며 현재만이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이다. 현재에 모든 정신을 기울여라. 우리는 오직 현재 속에서 영원을 인식한다. (괴테) 가장 흔한 망상의 하나는 현재를 가장 절실하고 결정적인 순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 하루가 1년 중에 가장 좋은 날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하라. (에머슨)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을 존경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조상은 더욱 훌륭했다”고. (탈무드)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의 자신의 그릇(육체)을 이용하라. 내일이면 깨질지도 모른다. (탈무드) 너는 과연 네가 해야 할 일을 했는가? 그것은 참으로 크고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네 삶의 유일한 의미는, 너에게 주어진 짧은 생존 기간 동안에 너를 이 세상에 보낸 자가 바라는 바를 행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탈무드) 원래 과거와 미래는 없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언제, 그 환상의 왕국을 탐험했다는 말인가! 있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다. 내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세계 2차 대전 말기 독일의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유대인 시몬 비젠탈(Simon Wiesenthal)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는 강제 노역을 나가는데 수용소 내의 간호사가 그를 불렀다. 그녀를 따라간 비젠탈은 전쟁의 폭격으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나치 친위대(SS) 병사의 임종을 지키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죽어가기 직전의 친위대원은 자신의 악행을 고해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유대인 ‘아무나’가 필요했고 그날 지목되어 온 ‘아무나’가 비젠탈이었다. 친위대원이 고백하는 내용은 유대인들을 교회당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밖으로 뛰쳐나오는 유대인들에게 총을 난사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행한 행위로 인해 많은 번민과 고통 속에 있다가 이제 죽기 직전에 유대인에게 고백함으로써 용서를 받고자 한 것이었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비젠탈은 고민했다, 죽기 직전의 그에게 용서한다고 말해서 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동족을 무참히 죽인 그 나치를 여전히 증오해야 하는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병실은 나온 비젠탈은 자신의 대응에 또 다른 번민에 싸였다. 전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