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확산으로 학교에서도 개학연기로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고 있으나 학원을 찾는 학생들이 있어 우려가 된다. 교육당국에서는 ‘우리 집 온라인 클래스’ 와 같은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 및 컨텐츠를 활용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또, ‘학교가자.com’와 같은 온라인 초등학생 학습시스템으로 집에서 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즐겁게 소통하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자발적인 교사들의 미담사례도 들려온다. 하지만, 교과학습지원에서 더 나아가 가족과 함께 여유를 갖고 자기 자신의 진로를 생각해보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더 의미 있을 것 같다. 지나친 경쟁으로 왜곡된 교육을 바로잡고 학교폭력 등 다양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할 때 우리의 안목은 넓어지고, 성숙해질 것이다. 최진석 교수는 건너가려면 우선 자기가 서 있는 곳에 대한 믿음과 확실성을 부정해야하며, 지혜가 없으면 부식된 곳에 계속 머무르려 하고 지혜가 있으면 건너가려 한다고 했다. 언제까지 교육이 이렇게 주저앉아 머무르려 해야 하나? 건너가려면, 미래교육으로 한 발 더 나가려면 교육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생각해야 질문할 수 있고 질문해야 더 나은 미래로 나갈 수 있다. ‘가만히 있으라’는
벌써 한참이 지났지만 2002년 서울 월드컵은 생각만 해도 엔돌핀이 나올 정도로 즐거운 일이다. 국가대표 축구팀의 승전보는 온 나라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축구 강국들을 하나씩 격파할 때마다 반신반의하던 국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붉은 악마가 되어 환호했다. 한국팀은 파죽지세의 전투력으로 처음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준결승에 진출했다. 세계 4강에 오른다는 것은 언감생심, 애초에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하지만 국가대표팀은 해냈고, 그것을 계기로 한국축구는 세계적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러면 무엇이 세계 4강을 가능케 했을까? 선수들의 투지, 감독의 전략, 국민적 열망과 응원, 홈그라운드 이점…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터다. 그 중에서 하나를 꼽는다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히딩크라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히딩크 없는 세계 4강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히딩크는 한국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후 몇 번씩이나 목이 날아갈 뻔했다. 외국팀과의 평가전에서 계속 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5대0으로 몇 번 깨지고 난 후 그의 별명은 ‘오대영’이 되었다. 언론과 여론이 가만있을 리…
우리나라 이민은 1902년 12월22일 121명이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1903년 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미국 땅을 밟은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16명은 송환되고 남자 48명,여자 16명,어린이 22명 등 모두 86명만이 상륙했다. 운항도중 질병과 사망으로 35명이 입국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횡포로 하와이 이민이 금지된 1905년 말까지 약 7천여명이 이런 식으로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의 이민사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더 오래 됐다. 기근이 들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들어간 사람이 많았던 1860년경을 우리 해외 이주의 시작으로 보는 사학자도 있다. 그런데도 하와이 이민을 최초라 하는 것은 나라를 세운 후 처음으로 추진한 공식 인력송출 이어서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멈췄던 우리의 이민은 1960년대 활짝 열리게 된다. 중남미 이민도 이때 시작됐다. 그 첫 테이프는 브라질 이민단이 끊었다. 1962년 12월18일 107명이 부산항을 출발, 브라질로 이민을 떠난 것이다. 당시 브라질은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었다. 특히 국토가 남미대륙의 절반에 가까운 데다 광활한 밀림과…
‘졸혼’이란 ‘혼인 관계를 졸업하다’는 의미로 이혼하지 않고 법적으로 부부관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사는 공간과 각자의 생활, 취미 등을 간섭하지 않는 형태이다. 졸혼이라는 말은 2004년 일본의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彬山 由美子)가 ‘졸혼을 권함’이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한 신조어(新造語)이다. 졸혼을 결정한 부부들은 한집에 함께 살면서 서로 간섭만 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따로 살면서 가족 행사 등에서 만난다. 문학평론가 김성수는 졸혼에 대해 ‘가정이 깨어진대도 법적 정리를 못해 차선책으로 선택하는 것이 졸혼의 실체’라고 말한다. 그러나 졸혼의 형태는 원만한 사이의 부부라도 ‘자기 주도적 삶’을 영위하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위기의 부부들이 이혼의 대안으로 졸혼을 선택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졸혼: 결혼관계의 재해석’의 저자인 강희남은 ‘졸혼이 황혼이혼의 신드롬을 진정 시켜주는 대안이 될 것이며 혼인과 이혼사이 졸혼이 존재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낡은 결혼을 졸업할 시간, 졸혼 시대야 말로 나와 가족이 더 행복해지는 관계혁명이 될 수도 있다. ‘졸혼’은 100세 수명시대 삶 중에서 생애 후반기, 즉 평생의 본업에서 손을 놓거나 정년퇴직하고 난
2004년 수원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가 낡은 책 3권을 습득했다. 그때 마침 그것을 본 사람이 헐한 가격으로 구입했고 2006년 텔레비전의 감정 프로그램에 등장하여 다산 정약용 선생의 ‘하피첩’인 것이 알려졌다. 이후 이것은 2010년 10월 보물로 지정되고 2015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낙찰받았다. 낙찰가액은 무려 7억5천만원. 하피첩의 서문을 보면 저간의 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는데, 그것은 시집올 때의 훈염(예복)으로 붉은빛은 흐려지고 노란빛은 옅어져 글씨 쓰는 바탕으로 알맞았다.” 다산은 아내가 보내온 붉은 색 바랜 낡은 치마를 70여장으로 자르고 다듬어 B5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치마폭마다 종이를 붙여 빳빳하게 첩(帖)을 만들어 하피첩이라 이름지었는데, 다산의 말대로 이는 곧 홍군(紅裙, 붉은 치마)을 달리 표현한 말이라 볼 수 있다. 이 하피첩에 남은 두 아들을 위해 간곡한 자신의 심정을 적었다. 하피첩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다산은 제일 먼저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첫 대목에 ‘효제위행인지본(孝弟爲行仁之本)’이 보인다. 효제(孝弟)가 인(仁)을 실천하는 근본이란 의미
코로나19 사태로 온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대구·경북지역에 이어 여러 곳에서 집단감염이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국민들의 건강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증가하고 있다. 학교와 각종 공공시설이 문을 닫고 천주교계와 조계종·원불교 등 불교계가 모든 미사와 법회를 중단했다. 개신교의 많은 교회도 주일예배 등을 온라인으로 대체했다. 온라인예배를 하면서 모은 헌금을 대구·경북 지역을 위해 전액 기부하겠다는 교회도 있다. 이에 정부도 종교계의 적극적 참여에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국민 모두의 안전을 위해 모든 종교계의 신중한 판단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한국교회총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종교집회 자제를 재차 요청했다. 지금은 코로나19 확산과 장기화의 중대한 고비이므로 당분간 종교집회를 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종교계의 협조를 요청했다. 경기도와 수원시 등 각 지방 정부들도 적극적으로 집회 취소 권고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개신교 교회들이 여전히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교회가 예배를 중단한 경우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예배는 유지되어야 한다’, ‘한번 중단된 예배는 쉽게 재개되기 힘들다’, ‘예배중단이
‘산학연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최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따라서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입주한 외국대학들이 국내 기업과 산학협력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8일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이로써 송도 인천글로벌캠퍼스에 입주한 한국뉴욕주립대, 한국조지메이슨대, 겐트대 글로벌캠퍼스, 유타대 아시아캠퍼스, 뉴욕패션기술대 등 5개 외국대학도 국내 기업과 산학협력을 추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밝혔다. 또한 국내 기업이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외국대학의 우수 연구인력과 연계해 산학협력 활동을 활성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스런 일이다. 사실 지금까지 이들 대학은 국내 대학과 달리 산업 교육기관에 포함되지 않아 산학협력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이 때문에 외국대학들은 관련 법규 완화를 지속해서 건의해 왔으나 번번히 무산 됐었다. 혁신적인 산업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 하기 위해선 미래의 산업을 이끌어갈 인재 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대학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산학협동이 필수적이다. 산학협력정책의 취지는 산학협력단이 법인체로서 대학의 산학협력에 관한 계약의 당사자가 되어 법적 책
당 태종(재위724~749) 이세민은 스스로 인간 최고의 지위에는 올랐지만, 근심 걱정이 끊임이 없었다. 도처에서의 반란이며, 도탄에 빠진 백성걱정, 호시탐탐 적국의 침략에 대한 걱정 등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는 못하였다. 어느 날 ‘사주가 같으면 팔자도 같은지’ 궁금하여 자신과 같은 사주를 지닌 사람을 찾도록 신하에게 명하자 두 사람을 대령하였다. 태종이 사는 형편을 묻자, 한 사람이 먼저 이르기를, “폐하 저는 꿈만 꾸게 되면 천하의 재물이 제 것이요, 만조백관과 삼천 궁녀를 거느리고 지내오나 꿈을 깨면 먹는 것도 어려워 근근히 지내 옵니다.” 자신은 현실에서는 궁핍하지만 꿈 속에서는 천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이 이르기를 “신은 아들이 여덟 명인데 모두가 만석꾼입니다. 정월 초하루부터 칠일마다 한 번씩 아들 여덟명이 번갈아 가면서 비단옷이며 진수 성찬으로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천자인 나보다 더 복이 많은 듯 하니, 걱정을 좀 만들어 주어야 겠다’ 라는 속셈을 지니고 태종은 야광구슬을 하나씩 나누어 주며 “우리가 한낱한시에 태어났으니, 매년 봄마다 한 번씩 만나 놀아 보세나, 그날은 반드시 지금 주는 이 야광구슬을 꼭…
옥산서원에는 회재 이언적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회재는 이언적의 호이며 이언적은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491년에 태어난 이언적은 중종9년(1514) 23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순탄할 줄만 알았던 그의 관료생활은 40세(1531)가 되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조선시대 언론기관에 해당하는 사간원에 근무 중이었던 이언적은 당시 실세였던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언적은 고향으로 돌아와 독락당을 짓고 다시 관직에 나오기까지 약 7년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언적이 다시 조정으로 나아간 것은 김안로가 죽고 난 뒤인 46세(1537) 때였다. 이후 그의 벼슬길은 승승장구 하지만 을사사화에 연루돼 56세(1547)의 나이에 또 다시 유배를 떠나게 된다. 평안도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이언적은 62세(1553)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6년간의 강계생활에서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구인록’도 이 시기에 완성된 것이다. 사후 13년이 지난 뒤에야 그의 신분은 다시 복권되었고, 다시 2년 뒤인 선조1년(1568)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이후 종묘에 배향(선조2년· 1569)되었다. 광해군…
청와대 국민청원에 ‘한전 사업에 중국 기업의 참여를 허락하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라는 글이 올라와 있다. 2월 26일 게재된 청원인데 5일 동의 인원이 30만 명에 육박했다. 청원 내용은 우리나라의 공기업인 한국전력공사 발주 공공 전력사업에 중국 업체 입찰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국내 기업의 입찰로 사업을 진행하도록 해달라는 내용이다. 청원자는 “코로나19 때문에 경제가 휘청거리는 이 시국에 한 나라의 공기업인 한국전력공사가 국내 기업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유례도 없는 중국 기업의 입찰을 허용시켜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포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중국 기업의 입찰을 허용하면 안 되는 이유를 들었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 정부 조달협정(GPA)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 전력 케이블을 수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 기업이 한국 사업에 참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며, 중국 기업보다 기술력이 우위에 있는 우리 기업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이유는 공기업의 취지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저가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의 업체들이 참여하게 되면 저가 수주가 만연”한다고 우려한다. 한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