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시인은 산골짜기 고향마을과 A시를 오가며 지낸다. 고향마을에선 선대의 전통가옥을 정비해서 민박을 하고 A시에는 아들네가 거주한다. 지난 초봄에는 아들네가 산골짜기로 들어가고 K시인이 시내로 나왔다고 했다. 손자가 그 산촌 소재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이었다. 의아해서 되물었다. 바뀐 게 아닌지,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아들네가 시내로 나와서 손자가 시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K시인이 산골로 들어가 정착한 건 아닌지…. 아니라고 했다. 제대로 얘기하고 들은 것이라고 했다. 시내 학교는 아직도 한 학급에 25명이 복작거리는데 산골 학교는 1학년이 딱 네 명이고 선생님이 아이들을 ‘정말로!’ 따듯하고 정겹게 보살펴주는데다가 시설설비는 이 세상 어느 선진국 학교와 비교해 봐도 월등해서 “세계 최고가 분명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그게 더없이 행복하다고 했다. 이 각박한 세상에 우선 6년간 그 손자의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 어디냐고 했고, 중·고등학교 진학문제는 그때 가서 보겠다고 했다. 그동안 행복하게 지내면 분명히 또 행복한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우리는 그 산촌이…
컴퓨터 바이러스는 백신 프로그램으로 치료하는데, 바이러스가 발견되어야 백신 제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치료가 매우 어렵다. 정상적인 프로그램이나 데이터를 파괴하도록 특수하게 개발된 악성프로그램인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는 브레인 바이러스다. 파키스탄의 ‘바시트 파루크 알비’와 ‘암자드 파루크 알비’ 형제가 만든 것으로, 자신들이 만든 소프트웨어가 불법 복제되어 퍼지자 이에 복수하려고 만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바이러스는 당시 널리 보급돼 있던 MS-DOS 운영체제에서 실행됐던 탓에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됐다. 1988년에는 국내에서도 발견돼 바이러스 백신 개발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후 수많은 컴퓨터 바이러스가 등장했다. 그리고 영향 정도에 따라 양성 및 악성 바이러스, 감염 부위에 따라 부트(Boot) 및 파일(File) 바이러스로 구분했다. 부트 바이러스는 컴퓨터가 기동할 때, 파일 바이러스는 프로그램에 감염되어 있다가 실행할 때 활동하는 바이러스를 말한다. ‘예루살렘 바이러스’ ‘미켈란젤로 바이러스’등 이미 고전이 됐지만 한때 특정기간이나 특정한 날에만 활동하는 바이러스들도 컴퓨터 사용자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나 1년 전
향기에도 지문이 있다 /지하선 유년의 허기진 기억을 비집고 들어서네 할머니 손맛 그윽한 쑥개떡 할머니 가슴으로 빚어내는 초록 달 이었네 아늑하니 살내음 고여 있는 탯줄의 고향이었네 손끝으로 더듬어가는 먼먼 날의 푸르고 은은한 향기 한 입 베어 물면 달빛 한 점씩 씹혔네 붉은 입술엔 달빛 지문 묻어나고 입속에선 지문이 부서지는 소리 할머니 한숨이 자정을 빠져나가고 있었네 아픔과 고통이 어둠을 통과 하며 내게로 전해지는 비릿한 DNA 주름진 그늘 사이사이로 할머니의 지문이 뭉개지도록 수없이 입맞춤하던 내 어린 입들도 나를 키운 향기로 자라갔네 유년의 고향은 누구나 얼굴과 같다,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 삼시세끼도 어려웠기에 간식은 더더군다나 생각도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할머니는 들판에 만발한 쑥을 뜯어 쑥개떡을 간식으로 자주 해주셨을 것이다. 주름진 할머님의 회상들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이 내는 소리와 같다. 쑥개떡이라는 말도 아련해진 옛날의 간식이 되었다. 시인은 쑥개떡을 무심코 입에 넣다가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났을까. 아련한 할머니의 사랑이 봄날 향기로운 쑥향기 처럼 가슴으로 스며온다. 모든 기억들이 아름다운 봄이다. 완벽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는 사
새로운 문재인 정부에서 가장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남북관계 개선이다. 지난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개성공단 폐쇄 등 남북관계의 단절은 북한 핵개발 저지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용적 측면에서는 올바르지 않았다. 분단이 70년이 넘어서면서 남북관계는 적대적 관계를 넘어서서 경제적 동반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남과 북의 경제적 협력 사업이 남과 북 모두의 경제력 향상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보유한 천연자원을 남쪽의 기술로 개발하고, 남쪽에서 생산된 쌀과 경공업 제품들을 북한에 공급함으로써 남북 모두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종요하다. 여기에 더해 남과 북의 교류로 인한 적대적 이념을 희석시켜 장기적으로 통일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문재인 정부는 경기 북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경기도를 통일경제특구로 만들겠다는 대선 공약을 발표한 바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바로 경기 북부지역 전반을 통일경제특구로 만드는 것이다. 개성공단을 다시 부활하는 것만이 아니라 확대하여 경제도 활성화하고 남북의 긴장관계도 완화되어야 한다. 경의선과 경원선 철도의 개통도 하루빨리 실현되어야 한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선진국들은 물론이고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도 꽃은 생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꽃은 아직 ‘선물’이다. 그래서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성년의 날 등 기념일이 많은 5월은 ‘꽃 특수’가 발생해 화훼농가와 꽃가게가 가장 바쁘다. 그런데 올해는 상황이 바뀌었다. 꽃 특수가 사라져 화훼농가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경기침체에다가, 이른바 지난해 9월부터 ‘김영란법’이라고 불리는 부정청탁금지법이 시행된 이후 소비가 급격히 감소했다. 카네이션의 경우 연간 소비량의 약 50%가 4~5월에 집중되는데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거래금액은 29%, 거래물량은 27%나 감소했다고 한다. 농림축산식품부에 의하면 올해 들어 도매시장의 화훼류 거래금액은 전년 동기 대비 무려 31.1%나 폭락했다는 것이다. 화훼농가들은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도산할 수밖에 없다고 한숨을 쉰다. 경기도 화훼농가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도내 화훼농가가 감소하는 추세다. 도내 화훼농가 수는 2013년 3천19가구에서 2015년 2천812가구로 6.9% 줄어들었으며 꽃 재배 면적도 이 기간 1천201㏊에서 1천91㏊로 9.2%나 감소했다고 한다.(
예술가들에게 관심의 대상은 곧 작품으로 직결된다. 따라서 극심한 사회 현상을 다루지 않더라도 창의적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이유로 작가만의 독창성이 인정된다. 자기 세계에 깊이 함몰 되어 가장 섬세하고 예민한 촉수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는 사회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세상과 괴리된 모습으로도 비쳐질 수있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모두가 한 방향을 향해 소리칠 때 가끔씩은 마음의 여유 같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휴식처같은 역할을 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세월호 침몰을 바라보며 낭만적인 세상과의 작별이 고해짐을 느끼면서 조금이라도 예술로서 좋은 세상을 만들기를 기원하였다. 각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일선에서 가장 피해받는 것이 문화이고 예술이다 보니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문화정책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국민 속으로 파고들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세계각국도 국가적 차원에서 그토록 문화에 공들이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도 국가적 뒷받침이나 강력한 경제적 도움이 있지 않는 한 세계적 작가가 된다는 일는 너무나 요원한 길이라는 걸 안다. 또한 될지 안될지도 모르면서
눈을 들면 보이는 모든 것이 초록이다. 이른 봄 죽은 듯 거무칙칙한 나뭇가지에 연둣빛 안개가 어리는가 싶더니 꽃비가 내리고 개나리도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고 진달래도 지고 철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렇게 봄은 변화무쌍한 얼굴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선물한다. 봄이면 초록바람이 향기로운 들판을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어울려 삘기라고 부르는 억새풀의 햇순을 뽑아 먹기도 하고 시경이라는 말만 들어도 입안에 신 맛이 도는 시경을 잘라먹었다. 좀 더 활발하게 산으로 다니는 아이들은 찔레 순을 꺾어 가방에 가득 담아 가지고 오기도 했다. 여기저기 찔리고 긁힌 생채기가 빨갛게 그어진 팔로 나누어 주면서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도 잘 못 싸오던 아이도 그 날은 웃음소리가 커졌다. 비가 오거나 한가한 날에 할머니가 어린 손자손녀들을 앉혀놓고 손수 만드신 쑥떡을 나누어 주시면서 문제를 내신다. 봄에 나오는 풀 중에 조금만 나와도 많이 나왔다고 하는 게 무언지 아느냐고, 우리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 결국 할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까 기다리면 “그게 바로 쑥이란다.” 하시며 웃으시고 쑥떡을 오물거리던 우리의 입도 동시에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다른
12세기 중세 유럽의 도시에서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곳곳에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웅장한 교회들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건만, 남루한 옷차림을 한 탁발수도사들의 강론을 듣기 위해 거리로 인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성전에서는 무지하고 가난한 빈민들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 설교가 이루어졌고, 교리 역시 이해불가 한 논리들로 전개되었지만 탁발승들의 강론은 지방어로 이루어졌고 다채로웠으며 생생했다. 이들은 강론의 내용을 쉽게 설파하기 위해 무대 위의 배우처럼 행동하기를 전혀 꺼리지 않았고, 때로는 불 위를 걷거나 신비로운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탁발승들의 활약이 활발해지고 도시에서의 영향력 역시 커지면서 이들은 교황권력에 위협적인 존재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교회는 이들을 이단이라 규정하며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박해와 처형을 단행한다.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출생한 성 프란체스코(1182~1226)는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탁발승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그는 부유한 이탈리아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물질적으로 풍요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20대에 영적 체험을 한 뒤 모든 재산과 상속권을 포기함은 물론이고 두벌 옷과 신발, 심지어 지
경복궁에는 4개의 대문이 있다. 동은 건춘, 서는 영추, 북은 신무, 남은 광화문이다. ‘광화문(光化門)'은 이처럼 방위상 남쪽에 위치해 있지만 경복궁의 정문이자 왕실의 얼굴로 통한다. 또 조선의 중심은 한양이고, 한양의 중심은 경복궁이라면 광화문은 그런 경복궁의 상징이었다. 이런 광화문의 이름은 세종 7년(1425년)에 붙여졌다. 건립 당시 이름은 정문(正門)이라는 뜻에서 오문(午門)이라했다. 오문이 광화문으로 바뀌게 된 것은, “국왕의 덕(光)은 사방을 덮고, 바른 정치(化)는 만방에 미친다”는 뜻을 담은 당시 집현전 학자들이 건의에 의해서다. 그런가 하면 궁의 주인인 임금의 책무를 다해 줄 것을 기원한 광화에는 나라가 오래도록 태평무사하다는 의미, 즉 광천화일(光天化日)의 뜻도 담겨 있다. 하지만 국태민안을 빌며 세워진 광화문 자체는 아이러니 하게도 서있는 기간보다 무너진 기간이 더 길었다. 조선 태조 때인 1395년 경복궁 정문(正門)으로 건립됐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뒤 273년 동안 방치됐다가 1865년 경복궁 재건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광화문의 애사(哀史)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제 때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다는 구실로 1
집 /나해철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빛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와 벽지에 남은 어린 아들의 희미한 그림이 보인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가자 안 들리던 것들이 들린다 베란다를 지나는 바람과 부엌에서 떨그럭거리는 그릇 소리 들린다 지친 몸일 때 집으로 가자 안 보이던 그들이 안 들리던 그들이 눈도 귀도 어루만지며 곁에 와 함께 눕는다 집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편안하게 쉴 곳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오랜 여행에서 돌아오면 지친 몸을 받아주는 곳. 모든 것이 새롭고 귀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 날 기다렸다는 듯 변함없이 맞이해 주는 제라늄의 빨강과 빨랫줄에 걸린 햇살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친숙한 냄새와 섞일 때 비로소 내가 집에 왔음을 절실히 느낀다. 아침에 식구들을 배웅하면서 “잘 다녀오세요,”라고 인사한다. 산업 현장에서 혹은 학교에서 하루의 고된 일상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발걸음은 평화롭고 따듯함으로 충만할 것이다. 집에 작은 먼지와 벽지에 그려놓은 어린 아들의 그림이 미소 짓게 하고 소소한 소리마저 애틋하다, 부엌에선 달그락거리는 사랑과 소박한 반찬들로 밥상이 차려지는 평화로운 일상이 숨 쉬고 있는 곳이다. 치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