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전 문산역에서 역사적인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 행사를 지켜보던 박중대(74) 옹은 시종 감격에 복받친듯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빵~” 오전 11시 28분, 이윽고 철마가 요란한 기적소리를 내면서 출발을 알리자 박 옹은 ‘멍’하니 넋을 놓은 채 잊을 수 없는 그 때의 가슴아픈 과거로 함께 거슬러 달려갔다.
“13살 때 남한으로 오면서 원산과 흥남에 두 삼촌이 있었어. 근데 얼굴이 통 기억이 나지 않아”
반세기를 훌쩍 넘는 세월이 박옹을 그렇게 만들었다. 박 옹이 고향 흥남을 떠나온 건 지난 1947년 4월.
“13살 되던 어느 봄날이었어. 열차를 타고 한탄강 쪽으로 무작정 밤새 걸어 38선을 넘었어”
한낱 추억처럼 이젠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때의 기억만큼은 박 옹의 뇌리에 또렷히 각인돼 있다. 어머니 아버지 손을 꼭 붙잡고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38선을 넘었다.
“그때 열차 운행은 안했어. 그냥 걸어서 38선을 왕래할 수 밖에 없었어. 38선에 도착하니 말로만 듣던 코큰 미군과 남쪽 경찰이 있었어”
박 옹은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뱃지를 가슴에 단 경찰 아저씨가 일가족 4명이 기거할 수 있는 막사를 마련해주었다고 회고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곳이 동두천이었어. 키 큰 밤나무가 있었는데 여기서 사흘을 잤어. 옥수수를 삶아 밥 대신 연명했어”
박 옹은 나흘 째 되던 새벽, 피붙이인 고모가 살고 있는 충북 괴산으로 내려갔고 이곳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
“월남하던 그때의 기억은 이게 다야. 내가 더 기억을 또렷이 하는 건 흥남에 살 때야”
과거를 기억해내는 박 옹의 표정은 마치 ‘인연의 끈’을 한올 한올 푸는 것처럼 아주 잔잔하게 이어졌다. 눈을 지금시 감기도 하고 때론 한 숨을 크게 쉬어가면서 그 시절로 되돌아 갔다.
“내가 살던 집은 일제 시대 때 만들어진 관사였어. 그리 넉넉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사는 집이었어”
박 옹의 아버지는 마도로스였다.
“흥남역에서 아랫쪽으로 쭉 내려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와. 거기서 우측으로 5분쯤 가다보면 왼쪽에 중천길이 나오는데 거기가 내가 살던 집이었어”
박 옹은 흥남 조일인민학교를 다녔다. 당시 흥남에는 일본인 자녀들이 학교 2곳과 한국인들이 다니는 학교가 5~6곳 있었다고 박 옹은 말했다.
“벽에 그린 일본식 낙서, 애들과 장난치던 그때, 근데 동네에서 칼 싸움을 하고 놀던 친구들의 이름은 기억이 잘 안나”
박 옹은 놀랍게도 개구쟁이 유년의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사람이 말이지, 언제든 갈 수만 있다면 이렇게 그립진 않을거야. 살아생전 못간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마음이 짠 한거야”
박 옹은 지난 2003년 만기된 ‘방북 승인서’를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방에서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휴지가 되다시피한 이 ‘방북 승인서’를 왜 고이 간직하는지 알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