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화려한 휴가’는 지난 7월 개봉된 이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5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 영화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다큐멘터리는 물론 아니다. 한 편의 극영화이다. 그러나 너무나 감동적인 시대물이다.
포털에 올라오는 관객의 덧글마다 꼭 ‘울었다’라는 말이 보인다. 감동할 일이 별로 없는 요즘 세태 탓인지도 모른다. 사실 전달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불만도 있지만 영화는 영화로 말하는 법이다. 관객의 눈물샘을 끝없이 자극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의 전국화에 성공한 수작이다.
‘5.18광주’는 그 동안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가 없는 역사였다. 피해자가 겪은 5.18은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가해자는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99년 5.18현장의 한 사병 출신이 ‘당대비평’이라는 계간지에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라는 글을 발표했었다.
그가 지금은 평택의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이 경남 목사이다. 영화가 개봉된 이후 그의 글은 인터넷을 타고 부활했다. 다 열성적인 네티즌들의 덕이다.
이 경남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 1979년 5월 입대했다. 그리고 1980년 5.18 당시에는 11공수여단 63대대 9지역대 소속 일병이었다. 그는 이 글을 기억을 더듬어 작성했다. 다음은 그의 길고도 정확한 기억들의 일부이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피살(시해)되자 군부는 전쟁경계령인 데프콘Ⅲ를 발령했다.
곧 이어 12.12사태가 발생했다.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가 착착 진행된 셈이다. 다음해 봄,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은 즉각 반발했다. 전국 주요도시에서 반군부 데모가 일어났다. 군부는 집권계획 추진의 장애가 되는 소요와 혼란의 진압에 무자비하기로 악명 높은 공수특전사를 동원할 계획을 짰다. 강훈련이었다.
몹시 고달픈 생활이었다. 특전사의 주력전투요원인 하사관과 사병들은 정치적 상황이나 군부의 의도는 알 수조차 없었고, 단지 대통령이 죽고 나라가 혼란하니 전쟁 위험이 있고, 그러니 빨리 이런 소요를 진압해야 한다는 단순한 안보 논리만을 믿고 있는 형편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또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집권이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피치 못하게 전개된 사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고 썼다. “1979년 12월 30일, 종무식 때 중대장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새해부터는 특전 용사들에게만 200%의 봉급과 500%의 점프 수당이 파격적으로 인상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믿기지 않았다. 아마 이러한 조처들은 신군부가 특전 요원들을 자신의 충성스러운 친위대로 만들기 위해 의도한 선심이었을 것”이라고 기억한다.
“우리 공수 요원들은 봄이 되면서부터 시위진압 준비를 시작했다. 강원도 깊은 산속을 뒤지며 박달나무 같은 튼튼한 나무를 베어다 진압봉을 만들었고, 시위진압과 정국안정이 시급하며 좌경분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정신교육을 되풀이해서 받았다.
비상계엄의 확대 실시가 선포되기 며칠 전인가는 특전사령관이 공수여단 산하의 모든 부대에 1천500만원씩의 하사금을 내려 보냈는데 우리 대대에서도 400만 원을 받아 돼지를 잡고 큰 회식을 했다. 그때 정신교육 강사는 부마사태를 진압한 여단의 한 부대장이었다. 우리 부대는 5월 19일 새벽 2시경 광주에 투입, 조선대 교정에 막사를 쳤다. 시민들은 공수요원들에 대해 증오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어떤 군인들은 ‘전라도 놈들은 다 죽여야 해’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 대다수는 이미 맹목적인 ‘분노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민들은 우리를 보고 ‘당신들 대한민국 군인들 맞느냐, 혹시 공산군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그는 5월 24일 철수명령을 받고 상무대로 가던 도중, 송암동에서 벌어진 보병학교 부대와 공수부대 간의 오인전투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의 ‘광주에 대한 회고’는 여기서 끝난다. 그는 9개월의 병상생활을 마치고 건강을 되찾아 목사가 되었다. 그도 최근 ‘화려한 휴가’를 보고 울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 천인공노할 ‘5.18광주의 군부만행’을 이명박은 광주에 가서 ‘광주사태’라고 불렀다. 이제는 ‘5.18 민중항쟁’이자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평가됐는데 그가 실언한 것인지 고의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발포 책임자와 미국의 개입 근거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를 밝히는 것은 27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