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보면 제갈량이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출사표를 바치고 출정하는 장면이 있다. 군사를 집결시키고 사마의와 한판 승부를 벌일 참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을 맞이해 전투준비에 임한 사마의도 제갈량 못지않는 전략가였지만 웬일인지 만반의 준비를 끝내 놓고도 전혀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답답해진 부하들은 사마의에게 싸울 것을 요구하면서 이 싸움을 피하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불평했다. 그래도 사마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전혀 군사를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루한 대치상황이 지속되자 제갈량은 초조한 나머지 여자 속옷을 보내며 비겁하게 수성만 하려느냐면서 사마의를 자극해도 못들은 척 하며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 사마의는 패하지 않는 싸움만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면에서는 제갈량도 비슷했다. 제갈량 역시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답답해진 위연이 정예병 5천과 보급병 5천을 주면 단숨에 사마의를 깨겠다고 요청을 했지만 제갈량은 위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연 싸움은 길어지고 있었다. 이런 대치상황속에서 양쪽의 사자(使者)들이 서로 오가며 심리전을 펼치는데, 어느 날 사마의가 제갈량의 사자에게 다정스럽게 제갈량은 하루에 식사를 얼마나 하고, 일처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때 제갈량의 사자는 무심결에 음식을 지나치게 적게 먹고, 일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직접처리하고 있다며 부지런하고 건재한 제갈량의 근황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데, 그 순간 사마의의 머릿속에는 느낌표(!)가 떠올랐다. 하지만 사마의는 시치미를 떼며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적게 먹고 할일은 많으니 어떻게 오래 지탱하겠는가? 라고 말하며 비록 적장이지만 건강이 걱정스럽다는 말로 덕담을 나눴지만 이 전쟁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직감하게 된다.
천하의 제갈량도 뜻밖의 실수를 하고 만 셈이다. 사자를 보낼 때 자신에 관한 정보를 절대로 노출시키지 말도록 단속했어야 했는데, 제갈량의 건강상태에 대한 정보가 적에게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된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식사를 조금밖에 하지 않는다는 정보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지만, 사마의에게는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마의는 이를 토대로 제갈량의 사망시기까지 점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식소사번(食少事煩)인데,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다는 뜻이다. 과연 사마의의 예상대로 제갈량은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는데, 이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5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은 적에게 패해 죽은 것이 아니라 너무 일에 파묻혀 과로사했던 것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에 경제문제를 거론하며 불안해서 잠이 잘 안온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또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는 나름대로 뭐가 안 돼서 답답한 마음이 있고, 약간은 초조하고 불안할 때도 있다며 자신의 답답한 심경을 표출한 바 있었다.
물론 국정을 수행하면서 잠 못이루는 밤도 있다는 말에서 지도자의 고뇌를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발언들은 그대로 정보로 쌓일 수 있다.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정보라고 해도, 그것이 계속 쌓일 경우 큰 정보로 불어날 수도 있다.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좋은 정보 자료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식소사번이라는 삼국지의 고사성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지도력의 첫 번째 열쇠는 자기절제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금물이다. 징기스칸은 ‘자만심을 삼키지 못하면 남을 지도할 수 없다, 자만심을 누르는 것은 들판의 사자를 이기는 것보다 어려우며, 분노를 이기는 것은 가장 힘센 씨름꾼을 이기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백수의 왕사자는 느긋하다. 초조해하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하루종일 게으름을 피우다가도 사바나에 한번씩 포효하는 것만으로도 정글의 질서를 평정한다. 모름지기 지도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이 뒤따른다.
모든 지도자들에게서 임기말 레임 덕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한 때 선망의 대상이고 존경의 대상이었던 지도자들이 뒤뚱거리며 걷는 오리처럼 미움과 경멸의 대상으로 변하는 일을 수없이 보아왔다. 참 안 된 일이다. 그러기에 지도자들은 될 수 있으면 말을 아끼고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식소사번하고 있다는 것을 외부에 알려지게 해서는 안된다.
불안하고 초조한 나머지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그 실수를 상쇄하기 위하여 무리수를 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사마의에게 이걸 간파당하는 제갈량은 스스로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