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이 된다’는 사고속에 사는 이가 많은 듯하다. 누구는 이래서 안 되고 누구는 저래서 안 되고, 오로지 자신만이 적임자라는 말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공감할 수 있는 모습과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 날에 와서는 소리 높여 안된다고 주장하던 상대와 나란히 다시 방송매체에 등장한다. 굳게 손을 잡고 높이 쳐들은 모습이다. 함께 하기로 했단다.
뜻을 함께하기로 하는 동반자(同伴者)가 됐다는 것인지 아니면 같은 종류의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직업상 그저 사업을 함께 하기로 하는 동업자(同業者)가 되기로 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가갔다가 멀어지고 하나가 됐다가 다시 분리되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고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헤어졌다가 또 다른 어느 날 다시 굳게 손잡은 모습이 영 낯설다.
방송매체의 보도에 관심을 가져온 오래전부터 익히 봐온 광경이라 이제는 낯설지 않을 만도 하고 직업적 특성으로 이해해 보려하지만 왠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중요한 뭐 한 가지가 빠진 것 같다.
결혼과 이혼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있고, 그 사랑이 결혼의 결정적인 진실이다. 그들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팬과 관중’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팬과 관중을 모아들이기 위해서는 인간적 차원을 벗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타협이든 야합이든 해야 하는가 보다. 타협이라는 단어 속에 숨겨져 있는 야합의 그림자가 바로 뒤편에 비춰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누군가 정체성에 시비를 걸면 논리에 역 논리를 세워 또다시 자신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할까. 참으로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물론 국익을 위해서는 개인의 정체성 마저도 희생해야하는 것이 대승적인 의사결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에 부끄럽지 않은 의사결정이어야 할 것이며 집단이기주의가 국익보다 우선시 될 수 없음을 실천하는 행동이어야 한다.
정치적 논리가 항상 우월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 흔히 나도는 말 중에 ‘프로’라는 말이 있고, ‘선수’라는 말도 있다. 과연 프로와 선수는 아마추어와 어떻게 다른 걸까. 그들은 프로이고 우리는 아마추어인가. 어떤 이는 경험이 많다해 프로 선수와 같이 말하고 또 어떤 이는 낡지 않은 참신한 새 프로 선수라 자신을 드높여 보이지만 역시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낀다.
프로 선수로서의 본질보다는 팬과 관중만을 의식해 포장한 선수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드는 순간도 있다.
우리에겐 감독이나 팬과 관중들로부터 선택받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포장된 프로가 아닌 팬과 관중이 선택해 아낌없이 응원할 수 있는 진정한 선수가 필요하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고 동반자와 동업자를 엄격히 구분할 줄 알며 타협과 야합의 경계에서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프로 말이다.
당장은 팬과 관중의 사랑과 관심이 적다고 해도 지킬 것은 지키며 본연의 길을 걸어가는 프로와 함께 행복의 길을 찾아 나서고 싶은 것이 아마추어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 행복이 특정인의 소유물이 아닌 함께 나눌 수 있는 행복이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인내와 기다림은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그리고 인내와 기다림은 항상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속에 존재한다. 어쩌면 이미 오랜 기다림 속에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다림이 길었다해서 지나간 과거를 용서할 줄 모르거나 다가올 아름다운 삶을 포기하는 아마추어는 단 한명도 없다. 서두름이 적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기다려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라면 고통을 감래하면서도 기다릴 수 있다.
오히려 지금은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며 기다림의 가치와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은 심정이다. 다가서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의 기대와 희망이 이뤄지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