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초·중학생이 학업성취도 국제평가 경진대회에 참가하면 으레 상위권에 진입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둬 왔다. 그러다 얼마전 10위권의 순위가 나오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다. The Times(2007년)평가에서 세계 200대 대학중 우리나라는 단지 2개의 대학이 포함됐고 스위스 IMD 대학 경쟁력평가(200년)에서는 61개국 중 29위를 했다. 이 결과로 본다면 학생이 10위권을 유지했다는 것은 그나마 우리나라의 세계 경제규모(12위)에 걸 맞는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오히려 개별 학생의 경쟁력은 세계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데 대학의 경쟁력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게 문제다.
그리고 대학 진학률이 세계 최고의 수준(82.8%)인 환경 속에서 일부 대학가에서는 모집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반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학생수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난해 미국내 유학생 중 한국인의 비율이 14.9%(93,728명)으로 가장 많았던 반면, 국내 대학의 재적 학생 대비 외국인 학생 비율은 0.3%로 OECD국가(평균 7.3%)중 최하위의 수준이다.
한때 우리 사회는 수요와 공급의 논리가 지배해왔고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더 이상 양적 측면의 수요와 공급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요자의 요구에 맞춰 공급의 질을 평가하는 시대다. 이미 곳곳에서 공급기관의 제품이나 서비스의 질에 따라 서열이 매겨지고 있다.
무형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대학도 예외일 수 없는 사회가 돼 대학 이름 앞에 등위가 붙고 있다. 이미 고등교육의 질 관리를 위한 대학평가는 21세기 세계적인 화두가 됐으며 우리나라도 대학종합평가와 학문분야 평가를 실시하고 있다. 얼마전엔 우리나라 대학가를 대표한다는 SKY대학이 1,2위를 모두 다른 대학에 내준 보도도 있었고 전국 대학중 분야별로 10위권이 발표된 바도 있었다. 그 결과로 대학마다 희비가 엇갈리기는 했지만 모든 대학이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노력은 순위가 높으면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이라는 상식수준의 시장논리에서 승자가 되기 위함이고 순위가 교육의 질을 대변해 줘 고무적이나 염려하는 시각도 있다. 평가의 결과와는 무관하게 내가 모두 최고라고 하는 과장된 광고와 홍보가 병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디를 다녀도 심심치 않게 대학 광고문을 접할 수 있고 광고의 문안대로라면 그 대학에 입학만 하면 속칭 ‘만사 OK’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심지어는 신종 귀족으로 재탄생될 것 같은 기대를 갖게 하기도 한다. 마치 교회나 절에 나가기만 하면 천당에 가게 된다는 수준으로 혼란스럽다.
평가 서열이나 과장된 홍보와 광고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실제로 그 대학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들의 평가가 그것이다. 대학의 교육적 가치와 질에 대한 정확한 판단 주체는 학생이다. 경험하기 전의 기대와 경험의 차이는 만족과 불만족 혹은 신뢰와 불신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만약 후자의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면 학생으로서나 대학으로서나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범국가적으로 교육적 낭비의 주체자가 되고만 격이다. 때문에 단순히 평가서열만을 높이기 위한 홍보·광고 등은 멈춰야 한다. 그것은 대학의 이미지를 실추하게 됨은 물론, 대학의 진정한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수단이 되고 만다.
오히려 조직에 실패를 안겨 주는 적을 온 사방에 벌려 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무리 서열중심의 사회라 해도 학문의 요람이자 미래국가의 전문인적자원을 양성·개발해야 하는 대학마저 인식의 싸움에서 무조건 이기고 보자는 식의 접근은 근절돼야 한다.
오히려 대학교육 윤리의 틀을 지키며 특성화된 전문분야교육의 참된 질로 학습 성과를 지향하는 진실의 게임을 해야 한다. 사회적 인정과 학생의 신뢰와 지지를 받아야 하는 진정한 고등교육기관은 평가서열 이상의 대학윤리를 존중하는 곳이어야 한다. 학생을 위한 본질적 전문교육 기능에 충실하며 사회적 기능을 다하고자 혁신 모델을 창출·실천하고 있는 대학이 우리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