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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단상] 별 일 없제?

 

지금은 어지간히 자연스러워졌지만 상례(喪禮)의 경험이 일천(日淺)하던 시절에 문상(問喪)을 가 상주(喪主)와 마주 대하고 조문(弔問)할 경우 참으로 갑갑할 때가 많았다.

“얼마나 비통(悲痛)하십니까.”,“얼마나 망극(罔極)하십니까.”

주로 이런 말로 상주들을 위로하는데 어색한 이유는 평소 비통이나 망극같은 용어를 자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다음 망인(亡人)의 연세, 장지, 발인일시 등 순서로 문답을 주고 받는다.

상주들 또한 처음 상을 당하는 경우 경험이 없는지라 조문에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하고 서로 큰절로 예를 갖추고 웅크린 채 눈만 빤히 쳐다보는 게 일상적이었다.

경험담인이데 내가 상주가 됐을 때였다.

그 당시 꽤나 유명한 분이 조문을 오셨었다.

교회 장로이며 열 개 정도의 사립학교 이사장으로 계셨었는데,아마 상주가 굴건제복(屈巾祭服)을 하고 대나무 지팡이까지 손에 잡고 있는 초상집 조문은 경험이 없었던 모양이다. 잠시 뻔히 쳐다보시더니 순간 할 말을 잊었는지 “더운데 욕보십니다.” 참으로 어이없고 난처한 노릇이었다.

상주의 몸으로 어찌 날씨가 덥거나 추운게 무슨 상관이며 덧붙여 “욕보십니다”라니···. 적절한 위로의 말이 아니어서 한동안 당황했다. 그렇다고 “예 지금 욕보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할 수도 없고.

며칠전 신문을 읽다 기억속에서 아련하게 잊혀져 가던 어떤 분의 이름을 발견했다.

고흥문(高興門).

연세가 지긋한 분들은 아마도 기억하시리라.

참으로 그리운 이름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회의원들은 욕을 많이 얻어 먹지만 당대에 몇 안되는 존경의 대상이자 선량(選良)으로 현대사에 기록되는 분이다.

13대부터 16대까지 내리 4선 국회의원을 한 신경식씨가 회고록(回顧錄)을 냈다고 한다.

이 양반은 무려 다섯차례나 비서실장(당대표,총재 등)을 역임한 올해 칠순이 되신 분인데 누구 말마따나 직업이 비서실장인가 보다.

그 책안에 유석(維石)조병옥 박사의 장남 조윤형(작고, 전 국회의원)씨가 부인상을 당한 고흥문 의원을 조문하면서 “형님 요즘 별 일 없으시죠?”했단다(아마 평소에 호형호제(呼兄呼弟)했던 모양이다).

고흥문 의원은 하도 기가막혀 “야 이놈아,마누라가 죽었는데 별 일이 없느냐고?”하면서 씁쓰레 웃어 넘겼단다.

작은 일에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작은 일에 크게 화를 내는 것, 반대로 큰 일에 작은 화를 내는 것. 전자야 쫌팽이, 속좁은 사람 등으로 험잡힐 일이지만,화를 크게 낼 일을 그냥 대범하게 넘겨 버린다는 건 참으로 도량이 넓다고 할 수 있다.

자기 부인이 죽었는데 “별 일 없으시죠?” 큰 일인지 작은 일인지는 독자(讀者)들께서 판단할 몫이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합당(三黨合黨)으로 대표위원이 되었을 때 소위 민정계 인사들의 안주함이 됐다고 한다.

당시 어느나라인지 대통령 방한 기념파티가 열리는데 평상복(平常服)으로 복장을 통일하기로 했으나 혼자 연미복(燕尾服)을 입고 갔다고 한다. 그 때 주위에서 비아냥 거리는 말로 “군계일학(群鷄一鶴)이니 벌써부터 대통령 된 기분을 내는 모양이지.”라고 하면서 쑥덕거리는데 얼굴은 벌겋게 달아 올랐지만 겉으론 태연한척 하더라나···. 돌아오는 길에 수행비서에게 “한강에 가서 빠져 죽어라.” 일갈(一喝)하고 더 이상 질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치적 공과야 어떻게 됐더라도 아직도 그 일화가 떠오르면 대인(大人)의 풍모(風貌)를 느낀다.

운전기사가 조금만 늦게 올라치면 소리 지르는 사장이 흔한 세상에 말이다.

그 날 저녁 도서출판 무애(無碍)가 발간한 고흥문 선생의 정치현장 40년을 수록한 ‘못다 이룬 민주의 꿈’이란 570페이지 분량의 두터운 책을 밤새 읽었다.

역대 통합야당에서 다섯번이나 사무총장을 지내고 전통야당의 맥인 민주당 부총재,그리고 국회부의장을 거치고도 은퇴후 정치판에 단 한 번도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분이다.

언제 우리 곁에 고흥문 선생 같은 분이 또 나타날까? 잠시 회상(回想)에 잠겼다.

참고로 쌍용그룹 창업자이며 한때 정치인으로 크게 활약한 성곡(省谷) 김성곤(金成坤) 선생의 추모기념집,제목도 ‘별 일 없제?’였다.

아침에 봤던 사람에게도 별 일 없제?

몇 시간 뒤에 본 사람에게도 별 일 없제?

성의가 부족한 인사 같아도 바람 잘 날 없는 고해(苦海)같은 인생에 별 일이 없는 것도 행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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