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소득보전 직불금 문제가 연일 시끄럽다. 도내 직불금 부당 수령 의신자가 6000여명으로 파악됐다. 이들이 수령한 직불금은 20억원 쯤 된다고 한다. 예사로 보아넘길 돈이 아니다. 철저한 청문절차를 거쳐 반듯이 옥석을 가려낸 뒤 환수하고 법을 어긴 ‘가짜’는 엄중히 처벌해야 마땅하다. 오늘날에는 쌀의 가치가 예전 같지 않지만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쌀은 단순한 곡물이 아니라 영혼이 깃든 인격체로 여겼다. 특히 쌀 생산이 덜되던 북쪽 지방에서는 임금인 이씨(조선)만 먹을 수 있는 것이라하여 ‘이밥’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가 쌀 걱정에서 벗어난 것은 박정희 정권 때 통일벼를 생산한 녹색혁명 이후부터였다. 오늘날에는 미질 경쟁에서 밀려나 흔적 조차 없어졌지만 통일벼야말로 악몽 같은 보리고개를 없애준 구세주였다. 구한말 때는 가뭄이 자주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정부는 그때마다 중국의 호미(胡米)를 수입해 기아사태를 모면했는데 1901년에는 그것도 여의치 않아 베트남에서 안남미(安南米)를 수입해다 시장에 풀어 위기를 넘겼다. 쌀이 귀한 만큼 쌀값도 비쌌다. 1883년(고종 20) 10월 중미 1되 값은 5전이었는데 1885년, 12월엔 1냥 3전으로 2년여 만에 2.6배나 뛰어 올랐다. 1901년(광무 5)7월 하미 1되에 당오전 4냥 5푼이던 것이 11월에 7냥 5전, 상미는 8냥 5전으로 치솟았지만 그나마 돈을 주고도 쌀을 구할 수 없었다. 정부는 안남미를 긴급 수입해 서울과 경기 지역 시장에 내놓았는데 1되 값이 1냥 1전 8푼으로 조선 쌀값과는 비교되지 않았다. 도 정부는 매점매석하는 상인들을 잡아 가두고 순검으로 하여금 취채를 강화했지만 식량 부족을 완전히 해소시키지는 못했다. 얼마나 쌀 구하기가 어려웠으면 쌀가게에 모여 발을 구르는 아낙들의 고통을 담은 ‘미장탄(米場嘆)’이란 탄식의 노래가 황성신문에 소개될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쌀의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그러나 방심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 귀한 쌀을 직불금 부당 수령의 도구로 삼았으니 이는 국민이 아니라 하늘이 분노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