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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 이완용의 여죄

이창식 주필

이완용(李完用)의 대명사는 매국·매족노다. 그는 고종 19년(1882)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검교, 통문관 수찬·동학교수를 지내고 1887년 주미특파전권공사 박정양을 따라 미국에 갔다가 귀국, 이듬해 주차미국참찬관으로 재차 도미했으며 같은해 12월 대리공사로 승진하면서 구미파(歐美派)라는 별칭이 붙었다. 귀국 후에도 그의 벼슬 길은 이어졌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의 외무협판, 박정양 내각의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에 더해 농상공부대신 임시서리까지 겸직했다.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을 수립하자 내직에서 물러나 외직인 전라북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런데 이완용의 개인사는 내직에 집중되어 있을 뿐 외직인 전라북도 관찰사 시절의 행적에 대하여는 기록된 바가 거의없다. 그는 부임 이듬해인 1899년 전주 건지산에 조경단(肇慶壇)을 축조했다. 이곳에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의 묘가 있었던 자리라하여 조정에서 지관을 파견하여 능을 봉심(奉審)하였던 것이다. 이 때 공사를 하는데 재원이 부족하자 전주 갑부로 알려진 김창석과 정귀조에게 국책공사를 임시로 감독하는 별감동(別監董) 벼슬을 주고 공사 경비를 대게 하였다. 이완용은 비슷한 시기에 삼척의 노동(蘆洞)과 동산(東山)의 의총에도 단을 쌓도록 하되 건지산의 예에 따라 준경단(濬慶壇)과 영경단(永慶壇)으로 명명하였다. 이완용의 탐욕과 포학은 이 때부터 비롯된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닐듯 하다. 그는 2년여 동안 전라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자리 보전에만 급급했을 뿐 민생을 돌보기는 커녕 민폐만 저질렀다. 이같은 악행을 알게된 조정은 그를 관찰사에서 면직시켰으나 처벌은 받지 않았다. 그의 오만방자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미조약 체결 후 실권을 장악한 그는 임금이 상훈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상격(賞格)이 낮다며 거부한 일도 있다. 그는 결국 나라와 민족을 팔아 먹었다. 이완용은 전북 익산군 낭산면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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