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불필(不必) 스님의 이름을 신문에서 만났다. 청와대에서 대통령 내·외와 점심을 함께 먹었다는 고만고만한 소식인데, 제목은 ‘불심(佛心) 끌어 안는 이명박’.
우리는 지금 밥 한 끼 먹는 것조차 정치적인 해석을 할 만큼 각박한 언론에 포위돼 있다. 순수하게 고견(高見) 한 마디 듣고자 했다면, 대통령 내·외도 난감할 것이고, 또 밥 한 끼로 어떤 목적을 이루려 했다면 불도들의 자존심은 어디에서 찾을 것이며, 불필 스님의 입장에서 불심을 좌우하는 것도 아닌데 얼마나 민망스러울 것인가? 총체적으로 수준 이하의 제목이다.
어쨌든 ‘불필 스님’ 하면 당장 성철(性撤) 스님이 떠오른다. 방현희란 소설가가 쓴 성철 스님의 인물평전(人物評傳), 제목이 ‘우리 곁에 온 부처!’. 평생을 무염식(無鹽食)으로 생활한 분. 법당에서 삼천배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도 만나주지 않는 옹고집. 암자에 철조망을 두르고 10년간 등을 방바닥에 대지 않고(長坐不臥) 수행하신 분. 알 듯 모를 듯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분!
세상에 떠도는 성철 스님의 여러 일화 가운데 믿을 만한 것만 뽑아 본 것이다.
스님은 참으로 우리 곁에 온 부처였다. ‘불필(不必)’-필요 없다는 말이다. 불필이란 불명(佛名)은 성철 스님이 직접 지었다.
불필 스님의 출가(出家)에 얽힌 이야기다. 남달리 총명했던 큰아들(성철스님)이 아이 하나를 잉태시켜 놓고,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출가를 하고 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불필 스님)마저 출가를 하겠단다.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대가 끊어지면 죽어서 조상들을 뵐 자격도 없다는데...
사범학교 졸업을 앞둔 10대 소녀는 당돌하게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서겠다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6년 만에 깨치셨으니 저는 3년 안에 깨칠 겁니다.”
참 야무진 결심이다. 초등학교 졸업반 때 찾아 갔더니, “왜 왔노?” 한마디 하고서는 무심히 등을 돌렸다고 하던데...
두번째 만남에서 성철 스님은 “행복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이 있다. 영원한 행복은 부처님과 같이 도를 깨쳐서 생사를 해탈하는 것이요, 일시적인 행복은 이 세상의 오욕(五慾)에서 낙(樂)을 얻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부녀지간의 관계를 넘어 이미 제자로 인정하는 과정이었나 보다.
하필, ‘불필’이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부처님의 외아들 이름은 ‘라후라’이다. 인도말로 장애(障碍)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석가께서 출가를 결심한 뒤 아들이 태어났다는 말을 듣는 순간 “라후라, 또 새로운 장애가 생겼구나” 하고 탄식한 게 그대로 이름이 됐다고 한다. 득남을 기쁨이 아니라 절망으로 표현했다.
‘불필’과 ‘라후라’. 매정한(?) 아버지들의 작품이다.
그러고 보니 부처님과 성철 스님이 닮은 것 몇 가지가 있다. 두 분 모두 유복(有福)했다. 부처님은 왕자 출신이니 말할 것도 없지만, 성철 스님도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들을 지나 다닐 만큼 여유로웠다. 그리고 직계가족 모두가 자발적으로 당신이 갔던 길을 따랐다는 것이다. 우선 부처님의 부인 ‘야수다라’도 한때 자신을 팽개친 남편을 원망했지만, 세월이 흐른 뒤 그 큰 뜻을 우러러 머리를 깎았고 아들 라후라도 훌륭한 스님이 되었다. 성철 스님의 어머니도, 불필 스님도 모두 도를 닦기 위해 불가에 귀의(歸依)했다. 참으로 거룩한 계보(系譜)!
성철 스님은 세속의 인연을 완전히 끊기 위해 부모상 때 집에 가지 않았다. 대신 시자(侍者)를 보내 문상했다. 그러나 상좌 스님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몇 번이나 “내 말 꼭 들어라, 집에 다녀오너라”하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세속(世俗)의 인연을 이처럼 매섭게 끊어야만 집착(執着)과 미혹(迷惑)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기야 대중을 구제하는데 가족을 안중(眼中)에 뒀다면 과연 그 높은 덕(德)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해가 갈수록 신화(神話)로 덧칠돼 가는 것이 좀 안타깝지만 이런 신화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닐까?
어쨌든 이름만 들었던 불필 스님을 사진을 통해 처음 봤는데, 온 몸에서 풍겨 나오는 온화함과 절제(節制)됨이 ‘그 아버지에 그 딸’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