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문과 방송을 보는 심경은 착잡하다. 그 이유인즉 다양한 사건·사고의 이해당사자에 대한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드러내는 일색의 보도내용 탓이다. 보도내용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해당기관들의 형평성과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사실 크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우리는 많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그룹에 속해 있다. 어떤 때는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며 어떤 때는 공적인 것처럼 보임에도 사적인 것을 챙기는 과정일 수도 있다. 명백하게 눈에 보이는 측면은 뭐라 따로 붙이지 않아도 되지만 모호한 과정은 개인의 양심(良心)에 맞기는 수밖에 없다.
‘양심’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양심의 가책을 받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다’라고 쓰여진다.
사회를 이끌어 가는 많은 인사들이 ‘양심’을 이야기하다 자기만의 ‘양심’에 묻혀 버리기 일쑤이다. 앞만 보며 이들을 사회의 스승으로 따르고, 또는 닮고 싶은 이로 한참 가다 보면 내 양심은 어느 순간 갈 곳을 잃고 만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어느 순간 ‘갈등(葛藤)’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사회적 갈등이 내게 임하며, 개인적 갈등으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하다.
반대로 내가 갖고 있는 여러 모습의 성격들은 가족에서, 조직에서,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쓰여 진다. 내 개인의 특화된 영역은 가족의 특징으로, 조직의 특징으로, 사회의 특징으로 사회화가 되어지며 개인적 갈등이 사회적 갈등으로 규정되어지는 순간을 맞기도 한다.
사실 사회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그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가치를 통합적 관점에서 현명하게 포용한다는 뜻일 게다. 사회의 다양한 가치를 인식해야 하며, 이에 따른 변화도 깊이 있게 분석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섬세하게, 혹은 강경하게 조심스런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인 것이다.
그 임무는 서로 다른 가치에 따라 갈등의 문제를 주관적 편견이나 이해당사자의 손익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이해당사자가 갖고 있는 오해나 편견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득하여 서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갈등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갈등을 느끼는 당사자들이 긍정적인 소통의 방법을 선택했다면 상황에 따른 필요한 역동적인 힘들을 만들어 내며 건강한 사회, 좋은 사회를 만들어간다. 그러나 긍정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우는 작업과 다른 것, 타인을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며 소통을 하려는 적극적인 마음자세도 필요하다. 이러한 선택은 때로 매우 고통스럽기도 하다.
최근 이와 관련하여 갈등을 건강한 사회의 동력으로 다시 볼 필요가 있다는 새로운 고찰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도 노력해야 하는 부분도 있으나 갈등에 대한 고정관념을 변화시켜야 하는 사회적인 측면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아울러 다름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각각의 갈등을 관리하고 조정할 수 있는 높은 안목으로 끌어 올려져야 한다.
‘갈등’의 의미는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불화를 일으키는 상태’라고 규정하고 있다.
개인, 조직, 사회 여러 분야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나로부터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갖지만 역부족이다. 사회적으로 힘(?) 있는 분들의 양심에 따른 건강한 갈등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다시 내게 질문해 본다. 나는 가정에서, 조직에서, 사회에서, 어디에 서있는가? 아니면 어디로 가는 중인가? 나는 갈등을 겪고 있는가? 혹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가? 갈등을 해소하고 있는가?
우리의 안목을 높이고 적극적인 갈등해결을 위한 문구를 대산 김석진 선생의 ‘대산 중용강의’일부를 빌어 마무리해 본다.
“중용(中庸)의 ‘중’은 편벽되거나 과불급이 없는 것을 말하고, ‘용’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 평상한 것을 말한다. 물질문명이 발전하면서 정신문화는 오히려 피폐해져가는 현대사회에서 중용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학문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생존하기 위한 덕목이 ‘중용’이고, 인간사회에서 펼쳐지는 이념갈등과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화롭게 조율해 나가기 위한 원리도 ‘중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