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의 ‘여(如)’는 단순히 같다는 뜻보다는 ‘진리와 통한다’ 또는 ‘진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부처를 다른 말로 ‘여래(如來)’라고 하는데 이는 ‘여여하게 오신 분’, ‘진리의 세계에서 오신 분’ 등으로 번역된다.
여기서 ‘여여하다’는 뜻은 ‘진리의 세계 그 자체’를 지칭한다.
변함없이 항상 똑같다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불교에 ‘여법하다’라는 말도 있는데, ‘부처님 진리의 법에 맞게 생활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노벨문학상이 이번에도 고은 시인을 비껴갔다. 미당 서정주 이후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꼽혀온 그다.
노벨상이란 것이 세계적인 권위를 갖는다지만 수상여부를 놓고 왜 그리 호들갑인지 모르겠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수상이 유력시 된다며 언론마다 변죽을 울려댔다. 물론 상을 받는다면야 개인이나 국가로서 더없는 영광이겠지만 출가와 환속이라는 치열한 인생역정을 거치며 구도(求道)적인 삶을 살아온 시인에게 상이란 그리 집착할 만한 대상은 아니다.
시인은 미당의 삶과 일면 통하는 바가 없지 않다. 미당도 젊은 날 한 때 출가를 결심한 적이 있다. 한영(漢永)스님 문하에서 조지훈, 신석정 등 훗날 한국의 대표시인이 되는 사람들과 함께 대원불교강원에서 공부를 했다.
당시 가출해 톨스토이에 심취했던 미당의 시재(詩才)를 알아본 한영 스님은 미당에게 중보다는 시인이 되라고 했다. 이러한 미당은 효봉 문하로 출가한 고은을 알아보고 시인의 길로 이끌었다.
칠레가 낳은 세계적인 시인으로 파블로 네루다가 있다. ‘백년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1982)을 받은 마르케스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극찬했던 인물이다.
앞서 197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는 “사람에게 어떤 딱지도 붙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여여한 삶이다. 이러한 시인의 소망은 칠레의 작은 바닷가 마을 이슬라 네그라에 녹아 있고,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는 이를 배경으로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썼다. 무릇 시인이라면 이 정도의 여여함을 보여줘야 한다.
/이해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