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바른 줄기 이어갈 우리, 한마음 나라사랑 하나로 뭉쳐…(중략)…배우면서 지킨다, 학도 호국단~
모교 교정의 소나무에서는 송화가루가 날려 비가 오는 날이면 노오란 실개천이 되어 흐르고 빨간 장미가 만발한 화단 옆에서 10대의 꿈을 키워 가고 있었던 양갈래 머리 곱게 땋아 내린 여고시절...늘 가슴에 담고 있는 내 인생의 발판이 되어준 박진수 교련 선생님!
고양시 화정중학교에 근무하고 계시다 알고 있는데, 오늘까지도 그곳에 계시는지.
긴급조치...국가보안법...10월유신...1천만불 소득, 100만불 수출...포니 자동차...한국적 민주주의...삼청교육대...서정쇄신...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나의 10대는 그 단어들과 함께 애국심이라는 의식아래 그야말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특별한 여성으로 성장해 갔다.
ROTC 출신의 교련선생님과 학창시절을 보내며 받은 영향이다. 겨드랑이가 짓무르도록 수원시 교련실기경연대회 연습을 했다. 온갖 제식훈련과 응급조치법 준비...열병과 분열을 수 없이 반복하며 우리 나름대로의 끈끈한 학우애와 조직애를 쌓아나갔다.
손이 베일듯한 바지주름에 걸음걸이 때마다 쇠구슬 굴러가는 듯한 소리, 낙하산이 그려져 있는 각 잡힌 모자에 니스칠한 듯한 까만 군화, 우리 모두를 움츠러 들게 하는 호루라기 소리! 차돌방망이처럼 생긴 지휘봉(회초리였나?)...그야말로 선생님의 성격과 똑같은 차림새, 쳐다만 보아도 주눅이 들고, 감히 눈을 마주칠 생각을 못했던 나의 은사님. 교련 이론을 배우며 빈틈없는 선생님의 성격과 모든 것이 바를 正자여야 하는 올곧음에 나 스스로도 놀랐다.
결혼하셔서 모교근처에 살면서 우리 부모님과는 이웃지정을 나누시고, 학교에선 못 보던 따스함 때문에 지금도 이렇게 선생님을 생각한다.
내가 졸업한 후 영신여고에서 이직하여 여주 점동종고에 잠시 근무하실 때 찾아 뵙고는 인생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내외분이 첫돌을 맞이한 외동아들 정호와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며 전원생활을 만끽하고 계심이 마냥 부러웠습니다. 수원에서 느끼지 못했던 선생님의 든든함에 저도 빨리 선생님 같은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요. 물론 지금의 제 옆에는 그 때의 이상에 딱 맞는 배우자가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시간이 너무 멀어 여주 읍내까지 오토바이에 태워 저를 데려다 주실 때, 울퉁불퉁 비포장 도로를 달리면서도, 선생님이 너무 어려워 등에 기대지도 못했습니다. 그 후 며칠간 힘을 잔뜩 주었던 두 다리 때문에 고생도 했지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어요, “개척하는 자만이 멋진 선구자적 성취를 한다”는 박진수 선생님의 말씀. 지금도 내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남다른 노력을 할 때 몇 배의 더 큰 보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나요.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회의소집에 늦어 연대장인 제가 하키스틱으로 엉덩이 10대를 맞은 일... 1주일 간 제대로 앉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그 대표성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서있는 지금, 수원시의원이 되어있는 제자 박순영은, 선생님과 함께 쓰디쓴 술 한잔 기울이며 참다운 인생을 논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투철한 국가관과 올곧은 사랑실천이 오늘날의 저를 만드셨습니다. 선생님,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늘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