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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안타깝다 김근태 선생

한국 현대사의 큰 획을 그었던 많은 인물들이 최근에 잇따라 세상을 떠나 국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그중 한분이 ‘민주화 운동의 대부’라고 일컬어지는 김근태 선생이다. 구랍 30일 오전 5시 31분 별세했는데 겨우 64세다. 아깝고 또 아까운 인물이다. 정치인답지 않게 평생 청렴했고 올곧았다. 사랑이 넘쳤다. 박정희 정권의 부정선거 파동이 일어났던 71년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를 받았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을 통해 수배와 투옥을 되풀이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1985년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받은 참혹한 고문으로 평생 고생했다.

고문 후유증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고문을 당했던 가을만 되면 한달 이상 끔찍한 몸살을 앓았으며 고문대에 묶였던 기억 때문에 치과 치료를 못했다. 삼복중에도 추위를 느껴 에어컨을 틀지 못했다. 고문의 충격으로 인해 파킨슨씨병을 앓아 몸과 말이 어눌해졌다. 김근태 선생의 자서전 ‘남영동’에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한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결국 그는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세계의 양심수’로 불렸던 김근태는 1987년 로버트 케네디 국제 인권상을 받았지만 그는 헤어날 수 없는 몸과 마음의 깊은 병을 앓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 씨를 용서했다. 2005년 2월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선생은 자신을 고문해 구속된 이근안 전 경감을 찾아가 옥중면회를 하고 포옹하며 용서한 것이다.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목사가 된 이근안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난 일은 죄송하게 됐다’며 고개를 숙이자 김근태 장관이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이 시대가 낳은 비극 아니냐’며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참으로 내면까지 아름다운 인물이었다. 자신을 지악스럽게 고문했던 인물을 만나고 와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고 술회한 김근태 선생. 그런 정치인이 다시 우리나라에 나올 수 있을까? 이제 김근태 선생은 갔지만 이인영 전 의원의 말처럼 ‘그의 이름을 민주주의 역사의 심장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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