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시는 이 시대 최고의 협상가이며 겨레의 위대한 스승인 장위공(章威公)서희선생선양사업위원회를 조례로 지정하고 2004년부터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993년 고려를 침략한 거란의 소손녕은 고려를 침입한 이유 중에 하나로 고려는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도 거란이 소유하고 있는 고구려 땅을 침식했다고 주장하자, 서희는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뒤를 이었음으로 나라 이름도 고려라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일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너희 요나라의 동경(東京-지금의 랴오양(遼陽)도 모두 우리 경내에 있는 셈이니 어찌 우리더러 땅을 침식했다고 하는가’ 라며 옛 고구려의 땅이 고려의 영토임을 재확인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서희의 활약은 오늘에 이르러 다시금 역사적인 의미를 크게 부여한다.
현재 중국에서 벌이고 있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로 우리의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1천년 전 서희선생은 거란의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으로 국호를 정했음을 담판을 통해 확인시켰다는 중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미 서희선생은 1천년 뒤에 중국에서 한반도를 자기네 역사라고 떼를 쓸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담판을 통해 역사의 기록으로 확인시켜주는 혜안을 가진 것은 아닐까? 당대에 풍전등화 같은 고려의 위기를 구한 서희선생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인지하고 80만명에 이르는 거란족 병사들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몰아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압록강 남쪽의 강동6주를 되찾아 고려의 영토를 확장하는 쾌거를 이뤘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1999년 ‘서희서거 1000주기 학술대회’에서 당시 김대중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서희선생을 “겨레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극찬을 하며 널리 공포하기도 했다.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따른 분열,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남북관계의 긴장, 노사갈등, 국제유가와 원자재 폭등, 동유럽의 외환위기 등 국내외의 여러 가지 갈등으로 인한 문제점들을 들여다보며 서희선생의 지략을 겸비한 협상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지만 역사를 통한 슬기로움은 지금에도 배움을 통해 아픔만큼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현명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지혜로운 서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지자체에서 시작한 역사인물 바로 알고, 바로 세우기는 지역의 문화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지역인물이라고 단지 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시금 되새겨 배움으로 이어져야 한다. 문화가 단지 현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러 미래를 읽는 키워드로 확산해 나가야 한다는 전제임을 감안하면 이천에서 서희선생을 재조명하며 그의 업적을 오늘에 되살리려 하는 노력은 지역문화의 출발에서 국가적 차원의 문화활동으로 확산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시대 외교관으로 으뜸이 되는 1천년 전의 서희선생을 오늘에 되살리려는 지자체의 문화활동은 익히 지역의 인물로 부각시킨다는 작은 의미에서 벗어나 광의의 의미로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천아트홀에서는 ‘2012 장위공 서희선양 한-중학술회의’가 중국에서 바라본 제1차 여·요전쟁과 서희라는 주제로 열렸다. 한국적 시각, 우리의 시각에서 벗어나 거란의 땅에서 사는 거란의 후예인 중국인 학자들의 시각에서 당시의 거란과 고려의 국제관계와 그 정세에 관련된 새로운 시각에서 서희선생을 폭넓게 조명해 보자는 취지에서 학술회의를 어렵게 1년여 준비해 마련했다. 중국학자들이 얼마만큼 올바른 시각으로, 얼마만큼 학자다운 시각에서 접근하는지 토론을 통해 가늠해 보겠지만 국제관계속에서 서희선생을 선양하려는 이천의 노력은 새로운 지역문화를 뿌리내리려는 접근방식에서 보면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행정기관이 보조하고 민간이 중심이 돼 선양사업을 하는 ‘서희선생선양사업’은 용기와 지략으로 나라의 영토를 확장시키고 국운을 바로 세우는 제2의 서희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김선우 이천미술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