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국회의장이 결국 불명예 퇴진했다. 새누리당 고승덕 의원이 지난 2008년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을 폭로한 지 37일만이다. 18대 국회 후반기 임기를 3개월여 앞두고 이뤄진 박 의장의 사퇴는 우리 헌정사에 오점(汚點)을 남기게 됐다. 현직 입법부 수장이 비리나 부패 사건에 연루돼 검찰 수사 선상에 올라 중도하차한 것은 박 의장이 처음이다. 3부 요인중 한 명인 국회의장의 사퇴는 그 자체만으로도 국민에게 충격적이고 불행한 일이지만, 박 의장의 사퇴는 그 시기와 형식, 내용에 이르기까지 부적절했다는 점에서 아쉬움과 분노를 느끼게 한다.
박 의장은 입법부 수장으로서 최소한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고 도덕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기회마저 상실했다. 자신의 전 비서 고명진 씨가 2008년 전대 당시 고승덕 의원 측에 전달했던 문제의 300만원을 돌려받은 뒤 이를 당시 선거캠프 상황실장이던 김효재 현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에게 직접 보고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된 직후에야 의장직을 던졌다. 고명진 씨의 “책임 있는 분이 자기가 가진 권력과 아랫사람의 희생만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백은 김 수석을 겨냥한 것이지만, 은폐의혹에서 박 의장이 ‘결백’한 것인지는 검찰수사를 통해 낱낱이 규명돼야 할 것이다.
지난달 19일 헌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장실이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는 굴욕을 감내하면서도 침묵과 버티기로 일관한 의도와 배경이 무엇인지도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국회 대변인을 통해 대국민 사과와 함께 짤막한 사퇴의 변을 밝혔으나 정작 돈봉투 사건의 진상과 실체적 진실 공개를 끝까지 외면한 것은 검사 출신 원로정치인으로서 정정당당하지 못한 처사라는 비난을 받는다.
박 의장에 대한 검찰의 소환조사는 사건 폭로 직후부터 불가피한 수순으로 인식돼왔다. 박 의장의 사퇴로 형식상 헌정 사상 초유의 현직 입법부 수장에 대한 검찰 수사는 모면하게 됐지만, 수사결과와 사법처리 여하에 따라 돈봉투 사건이 몰고 올 파장은 예측을 불허한다. 돈봉투의 구린 냄새도 역겹지만 거짓진술을 사주하고 부하의 희생을 강요한 것은 조폭수준의 의리마저 팽겨친 더 큰 죄악이다.
특히 박 의장이 연루된 돈봉투 사건은 개인 비리가 아닌 집권여당의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와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정치개혁 차원에서 매듭져야 한다. 여야 정치권은 돈봉투 사건이 4·11 총선에 미칠 유·불리를 따지고 있지만, 국민의 눈높이는 부정부패 척결과 새 정치 구현을 위한 제도개혁에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