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입춘 추위도 땅속 깊이 움트는 봄의 기운을 제어하지 못했다. 절기 우수도 지났다. 간헐적으로 한랭과 온난한 기온은 등고선을 타고 출렁거리겠지만 봄이 스프링 튀듯 성큼 다가서는 것만은 분명하다. 진정 한 해의 출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버려야할 것과 지켜야 할 것으로 주어진 이 한 세월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온전하다’는 가치판단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왜곡된 신앙과 도덕적 불감증이다. 전자는 왜곡된 신앙으로 무지몽매한 행위를 용감무쌍하게 실천하고 이어 지혜로움을 상실한 채 무자비한 행동으로 비극의 씨앗을 사회에 던지는 경우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목사부부가 감기증세로 쓰러진 자식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금식과 안수기도를 시행했다고 한다.
그 결과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의식을 잃고 죽음을 맞이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비극적 사건이다. 이 얼마나 무지한가? 육체적 질병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함은 이 시대에 당연지사가 아닌가? 오히려 안수기도를 받고 정신 차려야 할 장본인은 다름 아닌 그 아이들의 부모임이 분명하다. 이런 사람이 어찌 영혼을 구원한다고 말하는가? 21세기 무지몽매가 빚은 참극(慘劇)이다.
후자는 신망을 가져야 할 지도층들의 거듭된 거짓과 허언(虛言)으로 국민 대중들을 바보로 취급하는 교만한 태도들이다. 위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참 세상의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말로만 떠들고 실체를 보면 구태의 반복이다. 대중들은 과연 누구를, 무엇을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결국 이 사회의 리더들이 가진 가치는 힘이요 교만임에 틀림없다. 잉여권력조차 나눌 줄 모르고 잉여재력 등 온갖 재화들을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와 같다. 이런 와중에 중산층들은 바람 든 무와 같이 병들어 와해돼 가고 서민들은 타작마당에 흩날리는 쭉정이 까락이었다. 과연 이런 사회가 정의롭다 할 수 있겠는가?
지켜야 할 것은 정직이요, 공의로움이다. 결국 세상은 궁극적으로 공의로움과 정직함이 이 세상을 지켰던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던가? 그런 가치를 가진 사람에 의해 그나마 사회가 덜 타락하고 덜 모순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정도만이라도 지킨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하거나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이 시대에 ‘정직’은 말과 글에만 나오는 수사학적 ‘레토릭’인가 보다. 몸소 실천한다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울까? 자존심에서? 아니면 체면 때문일까? 정직함이 인간적 사회적 시스템에 가장 근원으로 자리한다면 정말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에 신자유주의적 무한 탐욕과 ‘나 먼저’라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엄존하는 한 정직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공의로운 사회는 요원하기만 할 것이다.
공의로움은 정직함을 전제로 하는 이상적인 사회 규범적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기하학적으로 보면 둥근 원형이다. 결코 치우침이 없는 세상과 우주의 형상이다. 우리 인간이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임에 분명하다. 우주의 형상에 부합하는 사회적 윤리적 가치는 공의로움이기 때문이다. 오는 봄엔 버려야 할 것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지켜야 할 것들은 잘 지켜서 인정어린 살맛나는 사회이길 희망해 본다.
/시인 진춘석
▲1992년 시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평택지부장